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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장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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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지장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2006년 개금 시 발견된 복장유물을 포함한다. 불상은 자연스러운 자세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제작된 불상 양식을 보여주며,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장유물로는 저고리, 은제후령통, 다라니 등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은으로 제작된 후령통은 1639년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후령통과 유사하여 17세기 전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과 복장유물은 조선시대 불교 의례와 복식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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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장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지장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한자 표기地藏寺 木造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국가서울특별시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426
지정일2018년 8월 9일
주소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소유자대한불교호국지장사
수량불상 1구, 복장 1건

2. 역사적 배경

2. 1. 불상의 조성 배경

호국지장사 대웅전에는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2006년 개금 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불상 양식과 복장유물을 통해 17세기 초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숙여 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얼굴과 신체의 비례는 1:3.1로, 17세기 전반 이후에 제작된 불상과 달리 인체의 비례와 유사한 자연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螺髮)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로 표현되고, 육계 밑에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가 있지만, 1600년대 이후에 제작된 불상에서 주로 나타나는 원통형 정상계주(頂上髻珠)는 표현되지 않았다. 부처의 상호는 원만상이며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고, 코는 콧날이 곧게 뻗었으며, 입은 살짝 미소를 보이고 있다.

불상의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접힌 점이나 이목구비의 표현에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특히, 하반신의 대의처리는 다섯 겹의 주름 가운데 가장 안쪽 주름과 두 번째 주름이 정면으로 펼쳐지고, 나머지 주름은 물결이 일렁이듯 자연스럽게 접혀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불교 신앙을 장려하기 위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2. 복장유물의 발견과 의미

2006년 개금(改金) 작업 중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1] 발견된 복장유물은 1600년대 중반 이전의 저고리, 은제후령통 일괄, 황지주사(黃紙朱寫)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의 다라니 등이다.[1]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은 발견되지 않아 불상 및 후령통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불상 및 복장유물의 양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1]

호국지장사 후령통은 은으로 제작되었으며, 원통형 몸체와 덮개, 내장된 팔엽연화, 외면에 붙었던 사방경으로 구성되어 있다.[1] 이는 조선시대 후령통 및 봉안방식을 따르는 전형적인 예시이다.[1] 후령통 표면에는 사방주(四方呪)와 오종자(五輪種子)가 이중으로 쓰여 있으며, 덮개에는 후혈(喉穴)이 있어 오색선이 밖으로 나와 후령통과 사방경을 감는 구조이다.[1] 직경 3.9cm인 팔엽연화는 은판 2개로 제작되었으며, 후령통 내 오방병(또는 五寶甁) 위에 놓였다.[1]

호국지장사 후령통은 1639년에 수연(守衍)이 제작한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은제후령통 및 은제팔엽연화와 형태, 제작수법이 매우 유사하여, 1639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이는 불상의 제작 연대 추정(16세기 말 ~ 17세기 초)과도 일맥상통한다.[1]

이 복장유물은 조선시대 불교 의례와 복식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1] 비록 조성발원문을 비롯한 완전한 일습은 아니지만, 불상과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될 가치가 충분하다.[1]

3. 불상의 양식적 특징

3. 1. 전체적인 형태

3. 2. 세부 묘사

3. 3. 옷주름 표현

4. 복장유물

2006년 개금 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국가 민속자료적 가치가 있는 저고리(1600년대 중반 이전)가 발견되어 당시 복식 연구에 기여한다.[1] 또한 황지주사(黃紙朱寫)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의 다라니가 발견되었다.[1]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은 발견되지 않아 불상 및 후령통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불상 및 복장유물의 양식을 통해 추정하고 있다.[1]

4. 1. 후령통(喉鈴筒)

은으로 제작된 희귀한 사례로, 1639년에 제작된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은제 후령통과 형태 및 제작 기법이 유사하다.[1] 후령통 내부에는 팔엽연화(八葉蓮花)가 발견되었다.[1]

후령통은 원통형 몸체와 덮개, 내장된 팔엽연화, 외면에 붙었던 사방경으로 구성되어 있다.[1] 불복장(佛腹藏) 봉안 의식은 『조상경(造像經)』에 의해 진행되는데, 금강산 유점사에서 1824년에 간행한 『조상경』의 불복(佛腹)에 내장하는 물목에 따라 불상과 복장유물도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후령통 표면에는 처음 봉안될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사방주(四方呪)와 후대에 다시 쓴 오종자(五輪種子)가 이중으로 쓰여 있다. 오륜종자는 4방 종자만 썼는데, 사방경이 붙어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중앙을 상징하는 '캄'자는 바닥에 쓰여 있다.[1] 덮개는 [󰠑󰠚󰠘󰠚󰠓] 꼴의 후혈(喉穴)이 있는 형태인데, 후혈은 9줄의 음각선을 그린 판재를 말아서 덮개 중앙에 끼워 안에서 방사선 모양으로 접어 고정시켰다. 이 후혈로 후령통 내 오보병을 감았던 오색선이 나와 후령통과 사방경을 감게 된다.[1] 표면에는 진심종자(眞心種子: 훔 드라 흐리 아 밤)를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사방경은 동방 사각경, 서방 원경, 남방 삼각경, 북방 반월경으로 후령통 표면에 오색선으로 감았다.[1] 몸통과 붙었던 부분은 흑화되지 않아 은색 그대로이며, 오색선이 감겨졌던 면에는 실 흔적이 남아 있다.

