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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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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죽도는 전라남도에 위치한 섬으로, 정해왜변 당시 이대원 장군이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섬에 큰 손실을 입었다는 의미로 '손대도'라 명명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죽도'로 변경되었다. 매년 3월 3일 이대원 장군의 제사가 열리며, 과거 화전놀이가 성행했다. 현재는 낚시, 백패킹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여수에서 쾌속선으로 접근 가능하다.

2. 역사

1587년(선조 22) 정해왜변(丁亥倭變)이 발생하여 이대원 장군이 이 섬에서 전사하였다.[1][2] 이후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손죽도에 남아있던 왜구를 격퇴하였다.[4][5][6] 1591년 이순신 장군이 '손대도'(損大島)라고 명명하였다.[7]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죽도'(損竹島)로 바뀌었다. 섬에는 정해왜변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주민들은 해마다 3월 3일에 제를 지낸다.

2. 1. 정해왜변과 이대원 장군

1587년(선조 22) 음력 2월 26일,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침범한 정해왜변(丁亥倭變)이 발생했다.[1] 녹도와 손죽도에도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는데,[1]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당시 22세)이 이 섬에 쳐들어온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숨졌다.[2] 조정에서는 신립변협을 방어사로, 김명원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방어하게 했다.[3]

또한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南彦經)은 낙향하여 있던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정여립은 전주로 낙향후 그가 조직한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4] 당시 왜구는 별로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5] 그러나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6]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큰 인물을 잃어 큰 손해를 봤다며 '손대도'(損大島)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7]

2. 2. 이순신 장군과 손죽도

1587년(선조 22) 음력 2월 26일,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침범한 정해왜변이 발생했다. 녹도와 손죽도에도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는데,[1]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당시 22세)이 이 섬에 쳐들어온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숨졌다.[2] 조정에서는 신립변협을 방어사로, 김명원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방어하게 했다.[3]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南彦經)은 낙향하여 있던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정여립은 전주로 낙향 후 그가 조직한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4] 당시 왜구는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퇴각한 뒤였다.[5] 그러나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6]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큰 인물을 잃어 큰 손해를 봤다며 '손대도'(損大島)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7]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죽도'(損竹島)로 바뀌었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정해왜변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주민들은 해마다 3월 3일에 제를 지낸다.

2. 3. 지명 유래

1587년(선조 22) 음력 2월 26일,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침범한 정해왜변(丁亥倭變)이 발생했다. 녹도와 손죽도에도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는데,[1]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당시 22세)이 이 섬에 쳐들어온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숨진 일이 있었다.[2]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이대원 장군의 죽음을 두고 큰 인물을 잃어 큰 손해를 봤다며 '손대도'(損大島)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7]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죽도'(損竹島)로 바뀌었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3. 지리

소거문도, 평도, 광도와 함께 손죽열도를 이룬다. 여수시 시내에서 약 74km 떨어져 있다. 2010년 현재 인구는 194명(91가구)이다. 400여 년 전 제주도에서 고씨, 부씨, 양씨가 최초로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하여 육지로 피신하였고, 이후 전주 이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등이 다시 입도하여 거주하였다. 최고점은 깃대봉(242m)으로 섬 중앙에 있으며, 서쪽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가 곳곳에 분포한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많으나 섬 북쪽에 형성된 만 일대에는 사질해안이 발달되어 있다.

취락은 선착장이 있는 북쪽 만 안에 주로 분포하며, 주민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 마늘, 옥수수, 보리, 양파, 등이 생산되며, 근해에서는 문어, 삼치, 방어, 도미 등이 잡히고, 자연산 톳의 채취와 미역, 등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북서쪽 돌출부 끝에는 무인등대가 있고, 길이 1km되는 손죽해수욕장이 있다. 여수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1일 1회 운항된다.[4]

3. 1. 기후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며 비가 많은 편이다. 1월 평균 기온은 2.7°C 내외, 8월 평균 기온은 23.6°C 내외이며, 연 강수량은 1362mm 정도이다.[4]

4. 주민 생활

소거문도, 평도, 광도와 함께 손죽열도를 이룬다. 여수 시내에서 약 74km 떨어져 있으며, 2010년 기준 인구는 194명(91가구)이다. 400여 년 전 제주에서 고씨, 부씨, 양씨가 최초로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하여 육지로 피신하였고, 이후 전주이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 다시 입도하여 거주하였다.

취락은 선착장이 있는 북쪽 만 안에 주로 분포한다. 북서쪽 돌출부 끝에는 무인등대가 있고, 길이 1㎞의 손죽해수욕장이 있다. 여수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1일 1회 운항된다.

