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 쇼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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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 쇼켄은 17세기 류큐 왕국의 정치가이자 개혁가로, 1666년 섭정으로 취임하여 류큐 왕국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류큐 민족 출신으로, 하네지 마기리의 안지치토를 거쳐 섭정에 이르렀으며, 행정, 경제,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하네지 시오키》를 통해 왕부 내 관습을 개혁하고, 《주잔세이칸》 편찬을 주도하여 류큐의 역사를 정리했다. 그는 류큐의 "근세화"를 준비하고 "전통"을 형성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친사쓰마적인 역사관과 신분제 강화 정책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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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쇼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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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책 | 류큐의 섭정 |
재임 시작 | 1666년 |
재임 종료 | 1675년 |
이전 섭정 | 구시카와 초에이(ja) |
다음 섭정 | 오자토 초료(ja) |
군주 | 쇼시쓰왕 쇼테이왕 |
아명(兒名) | 오모카메(思亀) |
중국식 이름 | 고 쇼켄(呉象賢), 이후 쇼 쇼켄(向象賢) |
계급 | 오지 |
일본식 이름 | 하네지 오지 조슈(羽地王子朝秀) |
출생일 | 1617년 6월 6일 |
사망일 | 1676년 1월 5일 |
묘소 | 하네지 조슈의 묘(ja) |
생애 | |
아명 | 우미가미 (思亀) |
중국식 이름 | 고 쇼켄 (呉 象賢), 이후 쇼 쇼켄 (向 象賢) |
칭호 | 오지 |
기타 정보 | |
관련 작품 | 주잔세이칸(中山世鑑) |
2. 생애
쇼 쇼켄은 1617년 류큐 민족인 하네지우둔(羽地御殿)에서 태어났다.[4] 어릴 적 이름은 오모가메(思亀)였으며,[4] 당명(唐名)은 쇼 쇼켄(向象賢)이지만, 이 당명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고 쇼켄(向象賢)으로 불렸다.[4] 하네지우둔을 상속하기 전에는 도미구스쿠(富盛) 마기리(間切)의 오미네(大嶺)를 하사받아 "오미네(大嶺)"로 불렸다.[5] 20세 전후부터 정치 경제에 관심을 가져 전국 각지의 마기리나 마을을 돌며 논밭과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살펴보았고, 지역 노인들로부터 지역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고 한다.[12] 16세 때, 사쓰마 번 번주의 시독이자 당시 쇼호의 시강으로 류큐에 와 있던 유학자 하쿠 뇨치쿠[10]를 만나 그의 강의를 들었다. 여기서 뇨치쿠는 그의 스승인 난포 분시의 학문을 하네지에게 전수했고, 그것이 후에 『주잔세이칸』에서의 난포 사관으로 이어졌다고 한다.[11]
1640년, 하네지는 하네지 고텐의 가독을 이어 하네지 마기리의 안지치토가 되었다. 왕가 분가의 성씨가 "쇼"로 통일되고 이름의 첫 글자가 "조"로 통일된 것은 1691년 이후이다. 따라서, 생전의 본래 이름은 고 쇼켄·하네지 안지 시게이에이다. 1658년 6월~1659년 10월, 1661년~1662년 11월, 1667년~1668년 12월, 총 3회 왕명을 받아 사쓰마 번에 부임했다.[7] 그의 통외라는 호는 사쓰마 번 가로 신노 또자에몬 히사요리로부터 1661년 사쓰마 체류 시에 받은 것이었다.[8]
하네지의 전임 섭정이었던 구시카와 왕자 쇼쿄가 교타로(촌다라)의 춤을 보고 있을 때, 유모에게 안긴 어린아이를 만났다. 그 때 어린아이의 눈을 본 쇼쿄는 "이제껏 이렇게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본 적이 없다. 훗날 나를 이어 정치를 하고 류큐에 '황금의 굴레'를 씌울 것은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교육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1666년 쇼시쓰 왕의 섭정으로 취임하여 류큐 왕국의 개혁을 주도했다. 섭정 취임 당시 왕부 내의 관습을 부정하고, 신분과 사안에 맞는 공식적인 시스템으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58] 삼사관의 임명 요청 시에는 왕부 내 여관이 국왕으로부터의 요청을 전달하는 관습을 부정하고, 상급 관리에게 전달 역할을 맡도록 했다. 중직 취임이나 영지 하사, 명절 때의 진상품과 축의금, 그에 대한 대응에 대해 간소화를 요청했다. 지금까지는 국왕이나 왕비, 그 측근들에게도 진상품을 보냈지만, 이후에는 국왕과 왕비 외에는 진상품을 중단했다. 축의금을 가지고 면회를 왔을 때, 매번 면회하는 것이 아니라 장부에 방문자를 기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하거나, 필요 이상의 축의금을 준비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이러한 의도는 허례허식을 폐지하고 합리화하는 것과 동시에, 왕부 내의 신분 질서를 명확히 함으로써 정치 행정 조직의 강화를 목표로 한 것이라고 여겨진다.[58]
슈리성 화재 이후에는 성내 작법 규정도 정해졌다. 관리의 신분에 따라 성내에 동행할 수 있는 종자의 인원을 정하고, 종자 중에서도 특히 짚신을 신기는 사람은 "현관"의 바깥쪽에서 대기하는 것 등과 같은, 신분을 가시화한 규정이었다.[60] 섭정 취임 당시, 여러 사무관들이 성내를 짚신을 신고 걷는 것과 노인이 많은 좌식에게는, 겨울에 한해 성내에서 버선을 신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처음에는 슈리성 화재 후의 피난 장소인 오미도노에서의 규정이었지만, 슈리성 재건 후의 규정으로 간주되었다.[59]
