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프랑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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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프랑클은 오스트리아의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철학자이다. 빈 대학교에서 정신 의학을 전공하고, "제3 빈 학파"로 불리며 실존 분석과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그는 1942년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로고테라피를 발전시켰으며, 저서 《인간의 의미 탐구》는 널리 읽혔다. 프랑클은 심리 치료의 재인간화를 옹호했으며, 1985년 미국 정신의학 협회에서 오스카르 퓌스터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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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프랑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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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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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빅토르 에밀 프랑클 |
출생일 | 1905년 3월 26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빈 |
사망일 | 1997년 9월 2일 |
사망지 | 오스트리아 빈 |
안장지 | 빈 중앙 묘지 |
직업 | 신경과 의사, 정신과 의사, 철학자, 작가 |
배우자 | 틸리 그로서 (1941년 결혼 – 1944-1945년 사망) 엘레오노레 카타리나 슈빈트 (1947년 결혼) |
자녀 | 딸 1명 |
학력 | 빈 대학교 (의학박사, 1930년; 철학박사, 1948년) |
주요 업적 | 로고테라피, 실존 분석 |
참고 사항 | |
실존 분석 |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용되기 전에 이미 이론이 거의 완성되었다. 수용소 체험은 이론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장이 되었다. |
2. 1945년 이전의 삶
빅토르 프랑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의 유대인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 시절 응용 심리학 야간 강좌를 들으며 심리학과 의미의 역할에 관심을 가졌고,[1] 십 대 시절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논문 게재 허락을 구하는 서신을 보내 교류하기도 했다.[8][9] 192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1924년 프랑클의 첫 과학 논문이 ''국제 정신분석 저널(Internationale Zeitschrift für Psychoanalyse)''에 게재되었다.[10] 같은 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고등학생 청년 운동 단체 회장을 맡았는데, 프랑클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그를 당 창시자인 빅토르 아들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1][11] 이 시기 프랑클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접근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 알프레트 아들러 제자 그룹에 합류하여 1925년 ''국제 개인 심리학 저널''에 "심리 치료와 세계관"("Psychotherapie und Weltanschauung"de)이라는 두 번째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1] 그러나 인간의 주요 동기 부여 요인으로 의미를 강조하면서 아들러 그룹에서 축출되었고,[2] 1926년부터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 로고테라피라고 명명했다.[12]
2. 1. 의사, 심리치료사
1905년 빈에서 태어난 빅토르 프랑클은 빈 대학교에서 아들러와 프로이트에게 정신 의학을 배웠다. 빈 대학교 의학부 정신 의학 교수이자 빈 시립 병원 신경과 부장을 겸임했다. "제3 빈 학파"로서 독자적인 "실존 분석"을 주창하여 독일어권에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이론은 막스 셸러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마르틴 하이데거의 체계를 따랐다. 정신과 의사로 유명하지만, 뇌외과 의사로서의 실력 또한 뛰어났다.프랑클은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우울증과 자살에 관한 주제에 집중하여 신경과와 정신과를 전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그들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고등학생들을 위한 무료 상담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샬롯 뷔울러와 같은 심리학자들도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는 시기에 특히 집중되었고, 1931년에는 빈에서 단 한 명의 학생도 자살하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으로 프랑클은 빌헬름 라이히 등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가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빈에 있는 스타인호프 병원의 신경학과와 정신과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자살 충동을 가진 3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치료했다. 1937년에는 비엔나 알서 스트라세 32/12에 신경, 정신과 병원을 설립했다. 1940년에는 로스차일드 병원에서 정신과 과장으로 일했는데, 이 병원은 당시 빈에서 유대인들이 입원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는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으로부터 일부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3. 나치 강제 수용소 경험
