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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라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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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대공의 아들로,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 활동하다가 앙카라 전투 이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었으며,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았으며, 레사바 학파를 통해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427년 사냥 중 사망했으며,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그는 또한 저술가로, 《사랑에 대한 찬사》 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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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라자레비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나시야 수도원의 스테판 라자레비치 프레스코
마나시야 수도원의 스테판 라자레비치 프레스코
칭호'건축가 스테판 키테토르'
묘사'교회 건축가'
존경동방 정교회
왕조 정보
작위크네즈 (1389년–1402년), 전제공 (1402년–1427년)
선임자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후임자주라지 브란코비치
왕가라자레비치 가
아버지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어머니밀리차 흐레벨랴노비치 공주
출생일약 1377년
출생지모라비아 세르비아, 크루셰바츠
사망일1427년
사망지세르비아 전제공국, 글라바
매장지마나시야 수도원
종교세르비아 정교회
서명Подпись_Стефана_Лазаревича.jpeg
서명 설명인장
이름
이름스테판 라자레비치
다른 이름스테판 비소키 (스테판 키가 큰 자)
생애
활동 시기14/15세기

2. 배경과 가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모라비아 세르비아의 군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네마니치 가문의 방계 출신인 밀리차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이었다. 밀리차의 아버지 브라트코 네마니치는 스테판 네마냐의 장남인 부칸 네마니치의 직계 후손이었다.[3] 스테판은 슬하에 7명의 형제자매를 두었다.[3][4]

1405년 9월, 스테판은 레스보스의 영주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인 헬레나 가틸루시오와 결혼했다. 콘스탄티노스 철학자에 따르면, 스테판은 레스보스에서 아내를 처음 보았고, 프란체스코 2세는 그에게 딸들 중에서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이 결혼은 헬레나의 누이이자 황후인 이레네 가틸루시오의 조언과 참여로 이루어졌다.[5] 영국의 역사가 앤서니 럿트렐은 헬레나가 너무 어렸거나, 레스보스에 머물렀거나, 결혼 후 곧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6]

2. 1. 가계

스테판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네마니치 가문 출신인 밀리차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리차의 아버지인 브라트코 네마니치는 스테판 네마냐의 장남인 부칸 네마니치의 후손이다.[39][40][41] 스테판에게는 7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었다.[39][40][41]

스테판의 형제들과 자매들
스테판의 형제
이름수명작위
도브로보이(유년 시절 사망)
부크(?—1410)대공
스테판의 자매
이름수명혼인
마라(?—1426)부크 브란코비치, c. 1371[39][40][42]
옐레나(?—1443)주라지 2세 스트라치미로비치 발쉬치 (1385 — 1403), c. 1386[39][40]
산달리 흐라니치 (1392 — 1435), 1411
드라가나[41][42](?—?)이반 시슈만 (1371 — 1395) 또는 그의 아들 알렉산데르, c. 1386[42]
테오도라 (옐레나)(?—before 1405)[41]니콜라 2세 고르잔스키, c. 1387[39][40]
올리베라(c. 1378[39] — after 1443[40][41]/1444[39])바예지드 1세 (1389—1403), 1390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05년 9월에 옐레나(Jelena)와 혼인하였다. 옐레나는 요하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의 황후인 이레네 가틸루시오의 자매이자 레스보스의 제노바 출신 영주인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이었다. 이 혼인은 요하네스 7세가 그의 숙부인 마누엘 2세의 이름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지배하던 때인 1402년 콘스탄티노플에 스테판이 머무를 때 주선되었다. 옐레나와 스테판은 아이를 가지지 못했고 옐레나는 스테판이 지은 수도원의 어떠한 프레스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42]

2. 2. 형제자매

스테판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네마니치 가문 출신인 밀리차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이었다. 밀리차의 아버지인 브라트코 네마니치는 스테판 네마냐의 장남인 부칸 네마니치의 후손이다. 스테판에게는 7명의 다른 형제자매가 있었다.[39][40][41]

