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레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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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레마섬은 에스토니아 서부에 위치한 섬으로, 에스토니아어로는 사레마, 핀란드어로는 사렌마라고 불리며 '섬 땅'이라는 뜻을 지닌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바이킹 시대에는 해적 소굴로 악명이 높았다. 1227년 리보니아 십자군에 정복되어 외젤비크 주교령이 설치되었고, 이후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제국을 거쳐 1918년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1939년 소련에 조차되었고, 1940년 소련에 편입되었다가, 1941년 나치 독일의 침공을 겪은 후 1991년 에스토니아 독립과 함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사레마섬은 석회암 지형과 숲, 다양한 동식물, 카리 크레이터, 팡가 절벽 등의 자연 경관을 자랑하며, 특히 운석 충돌로 생성된 칼리 크레이터는 독특한 지형으로 유명하다. 에스토니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관광과 노간주나무 공예품이 주요 산업이다. 본토와는 페리, 항공편으로 연결되며, 교량 또는 터널 건설도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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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레마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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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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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발트해 |
군도 | 서에스토니아 군도 |
국가 | 에스토니아 |
행정 구역 | 사레 주 |
지리 | |
면적 | 2673 km² |
인구 통계 | |
인구 | 31,435 명 (2020년 1월 기준) |
인구 밀도 | 11.7 명/km² |
기타 정보 |
2. 명칭
'사레마'는 에스토니아어 명칭이며, 핀란드어로는 '사렌마'(Saarenmaa)라고 부르는데, 이를 직역하면 '섬 땅'이란 뜻이 된다.[45] 고대 스칸디나비아 언어에서 사레마섬은 '에이시슬라'(Eysysla)로 불렸으며, 아이슬란드 사가에서는 '외이시슬라'(Eysýsla)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섬 지역'이란 뜻이며, 핀란드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이시슬라'란 말은 곧 사레마섬을 가리키는 다른 언어의 어원이 되었는데, 덴마크어로는 '외셀'(Øsel), 독일어와 스웨덴어로는 '외젤'(Ösel), 고틀란드어로는 '외슬'(Oysl), 라틴어로는 '오실리아'(Osilia)가 되었다. 라트비아어에서는 '삼살라'(Sāmsala)라 부르는데 '사미족의 섬'이란 뜻이다. 한편 고대 문학과 지도상에 등장하는 섬인 툴레가 오늘날의 사레마섬을 가리킨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에스토니아의 중세 학자 라울 탈비크와 렌나르트 메리 전 대통령이 이 설을 밀었다.[46][47][48][49]
3. 역사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사레마섬 지역은 적어도 기원전 5000년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다.[8]
12세기 후반 사레마섬 주민들은 해적 행위에 종사하며 덴마크와 스웨덴의 연안부를 약탈했다.[24] 리보니아의 헨리 연대기는 16척의 배와 500명의 사레마섬 해적이 덴마크에 속해 있던 현재의 스웨덴 남부 지역을 약탈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게스타 다노룸 XIV권에서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1170년 외란트에서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가 쿠로니아와 사레마섬 해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대를 동원한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1187년에는 카렐리안족, 쿠로니아인과 함께 스웨덴 도시 시그투나를 공격하여 스웨덴 대주교 요한을 살해하기도 했다.
1939년 9월 28일, 폴란드 침공 중 에스토니아는 소련과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사레마섬 및 히우마섬에 해군 기지와 항공 기지를 건설할 권리를 얻었다.[28]
14~16세기, 사레마섬 주민들은 발트해 주변 지역으로 재정착하기 시작했고, 리보니아 해안에 마을을 건설하기도 했다. 사레마섬은 대부분 외젤-비크 주교령이 직접 통치했고, 일부는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봉토로 주어졌다. 1559년, 주교령과 사레마섬은 덴마크에 매각되어 덴마크령 에스토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1570년부터 1645년까지 섬 전체가 덴마크 소유였다.