1942년 9월 25일, 프랑클은 아내와 부모와 함께 나치 테레지엔슈타트 게토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종합의사로 일했다. 그의 정신 의학 기술이 알려지자, B블록 4번 정신 병동에 배치되어 정신 건강 관리를 위한 캠프를 설립했다. 그는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캠프를 만들었으며, 레지나 조나스의 도움을 받아 자살 감시망을 만들었다.[62]
1943년 7월 29일, 프랑클은 레오 백의 도움으로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과학회를 위한 비공식적인 행사를 주최했고, '몸과 영혼', '영혼의 의학 치료', '수면과 수면 장애'를 포함한 일련의 공개 강의를 했다. 프랑클의 아버지 가브리엘은 테레지엔슈타트에서 폐부종과 폐렴으로 사망했다.[62]
1944년 10월 19일, 프랑클은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0월 25일, 그는 다하우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5개월을 보냈다. 1945년 3월, 튀르크하임으로 옮겨졌고, 1945년 4월 27일에 미국군에 의해 해방되기 전까지 의사로 일했다.[62]
그의 어머니 엘사와 동생 월터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고, 아내 틸리는 베르겐 벨젠에서 죽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는 오스트리아에서 호주로 이주한 여동생 스텔라뿐이었다.[62]
1933년부터 빈 정신병원의 여성 자살 환자 부문 책임자를 맡고 있었지만, 나치에 의한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유대인이 독일인을 치료하는 것이 금지되어 해임되었다. 1941년 12월에 결혼했지만, 9개월 후 가족과 함께 강제 수용소의 테레지엔슈타트에 수용되었고, 아버지는 여기서 사망했으며, 어머니와 아내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어 사망했다. 프랑클은 1944년 10월에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3일 후에 튀르크하임으로 이송되어 1945년 4월에 미국군에 의해 해방되었다.[62]
이후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기를 집필했다. 일본에서는 1956년에 『밤과 안개』로 출판되었다.[62]
4. 경력
빅토르 프랑클은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신경과와 정신과를 전공하였다. 1924년에는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고등학생들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청년 운동인 'Sozialistische Mittelschüler Österreich'의 회장을 맡았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는 의대생으로서 샬롯 뷔울러 등과 함께 고등학생 무료 상담 프로그램을 만들어, 1931년 빈 학생 자살률 0%를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성과로 빌헬름 라이히 등의 주목을 받아 베를린으로 초청받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빈 스타인호프 병원의 신경학과와 정신과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이 기간 동안 자살 충동을 가진 3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치료했다. 1937년 개인 병원을 개업했으나,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인수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리안" 환자 치료가 금지되었다. 1940년부터는 로스차일드 병원에서 정신과를 담당하며,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으로부터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15]
4. 1. 정신의학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신경과와 정신과를 전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방향을 추구했다.[13] 1930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슈타인호프 정신 병원에서 자살 위험이 있는 여성의 치료를 담당하며 경험을 쌓았다.[1]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의과대학생 시절, 청소년 자살률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청소년 상담 센터를 조직했다.[13] 샬럿 뷜러 등 여러 심리학자들이 참여한 이 프로그램은 1931년 빈 학생 자살률 0%를 달성하는 성과를 냈다.[14]
1940년,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 과장으로 합류하여 나치의 안락사 프로그램으로부터 수많은 환자를 구출했다.[2][15]
전쟁 후, 빈 종합병원의 신경과 과장이 되었고, 1970년 은퇴할 때까지 개인 진료를 병행했다.[2] 1948년, 빈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의 논문 ''무의식적인 신''은 심리학과 종교의 관계를 탐구했다.[16]
1955년, 빈 대학교 신경정신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하버드 대학교 (1961), 댈러스의 사우스메소디스트 대학교 (1966), 피츠버그의 듀케인 대학교 (1972)에서 객원 교수로 강의했다.[12]
프랑클은 초기 심리 치료 접근 방식의 환원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심리 치료의 재인간화를 옹호했다.[18] 미국 정신의학 협회는 종교와 정신의학에 대한 그의 기여를 인정하여 1985년 오스카르 퓌스터 상을 수여했다.[18] "제3 빈 학파"로서 독자적인 "실존 분석"을 주창하여 독일어권에서 널리 알려졌다. 프랑클의 이론은 막스 셸러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마르틴 하이데거의 체계를 따랐다.
