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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몽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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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에몽 1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알베라다 데 부오날베르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건설한 노르만 출신의 군인이자 십자군 지도자이다. 그는 아버지의 군대에서 동로마 제국과 싸웠으며, 1096년 십자군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활약하며 공국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이후 다니슈멘드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기도 했다. 1106년에는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111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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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몽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보에몽 1세
이탈리아어 이름Boemondo I d'Antiochia
출생 장소산 마르코 아르젠타노, 칼라브리아, 아풀리아-칼라브리아 백국
사망일1111년 3월 5일 또는 7일 (56–57세)
사망 장소카노사 디 풀리아, 아풀리아-칼라브리아 백국
매장지카노사 디 풀리아 영묘
종교로마 가톨릭교
콩스탕스 공비와 보에몽 2세
콩스탕스 공비와 보에몽 2세
작위
작위안티오키아 공
재위1098년–1111년
전임자(신설)
후임자보에몽 2세
섭정탕크레드 드 오트빌
작위2타란토 공작
재위21088년–1111년
전임자2로베르 기스카르
후임자2보에몽 2세
가문
가문오트빌
아버지로베르 기스카르
어머니알베라다 디 부오날베르고
배우자콩스탕스 드 프랑스 왕녀
자녀보에몽 2세
군사 경력
참여 전쟁제1차 십자군

2. 생애

보에몽은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첫 아내 알베라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마르크라는 세례명을 받았지만 전설적인 거인의 이름을 딴 보에몽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4] 그는 칼라브리아의 산 마르코 아르젠타노 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보에몽은 옛 노르망어 외에, 로망스어군의 롬바르드어를 이해하거나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중세 그리스어를 구사하고 읽을 수도 있었다.

보에몽의 부모는 결혼을 무효로 하는 혈족 관계에 있었고, 1058년 교황 니콜라스 2세가 혈족 결혼에 대한 기존의 교회법을 강화하자 기스카르는 알베라다와 이혼하고 시켈가이타와 결혼했다. 부모의 결혼이 무효화되면서 보에몽은 사생아가 되었다.

1079년 보에몽은 아버지의 군대를 따라 카푸아 백작 조르다노 1세 등의 반란 진압전에 참가했고,[1] 1081년 초에는 비잔티움 제국 원정군의 선봉대장으로 임명되어 블로라를 점령했다.[2] 디라키움 전투에서 보에몽은 노르만 군 좌익을 이끌고 바랑기아 경비대를 궤멸시키는 활약을 펼쳤다.[1][3]

1085년 아버지가 죽자 보에몽은 유산을 받지 못했고, 루지에로 보르사와의 상속 분쟁에서 타협하여 타란토, 오리아, 오트란토, 브린디시, 갈리폴리를 받았지만, 루지에로 보르사의 계승을 인정했다.

보에몽은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사실상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령을 지날 때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원조를 받는 대신, 이슬람교도에게서 되찾은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하여 십자군의 보급을 원활하게 했다. 니케아 공방전, 도릴라이온 전투,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특히 안티오키아 포위전에서 변절자 피루즈와의 협상으로 안티오키아의 한 탑을 확보하여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6] 제1차 십자군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지만, 예루살렘 공략에는 참여하지 않고 안티오키아에 남아 그곳의 공작이 되었다.

도레의 판화에서 보에몽과 그의 노르만 군대가 안티오키아 성벽을 오르는 모습


1840년 루이 갈레의 그림, 1098년 6월 보에몽에 의한 안티오키아 함락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예루살렘 왕국 이상의 대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1100년에 다니슈멘드 가지에게 패배해 1103년까지 포로가 되었다.[7] 1104년 하란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로마 제국의 공격까지 받게 되자, 증원군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다.[7] 1106년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지원을 받은 보에몽은 군대를 일으켜 동로마 제국의 요새 두라초를 침공했지만 패배했다.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종주권을 인정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고, 1111년 실의 속에 죽었다. 아들인 보에몽 2세가 뒤를 이었다.[10]