4. 1. 어업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근해에서는 문어, 삼치, 방어, 도미 등이 잡히고, 자연산 톳 채취와 미역, 김 등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4. 2. 농업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며 비가 많다. 1월 평균 기온은 2.7°C 내외, 8월 평균 기온은 23.6°C 내외, 연 강수량은 1,362mm 정도이다. 농산물로는 고구마, 마늘, 옥수수, 보리, 양파, 콩 등이 생산된다.[1]

4. 3. 손죽도 화전놀이

손죽도에서는 3월 삼짇날 봄맞이 놀이로 '화전놀이'를 했다. 제비가 날아들고 진달래가 만발하는 시기에 액운을 막는 의미였다. 여자들은 진달래 꽃잎을 찹쌀가루에 버무려 밀가루 반죽 위에 올리고 쇠판에 기름을 둘러 전을 만들었고, 남자들은 풍물로 춤곡을 벌여 밤새도록 잔치를 했다고 알려진다. 손죽도에서는 <제화좋소>, <산아지타령>, <강강술래> 등을 함께 불렀다.[1]

화전놀이 때 부르던 대표적인 노래인 「제화좋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놀다가 갑세다 노-놀다나 갑세다 제가 제도록 에헤라 놀다나 갑시다/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우리가 이따가 초죽어나지면 저건너 저 무덤이 외로와 다대리로다/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증조야 난강에 혼불러 놓고서 정천 하늘에 애로와 비내리라세/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머래랑 다래랑 다 당재친 소래 자다가다가 들어도 외로와 우리님 소리라/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삼각산 몰랑에 벼 베어나 나아나 어린님 다래워 애로워 잠자나 마나/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각시야 잠자냐 밤 밤세나 올래나 밤중에 새벽에 애로와 산넘어 가노라/ 제화좋소 제제제화가 좋소 금년에 춘삼월로 화전놀이를 갑세다"

4. 4. 손죽도 옛 지명

손죽도에는 순우리말 옛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이름이 땅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손죽도 중앙부 깃대봉에서 지지미로 가는 길목에 옛날에 처녀들이 모여서 베를 짰다고 하는 곳의 이름은 ‘처녀 배짠디’이다. ‘독 보듬고 돈디’는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에서 이동을 위해 바위, 즉 돌을 안고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독 보듬고 돌고 나면”, ‘손잡고 돈디’를 만나게 되는데, 해변의 바위절벽을 돌아가기 위해선 서로의 손을 잡아줘야만 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화전놀이가 펼쳐진 ‘지지미재’도 ‘지지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1]

5. 교통

여수연안여객터미널에서 외나로도를 경유하여 손죽도로 가는 쾌속선 하멜호가 운항한다. 2024년 10월 1일 기준 운항 시간은 다음과 같다.[8]

구분여수 출발손죽도 출발
시간07:55, 13:0011:30, 16:25
소요 시간1시간 10분1시간 10분



쾌속선은 거문도가 최종 목적지이며, 손죽도는 경유지이다. 외나로도에서 승선할 경우 미리 매표해야 하며, 승선자가 없으면 경유하지 않으니 유의해야 한다. 여수연안여객터미널에서 승선하는 타지역민은 배편 요금의 절반을 지원받을 수 있다.[8]

차도선 이용은 녹동항에 별도로 문의해야 한다.

6. 관광

손죽도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낚시와 백패킹 명소로 알려져 있다. 섬 전역이 낚시 포인트이며, 여름에는 돌돔과 고등어, 늦가을에는 학꽁치 낚시를 즐길 수 있다.[1] 또한 백패킹 성지로도 유명하여, 마을 뒤편 전망데크에서 백패킹을 즐길 수 있다.[1] 민박집도 3곳 운영 중이며, 섬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특별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1]

6. 1. 낚시

손죽도는 선착장과 갯바위 등 섬 전역이 낚시꾼들에게 유명한 낚시 포인트이다. 한겨울을 제외한 연안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으며, 여름에는 돌돔과 고등어, 늦가을에는 학꽁치 낚시를 즐길 수 있다.[1] 마을 주민들 또한 선착장에서 고등어, 전갱이, 학꽁치 낚시를 즐기며, 통발을 이용하면 문어꽃게 등을 잡을 수 있다.[1]

6. 2. 숙박

손죽도는 백패킹으로 유명한 성지이다. 마을 뒤편 전망데크에서는 백패킹을 즐길 수 있다. 단, 안전 문제로 마을 주민에게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1]

손죽도에는 민박집이 3곳 있다. 부두 민박과 빨간집 민박 등에서는 1인당 15000KRW 상당으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손죽도산 열무로 만든 비빔밥, 통발로 잡은 문어숙회 등 신선한 밥상을 기대해도 좋다.[1]

6. 3. 마을 유명인

손죽마을 이장 김기한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요트 국가대표 출신이다.[9] KBS광주방송총국 제작 <별별다방>에서 김기한 이장의 젊은 시절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9]

참조

[1]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2] 웹사이트 이대원 [李大源]
[3] 서적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다산초당 2007
[4] 간행물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일 乙亥 5번째기사
[5]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6]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7] 서적 징비록-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8] Youtube KBS광주방송총국 <별별다방-섬섬위키> 방송 편 https://www.youtube.[...] KBS광주방송총국 2024-11-22
[9] Youtube KBS광주방송총국 <별별다방-섬섬위키> 방송 편 https://www.youtube.[...] KBS광주방송총국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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