스테판의 형제자매[39][40][41]
구분이름수명비고
형제도브로보이(유년 시절 사망)
부크(?–1410)대공
자매마라(?–1426)부크 브란코비치와 1371년경 혼인[39][40][42]
옐레나(?–1443)1386년경 주라지 2세 스트라치미로비치 발쉬치 (1385 – 1403)와 혼인[39][40], 1411년 산달리 흐라니치 (1392 — 1435)와 혼인
드라가나[41][42](?–?)1386년경 이반 (1371 — 1395) 또는 그의 아들 알렉산데르와 혼인[42]
테오도라 (옐레나)(?–1405년 이전)[41]1387년경 니콜라 2세 고르잔스키와 혼인[39][40]
올리베라(1378년경[39] – 1443년 이후[40][41]/1444년[39])1390년 바예지드 1세 (1389–1403)와 혼인


2. 3. 혼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05년 9월에 옐레나와 혼인하였다.[42] 옐레나는 레스보스의 제노바 출신 영주인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이자, 요하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의 황후인 이레네 가틸루시오의 자매였다. 이 혼인은 마누엘 2세의 이름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다스리던 요하네스 7세가 주선하여, 140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스테판이 머무를 때 이루어졌다.[42]

콘스탄티노스 철학자에 따르면, 스테판은 레스보스에서 처음 아내를 보았고, 프란체스코 2세는 그에게 딸들 중에서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이 결혼은 헬레나의 누이이자 황후인 이레네 가틸루시오의 "조언과 참여"로 이루어졌다.[5]

옐레나와 스테판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옐레나는 스테판이 지은 수도원의 어떠한 프레스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42] 영국의 역사가 앤서니 럿트렐(Anthony Luttrell)은 "결혼이 성립될 만큼 그녀가 너무 어렸을 수도 있고, 아마도 레스보스에 머물렀고 세르비아로 여행을 가지 않았을 것이며, 결혼 후 곧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결론짓는다.[6]

3. 생애

베오그라드 요새의 전제공 스테판의 탑.


1412년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노보브르도를 위해 만든 광산 법의 16세기 복사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대공의 아들로서 1389년에 권좌를 계승하였다. 그는 로비네 전투(1395년), 니코폴리스 전투(1396년), 앙카라 전투(1402년)에 오스만의 봉신으로서 참전했다.[44]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아나톨리아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적으로 붕괴되자, 세르비아 군대를 이끌고 살아남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귀국하는 길이 막히자, 비잔티움 황제에게서 전제공 작위를 받았다. 스테판의 첫 정책은 오스만의 봉신에서 벗어나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스테판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의 종속권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마치바를 넘겨받았다. 1402년 11월, 트리폴레 전투에서 주라지 브란코비치 군대(술레이만이 파견한 오스만군 포함)를 격퇴하고, 다뉴브 강에 위치한 골루바츠 요새를 지기스문트에게서 얻어냈다. 1403년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1690년 대튀르크 전쟁 때 파괴된 성채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전제공 스테판의 탑뿐이다.[45] 1404년, 지기스문트는 제문, 슬란카멘, 쿠피니크, 미트로비차, 베체이, 벨리키베치케레크를 포함한 오늘날의 보이보디나와 베오그라드의 판노니아 일부를 스테판에게 주었다. 1417년에는 아파틴도 그의 영토로 언급되었다.

1412년 세르비아의 경제 중심지였던 노보브르도의 광산법을 발표하였다. 그의 유산으로는 마나시야 수도원과 서적 수집, 번역, 전사의 중심지였던 레사바 학파가 있다.[45] 스테판은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남기고 1427년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8월 1일 그를 기념하고 있다. 그는 코포린 수도원에 묻혔다가 마나시야 수도원으로 옮겨졌다.[45]

3. 1. 초기 생애와 즉위

스테판이 태어난 크루셰바츠 요새의 망루 탑 유적


크루셰바츠에 있는 스테판 라자레비치 기념비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공작의 아들로, 1377년경 그의 수도 크루셰바츠에서 태어났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아버지 라자르 공작이 전사한 후, 스테판은 세르비아 공작이 되었으나,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 밀리차 공주가 섭정을 하였다.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 공작 라자르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가 모두 전사한 드문 사건이었다.[8]

스테판은 주변 강대국들의 압박 속에서 즉위했다.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 스테판의 누이 마라의 남편이자 강력한 세르비아 귀족인 브란코비치 붑(Vuk Branković)이 있었다. 서쪽에는 보스니아의 트르트코 1세가, 북쪽에는 지기스문트 왕이 이끄는 헝가리가 있었다.

