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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다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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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털링 다리 전투는 1297년 9월 11일,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루 머리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휴 드 크레싱엄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스털링 다리에서 벌인 전투이다. 좁은 다리 지형을 활용한 스코틀랜드군의 전술적 승리로, 잉글랜드군의 기병 돌격을 무력화시키고 다리를 건너던 잉글랜드군 선봉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임명되었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내 지배 지역을 상실하고 폴커크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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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다리 전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스털링 다리 전투
갈등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날짜1297년 9월 11일
장소스코틀랜드, 스털링, 스털링 다리
결과스코틀랜드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스코틀랜드 왕국
교전국 2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지휘관 1윌리엄 월리스
앤드루 드 모레이
지휘관 2존 드 워렌
휴 드 크레싱햄
병력 규모
병력 15,300 ~ 6,300명
병력 1 기병약 300명
병력 1 보병약 5,000 ~ 6,000명
병력 29,000명
병력 2 기병약 2,000명
병력 2 보병약 7,000명
사상자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기병 100명 전사
보병 5,000명 전사
기타 정보
영국 등록 전장UK 등록 전장
지정 날짜: 2011년 11월 30일
지정 번호:
게일어 이름Blàr Drochaid Shruighlea
일본어 이름スターリング・ブリッジの戦い

2. 배경

1296년, 서리 백작 존 드 와렌 6세가 던바 전투에서 버컨 백작 존 코민을 패배시켰다.[3] 존 발리올 국왕은 7월 10일 브레친에서 에드워드 1세 국왕에게 항복했고, 스코틀랜드의 토지 소유주들은 에드워드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3]

1297년, 앤드루 머리 경은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여름이 끝날 무렵 어쿼하트, 인버네스, 엘긴, 뱅프, 애버딘을 장악했다.[3] 윌리엄 월리스는 9월 던디 근처에서 머리에 합류하여 스털링으로 진군했다.[3] 스튜어트 레이드의 말에 따르면 스털링은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열쇠로 여겨졌다."[3]

윌리엄 월리스는 1297년 5월 잉글랜드에 반란을 일으킨 후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여러 곳에서 반란이 확산되었다. 총독 워렌은 이미 고령이었고 스코틀랜드의 기후를 싫어하여 대부분 잉글랜드에 머물렀는데, 이러한 반란 소식을 접하고도 처음에는 경시하여 대응이 늦었다. 그러나 9월에 잉글랜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중부로 진입했다. 이에 맞서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루 머리 경의 부대는 연합하여 스털링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잉글랜드군과 대치하였다.

3. 전투 경과

잉글랜드군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재무관 휴 드 크레싱엄이 지휘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윌리엄 월리스앤드루 머리가 이끌었다. 잉글랜드군은 스털링 다리를 건너 스코틀랜드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다리는 매우 좁아 한 번에 두 명의 기병만 지나갈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은 9월 11일 잉글랜드의 기사들과 보병들이 느린 속도로 다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3] 1296년의 무질서한 스코틀랜드군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월리스와 모레이는 스코틀랜드군이 견고한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훌륭히 통솔하고 있었다.[3]

헤임버그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의 두 지휘관은 "적의 대군이 몰려들어와 그들이 스코틀랜드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을 때까지" 기다렸다.[7] 4500명의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보병대, 그리고 기병대 몇백명으로 짜인 선봉대가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공격명령이 내려졌다.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높은 지대에서 빠른 속도록 스털링 다리로 내려왔고, 교두보에서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서리 남작의 전위대는 본대와 갈라져 흩어진 상태가 되었다. 강 북부에 있던 중무장 기병대들은 남쪽에 있는 분산된 자기 동료들을 구하려다 함정에 걸려 들었다. 요크셔 출신의 기사 마르마둑 트웽(Marmaduke Tweng)만이 침착하게, 무수한 창날들을 돌파하며 싸움을 치러 다리를 돌파, 탈출할 수 있었다. 살진 휴 드 크레싱엄을 포함하여 마리마둑을 따르던 기사 백여 명은 살해당했다.[3] 스코틀랜드군은 크레싱햄의 가죽을 벗겨내고 몸을 조각내어 승리의 상징물로 삼았다. 레너코스트 연대기(The Lanercost Chronicle)에 따르면 이때 윌리엄 월리스가[25]''"크레시암의 발꿈치살을 잘라내어 칼을 매는데 쓰는 수대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병의 피해가 컸는데 그 중에서도 웨일스 부대의 피해가 심했다. 갑옷을 벗을 수 있던 병사들은 헤엄을 쳐 겨우 살아남았다.