4. 2. ''죽음의 수용소에서''
1933년부터 빈 정신병원의 여성 자살 환자 부문 책임자를 맡고 있었지만, 나치에 의한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유대인이 독일인을 치료하는 것이 금지되어 해임되었다.[62] 1941년 12월에 결혼했지만, 9개월 후 가족과 함께 강제 수용소의 테레지엔슈타트에 수용되었고, 아버지는 여기서 사망했으며, 어머니와 아내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어 사망했다. 프랑클은 1944년 10월에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3일 후에 튀르크하임으로 이송되어 1945년 4월에 미국군에 의해 해방되었다.[62]이후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기를 집필했다. 일본에서는 1956년에 『밤과 안개』로 출판되었다.[62]
프랑클은 종합 진료 병원의 신경과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9일 동안 ''의미를 찾아서''를 집필했다.[19] 원래 ''어느 심리학자의 강제 수용소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1946년 독일어로 출간되었다. ''의미를 찾아서''의 영어 번역판은 1959년에 출간되었고,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2] 프랑클은 이 책의 성공을 "현대 시대의 집단 신경증"의 증상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20] 수백만 부가 수십 개의 언어로 판매되었다. 의회 도서관과 이달의 책 클럽을 위해 1991년에 실시된 설문 조사에서 ''의미를 찾아서''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21]
5. 로고테라피와 실존분석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와 자유 의지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 기반한 실존 분석과 로고테라피를 개발했다.[24][22]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세 가지 주요 방법(세상을 변화시키거나, 특별한 경험을 하거나, 특정 태도를 취하는 것)을 확인했다.
로고테라피와 실존 분석에서 제공하는 주요 기법은 다음과 같다.[23][24][22]
- 역설적 의도: 내담자는 자기 거리두기와 유머러스한 과장을 통해 강박이나 불안을 극복한다.
- 탈반사: 과도한 반추는 무력감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내담자의 주의를 증상에서 벗어나게 한다.[25]
- 소크라테스식 문답과 태도 수정: 내담자가 스스로 정의한 삶의 의미를 찾고 추구하도록 돕는다.[26]
의미를 중앙 동기 부여 힘이자 정신 건강의 요인으로 인정한 것은 심리학 분야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공헌이며, 새롭게 부상하는 긍정 심리학 분야의 기본 원리를 제공했다.[27]
6. 책임의 동상
빅토르 프랑클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 각자의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63]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프랑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자유는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며 진실의 절반일 뿐이다. 자유는 책임감이라는 현상의 긍정적인 측면의 부정적인 측면에 불과하다. 사실, 자유는 책임감의 관점에서 살지 않으면 단순한 임의성으로 퇴화될 위험이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동부 해안의 자유의 여신상과 더불어 서부 해안에 책임의 동상을 세울 것을 권하는 이유이다."[18]
프랑클의 이러한 생각은 널리 알려졌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의 관심을 끌었다. 코비는 1990년대에 케빈 홀과 함께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조각가 게리 리 프라이스에게 두 손을 맞잡은 형상의 조각상을 의뢰했다. 이 디자인은 프랑클의 부인에게서 승인을 받았고, 이들은 건설 장소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뉴욕의 대서양 항구를 보완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의 태평양 항구에 세우려 했으나, 주 규정 통과가 어려워 유타 주지사 스펜서 콕스가 2023년 자신의 주에 건설 부지를 제안하여 승인받았다. 그러나 아직 건설은 시작되지 않았다.[29][30]
7. 논란
빅토르 프랑클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논란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어 왔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증언 관련 논란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샌버너디노(California State University, San Bernardino)의 역사학 교수 티모시 피텔은 프랑클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증언과 자서전에 나타난 불일치와 누락을 지적했다.[31] 토마스 사스를 비롯한 동시대 인물들도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했다.[32] 프랑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며칠 동안만 수감되었고, 주된 수감 생활은 다하우의 부속 작업 수용소인 카우페링 III에서 이루어졌다.[33][34][35]
로고테라피 기원 관련 논란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전, 프랑클은 괴링 연구소에 논문을 제출하여 로고테라피가 "세계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일부 선도적인 나치 심리치료사들의 작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42] 이는 프랑클의 로고테라피가 나치즘에 용인될 수 있었다는 논란을 야기했다. 프랑클은 자신의 심리치료 이론이 수용소 경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이 진술은 삭제되었다. 1977년 프랑클은 "사람들은 제가 아우슈비츠에서 새로운 심리치료법을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46]
나치 협력 및 유대인 관계 관련 논란프랑클은 나치에 협력하거나 묵인한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집단적 죄책감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태도는 프랑클과 빈 시민들, 그리고 미국 유대인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47][48][49] 1988년에는 발트하임 대통령으로부터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대은성 훈장을 받았는데, 발트하임은 당시 나치 전범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논란의 인물이었다.[49] 또한, 프랑클은 전쟁 중 유대인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승인받지 않은 뇌 절제술과 개두술을 이용한 나치 의학 실험을 수행했다는 언급이 있다.[52][53][54][11]