《하네지 시오키(羽地仕置)》를 통해 왕부 내의 의례와 관혼상제에 관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토착 종교를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치와 일본인들에게 위엄이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관습을 줄이기 위해 왕족과 노로(류큐 종교의 중심인 여성 사제)를 소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660년 슈리성 화재 이후 재건 사업을 주도하고, 경제적 지원을 위해 사쓰마 번에 청원했다.[40] 슈리성의 소실은 사쓰마의 세수에 더해 명청 교체의 영향으로 공물 무역의 부진에 시달리던 와중에 일어났다. 하네지는 이러한 궁핍한 상황 속에서 슈리성의 재건을 실현하기 위해 사쓰마로 건너가 슈리성 재건을 구실로 경제적 지원에 관한 청원을 했다. 청원의 내용은 주로 슈리성 재건을 위한 목재선 3척의 건조,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사쓰마에 대한 출미를 재건 종료까지 면제해 줄 것 등, 조선, 운송, 그리고 사쓰마가 류큐에 부과하는 세금의 감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쓰마에서도 천재지변과 에도에 대한 군역 부담, 번저의 화재 등으로 인해 번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조선과 운송에 대해서는 허가되었지만 세금 감면은 허가되지 않았다.[41] 재정난으로 인해 재건이 늦어졌지만, 1666년 이후 하네지의 개혁으로 3년 안에 재건에 이르렀다. 재건된 슈리성은 이전보다 더 훌륭한 완성도를 보였으며, 이는 하네지의 리더십과 백성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하네지 스스로 자부심을 보였다.[44] 『하네지 시오키』에는 관리들의 참상에 관한 규정 외에도, "현관"이나 "복도"와 같은 슈리성 내부에 관한 문장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려웠던 슈리성의 재건을 염두에 둔 여러 정책을 하네지가 추진했고, 그 결과와 내용을 문서에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45]
유학을 강력하게 믿었으며, 난포 분시의 제자인 토나미 조치쿠 밑에서 공부했다. 자비로운 리더십과 전반적인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견해는 쇼의 저작물과 그의 정책에 스며들었다.
쇼 쇼켄하지 쇼켄/羽地 翔賢ryu은 1673년 섭정직에서 물러나 1675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쇼테이 왕이 참석하는 국장(国葬)급으로 치러졌다. 류큐의 오위인(五偉人)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5년, 일본 정부로부터 정5위(正五位)를 추증받았다.
쇼 쇼켄은 사쓰마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한 이래 피폐해졌던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며, 류큐 왕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개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유학을 강력하게 믿었으며, 자비로운 리더십과 전반적인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견해는 그의 저작물과 정책에 스며들었다. 그는 실용주의자로서, 사치와 일본인들에게 위엄이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관습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전후 오키나와 학계에서는 쇼 쇼켄을 류큐의 "근세화"를 준비하고 "전통"을 형성한 인물로 재평가하고 있다. 전쟁 전의 연구자 이하 후유는 "사려 깊은 경세가", "자국의 입장에 대한 자각이 강한 사람"으로 칭하며, 히가시온나 칸준은 "본토의 원류에 (류큐를) 복귀"시킨 인물로 평가했다. 복귀 후, 타카라 쿠라요시는 "시책 수행을 위해 일관되게 구체적·실천적인 자세를 견지한 정치가"로 칭하며, 타나 마사유키 등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왕국을 재건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2. 1. 출신과 배경
쇼 쇼켄은 1617년 류큐 왕족의 방계 가문인 하네지우둔(羽地御殿)에서 태어났다.[4] 어릴 적 이름은 오모가메(思亀)였으며,[4] 당명(唐名)은 쇼 쇼켄(向象賢)이지만, 이 당명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고 쇼켄(向象賢)으로 불렸다.[4] 하네지우둔을 상속하기 전에는 도미구스쿠(富盛) 마기리(間切)의 오미네(大嶺)를 하사받아 "오미네(大嶺)"로 불렸다.[5] 20세 전후부터 정치 경제에 관심을 가져 전국 각지의 마기리나 마을을 돌며 논밭과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살펴보았고, 지역 노인들로부터 지역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고 한다.[12] 16세 때, 사쓰마 번 번주의 시독이자 당시 쇼호의 시강으로 류큐에 와 있던 유학자 하쿠 뇨치쿠[10]를 만나 그의 강의를 들었다. 여기서 뇨치쿠는 그의 스승인 난포 분시의 학문을 하네지에게 전수했고, 그것이 후에 『주잔세이칸』에서의 난포 사관으로 이어졌다고 한다.[11]1640년, 하네지는 하네지 고텐의 가독을 이어 하네지 마기리의 안지치토가 되었다. 왕가 분가의 성씨가 "쇼"로 통일되고 이름의 첫 글자가 "조"로 통일된 것은 1691년 이후이다. 따라서, 생전의 본래 이름은 고 쇼켄·하네지 안지 시게이에이다. 1658년 6월~1659년 10월, 1661년~1662년 11월, 1667년~1668년 12월, 총 3회 왕명을 받아 사쓰마 번에 부임했다.[7] 그의 통외라는 호는 사쓰마 번 가로 신노 또자에몬 히사요리로부터 1661년 사쓰마 체류 시에 받은 것이었다.[8]
하네지의 전임 섭정이었던 구시카와 왕자 쇼쿄가 교타로(촌다라)의 춤을 보고 있을 때, 유모에게 안긴 어린아이를 만났다. 그 때 어린아이의 눈을 본 쇼쿄는 "이제껏 이렇게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본 적이 없다. 훗날 나를 이어 정치를 하고 류큐에 '황금의 굴레'를 씌울 것은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교육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1673년에 섭정의 지위를 물러나 1675년에 사망했다. 후에 류큐의 오위인으로 꼽힐 정도로 평가가 높았으며, 그의 장례에는 쇼테이 왕도 참석하는 국장급 장례였다고 한다.[14] 묘소는 나하시 슈리 타이라마치의 하네지 조슈의 묘이다.