2. 1. 초기 생애

보에몽은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첫 아내 알베라다 데 부오날베르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마르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4] 하지만 전설적인 거인의 이름을 딴 보에몽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보에몽은 1050년에서 1058년 사이에 태어났는데, 역사가 존 줄리어스 노위치에 따르면 1054년에 태어났다고 한다.[4] 그는 칼라브리아의 산 마르코 아르젠타노 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보에몽의 부모는 결혼을 무효로 하는 혈족 관계에 있었다. 1058년, 교황 니콜라스 2세는 혈족 결혼에 대한 기존의 교회법을 강화했고, 그 근거로 기스카르는 알베라다와 이혼하고 살레르노의 기술프 2세의 누이인 시켈가이타와 결혼했다. 부모의 결혼이 무효화되면서 보에몽은 사생아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라다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조카인 리처드 드 오트빌과 결혼했다. 알베라다는 보에몽에게 기사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 보에몽은 다언어 사용자였다. 그는 모국어인 옛 노르망어 외에도, 로망스어군의 롬바르드어를 이해하거나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중세 그리스어를 구사하고 읽을 수도 있었다.

1073년 초, 로베르 기스카르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 시켈가이타는 로베르가 죽을 것을 우려하여 바리에서 회합을 열었다. 그녀는 참석한 로베르의 봉신들을 설득하여, 13세의 장남인 로제르 보르사를 로베르의 상속자로 선포하게 했다. 시켈가이타는 반 롬바르드인인 로제르가 남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귀족들에게 가장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베르의 조카인 아벨라르 드 오트빌은 자신을 로베르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여겼기 때문에 항의한 유일한 남작이었다.

바리의 노르만 성

2. 2.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보에몽은 1079년 아버지의 군대를 따라 카푸아 백작 조르다노 1세, 콘베르사노 백작 고드프리 및 기타 노르만 귀족들의 반란 진압전에 참가했다.[1] 1081년 초, 아버지 로베르토의 명령으로 비잔티움 제국 원정군의 선봉대장으로 임명되어[2] 블로라를 점령했다. 이후 보에몽은 케르키라 섬으로 진군했으나, 수비대 규모가 압도적이었기에 섬 침공을 포기하고[1] 부트린토로 후퇴하여 아버지가 이끄는 본대의 도착을 기다렸다.[1] 로베르토 군이 같은 해 5월 하순에 도착한 후, 노르만 군은 이 지역 주요 도시 두라키움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1]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두라키움 구원을 목표로 황제군을 이끌고 노르만 군과 대치하여 10월 18일 양군은 결전을 치렀다.[1] 전투에서 보에몽은 노르만 군 좌익을 이끌고 싸워 비잔티움 군의 정예 부대인 바랑기아 경비대를 궤멸시키는 활약을 펼쳤고,[1][3] 전투는 노르만 군의 승리로 끝났다.[1]

1082년 2월 21일, 비잔티움 군을 격퇴한 노르만 군은 두라키움을 점령했다.[2][1] 노르만 군은 그 후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카스토리아까지 진군했지만, 알렉시오스 황제의 계략으로 남이탈리아에서 로베르토에 대한 반란이 발발함에 따라, 로베르토 기스카르는 같은 해 4월 그리스를 떠나 반란 진압을 위해 이탈리아로 귀환했다.[1][2] 로베르토는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아들 보에몽을 발칸 반도 노르만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1] 보에몽은 그 후 요아니나와 아르타에서 비잔티움 군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제압했다.[3] 그러나 라리사 포위전은 6개월간 계속된 끝에 실패했다.[3] 이 무렵, 노르만 군에서는 물자 공급과 병사 급여가 중단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이 탈영한 노르만 병사들에게 상을 약속했기에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3][1] 그 때문에 보에몽은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탈리아로 귀환했다.[1] 그러나 보에몽이 부재한 동안 많은 노르만 지휘관들이 노르만 진영에서 탈영하여 비잔티움 측에 투항했고, 두라키움과 케르키라 섬도 비잔티움 제국의 동맹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에 의해 탈환되었다.[1]

보에몽은 1084년 로베르토가 실시한 두 번째 비잔티움 제국 원정에도 참가했다.[2][1] 이때 노르만 군은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하고 케르키라 섬을 다시 정복했다.[2] 그러나 진중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여 보에몽도 건강을 해치게 되자, 그는 같은 해 12월 귀환했다.[2][1]

1106년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의 장녀인 콩스탕스와 결혼한 보에몽은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동로마 제국의 요새인 두라초를 침공하였다. 보에몽은 함락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모든 선박을 불태우고 배수의 진을 펼쳤으나, 동로마 제국 군대가 뒤로 우회하여 보급로를 끊었다. 이에 공성병기 사우(Sow)를 사용해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였지만 두라초의 수비대가 그리스의 불로 맞서자 결국 패배하였다. 포위된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종주권을 인정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고, 실의 속에 1111년 사망했다. 아들인 보에몽 2세가 뒤를 이었다.