직경 3.9cm인 팔엽연화는 후령통 내 오방병(또는 五寶甁) 위에 올렸던 팔엽주(八葉珠)로 2개의 은판으로 제작한 것이다. 『조상경』에 보이는 ‘팔엽대홍련지도’는 대홍련이 아니라 팔엽개(八葉蓋)라 했는데, 이 도안대로 판재를 오린 다음 끝을 접은 후 뒷면이 천원(天圓)으로서 후령통을 덮는다고 했다. 때문에 후령통 외면에 올려진 예도 있고, 호국지장사 경우처럼 후령통 안에 덮여진 예의 2종류가 있다. 오색선으로 감은 후령통은 황초폭자로 사서 불복장에 봉안하게 된다.[1]

후령통의 제작 기법을 보면 몸체와 뚜껑을 얇은 은판재로 말아서 잘 접합되도록 상하 [ㄷ]자형으로 돌출되게 한 다음 땜한 것인데, 이런 방식은 이성계 발원 은제사리기(1391)의 원통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통을 만드는 전통기법이다. 밑판은 원형 은판을 오려서 통 밖에서 은땜하여 붙인 것이다.[1]

호국지장사 후령통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령통 및 봉안방식을 따르고 있다. 고려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물을 보면 목제후령통과 청동방울(喉鈴), 팔엽연화가 다른 모양인데 팔엽연화는 마치 스님의 가사장식과 같은 형태이다. 조선후기에 다시 봉안(1611년 추정)된 4개의 사방 후령통 및 팔엽연화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령통 모양이며, 이런 후령통은 이미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고려 아미타불좌상의 후령통에서도 출현 한 바 있다.[1]

조선 15세기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이나 수덕사 근역박물관 소장 후령통은 호국지장사 후령통과 달리 팔엽연화가 외면에 있는 경우이다. 조선후기 17~18세기의 후령통들인 송광사 사천왕상 후령통이나 영원사 목조여래좌상 후령통, 수덕사 목조여래삼불좌상 후령통, 상정(尙淨) 작인 부천 석왕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회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개인소장 후령통 등을 보면 호국지장사 후령통 발견 당시의 원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중 1639년에 수연(守衍)이 제작한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은제후령통 및 은제팔엽연화는 호국지장사 후령통과 형태, 제작수법이 똑같아서 주목된다. 전북 남원에서 조성된 수덕사 불상의 팔엽연화 역시 은판 2장으로 만든 것인데, 팔화형판의 끝을 오므려서 약간 볼록한 원형판을 고정시킨 모양이다. 따라서 호국지장사 후령통은 1639년을 전후한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호국지장사 후령통은 형태나 은제라는 점, 제작방식 등에서 조선시대 복장유물의 좋은 예로 자료적 가치가 있으나 조성발원문이나 후령통 내부의 오보병, 오색선이 없고, 후령통을 감사는 황초폭자도 남아 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1]

4. 2. 기타 복장유물

2006년 개금 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국가 민속자료적 가치가 있는 저고리(1600년대 중반 이전)가 발견되어 당시 복식 연구에 기여한다.[1] 또한 황지주사(黃紙朱寫)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의 다라니가 발견되었다.[1]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은 발견되지 않아 불상 및 후령통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불상 및 복장유물의 양식을 통해 추정하고 있다.[1]

5. 지정 가치 및 의의

서울 지장사 목조여래좌상은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은 발견되지 않았으나,[1] 불상의 뛰어난 양식과 은제 후령통의 제작 방식 등에서 조선시대 복장유물(腹藏遺物)의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1] 불상과 후령통은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1]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숙여 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얼굴과 신체의 비례는 1:3.1로, 17세기 전반 이후에 제작된 불상과 달리 인체의 비례와 유사한 자연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1] 호국지장사 목조여래좌상은 얼굴의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오른쪽 어깨와 하반신에 걸친 대의자락에 자연스러운 볼륨감이 표현된 점에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후령통(喉鈴筒)은 흔치 않게 은으로 제작되었으며, 원통형 몸체와 덮개, 내장된 팔엽연화, 외면에 붙었던 사방경으로 구성되어 있다.[1] 후령통 표면에는 처음 봉안될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사방주(四方呪)와 후대에 다시 쓴 오종자(五輪種子)가 이중으로 쓰여 있다.[1] 호국지장사 후령통은 형태나 은제라는 점, 제작방식 등에서 조선시대 복장유물의 좋은 예로 자료적 가치가 있다.[1] 1639년에 수연(守衍)이 제작한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은제후령통 및 은제팔엽연화는 호국지장사 후령통과 형태, 제작수법이 똑같아서 주목된다.[1]

불상과 복장유물은 모두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식을 보이며, 복장유물과 불상의 훌륭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비록 조성발원문을 비롯한 온전한 일습은 아니지만,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서 함께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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