1389년 7월, 지기스문트는 세르비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사절을 보냈으나, 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해 가을, 지기스문트는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크라구예바츠 인근 요새들을 점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르비아 총회는 1390년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고 바예지드 1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군대를 파견하며, 매년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또한, 스테판은 여동생 올리베라를 바예지드 1세에게 보내야 했다.

1390년 여름,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했다.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의 원정에 참여하며 바예지드 1세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를 재건했다.

1392년 오스만 제국은 스코플레를 점령하고 북진하여, 브란코비치 붑을 굴복시켰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참전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바예지드 1세는 포로로 잡혔다. 스테판은 티무르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의 누이 올리베라는 석방되어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3. 2. 오스만 제국의 봉신 시절

스테판은 라자르 대공의 아들로서 1389년에 권좌를 계승하였다. 1395년 로비네 전투,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1402년 앙카라 전투에 오스만의 봉신으로서 참전했다.[44]

1402년, 티무르아나톨리아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 붕괴된 후, 스테판은 앙카라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를 이끌고 살아남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귀국하는 길이 막히자, 비잔티움 황제에게서 전제공 작위를 받았다. 스테판의 첫 정책은 오스만의 봉신에서 벗어나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스테판에게 충성하지 않았던 그의 조카 주라지 브란코비치바예지드 1세의 아들 술레이만과 함께 스테판에 대항하였다.

스테판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었다. 지기스문트는 스테판이 헝가리의 종속권을 받아들일 경우, 스테판이 살아있는 동안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마치바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1402년 11월, 트리폴레 전투에서 브란코비치의 군대(술레이만이 파견한 오스만군 포함)를 격퇴했다. 이 시기에 스테판은 다뉴브 강에 위치한 골루바츠의 주요 요새들을 지기스문트에게서 얻어냈다. 1403년 그는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1690년 대튀르크 전쟁 때 파괴된 성채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전제공 스테판의 탑뿐이다.[45] 1404년, 지기스문트는 제문, 슬란카멘, 쿠피니크, 미트로비차, 베체이, 벨리키베치케레크를 포함한 오늘날의 보이보디나와 베오그라드의 판노니아 일부를 스테판에게 주었다. 1417년에는 아파틴도 그의 영토로 언급되었다.

그의 통치 시기, 1412년 세르비아의 경제 중심지인 노보브르도의 광산법을 발표하였다. 그의 유산으로는 마나시야 수도원과 서적 수집, 번역, 전사의 중심지였던 레사바 학파가 있다.[45]

1393년, 스테판은 성년이 되어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류보스틴야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같은 해, 바예지드 1세는 불가리아 봉신들을 다스렸고, 벨리코 트르노보가 포위되고 불가리아는 황폐화되었다. 많은 불가리아 학자들이 세르비아를 포함한 인근 기독교 국가들로 피난하였다.

1393년 말과 1394년 초, 바예지드 1세는 세레스에서 기독교 봉신들을 소집했다. 비잔티움 자료에 따르면, 봉신들 중에는 스테판, 황제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 그의 조카 요한 7세, 그의 형제 테오도로스 1세, 세르비아 영주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가 있었다. 바예지드 1세는 이 회의에서 봉신들을 죽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려 했으나, 명령을 즉시 실행하지 않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 후 일부는 귀국하고 나머지는 테살리아테살로니키 (4월 12일) 정복을 완료하였다.

1394년 가을, 바예지드는 발라키아 호이보데 미르체아 1세에 대한 원정을 위해 군대를 모았다. 이 원정에서 스테판은 세르비아 중기병을 직접 이끌었고, 세르비아 귀족들인 마르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 콘스탄틴 발시치가 각자의 군대를 이끌었다. 1395년 5월 17일, 피테슈티 근처에서 로비네 전투가 벌어졌고, 발라키아가 승리하였다.[9] 전투에서 마르코와 드라가시가 사망하였고, 바예지드는 그들의 땅을 합병했다. 철학자 콘스탄티노스에 따르면, 전투 전 마르코는 드라가시에게 "나는 기독교인들을 돕고 이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자 중 하나가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오스만 군대는 비딘을 점령하고, 1396년 여름 세르비아 분견대의 지원을 받아 바나트로 진군하여, 부크 브란코비치의 땅을 공격하고 프리슈티나와 함께 그 대부분을 정복했다.

