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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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신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국자시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몽골과의 외교에서 활약했다. 그는 1216년 함풍현감무로 시작하여 북계분대어사, 용주 수령 등을 역임했으며, 1232년 몽골에 파견되어 표문과 공물을 바쳤다. 이후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242년에는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기도 했다. 1251년 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 설신의 아들 설공검은 도첨의중찬을 지냈으며, 설인검은 평장사를 역임했다.
설신은 20세에 국자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31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2] 1216년 함풍현감무를 시작으로 최우에게 포상을 받기도 하고, 대관승, 장야승, 상승직장, 비서랑, 당후관, 감찰어사 등을 역임했다.[3] 1226년에는 북계분대어사에 임명되었고, 1227년에는 용주 수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렸다.[2]
김구가 쓴 〈설신 묘지명〉[12]이 있으며, 이 자료는 김용선이 엮고 옮긴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 (상)》(개정3판)에 현대어 번역본으로 실려 있다.
[1]
서적
고려사
1251-06-14
2. 생애
1230년 이부원외랑으로 옮긴 후, 몽골 침입 시기에는 전라도안렴사 한윤혁을 대신하여 군사를 감독하기도 했다.[2] 1232년에는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살리타이와 관련된 일화도 전해진다.[5]
1234년 충주목 부사를 거쳐 호부시랑, 예부시랑을 역임하고, 경상도안찰사로 나가 2년간 재임했다.[2] 이후 서북면병마사로 부임했다가 좌간의대부로 승진했음에도 2년간 더 머물렀다.[2]
중앙으로 돌아온 후, 1242년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홍지경 등 37명을 급제시켰다.[7] 판예빈성사, 삼사사, 한림시독학사를 거쳐 1243년에는 동북면병마사로 다시 나갔다.[2] 이후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좌유덕, 좌복야 등을 역임했다.[2]
1251년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6월 14일 병으로 사망하였다.[1]
2. 1. 초기 관직 생활
20세에 시(詩)와 부(賦)로 국자시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고, 31세에 과거에 급제했다.[2]
1216년 함풍현감무(咸豊縣監務)로 벼슬을 시작했는데, 다스린 업적이 으뜸으로 알려져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최우에게 포상받아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가 되었다.[3]
이후 대관승(大官丞), 장야승(掌冶丞), 상승직장(尙乘直長), 비서랑(秘書郞), 당후관(堂後官),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3]
2. 2. 북계분대어사 및 지방관 시절
1226년(고종 13년) 북계분대어사(北界分臺御史)에 임명되었다.[3]
이듬해인 1227년(고종 14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서 용주(龍州)의 수령이 되었는데, 잘 다스렸으므로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으로 옮겼다.[2]
2. 3. 대몽 외교 활동
1230년(고종 17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으로 옮겼고, 이듬해 내시(內侍)에 속하게 되었다. 이 해 몽골이 침입했으나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한윤혁이 연약하여 병사를 능히 감독하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설신으로 그를 대신하게 했다.[2]
1232년(고종 19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대장군(大將軍) 조숙창[3]과 함께 몽골에 파견되어, 신하를 칭하는 표문과 공물을 바쳤다.[4] 그 후 대부소경(大府少卿)·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쳤다. 이 때 원나라 장수 살리타이가 설신을 붙잡아 두고 송경에 와서 강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고자 했는데 설신은 “우리나라에 '남의 나라의 대신으로 남쪽 강을 건너는 이는 불길하다'고 전해 오는 말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살리타이는 이 말을 듣지 않고 한양산성을 함락시킨 다음 처인성에 갔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원나라 군사는 송경에 돌아와서 설신이 식견이 있는 자라고 생각해서 강화도로 돌려보냈다.[5]
2. 4. 중앙 관직 복귀 및 지방관 재임
1232년(고종 19) 시어사(侍御史)로서 대장군(大將軍) 조숙창(趙叔昌)[3]과 함께 몽골에 파견되어, 신하를 칭하는 표문과 공물을 바쳤다.[4] 그 후 대부소경(大府少卿)·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쳤다. 이때 원나라 장수 살리타이가 설신을 붙잡아 두고 송경(개경)에 와서 강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고자 했는데, 설신은 “우리나라에 '남의 나라의 대신으로 남쪽 강을 건너는 이는 불길하다'고 전해 오는 말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살리타이는 이 말을 듣지 않고 한양산성을 함락시킨 다음 처인성에 갔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원나라 군사는 송경(개경)에 돌아와서 설신이 식견이 있는 자라고 생각해서 강화도로 돌려보냈다.[5]
1234년(고종 21) 충주목 부사(忠州牧 副使)로 나갔는데, 임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소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겼다.[2]
또한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다시 나가 2년 동안 재임했고, 임기가 끝나자 우승(右丞)·지제고(知制誥)로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나갔는데, 곧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병마사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하여 2년 동안 머물렀다.[2]
2. 5. 고위 관직 역임 및 사망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홍지경[6] 등 37명을 급제시켰다.[7] 중앙으로 돌아와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삼사사(三司使),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임명되었다.[2]
1243년(고종 30)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다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온 후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 좌유덕(左諭德), 좌복야(左僕射) 등을 역임했다.[2]
1251년(고종 38)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형부상서(刑部尙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나,[2] 같은 해 병으로 6월 14일에 사망하였다.[1]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증조부 설자승(薛子升) 순창군사호(淳昌郡司戶)[2] 조부 설정숙(薛挺叔) 사문박사(四門博士)[2] 아버지 설선필(薛宣弼)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2] 어머니 조씨(趙氏) 순창군사호 조숭영(趙崇穎)의 딸[2] 부인 최씨(崔氏) 고공낭중(考功郞中) 최입기(崔立基)의 딸[2] 장남 설공검(薛公儉)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문량공(文良公), 충렬왕(忠烈王)의 배향공신 (1224년 ~ 1302년) 차남 미상 조계종(曹溪宗) 승려, 보문사(普門寺) 주지[2][8] 삼남 설인검(薛仁儉) 평장사(平章事)[9], 합주부사(陜州副使)[10], 사재경(司宰卿)[11], 문숙공(文肅公)[9] 사위 정지교(鄭之僑) [2]
《고려사》 〈열전〉 설공검 편에 따르면, 설신의 어머니 조씨(趙氏)는 아들 여덟 명을 낳았고, 그 중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름이 알려진 아들은 설신 한 명뿐이다.
4. 전기 자료
참조
[2]
문서
설신 묘지명
[3]
문서
설신 묘지명
[4]
서적
고려사
1232-04-12
[5]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6]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7]
서적
고려사
1242-04
[8]
문서
설신 묘지명
[9]
서적
여지도서
[10]
서적
고려사
[11]
문서
김승용 묘지명
[12]
서적
지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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