티모시 피텔에 대한 반응알렉산더 바트야니는 티모시 피텔의 비판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테오도어 오키프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지적하며,[55] 피텔이 1차 자료를 참조하지 않고 프랑클을 인터뷰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7. 1. "아우슈비츠 생존자" 증언
1944년 10월 19일, 빅토르 프랑클은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31] 10월 25일,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어 5개월을 보냈다. 1945년 3월, 프랑클은 튀르크하임으로 옮겨졌고, 1945년 4월 27일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의사로 일했다.[31]그의 어머니 엘사와 동생 월터는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고, 아내 틸리는 베르겐 벨젠에서 사망했다.[31]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호주로 이주한 여동생 스텔라였다.[31]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샌버너디노(California State University, San Bernardino)의 역사학 교수 티모시 피텔은 《퍼즐의 잃어버린 조각들: 빅토르 프랑클의 기이한 경력에 대한 고찰》에서 프랑클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증언과 이후 자서전에 나타난 수많은 불일치와 누락을 지적했다.[31] 토마스 사스를 비롯한 많은 동시대 인물들도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했다.[32]
프랑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내용의 약 절반을 아우슈비츠와 수감자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할애하여,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 오래 머물렀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피텔에 따르면, 프랑클의 표현은 모순적이고 "매우 기만적"이며, 프랑클이 아우슈비츠에 몇 달 동안 머물렀다는 인상과는 달리, 그는 기차와 가까운 아우슈비츠의 "창고 수감자" 구역에 며칠 동안만 수감되었다.[33][34][35] 프랑클은 아우슈비츠에 등록되지 않았고, 그곳에서 번호를 부여받지도 않은 채 다하우의 부속 작업 수용소인 카우페링 III으로 보내졌으며, (테레지엔과 함께) 그의 저서에 묘사된 내용의 실제 배경은 바로 이곳이다.[33][34][35]
1933년부터 빈 정신병원의 여성 자살 환자 부문 책임자를 맡고 있었지만, 나치에 의한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유대인이 독일인을 치료하는 것이 금지되어 해임되었다. 1941년 12월에 결혼했지만, 그 9개월 후 가족과 함께 강제 수용소의 테레지엔슈타트에 수용되었고, 아버지는 여기서 사망했으며, 어머니와 아내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어 사망했다. 프랑클은 1944년 10월에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3일 후에 튀르크하임으로 이송되어 1945년 4월에 미국군에 의해 해방되었다.[62]
이후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기를 집필했다. 일본에서는 1956년에 『밤과 안개』로 출판되었다.[62]
7. 2. 로고테라피의 기원과 함의
빅토르 프랑클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되는 유한함과 한계가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에서 우리 각자가 자신의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63] 프랑클은 삶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며, 일과 고통이 의미를 찾는 데 기여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충족감과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1982년, 홀로코스트 분석가 로렌스 L. 랭거는 프랑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들의 경험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36] 랭거는 나치도 "세계를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 의미를 찾았다"는 점에서 프랑클의 비도덕적인 "의미" 강조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보았다.[37] 랭거는 "만약 이 [로고테라피] 교리가 더 간결하게 표현되었다면, 나치는 아우슈비츠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읽혔던 잔혹한 조롱인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를 준다)를 대체했을 수도 있다"고 썼다.[38] 랭거는 프랑클의 어조가 자찬적이고 홍보적이라고 비판하며, "독자가 책을 덮을 때 ''인간의 의미 탐구''의 진정한 영웅은 인간이 아니라 빅터 프랑클이라는 점에 놀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는 바로 문명을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로 이끌었던 세계관 의미 부여에 대한 환상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39]
피텔은 랭거가 프랑클의 홀로코스트 증언을 읽은 통찰력이 날카로웠다고 언급했다. 랭거는 빅토르 프랑클이 1930년대 후반에 치료의 한 형태로 나치 심리치료 운동("의지와 책임"[41])의 핵심 아이디어를 옹호하고 "받아들였다"[40]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데올로기에서 논란이 될 만한 유사점 또는 수렴을 이끌어냈다. 당시 프랑클은 1937년 비엔나에 있는 괴링 연구소에 논문을 제출하고 기고했는데, 이는 로고테라피가 "세계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일부 선도적인 나치 심리치료사들의 작업"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42] 이는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기 전의 일이었다.[43][44] 프랑클의 로고테라피 창시 논문은 괴링 연구소의 저널에 제출되어 게재되었는데, 이 연구소는 "나치 지향적 세계관을 긍정하는 심리치료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5]
프랑클이 설명한 로고테라피의 기원은 프랑클에게 잠재적으로 문제적인 주요 연속성 문제였다. 왜냐하면 프랑클은 나치와 관련된 괴링 연구소에서 일하거나 기여하면서 로고테라피의 주요 요소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1937년에 프랑클이 쓴 논문은 연구소에서 출판되었다.[44] 이러한 연관성, 즉 로고테라피가 나치즘에 용인될 수 있었다는 점이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프랑클은 자신의 심리치료 이론이 수용소 경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판본에서 이 진술은 삭제되었다. 1977년에 프랑클은 "사람들은 제가 아우슈비츠에서 새로운 심리치료법을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46]
7. 3. 유대인 관계 및 저항에 대한 실험
