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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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전쟁은 15세기 후반 부르고뉴 공작 샤를 용담공과 스위스 연방 간의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다. 부르고뉴 공작은 영토 확장을 추구하며 스위스와 갈등을 빚었고, 스위스는 이에 맞서 동맹을 결성하여 저항했다. 전쟁은 그랑송, 모라, 낭시 전투를 거치며 스위스의 승리로 끝났고, 샤를 용담공은 낭시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는 분할되었고, 스위스는 군사적 명성을 얻었으며, 유럽 전역의 군사 전략에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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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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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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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74년–1477년 |
장소 | 로렌 및 스위스 북서부 |
결과 | 프랑스-스위스 승리 |
영토 변화 | 부르고뉴 발루아 가의 멸망과 발루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상속인 간의 분할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부르고뉴 국가 |
교전국 3 | 스위스 맹약자단 |
교전국 4 | 로렌 공국 |
교전국 5 | 상 알자스 |
지휘관 | |
부르고뉴 | 샤를 용담공 |
로렌 | 르네 2세 드 로렌 |
스위스 | 한스 발트만 |
관련 정보 |
2. 시대적 배경
부르고뉴 공작가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강력한 세력으로서 약 100년에 걸쳐 지배력을 확립했다.[2] 이들은 본거지인 프랑슈콩테/Franche-Comté프랑스어와 부르고뉴 공국 외에도 플랑드르, 브라반트 및 룩셈부르크와 같은 경제적으로 강력한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다.[2]
1469년 처음엔 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함께 Eidgenossen(혹은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알자스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했다.[8]
부르고뉴 공작들은 일반적으로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추구하여, 특히 알자스와 로렌을 획득하고 남북으로 분리된 영토를 통합하려 했다.[3] 이미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편에 서서 프랑스 왕과 대립하고 있었고, 장미 전쟁에서는 요크 가문을 지원했다.[4] 흑사병의 여파는 사회를 쇠퇴하게 만들었지만, 부르고뉴 공국은 저지대 국가에서 얻은 수익으로 야망을 추구할 수 있었다.[5] 이 시기 스위스와 무역 및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합스부르크와 프랑스의 야망에 대항하여 안보에 도움을 받았다.[6]
샤를의 라인강 연안 진출은 합스부르크 가문,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의 갈등을 야기했다.[3]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국경과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르고뉴와 갈등 관계에 놓였다.[7]
3. 전쟁의 전개
그러나 샤를의 라인강 서쪽과의 관계는 지그문트가 바라던 스위스를 공격하는 동기가 되지 못했다. 샤를은 바젤 및 스트라스부르, 뮐루즈 등의 도시에 대항해 통상 금지령을 지방 행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에게 실행하게 했다.
헤겐바흐는 압정을 펼쳤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대해 도시 주민의 반감은 강해지게 되었고, 도시는 베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의 확장 전략은 1473년~14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쾰른 대주교에 대한 공격, 노이스 공성전의 실패로 처음으로 좌절되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화평을 획책하고, 콘스탄츠에서 후에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부르는 협정을 맺었다. 또 한편 지그문트는 샤를에게 양도한 영지를 도로 구입하려 했으나 이것은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30일 알자스에서 반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힌 헤겐바흐가 참수형에 처해졌다.[8]
알자스 및 스위스의 도시와 지그문트는 결속하여 "대부르고뉴 동맹"을 맺고, 같은해 11월 13일 에리쿠르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슈콩테의 쥐라 (Jura)를 정복했다. 다음 해 1475년 베른군이 샤를과 동맹관계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정복해 파괴했다.
발레에서는 1475년 11월 플란타 전투에서 독립공화국 ''지벤 젠덴''(Sieben Zenden)이 베른군 및 기타 동맹국의 도움에 의해 사보이아인을 저지 발레에서 몰아냈다.[9]
1476년 3월 샤를은 보복을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 드 로몽의 영지 그랑송으로 진군했다. 이곳은 같은해 1월 부르고뉴 군이 공략할 때 항복한 스위스 병사를 본보기를 위해 교수형에 처하고, 호수에 익사시켰던 인연이 있는 땅이었다.[8]
스위스 동맹군이 수일 후 이곳에 도착했고, 그랑송 전투에서 샤를은 뼈아픈 패배를 겪었다. 그는 전장에서 물러날 여유를 얻지 못해, 대포 및 많은 식량, 보물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으나 샤를은 다시 모라 전투에서 스위스 군에게 패배했다.