1915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15] 또한, 이를 나타내는 『증위제현전』의 목차에는 "하네치토모히데", "코쇼켄"으로 루비가 적혀 있다.[16]
2. 2. 초기 활동
쇼 쇼켄은 1617년 류큐 민족인 하네지우둔(羽地御殿)에서 태어났다. 1640년, 하네지우둔의 가독을 이어받아 하네지 마기리의 안지치토(按司地頭)가 되었다. 1650년, 쇼 시츠 왕의 명으로 류큐 왕국 최초의 정사인 《주잔세이칸(中山世鑑)》 편찬을 시작했다.사쓰마 번의 가로(家老)였던 신노 또자에몬 히사요리(新納当左衛門久珍)로부터 "통외(通外)"라는 호를 받았다. 유학자 하쿠 뇨치쿠(柏如竹)에게서 난포 분시(南浦文之)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이는 《주잔세이칸》의 난포 사관(南浦史観)으로 이어졌다.
2. 3. 섭정 취임과 개혁
1666년 쇼시쓰 왕의 섭정으로 취임하여 류큐 왕국의 개혁을 주도했다. 섭정 취임 당시 왕부 내의 관습을 부정하고, 신분과 사안에 맞는 공식적인 시스템으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58] 삼사관의 임명 요청 시에는 왕부 내 여관이 국왕으로부터의 요청을 전달하는 관습을 부정하고, 상급 관리에게 전달 역할을 맡도록 했다. 중직 취임이나 영지 하사, 명절 때의 진상품과 축의금, 그에 대한 대응에 대해 간소화를 요청했다. 지금까지는 국왕이나 왕비, 그 측근들에게도 진상품을 보냈지만, 이후에는 국왕과 왕비 외에는 진상품을 중단했다. 축의금을 가지고 면회를 왔을 때, 매번 면회하는 것이 아니라 장부에 방문자를 기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하거나, 필요 이상의 축의금을 준비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이러한 의도는 허례허식을 폐지하고 합리화하는 것과 동시에, 왕부 내의 신분 질서를 명확히 함으로써 정치 행정 조직의 강화를 목표로 한 것이라고 여겨진다.[58]슈리성 화재 이후에는 성내 작법 규정도 정해졌다. 관리의 신분에 따라 성내에 동행할 수 있는 종자의 인원을 정하고, 종자 중에서도 특히 짚신을 신기는 사람은 "현관"의 바깥쪽에서 대기하는 것 등과 같은, 신분을 가시화한 규정이었다.[60] 섭정 취임 당시, 여러 사무관들이 성내를 짚신을 신고 걷는 것과 노인이 많은 좌식에게는, 겨울에 한해 성내에서 버선을 신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처음에는 슈리성 화재 후의 피난 장소인 오미도노에서의 규정이었지만, 슈리성 재건 후의 규정으로 간주되었다.[59]
《하네지 시오키(羽地仕置)》를 통해 왕부 내의 의례와 관혼상제에 관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토착 종교를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치와 일본인들에게 위엄이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관습을 줄이기 위해 왕족과 노로(류큐 종교의 중심인 여성 사제)를 소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660년 슈리성 화재 이후 재건 사업을 주도하고, 경제적 지원을 위해 사쓰마 번에 청원했다.[40] 슈리성의 소실은 사쓰마의 세수에 더해 명청 교체의 영향으로 공물 무역의 부진에 시달리던 와중에 일어났다. 하네지는 이러한 궁핍한 상황 속에서 슈리성의 재건을 실현하기 위해 사쓰마로 건너가 슈리성 재건을 구실로 경제적 지원에 관한 청원을 했다. 청원의 내용은 주로 슈리성 재건을 위한 목재선 3척의 건조,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사쓰마에 대한 출미를 재건 종료까지 면제해 줄 것 등, 조선, 운송, 그리고 사쓰마가 류큐에 부과하는 세금의 감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쓰마에서도 천재지변과 에도에 대한 군역 부담, 번저의 화재 등으로 인해 번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조선과 운송에 대해서는 허가되었지만 세금 감면은 허가되지 않았다.[41] 재정난으로 인해 재건이 늦어졌지만, 1666년 이후 하네지의 개혁으로 3년 안에 재건에 이르렀다. 재건된 슈리성은 이전보다 더 훌륭한 완성도를 보였으며, 이는 하네지의 리더십과 백성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하네지 스스로 자부심을 보였다.[44] 『하네지 시오키』에는 관리들의 참상에 관한 규정 외에도, "현관"이나 "복도"와 같은 슈리성 내부에 관한 문장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려웠던 슈리성의 재건을 염두에 둔 여러 정책을 하네지가 추진했고, 그 결과와 내용을 문서에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45]
유학을 강력하게 믿었으며, 난포 분시의 제자인 토나미 조치쿠 밑에서 공부했다. 자비로운 리더십과 전반적인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견해는 쇼의 저작물과 그의 정책에 스며들었다.