독일인의 지배는 1557년까지 이어졌고, 이후 덴마크에 매각되었다. 1645년부터 1710년까지 스웨덴의 지배하에 놓였고, 대북방 전쟁 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23]
소련 시대의 사레마섬은 "국경의 섬"으로 국경 지대에 지정되었고, 연안부 주민들은 추방되거나 감시되었다. 섬을 방문하려면 에스토니아인이라도 경찰, 경비원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32] 에스토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후 사레마섬은 발전하여, 쿠레사레 성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 풍경과 자연으로 알려진 관광지가 되었다.[23]
3. 1. 고대와 중세
바이킹 시대의 사가에는 사레마섬 원주민들과 바이킹 간의 잦은 충돌이 기록되어 있다. 사레마섬은 해적 소굴로 악명이 높았으며, 동부 바이킹의 침공을 받기도 했다.[50] 리보니아의 헨리 연대기에 따르면, 500명의 외셀인과 16척의 배로 구성된 사레마섬 주민들이 오늘날 스웨덴 남부 지역을 침략했고, 이 지역은 나중에 덴마크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기 1000년경에는 아이슬란드의 군나르 하문다르손이 바이킹을 이끌고 사레마섬(외시슬라섬)을 공격, 할그리무르라는 전사에게서 마법의 창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227년, 리보니아 십자군 시기 리보니아 기사단이 사레마섬을 정복하고 외젤비크 주교령을 설치했으나, 섬 주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25] 1236년 사울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이 리보니아 기사단을 격파하자 사레마섬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리보니아 기사단장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기사단은 튜턴 기사단에 흡수되었다. 기사단의 통치가 강화되면서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카르마, 카리아, 키헬코나, 무후, 푀이데, 퓌하, 발리알라 등지에 교회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380년에는 튜턴 기사단이 쿠레사레성을 건설하여 외젤비크 주교에게 바쳤는데, 이 요새는 현재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요새 중 하나이다.
3. 2. 근대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에 따라 사레마섬은 덴마크 왕국에서 스웨덴의 소유지로 넘어갔으며, 스웨덴어식으로 '외셀' (Ösel)이라 불리게 되었다.[23]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리보니아 공국 전역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가 리보니아현에 속하게 되었다.[23] 1840년 아렌스부르크 (지금의 쿠레사레)에 스파가 처음 문을 열면서 러시아인들과 발트 지역 독일인들의 휴양지로 변모하였다.[27] 오늘날 사레마섬의 스파는 에스토니아의 다른 지역보다 더 많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7년 10월, 독일제국군은 에스토니아 연안 섬을 침공하여 1918년 11월 종전 시까지 점령하였다.[23] 이후 사레마섬은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섬 주민 대다수인 발트 독일인들이 독일로 이주하였다. 1939년 9월 28일 소련과의 상호 원조 조약으로 소련은 사레마섬 및 인접한 히우마섬을 조차하여 해군 기지, 항공 기지를 건설할 권리를 얻었다.[28] 1940년 6월 소련군이 에스토니아 전역을 점령하면서 사레마섬에 처음 진주하였고, 같은 해 소련에 정식 편입되었다.[29] 1941년 베오울프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면서 사레마섬도 함께 침공당했다. 이 과정에서 섬 주민들은 소련 지지자와 독일 지지자로 나뉘었다.[30] 1944년 10월~11월 경 독일군의 패퇴로 소련군이 다시 진주하였다. 같은 해 사레마섬 남부 술베 반도의 테흐마르디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군의 야전은 섬에서 벌어진 가장 처참한 전투로 꼽히며, 양군 병사 중에는 에스토니아 출신자가 포함되어 있었다.[31]
전쟁이 끝난 1946년 소련 군 당국은 사레마섬을 제한구역으로 설정하여 현지인 외 에스토니아인과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했다.[32] 당시 아스테 마을에 '아스테 항공기지'를 건설해 소련 공군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89년 접근제한구역이 해제되었고, 1991년 8월 에스토니아가 소련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4. 지리
사레마섬은 리가만과 발트해 사이의 주요 섬 중 하나로, 섬 남쪽에는 리가만으로 향하는 주요 항로인 이르베 해협이 있으며, 그 옆에는 사레마섬 최남단인 서르베 반도가 있다. 중세 시대 섬사람들은 해협을 건너 리보니아 연안에 어촌을 형성했는데, 그중 가장 큰 마을이 피트라그스였다. 과거에는 말을 타고 육지를 통해 멀리 돌아가야 했지만, 현재는 콜카, 사우나그스, 마지르베 등 인근 항구에서 배를 이용해 해협을 건너는 것이 더 쉬워졌다.