1477년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로렌 공작 르네 2세가 이끄는 로렌 군과 그를 따르는 스위스 병사와 교전하다 전사했다.[10]
3. 1. 초기 갈등
1469년, 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 공작은 Eidgenossen(혹은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알자스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게 양도했다.[13] 그러나 샤를의 라인강 서쪽과의 관계는 지그문트가 바라던 스위스를 공격하는 동기가 되지 못했다. 샤를은 바젤, 스트라스부르, 뮐루즈 등의 도시에 대항해 지방 행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에게 통상 금지령을 실행하게 했다. 헤겐바흐는 압정을 펼쳤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대한 도시 주민의 반감은 강해졌고, 도시는 베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4] 샤를의 확장 전략은 1473년~14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쾰른 대주교에 대한 공격, 노이스 공성전의 실패로 처음으로 좌절되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화평을 획책하고, 콘스탄츠에서 후에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부르는 협정을 맺었다.[14] 또 한편 지그문트는 샤를에게 양도한 영지를 도로 구입하려 했으나 이것은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30일 알자스에서 반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힌 헤겐바흐가 참수형에 처해졌다.[14] 알자스 및 스위스의 도시와 지그문트는 결속하여 "대부르고뉴 동맹"을 맺고, 같은해 11월 13일 에리쿠르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슈콩테의 쥐라 (Jura)를 정복했다. 다음 해 1475년 베른군이 샤를과 동맹관계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정복해 파괴했다.
발레에서는 1475년 11월 플란타 전투에서 독립공화국 ''지벤 젠덴''(Sieben Zenden)이 베른군 및 기타 동맹국의 도움에 의해 사보이아인을 저지 발레에서 몰아냈다.[14]
1476년 3월 샤를은 보복을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 드 로몽의 영지 그랑송으로 진군했다. 이곳은 같은해 1월 부르고뉴 군이 공략할 때 항복한 스위스 병사를 본보기를 위해 교수형에 처하고, 호수에 익사시켰던 인연이 있는 땅이었다.[14]
3. 2. 반 부르고뉴 동맹의 형성
1469년 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 공작은 용담공 샤를과 함께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알자스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했다.[13] 그러나 샤를의 라인강 서쪽과의 관계는 지그문트가 바라던 스위스를 공격하는 동기가 되지 못했다. 샤를은 바젤, 스트라스부르, 뮐루즈 등의 도시에 대항해 통상 금지령을 지방 행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에게 실행하게 했다. 헤겐바흐는 압정을 펼쳤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대한 도시 주민의 반감은 강해지게 되었고, 도시는 베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8] 샤를의 확장 전략은 1473년~14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쾰른 대주교에 대한 공격, 노이스 공성전의 실패로 처음으로 좌절되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화평을 획책하고, 콘스탄츠에서 후에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부르는 협정을 맺었다. 또 한편 지그문트는 샤를에게 양도한 영지를 도로 구입하려 했으나 이것은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30일 알자스에서 반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힌 헤겐바흐가 참수형에 처해졌다.[14] 알자스 및 스위스의 도시와 지그문트는 결속하여 "대부르고뉴 동맹"을 맺고, 같은해 11월 13일 에리쿠르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슈콩테의 쥐라 (Jura)를 정복했다. 1475년 베른군은 샤를과 동맹관계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정복해 파괴했다.
발레에서는 1475년 11월 플란타 전투에서 독립공화국 ''지벤 젠덴''(Sieben Zenden)이 베른군 및 기타 동맹국의 도움에 의해 사보이아인을 저지 발레에서 몰아냈다.