2. 4. 말년과 평가
쇼 쇼켄하지 쇼켄/羽地 翔賢ryu은 1673년 섭정직에서 물러나 1675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쇼테이 왕이 참석하는 국장(国葬)급으로 치러졌다. 류큐의 오위인(五偉人)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5년, 일본 정부로부터 정5위(正五位)를 추증받았다.쇼 쇼켄은 사쓰마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한 이래 피폐해졌던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며, 류큐 왕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개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유학을 강력하게 믿었으며, 자비로운 리더십과 전반적인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견해는 그의 저작물과 정책에 스며들었다. 그는 실용주의자로서, 사치와 일본인들에게 위엄이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관습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전후 오키나와 학계에서는 쇼 쇼켄을 류큐의 "근세화"를 준비하고 "전통"을 형성한 인물로 재평가하고 있다. 전쟁 전의 연구자 이하 후유는 "사려 깊은 경세가", "자국의 입장에 대한 자각이 강한 사람"으로 칭하며, 히가시온나 칸준은 "본토의 원류에 (류큐를) 복귀"시킨 인물로 평가했다. 복귀 후, 타카라 쿠라요시는 "시책 수행을 위해 일관되게 구체적·실천적인 자세를 견지한 정치가"로 칭하며, 타나 마사유키 등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왕국을 재건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3. 《주잔세이칸(中山世鑑)》
1650년, 쇼시쓰 왕의 명으로 《추잔세감》 편찬이 시작되었다.[18] 국왕의 명을 받은 킨구(金武) 왕자 조테이와 삼사관(三司官) 오자토 료안(大里良安) 등이 옛 신하와 원로들에게서 자료를 수집하고, 쇼 쇼켄이 이를 세계도(世系図)로 정리했다.[17] 《시경(詩經)》의 "은감불원(殷鑑不遠)"을 의식하여 "세감(世鑑)"이라고 이름 붙였다.
《추잔세감》은 과거를 본보기 삼아 선왕들의 계통과 사적을 살펴봄으로써 향후의 참고로 삼고, 자손들에게 선왕이 만세일계(万世一系)였다는 이유를 알리려는 의도로 편찬되었다.
이 시기에 편찬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에도 막부가 제후들에게 가계도 편찬을 명령하여 《간에이 제씨가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이 1643년에 완성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다.
쇼 쇼켄은 하네지 우돈(궁)의 세 번째 수장인 하네지 오지 쵸타이(하네지 쵸타이 왕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50년 쇼 시츠왕의 명에 따라 《추잔세감》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추잔세감》은 서문과 총론을 포함하여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문은 한자 가나 혼용문(일본어 문장)으로 표기되어 있다.[18] 개벽 전설부터 슌텐, 에이소(英祖), 삿토(察度)의 각 왕통을 거쳐 제1쇼씨(第一尚氏), 제2쇼씨(第二尚氏) 왕통으로 이어지는 류큐의 역사를 의제적(擬制的)으로 연속해서 기술했다. 슌텐 왕통기에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為朝)가 슌텐의 아버지라고 기술한 것[19]과 개벽 전설에 등장하는 천손씨(天孫氏)와 리유는 쇼 쇼켄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제2쇼씨 왕통은 쇼세이(尚清) 왕 대의 1555년까지 기술되어 있다.
쇼 쇼켄은 류큐가 일본 사쓰마의 봉신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1609년 일본의 침략은 사쓰마의 영주와 도쿠가와 막부가 류큐 열도를 통해 다른 국가와 비공개 거래를 하면서 봉건 일본의 고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부와 권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쇼 쇼켄의 저작물, 특히 《추잔세감》은 류큐 전체가 봉신이었던 일본 사쓰마의 영주인 일본 다이묘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가 그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또는 그들의 관습과 정치에 대한 진정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글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는 그의 저작과 정치적 행동에서 류큐가 일본을 더욱 완전히 모방하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을 보여주었고, 이는 또한 그의 역사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요소들이 일본의 세계관에 더 잘 맞도록 변경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추잔세감》에서는 일본 연호의 사용, 시마즈 씨(島津氏)에 대한 "부용(附庸)" 기술, 쇼신기와 쇼네이기의 결여[21] 등 사쓰마 번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 각 왕통을 선양(禅譲)이나 국왕 출생 시의 일광감정설화(日光感精説話) 등 중국적인 사상을 담아 연속시키고 있다.[22] 류큐 침공의 원인을 류큐의 불충(不忠)과 간신 샤나 우에카타(謝名親方)의 탓으로 돌리고, 자비로운 사쓰마 번주가 류큐를 징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등 사쓰마 번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왕통의 시조 탄생을 신비화하고 신성시하여 서술하는 것도 쇼 쇼켄의 특징으로 여겨진다.[24] 초대 국왕을 슌텐으로 하였으며,[19] 슌텐과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전설을 융합한 점은 하지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난포 분시의 영향을 받은 유교 윤리에 기반한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쇼 쇼켄은 유학을 강력하게 믿었으며, 난포 분시의 제자인 토나미 조치쿠 밑에서 공부했다. 자비로운 리더십과 전반적인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견해는 쇼의 저작물과 그의 정책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또한 오키나와어로 ''틴토''라고 불리는 개념과 일본어로 ''텐도''(天道, 문자 그대로 "하늘의 길")와 일치한다. 류큐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왕들의 계보를 설명함으로써 이 개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이는 천명 개념과 매우 유사하고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가난하거나 악한 통치자였던 왕들은 하늘의 길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3. 1. 편찬 경위와 목적
1650년, 쇼시쓰 왕의 명으로 《추잔세감》 편찬이 시작되었다. 국왕의 명을 받은 킨구(金武) 왕자 조테이와 삼사관(三司官) 오자토 료안(大里良安) 등이 옛 신하와 원로들에게서 자료를 수집하고, 쇼 쇼켄이 이를 세계도(世系図)로 정리했다. 《시경(詩經)》의 "은감불원(殷鑑不遠)"을 의식하여 "세감(世鑑)"이라고 이름 붙였다.《추잔세감》은 과거를 본보기 삼아 선왕들의 계통과 사적을 살펴봄으로써 향후의 참고로 삼고, 자손들에게 선왕이 만세일계(万世一系)였다는 이유를 알리려는 의도로 편찬되었다.
