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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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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구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사인으로서 종군하여 장군으로 활약하며 항우와 종리말을 공격한 공로로 광평후에 봉해졌다. 고제의 명으로 왕흡과 함께 왕릉과 연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홍려를 역임했다. 혜제 7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경(敬)이며 작위는 아들 설산이 이었다.

2. 생애

설구는 사인(舍人)으로서 풍(豊) 땅에서부터 종군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렀다.[1] 낭중(郞中)이 되어 한나라로 들어가고, 장군이 되어 항우종리말을 친 공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2년) 12월 갑신일에 광평후[1]에 봉해지고 식읍 4,500호를 받았다.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고제의 명령으로 장군으로서 왕흡과 함께 관문을 나가 남양군에서 독자적 세력을 이끄는 왕릉과 합류하여 패에 있는 태공과 여후를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항우가 이를 듣고 양가에서 저지하게 해 더 나아가지 못했다.[2]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전객이 됐다.[3]

혜제 7년(기원전 188)에 죽으니 시호(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설산이 이었다.

2. 1. 초기 활동

설구는 사인(舍人)으로서 풍(豊) 땅에서부터 종군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렀다.[1] 낭중(郞中)이 되어 한나라로 들어가고, 장군이 되어 항우종리말을 친 공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2년) 12월 갑신일에 광평후[1]에 봉해지고 식읍 4,500호를 받았다.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고제의 명령으로 장군으로서 왕흡과 함께 관문을 나가 남양군에서 독자적 세력을 이끄는 왕릉과 합류하여 패에 있는 태공과 여후를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항우가 이를 듣고 양가에서 저지하게 해 더 나아가지 못했다.[2]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전객이 됐다.[3]

혜제 7년(기원전 188)에 죽으니 시호(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설산이 이었다.

2. 2. 광평후 책봉

설구는 사인(舍人)으로서 풍(豊) 땅에서부터 종군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렀다.[1] 낭중(郞中)이 되어 한나라로 들어가고, 장군이 되어 항우종리말을 친 공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2년) 12월 갑신일에 광평후[1]에 봉해지고 식읍 4,500호를 받았다.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고제의 명령으로 장군으로서 왕흡과 함께 관문을 나가 남양군에서 독자적 세력을 이끄는 왕릉과 합류하여 패에 있는 태공과 여후를 맞아들이려 했다.[2] 그러나 항우가 이를 듣고 양가에서 저지하게 해 더 나아가지 못했다.[2]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전객이 됐다.[3]

2. 3. 왕릉과의 연합 시도

2. 4. 대홍려 역임

설구는 사인(舍人)으로서 풍(豊) 땅에서부터 종군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렀다. 낭중(郞中)이 되어 한나라로 들어가고, 장군이 되어 항우종리말을 친 공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2년) 12월 갑신일에 광평후[1]에 봉해지고 식읍 4,500호를 받았다.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고제의 명령으로 장군으로서 왕흡과 함께 관문을 나가 남양군에서 독자적 세력을 이끄는 왕릉과 합류하여 패에 있는 태공과 여후를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항우가 이를 듣고 양가에서 저지하게 해 더 나아가지 못했다.[2]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전객이 됐다.[3]

혜제 7년(기원전 188년)에 죽으니 시호(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설산이 이었다.

2. 5. 사망과 시호

사인(舍人)으로서 풍(豊) 땅에서부터 종군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렀다. 낭중(郞中)이 되어 한나라로 들어가고, 장군이 되어 항우종리말을 친 공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2년) 12월 갑신일에 광평후[1]에 봉해지고 식읍 4,500호를 받았다.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고제의 명령으로 장군으로서 왕흡과 함께 관문을 나가 남양군에서 독자적 세력을 이끄는 왕릉과 합류하여 패에 있는 태공과 여후를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항우가 이를 듣고 양가에서 저지하게 해 더 나아가지 못했다.[2]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전객이 됐다.[3]

혜제 7년(기원전 188)에 죽으니 시호(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설산이 이었다.

3. 평가

4. 출전

사마천의 『사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에 등장한다.

참조

[1] 문서 당시로는 조 (전한)|조나라 거록군의 속현
[2] 서적 고조본기제8
[3] 서적 백관공경표제7하
[4] 문서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5]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6] 서적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7] 서적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8] 서적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9] 서적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10]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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