1476년 3월 샤를은 보복을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 드 로몽의 영지 그랑송으로 진군했다. 이곳은 같은해 1월 부르고뉴 군이 공략할 때 항복한 스위스 병사를 본보기를 위해 교수형에 처하고, 호수에 익사시켰던 인연이 있는 땅이었다.[14]
3. 3. 스위스의 공세
1469년 오스트리아 대공 지그문트는 알자스 지역의 소유지를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게 양도하며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고자 했다.[8] 그러나 샤를은 라인강 서쪽에 개입했지만, 페터 폰 헤겐바흐가 바젤, 스트라스부르, 뮐루즈 등에 통상 금지령을 실행하며, 이 도시들은 베른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샤를의 팽창주의 전략은 노이스 공성전(1474년~1475년) 실패로 좌절되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평화 협정을 맺고, 콘스탄츠에서 "영구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샤를에게서 알자스 소유지를 되찾으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직후, 헤겐바흐는 알자스에서 참수되었고, 알자스 도시, 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 스위스는 동맹을 맺어 1474년 에리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슈콩테의 일부를 정복했다. 루이 11세는 안데르나흐 조약을 통해 동맹에 합류했다.[9]
1475년 베른 군대는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정복하고 황폐화시켰다. 베른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샤를의 침략을 막고자 했으나, 다른 스위스 도시들은 베른의 정책에 불만을 품어 처음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발레에서는 지벤 젠덴의 독립 공화국들이 플란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보이아인들을 몰아냈다.
1476년 샤를은 그랑송으로 진격하여 항복한 수비대를 처형했다.[8] 며칠 후 연방군이 도착했을 때, 샤를은 그랑송 전투에서 패배하여 많은 보급품과 귀중품을 남기고 도망쳤다. 그는 군대를 재편성했지만, 무라 전투에서 연방군에게 다시 패배했다.
부르고뉴의 손실이 계속되자, 샤를은 르네 2세가 이끄는 반란에 직면했다.[10] 내부 갈등은 스위스와의 전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샤를은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샤를의 군사적 실패는 "샤를 용담공은 그랑송에서 재산을, 무라에서 용기를, 낭시에서 피를 잃었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1476년 말, 교황 식스토 4세는 전쟁 종식과 평화 조약 체결을 촉구했지만,[11] 스위스는 르네 2세의 로렌 공국을 샤를이 떠나지 않는 한 전쟁을 끝내기를 거부했다. 스파이 활동과 검열은 전쟁 내내 양측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12]
부르고뉴 전쟁은 게발트하우펜 전술을 통해 스위스가 승리하면서 유럽 전역의 군사 전략 변화를 촉진했다. 이는 기병보다 보병에 유리하게 균형을 기울였다.[6]
3. 4. 부르고뉴의 반격과 패배
1469년 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 공작은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알자스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게 양도했다.[8] 그러나 샤를은 라인강 서쪽에 개입했지만, 지그문트가 바랐던 것처럼 연방군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샤를은 바젤, 스트라스부르, 뮐루즈 등의 도시에 대항해 통상 금지령을 지방 행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에게 실행하게 했다. 헤겐바흐는 압정을 펼쳤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대한 도시 주민의 반감은 강해졌고, 도시는 베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의 확장 전략은 1473년~14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쾰른 대주교에 대한 공격, 노이스 공성전의 실패로 처음으로 좌절되었다.[9]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화평을 획책하고, 콘스탄츠에서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부르는 협정을 맺었다. 지그문트는 샤를에게 양도한 영지를 다시 구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30일 알자스에서 반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힌 헤겐바흐가 참수형에 처해졌다.[8]
알자스 및 스위스의 도시와 지그문트는 결속하여 "대부르고뉴 동맹"을 맺고, 같은해 11월 13일 에리쿠르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슈콩테의 쥐라 (Jura)를 정복했다. 다음 해 1475년 베른군은 샤를과 동맹관계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정복해 파괴했다. 발레에서는 1475년 11월 플란타 전투에서 독립공화국 ''지벤 젠덴''(Sieben Zenden)이 베른군 및 기타 동맹국의 도움에 의해 사보이아인을 저지 발레에서 몰아냈다.[9]