아이언 게이트


로비네 전투의 승리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및 기타 유럽 국가들의 군대가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 미르체아 1세, 그리고 다뉴브 강으로 진입하여 육지의 군대를 지원할 베네치아 함대에 합류하는 대규모 십자군을 촉발시켰다. 십자군은 헝가리에 집결한 후 다뉴브 강을 건너 비딘을 점령하고, 다뉴브 강을 따라 진군했다. 대규모 오스만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니코폴리스가 포위되었다. 이 포위 공격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봉쇄를 깨뜨려 바예지드가 군대를 다뉴브 강으로 보내 플로브디프 근처에서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중기병과 합류하게 만들었다.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가 벌어져 십자군이 완전히 궤멸되었다. 십자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지휘부가 부족하여 전장에서 협조가 부족했고, 오스만 군대의 전투 방식에 익숙하지 않고 무지했다. 초기 십자군의 성공 이후, 오스만 군은 반격을 시작했고, 헝가리 기사들의 참전 후에 끝났는데, 헝가리 기사들은 십자군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의 전환점에서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직접 이끄는 세르비아 중기병이 헝가리 전열을 돌파하여 지기스문트 왕을 포위하고 니콜라스 2세 가라이의 헝가리 깃발 부대를 공격했다. 가라이의 부대가 흩어졌는데, 이는 전투의 진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부 십자군은 지기스문트가 죽고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고, 헝가리 지휘관들은 지기스문트에게 전투가 사실상 패배했고 철수하는 것이 낫다고 설득했다. 그 후 십자군의 전열이 무너지고 대학살이 벌어졌다.

니코폴리스 전투 (장 프로아사르가 1398년에 그린 그림)


일부에 따르면, 세르비아군은 바예지드 군대의 좌익에 있는 숲에 숨어 있다가 헝가리군을 기습 공격했다고 한다. 슈테판 2세 라크피와 미르체아 1세가 스테판의 공격 직전에 자신의 군대와 함께 전장에서 철수하여 지기스문트를 지원 없이 남겨두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기스문트는 다뉴브 강의 베네치아 함선으로 어부의 배를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스테판이 그가 배에 오를 충분한 시간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 스테판이 지기스문트를 구출한 것이 스테판이 나중에 용의 기사단에 들어가게 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니코폴리스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발칸 기독교인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비딘은 파괴되었고, 아테네는 점령되었고(1397년), 모레아 데스포트국은 다시 한번 황폐화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사실상 불가피해졌으며, 부크 브란코비치의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령되었다. 부크 브란코비치는 포로로 잡혔고 곧 감옥에서 사망했다(1397년). 그의 지역 대부분은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통제하에 넘겨졌고, 소규모 지역(부치트른 중심)은 그의 아내 마리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남겨졌으며, 오스만은 직접 통치하에 전략적 요충지를 유지했다. 또한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로 진군하여 특히 제문(황폐화됨)과 스렘스카 미트로비차(불타 버리고 인구가 이주함)의 남부 지역을 약탈했다.

스테판 공과 브란코비치 가문의 관계는 역사적 자료에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부크 브란코비치가 코토르와 라구사 공화국에 남겨둔 막대한 자금으로 이전 영토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다. 1402년 초, 그들의 영토는 코소보, 폴림례, 스예니차, 브르스코보 일부를 포함했고, 그해 봄부터 그들은 스테판 공과 같은 책임을 지닌 바예지드 1세의 봉신이 되었다.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지역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즈베찬, 옐레치, 글루하비차, 그리고 3월에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국가의 일부였던 프리슈티나가 있었다.