약 1만 년 전, 발트해가 발트 얼음호수였을 때 에스토니아 서부 연안에 여러 섬이 융기하면서 사레마섬이 처음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지각 융기는 현재도 연간 2mm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당시 형성된 섬들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저지대 평원으로, 평균 고도는 해발 15m였다. 이 석회암 지반은 사레마섬에 절벽과 채석장 등 다양한 지형을 만들었는데, 무스턀라, 니나세, 풀리, 위구, 카우가투마 등지에 석회암 지형이 분포해 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54m이다. 섬에는 숲이 우거진 지형이 많으며, 섬을 대표하는 나무는 노간주나무이다. 백운암, 석회암, 치유 진흙, 광천수, 내화 점토, 모래, 자갈은 주요 지역 자원이며, 이 중 백운암이 가장 유명하다.[13]
4. 1. 자연
사레마섬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와 다양한 토양 덕분에 풍부한 식물상을 자랑하며, 에스토니아에서 발견되는 관속식물 종의 80%에 해당하는 1,200여 종이 이곳에서 자생한다. 특히, 지역 고유종 중 약 120종은 희귀종으로 특별 보호를 받고 있다. 봄 습지에서 주로 발견되는 희귀한 작은 꽃인 Rhinanthus osiliensis가 대표적인 고유종이다.[10] 에스토니아에서 발견되는 36종의 난초 중 35종이 사레마섬과 인근 섬에서 발견될 정도로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널리 분포한다.섬 전체 면적의 40% 이상이 숲으로 덮여 있으며, 대부분은 혼합림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이전의 온화한 기후 시대에 형성된 활엽수(낙엽수) 숲도 발견된다.[10]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숲 초원이 흔했지만, 점차 일반적인 숲으로 바뀌었다. 얇은 토양과 왜소한 식물이 덮인 석회암 지대인 알바르 역시 과거 사레마섬의 독특한 풍경이었으나, 현재는 쇠퇴하고 있다. 사레마섬의 자연 보존 계획은 가장 크고 특이한 알바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레마섬에는 곤충부터 물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희귀 야생 생물이 서식한다. 구름 아폴로 나비와 로마 달팽이는 크기가 작은 보호종에 속한다.[10] 해안 지역은 물개 서식지로 유명하며, 섬 서부 및 남부 해안의 작은 섬에는 토착 회색 물범의 영구 휴식 지역 세 곳이 발견된다. 최근 회색 물범의 개체수는 약간 증가하고 있다. 고리 무늬 물개는 사레마섬 해안 수역 어디에서나 발견되지만, 수줍음이 많아 정확한 개체수 파악은 어렵다.