이 시기에 편찬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에도 막부가 제후들에게 가계도 편찬을 명령하여 《간에이 제씨가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이 1643년에 완성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다.
3. 2. 내용과 구성
쇼 쇼켄은 하네지 우돈(궁)의 세 번째 수장인 하네지 오지 쵸타이(하네지 쵸타이 왕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50년 쇼 시츠왕의 명에 따라 《추잔 거울》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추잔 거울》은 서문과 총론을 포함하여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문은 한자 가나 혼용문(일본어 문장)으로 표기되어 있다. 개벽 전설부터 슌텐(舜天), 에이소(英祖), 삿토(察度)의 각 왕통을 거쳐 제1쇼씨(第一尚氏), 제2쇼씨(第二尚氏) 왕통으로 이어지는 류큐의 역사를 의제적(擬制的)으로 연속해서 기술했다. 슌텐 왕통기에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為朝)가 슌텐의 아버지라고 기술한 것과 개벽 전설에 등장하는 천손씨(天孫氏)와 리유(利勇)는 쇼 쇼켄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제2쇼씨 왕통은 쇼세이(尚清) 왕 대의 1555년까지 기술되어 있다.쇼 쇼켄은 류큐가 일본 사쓰마의 봉신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1609년 일본의 침략은 사쓰마의 영주와 도쿠가와 막부가 류큐 열도를 통해 다른 국가와 비공개 거래를 하면서 봉건 일본의 고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부와 권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3. 3. 특징과 사관
쇼 쇼켄의 저작물, 특히 《추잔 거울》은 류큐 전체가 봉신이었던 일본 사쓰마의 영주인 일본 다이묘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가 그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또는 그들의 관습과 정치에 대한 진정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글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는 그의 저작과 정치적 행동에서 류큐가 일본을 더욱 완전히 모방하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을 보여주었고, 이는 또한 그의 역사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요소들이 일본의 세계관에 더 잘 맞도록 변경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추잔 거울》에서는 일본 연호의 사용, 시마즈 씨(島津氏)에 대한 "부용(附庸)" 기술, 쇼신기와 쇼네이기의 결여 등 사쓰마 번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21] 각 왕통을 선양(禅譲)이나 국왕 출생 시의 일광감정설화(日光感精説話) 등 중국적인 사상을 담아 연속시키고 있다. 류큐 침공의 원인을 류큐의 불충(不忠)과 간신 샤나 우에카타(謝名親方)의 탓으로 돌리고, 자비로운 사쓰마 번주가 류큐를 징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등 사쓰마 번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34] 왕통의 시조 탄생을 신비화하고 신성시하여 서술하는 것도 쇼 쇼켄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초대 국왕을 슌텐으로 하였으며, 슌텐과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전설을 융합한 점은 하지의 창작으로 여겨진다.[33] 난포 분시의 영향을 받은 유교 윤리에 기반한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쇼 쇼켄은 유학을 강력하게 믿었으며, 난포 분시의 제자인 토나미 조치쿠 밑에서 공부했다. 자비로운 리더십과 전반적인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견해는 쇼의 저작물과 그의 정책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또한 오키나와어로 ''틴토''라고 불리는 개념과 일본어로 ''텐도''(天道, 문자 그대로 "하늘의 길")와 일치한다. 류큐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왕들의 계보를 설명함으로써 이 개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이는 천명 개념과 매우 유사하고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가난하거나 악한 통치자였던 왕들은 하늘의 길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4. 주요 개혁
4. 1. 행정 개혁
평정소의 각 기구를 정비했는데, 1666년부터 1673년까지의 하지 섭정기 동안 이목관이나 어물봉행 중인들을 음미역으로 개칭(1666년)하고, 평정소 필자 2명을 감원(1666년)했다.[52] 평정소 필자 주취를 설치(1668년)하고, 일장 주취 2명이나 어물봉행 장당(모두 1671년)을 설치했다.[52]1667년에는 삼사관의 최단 거리에 있으며, 사쓰마와 류큐 사이의 중개를 주된 임무로 하는 재번친방이 제도화되었다.[53]
4. 2. 《하네지 시오키(羽地仕置)》
《하네지 시오치》는 1666년부터 1673년까지 쇼 쇼켄의 섭정기에 발표된 포고 문서집의 일부이다.[54] 처음에는 《하네지 시오치》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회문이나 각 관청에 게시된 문서를 모아놓은 것이다. "하네지 시오치"라는 표제는 후세에 오키나와현청이 류큐 자료에 수록할 때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55]《하네지 시오치》에 나오는 사항의 날짜가 반드시 실시된 날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실시 이후에 후년을 위한 비망이나 참고를 위해 정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연도 기억의 오류로 보이는 부분도 존재한다.[56]
《하네지 시오치》의 내역을 살펴보면, 하네지가 섭정에 취임한 1667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빈번하게 문서를 발표하고 있지만, 1668년과 1672년의 문서는 수록하지 않았다. 그 외의 해에는 2~4건 정도이지만, 은퇴 직전인 1673년에는 문서가 집중되어 있다.[57]
왕부 내 관습 개혁은 왕부와 국왕의 의례, 나아가 백성을 포함한 관혼상제에 관한 개혁으로 이어졌다. 왕부에서는 지금까지 중국이나 일본에 출장하는 관리들을 정월 초하루와 15일에 슈리성에 출사하게 하거나, 그 관리들 중 그 해의 간지(세일: 투시비)에 해당하는 자가 있을 경우, 그들에게 여무를 행했지만, 이들을 모두 폐지했다. 동시에, 정월 초하루와 15일에 슈리성에 출사하는 관리들에게의 대접도 모두 폐지했다.