부크와 스테판 (류보스틴야 수도원의 프레스코화, 1402~1405년)


아시아 소아시아와 동남유럽의 큰 사건 변화는 티무르(타메를란)의 지휘 아래 타타르의 침략으로 인해 발생했다.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는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15]

오스만 군대의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전투 시작 전에 티무르 편으로 변절한 아나톨리아 출신의 투르크와 타타르 기병 때문이었다.[15] 이로 인해 티무르의 군대는 바예지드의 좌익을 돌파하고 술탄과 예니체리(약 1만 명[16])가 위치한 중앙을 포위할 수 있었다. 우익에는 바예지드의 봉신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쥬라지 브란코비치와 그의 형제 그르구르, 스테판의 형제 브크, 그리고 우익 사령관이기도 했던 스테판이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 싸웠고, 이는 티무르의 존경을 불러일으켰다. 연대기 작가 두카와 여러 당대인들에 따르면, 기병을 포함한 창으로 무장한 5000명의 중무장 병사들이었던 스테판 공과 그의 기사들은[16] 적의 전열을 반복적으로 공격하여 그의 주인 바예지드 1세를 적대적인 환경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그는 결국 성공했지만, 바예지드는 후퇴하기를 거부했고, 그 후 스테판은 그의 아들 술레이만 첼레비를 데리고 타타르 무리의 끊임없는 공격 속에서 부르사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연대기 작가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는 "세르비아인들은 진정한 영웅처럼 싸웠고, 각자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하며, "그들은 타타르를 큰 활기로 공격하여 전투에서 그들을 크게 압도했다"고 덧붙였고, 세르비아의 투쟁에 대해서는 앙카라 근처에 있는 세르브-가지(세르비아 승자)라는 지명이 증거가 된다.[17]

전투 중 스테판 공은 부상을 입었고, 그레고리 브란코비치는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다. 한편, 바예지드는 그의 병사들, 그의 아들 무사, 그리고 스테판의 누이 올리베라가 있던 그의 하렘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스테판이 바예지드에 대한 봉신 의무를 존중한 이유 중 하나는 헝가리의 압력이 임박한 상황에서 세르비아-오스만 동맹을 강하게 유지하려는 욕망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스테판의 누이인 올리베라 데스피나가 술탄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스테판과 티무르 사이에 체결된 협정을 통해 석방되었다. 티무르가 올리베라의 형제 스테판을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몸값은 지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녀는 세르비아(1403년 봄)로 돌아왔다. 감옥에 갇힌 세르비아인들은 사마르칸드로 끌려가 건설 작업에 종사했다. 한편, 티무르의 군대는 이미 1403년에 소아시아를 떠났고, 티무르 자신은 1405년 초 중국 원정 중에 사망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바예지드의 포로 생활과 그 후 사망으로 그의 아들들 사이에 왕위를 놓고 내전이 일어났다.

부르사에서 스테판과 그의 형인 부크 라자레비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는데, 이곳은 수년간의 오스만 제국의 봉쇄 후에 해방되었다. 요한 7세 팔라이올로고스는 1402년 8월 스테판 공작에게 비잔티움의 고위 칭호인 데스포트를 수여했는데, 이는 비잔티움의 계급에서 황제 바로 아래였다.[15] 게다가 스테판은 제노바의 레스보스 지배자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인 헬렌 가틸루시오와 결혼했다.

라자레비치 형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동안 그들은 브란코비치 가문과 공개적인 갈등을 빚었다. 스테판의 명령에 따라 듀라지 브란코비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후 도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브로 오르비니와 같은 후대의 여러 편년사가들은 듀라지가 유럽 지역의 오스만 제국을 지배한 바예지드 1세의 아들 술레이만에 합류하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9월에 감옥에서 탈출한 후 술레이만에게 가서 라자레비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스테판의 세르비아 귀환은 오스만 제국의 적대 행위로 인해 방해받았다. 귀환하는 세르비아 군대는 아드리아노플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두 형제와 약 260명의 남은 병사들은 레스보스에 잠시 머문 후 세르비아로 향했다. 그들의 첫 번째 기착지는 스테판의 누이 옐레나의 남편인 듀라지 2세 발시치가 통치하는 제타였다. 듀라지 2세는 그의 수도인 울치니에서 그들을 맞이했고, 그 후 스테판은 브란코비치와의 대결을 위한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테판의 어머니는 세르비아에서 군대를 모았고, 동시에 브란코비치와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의 도로를 장악하여 스테판의 귀환을 막았다.