가장 유능한 전사이자 여전히 적지 않은 궁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서리 백작은 강 남쪽에 남아서, 아직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리 백작의 병력 대부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앞쪽으로 전열을 잘 유지한 상태라 스코틀랜드군은 승세를 몰아 남쪽으로 치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서리 백작은 이 시점에서 전의를 상실하여, 트웽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뒤에 스털링 성의 수비병들을 고립된 상태로 남겨두고 스코틀랜드 로우랜드(남부 저지대)를 스코틀랜드군 영향력에 놓아 둔 채 다리의 파괴를 명령한 뒤 베릭(Berwick)으로 물러났다.[9] 스코틀랜드의 하이 스튜어드(High Steward)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와 레녹스 백작 말콤(Malcolm, Earl of Lennox)은 서리 백작의 군대에 끼어 있었으나, 다리 북부에서 잉글랜드군이 대패하는 모습을 보고 퇴각했다. 잉글랜드 보급 마차들은 숲이 우거진 늪지대인 포우즈(The Pows)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와 다른 스코틀랜드 영주들에게 기습을 당했고, 많은 패잔병들도 이들에게 살해당했다.[9]

전투지점은 전투로부터 얼마 후에 세워진 오늘날 스털링 다리의 상류 쪽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전투는 윌리엄 월리스의 중대한 승리의 하나로 끝을 맺었다.

3. 1. 전투의 전술적 측면

스털링 다리 전투는 지형을 이용한 전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좁은 스털링 다리는 잉글랜드군의 주력인 중기병의 돌격을 무력화시켰다.[6][3]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과 웨일스군, 스코틀랜드 기사, 궁수, 보병으로 구성된 잉글랜드군이 강 남쪽에 진을 치고, 스코틀랜드군은 애비 크레이그에 진을 치고 강 북쪽의 부드러운 평지에서 우세한 위치를 점했다.[3] 잉글랜드군은 스털링 다리를 건너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스코틀랜드군은 이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공격했다. 1296년의 무질서한 모습은 이미 사라졌고, 월리스와 모레이는 스코틀랜드군이 견고한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훌륭히 통솔하고 있었다. [3]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높은 지대에서 빠른 속도로 스털링 다리로 내려와 교두보에서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헤임버그 연대기(Chronicle of Hemingburgh)에 따르면, 윌리스와 모레이는 "자신들이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많은 적들이 건너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7][3] 이 공격으로 서리 남작의 전위대는 본대와 갈라져 흩어졌으며, 강 북쪽에 있던 중무장 기병대는 분산된 동료들을 구하려다 함정에 걸려 들었다. 이 전투에서 요크셔 출신의 기사 마르마둑 트웽(Marmaduke Tweng)만이 침착하게, 무수한 창날들을 돌파하며 싸움을 치러 다리를 돌파, 탈출할 수 있었다.[3]

스코틀랜드군의 창병 전술은 잉글랜드 보병을 상대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스코틀랜드군은 다리 초입에 돌격하여 적 선봉대와 후속 부대의 연락을 차단했고, 고립된 잉글랜드군 선봉대는 와해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지휘관 크레싱엄의 전술적 실책은 잉글랜드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 왕의 재정업무를 맡고 있던 크레싱햄은 전쟁이 길어져 생길 불필요한 재정지출을 꺼려, 6명의 기병이 동시에 건널 수 있는 여울을 통해 기병대를 지휘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자는 리처드 룬디경(Sir Richard Lundie)의 제안을 무시하고 다리로 곧장 돌격할 것을 명했다.[6][3] 또한, 좁은 다리는 두 명의 기병만 나란히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지만, 가장 안전한 강을 건너는 곳이었기에, 9월 11일 아침, 크레싱엄 경, 마마듀크 스웬 경 그리고 리처드 월드그레이브 경이 이끄는 영국 기사와 보병들이 다리를 천천히 건너기 시작하자, 스코틀랜드군은 기다렸고, 영국군 전체가 다리를 건너는 데는 몇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4][6][3]