관혼상제에 관해서는, 법사 시에 각 관리의 집에 국왕이 사품을 보내는 관례를 금지했다. 또한, 국왕이 행차하거나 참배했을 때, 관계자에게 축하 물품을 내리는 관례도 폐지했다.
관혼상제의 규정은 왕부의 관리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예를 들어, 약혼 축하 시에 중매인에게 호화로운 잔치를 준비했지만, 이를 간략화하여 분수에 맞게 하도록 했다. 장례에 관해서도, 죽은 자를 운반하는 가마나 식전 시의 장식의 수, 법사 시의 스님의 수, 의례, 식사, 의상에 관한 사항 등이 자세하게 정해졌다. 장례에 관해서는 동시에, 효도를 명목으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해지고, 자녀나 손자의 지출이 늘어나는 것과, 기일 중을 이유로 한 직무의 권태를 문제 삼았다.
특히 시골에서는, 신분에 맞지 않게 술을 많이 마시거나 소를 죽이는 등, 의례가 화려하게 흘러가면서 물품 구입이 가계를 압박하고, 결국 몸을 파는 자까지 나왔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하지(羽地)는, 이러한 무리가 이후에도 나올 경우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마을의 관리나 당사자가 소속된 여(조)의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엄벌로 대처했다.
여기에서, 하지가 목표로 한 개혁이 단순히 허례허식 폐지나 검소 절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국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왕국 내의 광범위한 "의식 개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3. 신분제 확립
1689년 계도좌(系図座) 설치를 통해 가계(家系)를 갖는 것을 허가받은 신분을 "계지(系持)", 가질 수 없는 신분을 "무계(無系)"로 구분했다.[62] "계지"를 사(士), "무계"를 백성으로 하고, 사 신분의 자가 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장되는 신분제가 성립되었다.[62] 쇼 쇼켄은 1670년에 왕부 명의로 여러 무사에게 각자의 계도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여, 사들의 출자와 가(家)의 격을 명확히 했다.[64]사쓰마번의 섬진씨 침공 이전 류큐 왕국에서는 위계 제도를 통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존재했지만, 위계는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이었고, 자자손손 계승되는 것은 아니었다.[61] 섬진씨의 침공 이후에는, 검지나 여러 무사에게의 급지 및 기독교 종교 개정의 필요성으로 신분과 각 구성 인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61]
이러한 신분제가 확립되어 가는 단초가 된 것은, 쇼 쇼켄의 개혁이다. 개혁에 이르기 전 단계로서, 쇼 쇼켄은 1650년에 왕부의 "가계"에 해당하는 『중산세감』을 편찬했다.[63] 섭정 취임 후에는, 1670년에 왕부 명의로 여러 무사에게 각자의 계도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64] 여기에는, 사들의 출자나 가격을 명확히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64]
계지층에는, 학문, 산수, 서도, 노래나 음악, 의도, 요리, 승마, 꽃꽂이, 다도 등의 중에서 하나도 재주를 익히지 않은 자는, 비록 가문이 좋더라도 관리에 등용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65] 슈리성에서의 공식 행사 때에도, 신분을 나타내는 관을 쓰고 오도록 하는 통달도 『하지 치치』에 보인다.