3. 3. 세르비아 전제공 (1402-1427)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대공의 아들로 1389년에 권좌를 계승하였다. 1402년 앙카라 전투티무르아나톨리아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적으로 붕괴된 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비잔티움 황제에게서 전제공 작위를 받았다.[44] 스테판의 첫 정책은 앙카라 전투의 이점을 활용하여 오스만의 봉신에서 벗어나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스테판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으면서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받았다. 헝가리의 종속권을 받아들일 경우, 스테판이 살아있는 동안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마치바를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1402년 11월 트리폴레 전투에서 브란코비치의 군대(술레이만이 파견한 오스만군 포함)를 격퇴시킨 스테판은 다뉴브 강에 위치한 골루바츠 요새를 지기스문트에게서 얻어냈다.[45] 1403년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성채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했으며, 1690년 대튀르크 전쟁 기간에 파괴되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전제공 스테판의 탑뿐이다.[45] 1404년 지기스문트는 제문, 슬란카멘, 쿠피니크, 미트로비차, 베체이, 벨리키베치케레크를 포함한 오늘날의 보이보디나(및 오늘날 베오그라드의 판노니아 일부)를 스테판에게 주었다. 1417년 아파틴도 그의 영토로 언급됐다.[45]

그의 통치 시기인 1412년, 세르비아의 경제 중심지였던 노보브르도의 광산법을 발표하였다. 그의 유산으로는 마나시야 수도원과 서적 수집, 번역, 전사(베껴쓰기)의 중심지였던 레사바 학파가 있다.[45]

1403년 또는 1404년 초, 스테판은 시트니차(Sitnica) 강 주변 브란코비치의 영토를 공격한 후,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오토만 제국의 지배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떤 도시와 지역을 탈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르비아 동부와 코소보를 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브란코비치와 평화를 맺었고, 어머니를 통해 술레이만과도 화해했다.

벨그라드 점령 직후, 1397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된 벨그라드의 요새를 재건하고 도시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1405년 초, 수도를 크루셰바츠(Kruševac)에서 벨그라드로 옮겼다. 같은 해 9월, 헬레나 가틸루시오(Helena Gattilusio)와 결혼했지만, 두 달 후인 11월 11일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강력한 지원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의 상황은 안정되었고 번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같은 해 12월 2일 보라치에서 발행된 두브로브니크(Dubrovnik)(라구사 공화국(Republic of Ragusa)) 상인들의 거래 특권에 대한 칙령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05년 초, 베네치아 지배에 반대하는 스쿠타리 지역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스테판의 조카 발샤 3세(Balša III)가 개입하여, 아버지 Đurađ Stracimirović Balšić)가 베네치아에 넘긴 도시들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회복하려고 했다. 스테판은 평화 협상 중재자로 나섰지만, 여러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1408년 12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은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을 창설했고,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첫 번째 기사였다. 그는 부다에서 열린 기사단을 위한 의식에 참석했고, 용의 상징은 그의 궁정에도 있었다.

16세기 후반 무사와 술레이만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스테판과 무사는 술레이만과의 갈등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동맹 관계를 맺었다. 스테판은 비트코 공작을 통해 먼저 무사의 군대를 견제한 후 동맹을 맺는 협상을 시작했다.[11] 스테판 외에도 브란코비치 가문과 블라트코 라자레비치도 무사에게 합류했다. 1410년 초 갈리폴리가 점령되었고, 2월 13일에는 술레이만의 얌볼을 공격하여 수비군 베일러베그 시난을 물리쳤다.[15] 이로 인해 술레이만은 유럽으로 돌아와 무사와 맞서 싸워야 했다.