2. 3. 상속 분쟁

오트빌 가문 문장
[16]

보에몽은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첫 아내 알베라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마르크라는 세례명을 받았지만 보에몽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버지 기스카르는 동로마 제국을 침공한 노르만족 출신 용병대장이었다.

보에몽은 아버지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며 알렉시오스 1세의 동로마 제국과 싸웠다. 한편, 계모 시겔가이타는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루지에로 보르사를 낳았다. 이 때문에 보에몽은 유산을 물려받지 못할 것을 깨닫고 자립하기로 결심한다. 1083년 테살리아 라리사에서 패배하고, 108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유산을 받지 못하고 동로마 제국과 맞설 가능성도 사라졌다.

1085년 7월 17일, 로베르 기스카르가 케팔로니아에서 사망했다.[16] 오르데릭 비탈리스, 윌리엄 오브 말메즈베리 등 당대 역사가들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그의 아내 시겔가이타에게 독살되었다고 기록했다. 시겔가이타는 자신의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시겔가이타는 군대를 설득해 아들 루지에로를 로베르 기스카르의 후계자로 인정하게 하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갔다. 두 달 후, 노르만 귀족 회의에서 루지에로 보르사의 계승이 확정되었지만, 보에몽은 자신이 아버지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보에몽은 카푸아의 조르단과 동맹을 맺고 오리아와 오트란토를 점령했다. 보에몽과 루지에로 보르사는 베노사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서 만나 타협했다. 이 합의에 따라 보에몽은 타란토, 오리아, 오트란토, 브린디시, 갈리폴리를 받았지만, 루지에로 보르사의 계승을 인정했다.

1087년 가을, 보에몽은 다시 형제 루지에로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어진 내전으로 노르만인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지원하지 못했고, 형제들의 삼촌인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1세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보에몽은 1090년 바리를 점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멜피 남쪽 대부분의 땅을 장악했다.

2. 4. 제1차 십자군 원정

보에몽은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사실상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령을 지날 때 보에몽은 교묘히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그에게 이슬람교도에게 되찾은 땅을 돌려주는 대신 원조를 제공받는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이것으로 십자군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지중해 지도. 베르망두아의 위그 1세, 보두앵 1세, 보에몽, 툴루즈의 레이몽 4세, 로베르 쿠르토즈, 불로뉴의 보두앵의 경로가 강조 표시되어 있음. 십자군 당시 주요 기독교와 무슬림 제국도 강조 표시되어 있음. 소아시아의 주요 전투가 표시되어 있음.
제1차 십자군 주요 지도자들의 경로 지도


보에몽은 니케아 공방전, 도릴라이온 전투,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특히 안티오키아 포위전에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것도 보에몽이 변절자 피루즈와의 협상으로 안티오키아의 한 탑을 확보한 덕분이었다.[6]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그의 수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예루살렘 공략에는 참가하지 않고 안티오키아에 남아 그곳의 공작이 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예루살렘 왕국 이상의 대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1100년에 소아시아의 투르크족 지도자인 다니슈멘드에게 패배해 1103년까지 포로가 되었다.[7]

2. 5. 안티오키아 공국 통치

보에몽은 니케아 공방전, 도릴라이온 전투,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특히 안티오키아 포위전에서는 변절자 피루즈와의 협상으로 안티오키아의 한 탑을 확보하여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지만, 예루살렘 공방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안티오키아에 남아 그곳의 공작이 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예루살렘 왕국 이상의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1100년 소아시아의 튀르크족 지도자인 다니슈멘드 가지에게 패배하여 1103년까지 포로로 잡혀 있었다.[8]

그 사이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을 받은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 질이 트리폴리 백작령을 창설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의 확장을 저지했다.