1476년 3월 샤를은 보복을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 드 로몽의 영지 그랑송으로 진군했다. 스위스 동맹군이 수일 후 이곳에 도착했고, 그랑송 전투에서 샤를은 뼈아픈 패배를 겪었다. 그는 전장에서 물러날 여유를 얻지 못해, 대포 및 많은 식량, 보물을 남기고 철수하였다.[8]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으나 샤를은 다시 모라 전투에서 스위스 군에게 패배했다. thumb
1477년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로렌 공작 르네 2세가 이끄는 로렌 군과 그를 따르는 스위스 병사와 교전하다 전사했다.[10] 샤를의 군사적 실패는 당시 스위스의 격언으로 요약된다. "샤를 용담공은 그랑송에서 재산을, 무라에서 용기를, 낭시에서 피를 잃었다." 한편, 부르고뉴 전쟁은 수적으로 우세한 부르고뉴군을 상대로 스위스의 승리 후 유럽 전역의 군사 전략 변화를 촉진했다. 게발트하우펜(Gewalthaufen)은 우세한 부르고뉴군에 대한 효과적인 스위스 군사 전략임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군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었고, 기병보다 보병에 유리하게 균형을 기울였다.[6]
3. 5. 샤를의 죽음과 전쟁의 종결
1469년 초, 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 공작은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알자스 지역의 소유지를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게 담보로 제공했다.[8] 샤를은 라인강 서쪽에 개입했지만, 지그문트가 바랐던 것처럼 연방군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집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가 지휘하는 바젤, 스트라스부르, 뮐루즈 도시에 대한 금수 조치는 이들 도시들이 베른에 도움을 요청하게 만들었다. 샤를의 팽창주의 전략은 노이스 공성전(1474-75) 실패 후 쾰른 대주교 공격 실패로 첫 번째 좌절을 겪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 연방과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했고, 콘스탄츠에서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불리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샤를에게서 알자스 소유지를 되찾고 싶어했지만, 샤를은 거절했다. 그 직후, 헤겐바흐는 알자스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고, 알자스 도시들과 합스부르크의 지기문트와 연합한 스위스는 에리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슈콩테의 쥐라 (Jura)를 정복했다.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1474년 12월 안데르나흐 조약을 통해 동맹에 합류했다.[9] 1475년, 베른 군대는 샤를과 동맹을 맺은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정복하고 황폐화시켰다. 베른은 부르고뉴보다 베른 땅에 더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샤를의 미래 침략을 막기 위해 사보이의 보주 지역으로의 확장을 위해 스위스 동맹국에 호소했다. 그러나 다른 스위스 도시들은 점점 더 확장적이고 공격적인 베른의 대외 정책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따라서 처음에는 베른을 지원하지 않았다. 연방은 스위스 회원국 간의 집단 방위 협정이었고, 한 도시가 공격받으면 다른 도시들이 도와줄 것을 보장했다. 베른의 사보이에 대한 군사 행동은 침략이었기 때문에, 다른 연방 동맹국들은 베른을 도울 법적 의무가 없었다. 발레에서는 베른과 다른 연방군의 도움을 받은 지벤 젠덴(Sieben Zenden)의 독립 공화국들이 플란타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하부 발레에서 사보이아인들을 몰아냈다.
1476년, 샤를은 사보이아 공국의 피에르 드 로몽에게 속했지만 최근 스위스에 의해 점령된 그랑송으로 진격했다. 그는 항복한 수비대를 교수형에 처하거나 호수에 익사시켰다.[8] 며칠 후 연방군이 도착했을 때, 샤를은 그랑송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장에서 도망쳐야 했고, 그의 포병과 많은 보급품과 귀중품을 남겨두었다. 그는 군대를 재편성했지만, 모라 전투에서 연방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부르고뉴의 손실이 계속됨에 따라, 샤를 용담공은 병사와 이익을 잃고 있는 영주들의 지지를 잃었고, 로렌 공작 르네 2세가 이끄는 반란이 곧 시작되었다. 반란이 계속됨에 따라, 르네는 북부와 남부 부르고뉴 사이에 있는 그의 땅의 전략적 위치를 이용하여 통신을 차단하고 전쟁 능력을 방해했다.[10] 내부 갈등은 스위스와의 전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샤를의 관심을 연방에서 르네의 반란이라는 더 긴급한 문제로 돌리게 했다. 샤를 용담공은 새로운 군대를 모았지만, 1477년 스위스가 르네의 군대와 함께 싸운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샤를 용담공의 군사적 실패는 당시 스위스의 일반적인 말로 요약된다. "샤를 용담공은 그랑송에서 재산을, 무라에서 용기를, 낭시에서 피를 잃었다."