프랑클은 전후 몇 년 동안 나치에 협력하거나 묵인한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집단적 죄책감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프랑클과 빈 시민들, 그리고 더 큰 미국 유대인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978년 뉴욕의 성인 유대교 연구소에서 강연을 하려다 청중으로부터 야유를 받고 "나치 돼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47][48][49] 그는 용서를 지지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발생한 만행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집단적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47][48][49]1988년, 프랑클은 발트하임 대통령으로부터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대은성 훈장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격으로 수여받았다. 발트하임은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 경력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나치 전범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논란의 인물이었다. 프랑클의 훈장 수여는 많은 국제 유대인 공동체에서 배신으로 여겨졌다.[49]
게슈타포 프로필에서 나치 비밀 경찰은 프랑클을 "정치적으로 완벽"하다고 묘사했으며, 1934년 프랑클의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애국전선" 가입 사실도 언급되었다. 병원 공무원이었던 그는 원치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당에 가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50][51]
프랑클은 전쟁 중 유대인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승인받지 않은 뇌 절제술과 개두술을 이용한 나치 의학 실험을 수행했다는 언급이 있다. 외과 수술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프랑클은 나치에게 자살한 사람들에게 실험을 수행해달라고 자발적으로 요청했고, 승인을 받은 후에는 실험의 일부 세부 사항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역사가 귄터 비쇼프는 프랑클이 절제술 실험을 요청한 것은 나치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52][53][54][11]
7. 4. 티모시 피텔에 대한 반응
알렉산더 바트야니는 티모시 피텔에 대한 빅토르 프랑클의 비판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테오도어 오키프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말했다.[55] 바트야니는 비엔나의 빅토르 프랑클 아카이브의 연구원이자 직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빅토르 프랑클과 쇼아''의 첫 번째 장에서 프랑클에 대한 피텔의 작업과 그 결점에 대해 고찰한다. 바트야니는 피텔이 그가 글을 쓰고 있는 인물에 대한 1차 자료를 참조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방문한 적이 없으며, 프랑클이 살아있을 때 그를 인터뷰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한다. 피텔은 프랑클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 친구가 제안하여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빅토르 프랑클을 만날 수 없다고 결정했다고 썼다.8. 수상
연도 | 상 이름 |
---|---|
1956년 | 오스트리아 교육부 공공 교육 공로상 |
1962년 | 오스트리아 추기경 이니처 상 |
1969년 |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훈장 1등급 |
1976년 | 다뉴비아 재단상 |
1980년 | 오스트리아 빈 명예 링 |
1981년 |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훈장 |
1985년 | 오스카르 푀스터 상, 미국 |
1986년 | 빈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1986년 | 20세기 란츠베르크 시민 협회 명예 회원 |
1988년 |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대은장 |
1995년 | [https://www.dgpa.org/prinzhorn.php?m=6 한스 프린츠호른 메달] |
1995년 | 빈 시 명예 시민 |
1995년 |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대금성 훈장 |
9. 개인사
빅토르 프랑클은 오스트리아 빈의 한 유대인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심리학에 관심을 보였는데, 김나지움 입학 시험에서 철학사상 심리 논문을 썼다. 1923년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의 영향을 받았으나, 우울증과 자살에 관한 주제에 집중하면서 신경과와 정신과를 전공하며 이들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1924년, 프랑클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고등학생들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청년 운동인 'Sozialistische Mittelschüler Österreich'의 회장이 되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의대생 시절, 그는 샬롯 뷔울러 등 심리학자들의 참여 하에 고등학생들을 위한 무료 상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는 시기에 특히 주목했고, 1931년 빈에서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자살하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은 빌헬름 라이히와 같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 프랑클을 베를린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프랑클은 빈 스타인호프 병원의 신경학과와 정신과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자살 충동을 가진 3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치료했다. 1937년, 비엔나 알서 스트라세 32/12에 신경정신과 병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인수 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리안" 환자 치료를 금지당했다. 1940년, 프랑클은 빈에서 유대인 입원이 가능한 유일한 병원이었던 로스차일드 병원에서 정신과 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으로부터 일부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1941년 12월, 프랑클은 틸리 그로서와 결혼했다. 1942년 9월 25일, 프랑클과 그의 아내, 부모는 나치 테레시엔슈타트 게토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일반의사로 일했다. 그의 정신 의학 기술이 알려지자, 정신 건강 관리 캠프를 설립하고 B블록 4번 정신 병동에 배치되었다. 그는 충격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캠프를 만들었으며, 레지나 조나스와 함께 자살 감시망을 구축했다.