철새 이동 경로인 동대서양 철새 노선에 위치한 사레마섬은 매년 봄과 가을 수십만 마리의 철새가 방문하는 곳이다. 흰뺨기러기, 고니, 큰고니, 솜털오리, 넓적부리 등 다양한 조류 종이 보호받고 있다.[10] 그러나 전체적으로 섬의 야생 생물 종은 본토보다 약간 빈약한 편이다. 유럽 두더지, 족제비, 유럽 수달은 발견되지 않으며, 유라시아 스라소니와 불곰은 드물게 방문한다.[10]
소련 시대에 사레마섬은 국경 섬으로서 출입이 제한되어 개발이 늦어졌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재독립 후에는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남아 있다.[33] 쿠레사레 북동쪽 약 15km 지점에는 운석 충돌로 형성된 카리 크레이터가 있으며, 움푹 들어간 곳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다.[34]
사레마섬 북부의 팡가 절벽은 실루리아기에 형성된 높이 약 21m의 절벽으로, 석회암, 돌로마이트, 이회암 등이 층을 이루고 있다.[36]
사레마섬 남동부의 Laidevahe Nature Reserve영어와 서부의 Vilsandi영어 섬 인근 지역은 람사르 협약 등록지로,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37][38]
4. 2. 칼리 운석 충돌구

사레마섬에는 칼리 충돌구(Kaali)라고 부르는 운석 충돌구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총 아홉 개의 충돌구가 발견되었으며 가장 큰 것은 지름이 110m, 깊이 22m에 달하며, 물이 들어차면서 '칼리 호수' (Kaali järv)라고도 부른다. 칼리 일대에 충돌한 운석의 무게는 20~80톤, 충돌속도는 10km/s~20km/s로 추정된다. 대기권에 진입할 당시 5km~10km 고도에서 조각난 채로 지면에 충돌하였고, 그 중 가장 큰 조각이 지금의 칼리호수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여덟 개의 작은 충돌구는 지름 12m~40m, 깊이 1m~4m로 다양하며 칼리 호수로부터 1km 이내에 분포해 있다.[52][53]
충돌구의 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5000년에서 3000년경이라는 설이 일반적인 측정연대다.[52] 다만 기원전 745년 경에서 575년경으로 비교적 최근에 형성되었다는 시각도 있다.[53] 충돌 에너지는 총 80 TJ (20kt TNT)로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비슷하며, 충돌지점으로부터 6km 이내 반경의 숲을 태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사레마섬의 독특한 지형 중 하나였던 만큼, 충돌구에 관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53]
5. 인구와 경제
에스토니아인이 사레마섬 인구의 97%를 차지하며 대다수를 이룬다. 러시아인은 2% 정도이며, 핀란드인 등 기타 소수 민족은 전체 인구의 3% 미만이다.[14][23] 사레주와 쿠레사레시는 에스토니아 전체와 비교해 평균 연령이 젊고, 특히 은퇴 인구가 적다.[14]
사레마섬은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중 하나인 발트해 지역 중심부에 위치해 경제적 지위도 주목받고 있다. 쿠레사레 공항과 룸사레 항구가 재건되고, 사레마섬과 에스토니아 본토 간의 현대적인 페리 운항과 통신 시설이 발달하면서 교통 및 통신 편의가 크게 향상되었다.[14][54]
사레마섬은 에스토니아의 주요 관광지로, 외국인 관광객의 35%, 내국인 관광객의 95%가 다시 방문할 의사를 밝혔다.[14] 노간주나무로 만든 민예품은 사레마섬 특산품으로, 노간주나무는 억세고 강인한 섬 주민의 기질을 비유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43] 종교는 개신교 신자가 많지만, 동방 정교회, 침례교 신자도 있다.[23]
6. 교통
본토와의 교통은 주로 페리 운항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가까운 교통편은 본토의 비르추에서 무후섬의 쿠이바스투까지 TS 래바드사의 페리가 운항하는 것이다. 무후섬에서 사레마섬까지는 '배이나탐 둑길'(Väinatamm)로 연결되어 있다. 사레마섬의 서루에서 트리기 사이를 잇는 페리도 운항된다. 로마사레에서 아브루카섬까지 가는 배편도 있다. 겨울에는 연안이 얼기 때문에 본토와 무후섬·사레마섬, 히우마섬이 아이스 로드로 연결되어 쉽게 이동할 수 있다.[43] 탈린, 패르누, 타르투 등 본토에서 출발하여 비르추에서 페리를 타고 무후섬을 거쳐 섬에 도착하는 버스편도 있다.
섬내 최대 도시인 쿠레사레에는 쿠레사레 공항이 있으며, 탈린까지 가는 NyxAir 사의 항공편이 있다. Diamond Sky가 운항하는 루흐누섬, 패르누행 정기 운항편도 있다.[44]
현재 사레마섬과 본토를 잇는 방안으로 교량 건설 및 터널 건설이 계획 및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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