1476년 말, 스위스 연방은 전쟁 종식과 스위스와 샤를 사이의 평화 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시스투스 4세의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11] 그것은 전쟁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책처럼 보였지만, 교황은 샤를이 스위스에서 눈을 돌려 성전에서 무슬림에게로 관심을 돌리기를 바랐다. 교황의 압력은 결국 스위스에 의해 무시되었고, 스위스는 샤를이 로렌 공국을 떠나지 않는 한 전쟁을 끝내기를 거부했다. 당대 글에서 스파이 활동과 검열이 전쟁 내내 스위스와 부르고뉴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분명하다. 양측 모두 적의 움직임과 약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문 스파이를 고용했다. 그러나 이 직업은 매우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일부 스위스 도시들이 큰 손실을 입었고, 전쟁 내내 상대방의 정보를 얻는 것은 계속 어려운 일이었다.[12]
부르고뉴 전쟁은 또한 수적으로 우세한 부르고뉴군을 상대로 스위스의 승리 후 유럽 전역의 군사 전략 변화를 촉진했다. 게발트하우펜은 우세한 부르고뉴군에 대한 효과적인 스위스 군사 전략임이 입증되었다. 그때까지 전투는 기병이 지배했는데, 기병은 전장에서 보병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게발트하우펜 전술은 긴 창을 사용하여 기병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군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었고, 기병보다 보병에 유리하게 균형을 기울였다.[6]
4. 전쟁의 영향
샤를의 죽음으로 발루아부르고뉴 가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인 플랑드르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고, 샤를의 딸 마리와 결혼함으로써 마리의 사후 합스부르크 영지가 되었다.[6][15]
부르고뉴 공작령은 루이 11세가 다스리는 프랑스에 귀속되었고 프랑슈콩테도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나 1493년 상리스 조약에 의해 프랑스 왕 샤를 8세로부터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단려공 필리프에게 양도되었다. 이것은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략 때 막시밀리안 1세에게 중립의 입장을 지키게 하기 위한 매수공작이었다.[6][15]
또한 당시 유럽 최강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부르고뉴 군에게 승리한 것에서 Eidgenossende(스위스 연방)는 거의 무적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부르고뉴 전쟁은 유럽의 전장에서 스위스 용병의 평가를 특출 나게 만들었다.[6] 유럽 각지에서 창병이야말로 사용해야 할 보병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고, 플랑드르의 창병과 독일 제국의 도시 보병들이 스위스를 모범으로 개량되었으며, 프랑스군조차 스위스와 국경을 접한 산간 계곡에서 창병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리고 스위스 병사는 15세기 말 최고급 용병으로 인식되게 되었다.[15]
5. 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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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본/Richard Vaughan영어 (1973). 《Charles the Bold: The Last Valois Duke of Burgundy》. 런던: Longman Group. ISBN 0582502519.
- 플로렌스 도이힐러/Florens Deuchlerde (1963). 《Die Burgunderbeute: Inventar der Beutestücke aus den Schlachten von Grandson, Murten und Nancy 1476/1477》. 베른: Verlag Stämpfli & Cie.
참조
[1]
웹사이트
The Panorama of the Battle of Murten - The Battle of Murten, 1476
https://www.murtenpa[...]
[2]
서적
Magnanimous Dukes and Rising States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Crusading in the Fifteenth Century
Palgrave Macmillan
[4]
서적
From the Brink of the Apocalypse
Routledge
[5]
서적
The Promised Lands: The Low Countries Under Burgundian Rule, 1369–1530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6]
서적
Splendour of the Burgundian Court
Mercatorfonds
[7]
서적
A Concise History of Switzerland
Cambridge
[8]
서적
Charles the Bold: The Last Valois Duke of Burgundy
Longman
[9]
웹사이트
France in the Renaissance 1453–1517
http://www.san.beck.[...]
[10]
서적
The Lost Kingdom of Burgundy
Dodd, Mead & Company
[11]
서적
The Papal Indulgence as a Medium of Communication in the Conflict between Charles the Bold and Ghent, 1467–69
Viella
[12]
서적
Journal of Medieval Military History
The Boydell Press
[13]
문서
U.イム・ホーフ、p.60。
[14]
문서
J.カルメット、p.411
[15]
문서
『戦闘技術の歴史 2 中世編』 8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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