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미 요시야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토미 요시야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와 에도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안도받았으나, 오다와라 정벌에서 영지를 몰수당하고 감봉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영지를 늘렸다. 1603년 사망했으며, 그의 가독은 아들 사토미 타다요시가 계승했다.
1573년(텐쇼 원년) 안방국(安房国)의 다이묘(大名) 사토미 요시요리(里見義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센쥬마루(千寿丸)였다.
사토미 요시야스|里見義康일본어는 리미 기요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마사키 토키시게의 딸인 룡운인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슬하에 장남 리미 다다요시와 리미 다다타카를 두었다.
2. 생애
1587년(텐쇼 15년), 아버지 요시요리의 죽음으로 15세에 가독을 상속받아 사마노카미(左馬頭), 사에몬도쿠(左衛門督) 등의 관직을 지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요시야스에게 사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은 닛타 씨(新田氏)를 조상으로 하는 동족이며 친척이라는 내용의 기청문을 보냈으나, 이 고문서는 다키가와 쓰네아키(滝川恒昭)에 의해 위서일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1591년 6월부터 11월까지 오카모토 성(岡本城)에서 다테야마 성(館山城)으로 이전하였다.
1588년 11월, 마스다 나가시게(増田長盛)의 토리츠기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연락하여, 안방국(安房国), 카즈사국(上総国) 두 국과 시모우사국(下総国) 일부를 안도(安堵)받았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영지를 몰수당하고 안방 4만 석(차출검지(差出検地)에 의한 석고)으로 감봉되었다. 그 원인은 종래에는 지각이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사토미 씨가 보호하고 있던 코유키 곤방·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의 유자(遺児) 요리준을 옹립하여, 호죠씨에게 빼앗긴 옛 영토 회복을 꾀하고, 미우라로 해상 진군하여 가마쿠라 곤방가(鎌倉公方家) 재흥을 표방하며 독자적인 금제를 발했던 것이, 사전(私戦)을 금한 소부지령(惣無事令) 위반으로 문제시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 사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중재하였으며, 이후 사토미 씨는 도쿠가와씨(徳川氏)에 접근하게 된다.
1590년 10월 상락(上洛)했으며, 1591년 3월 종오위하(従五位下) 시종(侍従)·안방 수(安房守)에 서임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았다.
1591년 7월 귀국한 요시야스는 쿠누기 일기(九戸一揆) 진압을 위해 도호쿠(東北)로 출병했고, 9월에 귀국하였다. 같은 시기 마스다 나가시게(増田長盛)가 안방국(安房国)에서 검지(検地)를 실시했는데, 이는 본격적인 타이코 검지(太閤検地)가 아니라 마을이나 지행자(知行者)로부터 서류를 받아 작성하는 차출검지(差出検地)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이에야스를 수행하여 도해(渡海)하지 않고 히젠국(肥前国)나고야 성(名護屋城)에 체재했다.
1597년 마스다 나가시게에 의해 안방국(安房国)에서 처음으로 석고제(石高制)에 의한 본격적인 타이코 검지(太閤検地)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지행할당(知行割)이 이루어졌고, 석고제에 의한 지행제도가 성립되었다. 석고는 9만 1천 석으로 증가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에 향했으나, 세키가하라로 향하는 군대에는 편성되지 않고, 유키 슈코의 부하 군대로서 우쓰노미야 성의 수비를 담당하여 우에스기 카게카쓰의 남하를 저지했다.
전후, 공훈에 대한 상으로 히타치국가시마군 3만 석 이상을 증가받아 총 12만 석이 넘는 영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가 무사시에 열리자 국지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으나, 1603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가독은 10세의 적남인 우메즈루마루(후의 타다요시)가 계승했다.
2. 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년(텐쇼 원년) 안방국(安房国)의 다이묘(大名) 사토미 요시요리(里見義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센쥬마루(千寿丸)였다.
1587년(텐쇼 15년), 아버지 요시요리의 죽음으로 15세에 가독을 상속받아 사마노카미(左馬頭), 사에몬도쿠(左衛門督) 등의 관직을 지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요리야스에게 사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은 닛타 씨(新田氏)를 조상으로 하는 동족이며 친척이라는 내용의 기청문을 보냈으나, 이 고문서는 다키가와 쓰네아키(滝川恒昭)에 의해 위서일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1591년 6월부터 11월까지 오카모토 성(岡本城)에서 다테야마 성(館山城)으로 이전하였다.
2. 1. 1. 도요토미 정권과의 관계
1588년 11월, 아버지 요리요리에 이어 마스다 나가시게(増田長盛)의 토리츠기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연락을 취했고, 안방국(安房国), 카즈사국(上総国) 두 국과 시모우사국(下総国) 일부를 안도(安堵)받았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영지를 몰수당하고 안방 4만 석(차출검지(差出検地)에 의한 석고)으로 감봉되었다. 그 원인은 종래에는 지각이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사토미 씨가 보호하고 있던 코유키 곤방·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의 유자(遺児) 요리준을 옹립하여, 호죠씨에게 빼앗긴 옛 영토 회복을 꾀하고, 미우라로 해상 진군하여 가마쿠라 곤방가(鎌倉公方家) 재흥을 표방하며 독자적인 금제를 발했던 것이, 사전(私戦)을 금한 소부지령(惣無事令) 위반으로 문제시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 사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중재하였으며, 이후 사토미 씨는 도쿠가와씨(徳川氏)에 접근하게 된다.
1590년 10월 상락(上洛)했으며, 1591년 3월 종오위하(従五位下) 시종(侍従)·안방 수(安房守)에 서임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았다.
1591년 7월 귀국한 요리야스는 쿠누기 일기(九戸一揆) 진압을 위해 도호쿠(東北)로 출병했고, 9월에 귀국하였다. 같은 시기 마스다 나가시게(増田長盛)가 안방국(安房国)에서 검지(検地)를 실시했는데, 이는 본격적인 타이코 검지(太閤検地)가 아니라 마을이나 지행자(知行者)로부터 서류를 받아 작성하는 차출검지(差出検地)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이에야스를 수행하여 도해(渡海)하지 않고 히젠국(肥前国)나고야 성(名護屋城)에 체재했다.
1597년 마스다 나가시게에 의해 안방국(安房国)에서 처음으로 석고제(石高制)에 의한 본격적인 타이코 검지(太閤検地)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지행할당(知行割)이 이루어졌고, 석고제에 의한 지행제도가 성립되었다. 석고는 9만 1천 석으로 증가되었다.
2. 2. 에도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에 향했으나, 세키가하라로 향하는 군대에는 편성되지 않고, 유키 슈코의 부하 군대로서 우쓰노미야 성의 수비를 담당하여 우에스기 카게카쓰의 남하를 저지했다.
전후, 공훈에 대한 상으로 히타치국가시마군 3만 석 이상을 증가받아 총 12만 석이 넘는 영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가 무사시에 열리자 국지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으나, 1603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가독은 10세의 적남인 우메즈루마루(후의 타다요시)가 계승했다.
3. 가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