4. 4. 경제 정책
사쓰마 번의 허가를 받아 토지 개간을 장려하는 시아케(仕明地) 정책을 1669년에 실시했다.[73] 개간된 토지는 "영영(永々)" 소유를 허가받았다. 시마즈 씨의 침공 이후, 약 60년간 검지가 실시되지 않아 수해로 인한 황폐와 황무지가 발생했고, 게이초 검지에서 정해진 경작지에 대한 세율과 실제 세율 간에 큰 차이가 발생하여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을 부담하고 있었다. 하지는 이러한 세율 격차를 줄이는 것을 명분으로 사쓰마에 시아케 허가를 신청했다.[73] 이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17세기 말에는 경작지 확대와 더불어 난개발과 연료, 사료 고갈 문제가 발생하여 왕부는 시아케 억제책을 시행하게 되었다.[74]하지 쇼의 지명지 정책과 연계하여 1667년경에는 설탕과 강황의 전매제가 시작되었다.[51] 왕부는 강희제 경하사의 일행에 백당 기술을 배우는 자를 수행시키거나, 설탕 봉행을 왕부 전속의 관청으로 배치하는 등 왕부 재정 수입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4. 5. 종교 정책
류큐에서는 불교가 번성했지만, 시마즈의 류큐 침공 이후 사찰 건립에 제한을 받았다.[76] 1662년 에도 막부는 출가, 산복 등의 활동을 규제했고, 류큐에서도 불교 대신 유교가 장려되었다.[77] 쇼 쇼켄은 사찰의 신축이나 수복 재건을 제한하고, 지행지(知行地)를 정리·삭감하는 등 사찰 정리를 실시했다.[78] 1671년에는 구메무라(久米村)에서 제출된 공자묘 창건 청원을 허가했다.[80]4. 6. 기타 개혁
하네지 초슈는 행정 구역을 재편성하여 1666년에는 나키진 마지리(今帰仁間切)에서 11촌을, 고에쿠 마지리(越来間切)에서 15촌을 분할하고 각각 7촌과 5촌을 신설하여 모토부 마지리(本部間切)와 미사토 마지리(美里間切)를 설치했다. 1671년에는 기노완 마지리(宜野湾間切), 1673년에는 온나 마지리(恩納間切), 오기미 마지리(大宜味間切), 오로쿠 마지리(小禄間切), 구시 마지리(具志間切), 1676년에는 요나시로 마지리(与那城間切) 등 총 8개의 마지리(間切)를 신설하여 35개 마지리 체제를 완성했다.[75] 섭정 취임 당시 오키나와 본섬의 촌 수는 322개 촌이었지만, 27마지리 322촌으로 재편성되었다.
류큐 개벽 신화의 성지로 여겨지던 쿠다카 섬(久高島)에는 항구가 없고, 음력 2월 강풍이 국왕의 건강에 해롭다는 점, 쿠다카 섬 제례는 성현의 규식이 아니며, 신녀가 제례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조롱받을 것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국왕이 매년 음력 2월에 신녀를 동반하여 격년으로 참배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69] 지넨 성(知念城)의 제례 때에도 성 내부가 매우 좁아 화재 발생 시 피할 곳이 없고, 주변 지역 백성들에게 국왕 접대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이유로 참배는 국왕 일대에 한정하거나 대리인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불교를 들여온 것처럼, 쿠다카 섬이나 지넨 성의 신을 슈리 성 근교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지방에 부임한 관리들 중에는 현지 백성들에게 금전이나 물품을 강제 대여하고, 그 대가로 백성들을 부리거나, 명절 때 부임 지역의 특산물 등을 뇌물로 받는 등 착취와 불법을 반복해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71] 또한 부임지에 가지 않고 유녀에게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거나, 부임하더라도 유녀에게 자신의 영지 관리 경영을 맡겨버리는 자 등이 있었다. 백성들 역시 이러한 사태로 인해 농업을 싫어하게 되었고, 몰래 나하(那覇)나 슈리(首里)와 같은 도시 지역으로 유입되는 자들이 나타났다. 하네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중간 착취를 단속하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통해 황폐해진 농촌을 재건하도록 했다.[71] 또한, 개간을 장려하여 산업과 경제의 진흥을 백성들 스스로 담당하게 했다.
하네지는 토키노오야코(時之大屋子)와 같은 무학(無學)의 무녀(巫女)에게 날짜를 선택하게 하는 것을 금지하고, 중국의 역(曆)을 사용하도록 했다.[70]
5. 외교 정책
17세기 초부터 중국 대륙에 조공을 하러 가는 류큐 선박이 타이완을 거점으로 하는 네덜란드 선박으로부터 해적 행위를 당했다. 중국(명나라)과 적대 관계에 있던 네덜란드가 중국 선박과 같은 정크형인 류큐 선박을 공격한 것이다.[35] 이에 류큐는 1636년에 이 사태를 사쓰마 번에 호소했다. 사쓰마 번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과 협상하여 안전 보장의 표시가 되는 깃발과 통행증을 받아 류큐에 넘겨주었다. 류큐는 사쓰마 번으로부터 받은 네덜란드 깃발을 게양하고 타이완 근처를 항해함으로써 네덜란드로부터의 공격을 면했다.[35]
한편 1662년에는 명나라 멸망 후 청나라와 항쟁한 정씨 일족이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몰아내고 이곳을 새로운 항쟁의 거점으로 삼았다. 류큐는 1663년에 청나라와 책봉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정씨로부터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어 조공 시 공격 대상이 되었다.[37] 이러한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쇼 쇼켄은 류큐 선박의 항해 안전을 정씨에게 보장받기 위해 사쓰마 번에 의뢰했다. 네덜란드 때와 마찬가지로 나가사키 무역을 통해 정씨와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던 막번 체제 국가를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한 것이다.[38]
사쓰마 번과 나가사키의 노력으로 타이완 측과 협상이 성립된 사례도 있지만, 그 후에도 해적 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류큐는 사쓰마 번의 허가 하에 조공 시 무장하는 등의 자위 수단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39]
6. 평가
전쟁 전과 일본 복귀 전의 오키나와에 관한 여러 학문(오키나와학)은 오키나와인에 의한 자기 인식(오키나와 인식)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또한 오키나와인=일본인이라는 것, 더 나아가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1980년 이후가 되면, 지금까지와 같은 일본이나 인종에 규정되어 온 시점이 비판받고, 아시아 안에서 다른 국가와는 다른 역사를 가진 독립국이라는 시점에서의 오키나와학으로 변용해 간다[83]。