1943년 7월 29일, 프랑클은 레오 백의 도움으로 테레지엔슈타트에서 '몸과 영혼', '영혼의 의학 치료', '수면과 수면 장애' 등을 주제로 한 비공식 과학 행사를 주최했다. 같은 해, 프랑클의 아버지 가브리엘은 테레시엔슈타트에서 폐부종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1944년 10월 19일, 프랑클은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0월 25일, 다하우로 이송되어 5개월을 보냈다. 1945년 3월, 투르크하임으로 옮겨졌고, 1945년 4월 27일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의사로 일했다.
프랑클의 어머니 엘사와 동생 월터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아내 틸리는 베르겐 벨젠에서 사망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는 호주로 이주한 여동생 스텔라였다.
1941년, 프랑클은 로스차일드 병원의 간호사였던 틸리 그로서와 결혼했으나, 틸리는 임신 직후 아이를 낙태해야 했다.[56] 틸리는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2][1]
프랑클의 아버지 가브리엘은 모라비아 포호르제리체 출신으로, 1943년 2월 13일 테레지엔슈타트 게토 강제 수용소에서 81세의 나이로 굶주림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머니와 형제 발터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여동생 스텔라만이 호주로 탈출했다.[2][1]
1947년, 프랑클은 엘레오노레 "엘리" 카타리나 슈빈트와 재혼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엘리와 프랑클은 서로의 종교적 배경을 존중하여 교회와 회당에 모두 참석하고, 크리스마스와 하누카를 함께 기념했다. 프랑클의 아내와 사위는 그가 사망한 후 5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즉 그가 매일 기도하고 유대교 기도문과 시편 말씀을 암송했다는 것을 밝혔다.[2][28]
빅토르와 엘리 프랑클 사이에는 딸 가브리엘이 태어났으며, 그녀는 아동 심리학자가 되었다.[2][4][57] 프랑클의 손자 알렉산더 베세리는 심리 치료사, 프로듀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며 빅토르 프랑클 미국 연구소를 공동 설립했다.[58] 그는 다큐멘터리 "Viktor & I"를 제작, 촬영, 편집했다.[59]
프랑클은 1997년 9월 2일 빈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하여 빈 중앙 묘지의 유대인 묘역에 안장되었다.[60]
10. 저서
빅토르 프랑클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인간의 의미 탐구: 로고테라피 입문 (비콘 프레스, 2006년). (1959년 영어 번역본. 원래는 1946년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한 심리학자의 강제 수용소 경험")로 출판)
- 의사와 영혼 (원래 제목 ''Ärztliche Seelsorge''), 랜덤 하우스, 1955.