가장 유능한 전사이자 여전히 적지 않은 궁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서리 백작은 강 남쪽에 남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병력 대부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앞쪽으로 전열을 잘 유지한 상태라 스코틀랜드군은 승세를 몰아 남쪽으로 치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서리 백작은 전의를 상실하여, 스털링 성의 수비병들을 고립된 상태로 남겨두고 다리의 파괴를 명령한 뒤 베릭(Berwick)으로 물러났다.[9]

4. 영향

스털링 다리 전투는 잉글랜드의 완벽한 패배로 끝났으며, 보병이 기병보다 유리한 지형 조건을 활용한 스코틀랜드군의 전술적 승리였다.[14] 이 전투에서 앤드루 드 모레이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몇 주 후 사망한 것을 제외하면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3] 반면, 잉글랜드군은 기병 100명과 보병 5,000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4]

이 승리로 윌리엄 월리스는 큰 명성을 얻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이자 왕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16][17] 윌리엄 월리스는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하여, 잉글랜드, 더럼까지 약탈을 자행하는등 과감한 선공을 가했다.[3]

스코틀랜드의 첫 대승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고,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잉글랜드에 등을 돌리고 반란군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내 지배 지역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플랑드르에서의 전투를 중단하고 스코틀랜드 침공을 계획했으며, 이는 폴커크 전투로 이어졌다.[3]

4. 1. 전투 이후 윌리엄 월리스의 행보

스털링 다리 전투는 잉글랜드의 완벽한 패배로 끝났으며, 보병이 기병보다 유리한 지형 조건을 활용한 스코틀랜드군의 전술적 승리였다.[14] 이 전투에서 앤드루 드 모레이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몇 주 후 사망한 것을 제외하면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3] 반면, 잉글랜드군은 기병 100명과 보병 5,000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4]

이 승리로 윌리엄 월리스는 큰 명성을 얻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수호자(Guardian of Scotland)이자 왕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16][17] 윌리엄 월리스는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하여, 잉글랜드, 더럼까지 약탈을 자행하는등 과감한 선공을 가했다.[3]

스코틀랜드의 첫 대승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고,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잉글랜드에 등을 돌리고 반란군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내 지배 지역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플랑드르에서의 전투를 중단하고 스코틀랜드 침공을 계획했으며, 이는 폴커크 전투로 이어졌다.[3]

5. 픽션에서의 묘사

1995년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에서 스털링 다리 전투가 묘사되었지만, 감독 멜 깁슨(Mel Gibson; 주연 윌리엄 월리스 역할도 맡았다.)은 다리가 아닌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묘사하여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표현했다.[26] 특히 영화에서는 다리가 등장하지 않으며, 전투 전술은 배넉번 전투와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블라인드 해리(1492년 사망)는 그의 저서 ''영웅적이고 용감한 챔피언 윌리엄 월리스 경의 행적과 업적''(약 1470년)에서 스털링 다리 전투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참전 군대 규모를 과장하는 등 사실과 허구가 혼합되어 있다.[19] 블라인드 해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은 다리의 판자를 톱질하여 덫을 놓았고, 잉글랜드군이 다리를 건널 때 덫을 작동시켜 많은 병사를 익사시켰다. 또한 월리스가 창을 사용하여 잉글랜드군 지휘관 크레싱엄을 죽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월리스는 양손 검[게일어로 claidheamh dà-làimhgd, 더 일반적으로 claidheamh-mòrgd 또는 claymore는 큰 검을 의미함]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리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손 검은 월리스 기념탑에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20]

이러한 블라인드 해리의 이야기는 로버트 번스와 같은 후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1]

6. 역사적 평가와 의의

블라인드 해리가 쓴 윌리엄 월리스 경의 이야기의 영향력은 이 이야기가 처음 전해진 지 약 3세기 후에 쓴 시인 로버트 번스의 다음 진술에서 알 수 있다.

내가 사적으로 읽은 처음 두 권의 책은 길버트필드의 윌리엄 해밀턴이 현대화한 블라인드 해리의 ''윌리엄 월리스 경의 역사''와 ''한니발의 일생''이었고, 다시는 읽은 책 중 어떤 두 권보다 더 큰 기쁨을 주었다. 한니발은 내 젊은 생각에 그런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에 나는 모병 드럼과 백파이프 뒤를 따라 황홀경에 휩싸여 거닐며 내가 병사가 될 수 있을 만큼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바랐고, 월리스의 이야기는 내 정맥에 스코틀랜드인의 편견을 불어넣었는데, 그것은 생명의 수문이 영원한 안식 속에서 닫힐 때까지 거기에 끓어오를 것이다.[21]