하지 조슈에 대한 평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예를 들어 전쟁 전의 연구자인 이하 후유는 "사려 깊은 경세가", "자국의 입장에 대한 자각이 강한 사람", "선견지명이 있어서 류큐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고 칭하며[84], 시마즈 침공 후, 류큐 관료들에게 야마토(일본) 정신의 함양을 알선하고, 스스로는 사쓰마와의 파이프 역할을 하며, 사쓰마의 지시에 따름으로써 일본 민족으로서 동화해 갔다고 하는, 일본이나 일본 민족으로의 동화라는 시점에서 하지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전후 7년째에 해당하는 1952년에 "하지 시치"의 교정을 행한 히가시온나 칸준은, 이하와 마찬가지로 하지를 "본토의 원류에 (류큐를) 복귀"시킨 인물로 위치지은 다음 "우리 향리의 현상이 게이초 종전 직후와 흡사하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고, "한 조각의 사심 없는 열혈 양식의 지도자"인 그가 존재했던 시마즈 침공 후와, 그가 존재하지 않는 전후를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85]。
한편, 복귀 후가 되면 타카라 쿠라요시는 "시책 수행을 위해 일관되게 구체적·실천적인 자세를 견지한 정치가", "주도면밀한 전술을 구사하는 논객"으로서 하지를 칭하며, 채온에 앞서 일본과는 궤를 달리하는 류큐의 "근세화"를 준비하고 "전통"을 형성한 인물[86]로 위치 지었다. 또한 타나 마사유키 등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왕국을 재건한 인물로서 하지를 위치짓고 있다[87]。이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합리주의자이며 류큐의 "전통"과 류큐 "근세"의 창출자라는 시점에서 하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6. 1. 긍정적 평가
쇼 쇼켄은 류큐 왕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류큐 왕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86][87] 《주잔세이칸》을 편찬하여 류큐의 역사를 정리하고, 유교적 이념에 기반한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도 힘썼다.[87] 사쓰마 번의 침입 이후 피폐해진 류큐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전쟁 전과 일본 복귀 전의 오키나와 학계는 오키나와를 일본의 일부로 증명하는 데 힘을 쏟았다.[83] 이하 후유는 쇼 쇼켄을 "사려 깊은 경세가", "자국의 입장에 대한 자각이 강한 사람"으로 칭하며,[84] 히가시온나 칸준은 "본토의 원류에 (류큐를) 복귀"시킨 인물로 평가했다.[85]
1980년대 이후 오키나와학은 아시아 내 다른 국가와는 다른 역사를 가진 독립국이라는 시점으로 변화했다.[83] 전후 오키나와 학계에서는 쇼 쇼켄을 류큐의 "근세화"를 준비하고 "전통"을 형성한 인물로 재평가하고 있다.[86] 타카라 쿠라요시는 쇼켄을 "시책 수행을 위해 일관되게 구체적·실천적인 자세를 견지한 정치가"로 칭했다.[86]
6. 2. 비판적 평가
쇼 쇼켄은 《주잔세이칸》에서 사쓰마 번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류큐 침공의 원인을 류큐의 탓으로 돌리는 등 친(親)사쓰마적인 역사관을 보여주었다는 비판이 있다.[83] 또한 신분제를 확립하고 사(士) 신분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과, 사찰 정리를 실시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종교 정책은 불교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84][85][86][87]6. 3.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쇼 쇼켄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류큐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국가를 재건하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83] 그의 개혁은 류큐 왕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그의 사후에도 류큐 왕국의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84][85] 이하 후유는 쇼 쇼켄을 "사려 깊은 경세가", "자국의 입장에 대한 자각이 강한 사람", "선견지명이 있어서 류큐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고 평가했다.[84] 히가시온나 칸준은 이하 후유와 마찬가지로 쇼 쇼켄을 "본토의 원류에 (류큐를) 복귀"시킨 인물로 평가했다.[85] 타카라 쿠라요시는 "시책 수행을 위해 일관되게 구체적·실천적인 자세를 견지한 정치가", "주도면밀한 전술을 구사하는 논객"으로 칭하며, 채온에 앞서 일본과는 궤를 달리하는 류큐의 "근세화"를 준비하고 "전통"을 형성한 인물로 평가했다.[86] 다만, 그의 친사쓰마적인 역사관과 신분제 강화 정책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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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良倉吉 (1989)
[69]
서적
高良倉吉 (1989)
[70]
서적
高良倉吉 (1989)
[71]
서적
高良倉吉 (1989)
[72]
서적
上原兼善 (1989B)
[73]
서적
上原兼善 (1990)
[74]
서적
安里進等編 (2004)
[75]
서적
田里修 (1989)
[76]
서적
知名定寛 (2008)
[77]
서적
知名定寛 (2008)
[78]
서적
知名定寛 (2008)
[79]
서적
知名定寛 (2008)
[80]
서적
鎌田出 伊藤陽寿 (2017)
[81]
서적
伊波普猷 (1916)
[82]
서적
羽地家家之傳物語
[83]
서적
豊見山和行 (2003)
[84]
서적
伊波普猷 (1916)
[85]
서적
東恩納寛惇 (1978)
[86]
서적
高良倉吉 (1998)
[87]
서적
田名真之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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