- [https://books.google.com/books?id=cY3u6N1zXIgC 정신 질환의 이론과 치료에 관하여]. 로고테라피와 실존 분석 입문. (제임스 M. 뒤부아 번역, 브루너-루틀리지, 2004)
- [https://books.google.com/books?id=FgVsAAAAMAAJ 정신 치료와 실존주의]. 로고테라피에 관한 선별된 논문, (사이먼 & 슈스터, 1967)
- [https://archive.org/details/willtomeaningfou00fran_0 의미에의 의지]. 로고테라피의 기초와 응용, (뉴 아메리칸 라이브러리, 1988)
- [https://archive.org/details/unheardcryformea00fran 의미를 향한 외침]. 정신 치료와 휴머니즘 (사이먼 & 슈스터, 2011)
- [https://books.google.com/books?id=dHHVzdO_SJoC 빅토르 프랑클 회고록: 자서전] (베이직 북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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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의 긍정: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비콘 프레스, 2020)
- 『밤과 안개』 (시모야마 도쿠지 번역(초판 1956년) / 이케다 가요코 번역(신역판 2002년), 미스즈 서방
- 『죽음과 사랑』 (시모야마 도쿠지 번역, 미스즈 서방, 초판 1957년, 개정판 2019년)
- 『시대정신의 병리학』 (미야모토 타다오 번역, 미스즈 서방 <프랑클 셀렉션>, 2002년, 신장판 2016년)
- 『정신 의학적 인간상』 (미야모토 타다오, 오다 스스무 번역)
- 『알려지지 않은 신』 (사노 토시카츠, 키무라 사토시 번역)
- 『신경증 I』 (미야모토 타다오, 오다 스스무 번역, 단행본 신판 전 1권)
- 『신경증 II』 (시모야마 도쿠지 번역, 각·구판은 '프랑클 저작집'(전 7권, 1960년대))
- 『그럼에도 인생에 예스라고 말한다』 (야마다 쿠니오・마츠다 미카 번역, '''춘추사''', 1993년~2011년)
- 『숙명을 넘어, 자기를 넘어』 (F・크로이처와의 대화 / 야마다 쿠니오・마츠다 미카 번역)
- 『「삶의 의미」를 찾아서』 (모로토미 요시히코 감수, 카미시마 요이치・마츠오카 세리코 번역)
- 『제약받지 않는 인간』 (야마다 쿠니오 감수)
- 『의미에의 의지』 (야마다 쿠니오 감수)
- 『의미에 의한 치유 로고테라피』 (야마다 쿠니오 감수)
- 『고뇌하는 인간』 (야마다 쿠니오, 마츠다 미카 번역)
- 『프랑클 회고록 20세기를 살아가며』 (야마다 쿠니오 번역, 신장판 2024년, 증언에 의한 회고록)
- 『인간이란 무엇인가 실존적 정신 요법』 (야마다 쿠니오 감수, 오카모토 테츠오・아마미야 토오루・이마이 노부카즈 번역, 원서는 '죽음과 사랑' 증보 개정판)
- 『절망에서 희망을 이끌어내기 위해 로고테라피의 사상과 실천』 (히로오카 요시유키 번역, 아오토샤 , 2015년)
- 『허무감에 관하여 심리학과 철학에의 도전』 (히로오카 요시유키 번역, 아오토샤, 2015년, 신장판 2023년)
- 『정신 요법에서의 의미의 문제 로고테라피 영혼의 치유』 (아카사카 모모코 번역, 테라다 히로시・하루코 감수, 키타오지 서방, 2016년)
- 『밤과 안개가 걷히는 날에 미발표 서간, 초고, 강연』 (아카사카 모모코 번역, 신교 출판사, 2019년)
- 『로고테라피의 에센스 18개의 기본 개념』 (아카사카 모모코 번역, 신교 출판사, 2016년)
- 『또 하나의 <밤과 안개> 비르켄발트의 공시 공간』 (히로오카 요시유키 편역, 하야시 신지 번역, 미네르바 서방, 2017년, 모로토미 요시히코 해설, 창작극)
- 『삶의 가치 상실의 고민 현대의 정신 요법』 (나카무라 유타로 번역, 엔데르레 서점, 1982년 / 고단샤 학술 문고 (개정판), 2014년, 강연집, 권말에 상세한 서지)
- 『의미에의 의지 로고테라피의 기초와 적용』 (오사와 히로시 번역, 브레인 출판, 1979년)
- 『현대인의 병 심리 요법과 실존 철학』 (타카시마 히로시・나가사와 준지 번역, 마루젠, 1980년)
- 『고뇌의 존재론 니힐리즘의 근본 문제』 (신교지 코우 번역, 신센샤, 신판 1998년)
- 『로고테라피: 인간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에 기반한 심리 치료』(쿠사노 토모히로, 토쿠나가 시게코 번역, 아카사카 모모코 번역 협력, 신교출판사,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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