스털링 다리 전투는 1995년 영화 ''브레이브하트''에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 전투와는 거의 닮지 않았다. 특히 영화에는 다리가 없다[22](주로 다리 자체 주변에서 촬영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

이 승리로 윌리엄 월리스의 명성은 높아졌고, 곧 기사 작위를 받아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이자 왕국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19] 앤드루 머리는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수 주 후 사망했다.[19]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최초의 큰 승리였으며, 스코틀랜드의 자신감 회복에 기여했다.[19] 이 전투 이후, 잉글랜드 편에 섰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많은 수가 반란군에 가담했고, 잉글랜드는 지배지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19]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플랑드르 전투를 중단하고 대응해야 했으며, 이는 폴커크 전투로 이어진다.[19]

스털링 다리 전투는 한국사에서 고려 시대 살수대첩과 비견될 만하다. 두 전투 모두 수적으로 열세인 군대가 지형을 이용, 적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살수대첩은 고구려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스털링 다리 전투는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지배에 맞서 싸운 중요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6. 1. 한국사와의 비교

스털링 다리 전투는 한국사에서 고려 시대 살수대첩과 비견될 만하다. 두 전투 모두 수적으로 열세인 군대가 지형을 이용, 적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살수대첩은 고구려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스털링 다리 전투는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지배에 맞서 싸운 중요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승리로 윌리엄 월리스의 명성은 높아졌고, 곧 기사 작위를 받아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이자 왕국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19] 앤드루 머리는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수 주 후 사망했다.[19]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최초의 큰 승리였으며, 스코틀랜드의 자신감 회복에 기여했다.[19] 이 전투 이후, 잉글랜드 편에 섰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많은 수가 반란군에 가담했고, 잉글랜드는 지배지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19]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플랑드르 전투를 중단하고 대응해야 했으며, 이는 폴커크 전투로 이어진다.[19]

참조

[1] 간행물 BBC History Magazine 2014-07
[2] 서적 The Wallace Book John Donald 2007
[3] 서적 Battles of the Scottish Lowlands Pen & Sword Books Limited 2004
[4] 웹사이트 The Battle of Stirling Bridge, 1297, Scotland's History, BBC http://www.bbc.co.uk[...] 2015-07-16
[5] 웹사이트 lundie.org http://www.lundie.or[...] 2018-03-29
[6] 웹사이트 The Battle of Stirling Bridge, Foghlam Alba http://www.education[...] 2015-07-16
[7] 서적 Battles of the Scottish Lowlands Pen & Sword 2004
[8] 웹사이트 Battle of Stirling Bridge, UK Battlefields Resource Centre http://www.battlefie[...] 2015-07-16
[9] 웹사이트 The Wars – Stirling Bridge, Stirling Council http://my.stirling.g[...] 2015-07-16
[10] 논문 Ancient Bridge, Stirling (Stirling parish) http://archaeologyda[...] 2011-12-14
[11] 논문 Stirling Ancient Bridge (Stirling; Logie parishes) http://archaeologyda[...] 2011-12-14
[12] 웹사이트 Battle of Stirling Bridge 2019-04-01
[13] 웹사이트 Inventory battlefields http://www.historic-[...] Historic Scotland 2012-04-12
[14] 서적 The Wallace Book John Donald 2007
[15] 서적 The Chronicle of Lanercost https://archive.org/[...] James Maclehose and Sons 2020-06-26
[16] 서적 The Wars of Scotland, 1214–1371, Volume 4 in The New Edinburgh History of Scotland Edinburgh University Press Ltd. 2004
[17] 서적 Scottish Battlefields, 500 Battles That Shaped Scottish History Tempus Publishing 2008
[18] 서적 British Battles on Land and Sea Cassell Petter & Galpin
[19] 서적 Sir William Wallace, His Life And Deeds By Henry The Minstrel in Modern Prose Glasgow 1910
[20] 서적 News Out of Scotland Heinemann 1926
[21] 서적 Robert Burns London and New York 1979
[22] 웹사이트 Mel Gibson versus history: how Braveheart got William Wallace so wrong https://www.telegrap[...] 2020-05-28
[23] 간행물 BBC History Magazine 2014-07
[24] 서적 The Wallace Book John Donald 2007
[25] 서적 Chronicle of Lanercost
[26] 영화 Brave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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