1103년 8월에 에데사 백작 보두앵 1세에 의해 구출되어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보에몽은, 1104년에 하란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로마 제국의 공격까지 받게 되자, 1104년 말 증원군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다.[7] 1106년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지원을 받은 보에몽은 군대를 일으켜 동로마 제국의 요새 두라초를 침공했다. 보에몽은 배수의 진을 쳤으나, 동로마 제국 군대가 뒤로 우회하여 보급로를 끊었다. 이에 보에몽은 공성병기 사우(Sow)를 사용해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였지만, 두라초의 수비대가 그리스의 불로 맞서자 결국 패배하였다. 포위된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종주권을 인정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후,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지 않고 1111년 실의 속에 죽었다. 아들인 보에몽 2세가 뒤를 이었다.[10]

3. 외모

안나 코무네나는 자신의 저서 알렉시아스에서 보에몽의 외모를 자세히 묘사했다. 그녀에 따르면, 보에몽은 당시 로마 땅에서 본 어떤 사람보다도 키가 컸으며, 허리와 옆구리는 가늘었지만 어깨와 가슴은 넓고 팔은 힘이 넘쳤다. 그는 완벽한 비율을 가진, 마치 폴리클레이토스의 이상적인 조각상과 같은 모습이었다.[5]

그의 손은 컸고 자세는 단단했으며, 목과 등은 탄탄했다. 피부는 매우 창백했지만 얼굴은 약간의 색을 띠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밝은색이었으며 귀까지 짧게 잘랐다. 그의 눈은 밝은 파란색이었고, 넓은 콧구멍으로 자유롭게 숨을 쉬었다.[5]

4. 평가

베르사유 궁전의 십자군 전쟁 회랑에 있는 보에몽 묘사, 메리-조제프 블롱델 작


보에몽 1세에 대한 평가는 그에 대한 다양한 기록과 문학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는 보에몽의 일생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며[7], 익명의 『프랑크인의 행적』은 보에몽의 추종자가 쓴 것으로 그의 관점을 반영한다. R. B. 유데일은 1924년에 보에몽의 전기를 썼으며, 랄프 드 캔의 『탄크레드의 행적』은 보에몽의 부하인 탄크레드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에몽의 생애는 B. 폰 퀴글러의 『보에몽과 탄크레드』(1862), L. 폰 하이네만의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인 역사』(1894), 라인홀트 뢰리히트의 『제1차 십자군 원정사』(1901) 및 『예루살렘 왕국사』(1898) 등에서 다루어진다.[7] 로버트 로렌스 니콜슨은 "탄크레드: 제1차 십자군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라틴 국가 건설과 관련된 그의 경력과 업적 연구"라는 탄크레드에 대한 영어 전기를 썼다. 제프리 말라테라는 『로제르 백작의 업적...』에서 보에몽의 십자군 이전 경력을 자세히 다루었다.

알프레드 더건의 『보에몽 백작』(1964)은 보에몽의 삶과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기까지의 사건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11] 보에몽은 F. 밴 와이크 메이슨의 역사 소설 『은빛 표범』(1955), 로버트 E. 하워드의 단편 소설집 『아즈라엘의 길』(1979)에 수록된 단편 "보에몽의 흔적", 러셀 호반의 판타지 소설 『순례자』(1983)에도 등장한다. 라베른 게이의 역사 소설 『사탄의 포도주』(1949)는 보에몽의 삶을 각색하여 묘사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the Crusad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 백과사전 Bohemu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Bohemond I of Antioch (d. 1111)
[4] 웹사이트 Bohemond II Prince of Antioch http://www.britannic[...] 2016-05-05
[5] 서적 Alexiad Penguin Publishing
[6] 서적 The Portable Medieval Reader https://books.google[...] Penguin Publishing Group
[7] 백과사전 Bohemund
[8] 서적 Chapter XII. The Foundations of the Latin States, 1099–1118 http://images.librar[...]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9] 서적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10] 서적 Albericus Aquensis II. XI
[11] 서적 Preface Cassell Military
[12]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the Crusad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13] 백과사전 Bohemu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Bohemond I of Antioch (d. 1111)
[15] 웹사이트 Bohemond II Prince of Antioch http://www.britannic[...] 2016-05-05
[16] 서적 The Portable Medieval Reader https://books.google[...] Penguin Publishing 1977-05-26
[17] 서적 The Portable Medieval Reader https://books.google[...] Penguin Publishing Group
[18] 백과사전 Bohemund
[19] 서적 Chapter XII. The Foundations of the Latin States, 1099–1118 http://images.librar[...]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 서적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21] 서적 Albericus Aquensis II. XI
[22] 서적 Preface Cassell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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