골루바츠 요새 전경


비잔티움 황제 만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술레이만을 지원했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배를 제공했다. 스테판과 무사는 술레이만의 군대가 유럽으로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갈라티아에서 함대를 공격했지만, 일부 배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을 뿐, 술레이만의 군대는 여전히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1410년 6월 15일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성벽 앞, 황금각 기슭의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무사의 군대는 패배했고, 스테판은 전투에서 철수했다.[18] 갈라티아로 향하던 스테판을 위해 비잔티움 황제 만누엘은 배를 보냈고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갔다.[19] 콘스탄티노플은 스테판을 위한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고,[11] 만누엘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데스포트 칭호를 확인하고 데스포트의 지위를 나타내는 왕관을 수여했다.[11] 스테판은 흑해와 도나우 강을 통해, 미르체아 공작의 영지를 거쳐 골루바츠[11]에 7월 말이나 8월 초에 도착했다.[18]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승리한 술레이만은 스테판을 폐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무사는 세르비아의 스테판에게 은퇴했고,[11] 1411년 초 세르디카에서 술레이만의 수비군을 물리쳤다.[15] 술레이만은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치다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당했고(2월 17일), 무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역 통치자가 되었다.

메흐메트 1세 술탄


무사 첼레비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1411년 말까지 스테판과 스코페, 키우스텐딜 베일러베이들이 무사의 영토를 공격했다.[11] 1412년 초, 무사는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노보 브르도로 진군했으나, 스테판의 군대 도착 소식을 듣고 테살로니키테살리아로 갔다.

1413년, 무사는 스브를리그와 소코 그라드를 공격하여 함자 베이를 처형하고, 모라바 계곡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다.[20] 스테판은 지기스문트와 그의 사위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 군대를 모았고, 크루셰바츠 근처에서 메흐메트 1세의 사령관들과 만났다.[18] 1413년 7월 15일, 카무를루 전투에서 무사의 군대는 패배했고, 무사는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스테판과 듀라지는 메흐메트 1세의 지배를 인정했고, 메흐메트 1세는 스테판에게 풍부한 선물과 즈네폴레 요새, 코프리얀 지역을 주었다.[18]

스레브레니차 요새 유적


지기스문트 1세와 스테판의 협력은 1411년까지 계속되었다. 스테판은 지기스문트로부터 헝가리의 옛 영토를 받았다.[11] 늦여름, 지기스문트 1세는 보스니아의 왕 및 귀족들과 평화를 맺었다. 스레브레니차는 아마도 그 해에 데스포트 스테판에게 넘어갔을 것이다.[11] 연말에 스테판의 누이 옐레나는 산달리흐 흐라니치 코사차와 재혼했다. 이듬해 5월, 스테판은 유럽 귀족들의 대규모 회의에 참석했다.

동시에 스테판의 누이 마라는 그와 연락을 취했고, 아들 주라지를 대신하여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시키려 했고, 성공했다. 1411년 가을 무사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 근처 셀림브리아 마을을 공격했다. 그 후 테살로니키에서 그는 1412년 가을 세르비아로 돌아와 삼촌 스테판과 화해하여,[11] 세르비아를 분열시켰던 두 가문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조카인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남기고 1427년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8월 1일 그를 기념하고 있다. 그는 코포린 수도원에 묻혔다가 마나시야 수도원으로 옮겨졌다.[45]

3. 3. 1. 헝가리와의 동맹

티무르아나톨리아 침공 이후 1402년에 세르비아 전제공이 된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에서 벗어나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기 위해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제안을 수용했다. 헝가리의 종속권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스테판은 살아있는 동안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마치바를 넘겨받기로 했다.[45]

1402년 11월 트리폴레 전투에서 브란코비치의 군대(술레이만이 파견한 오스만군 포함)를 격퇴시킨 스테판은 골루바츠 요새를 지기스문트에게서 얻어냈다.[45] 1403년 그는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성채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690년 대튀르크 전쟁 기간 파괴되었고, 오늘날에는 전제공 스테판의 탑만이 남아있다.[45]

1404년, 지기스문트는 제문, 슬란카멘, 쿠피니크, 미트로비차, 베체이, 벨리키베치케레크를 포함한 오늘날의 보이보디나(및 오늘날 베오그라드의 판노니아 일부)를 스테판에게 주었다. 1417년에는 아파틴도 그의 영토로 언급되었다.[45]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용기사단의 최초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데스포트 스테판 시대의 베오그라드 요새 일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 안토니오 피사넬로 1433


데스포트 스테판의 문장

3. 3. 2. 내분과 갈등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대공의 아들로 1389년에 권력을 이어받았다.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황제에게 전제공 작위를 받았다.[44] 그의 초기 정책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나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 주라지 브란코비치바예지드 1세의 아들 술레이만과 손을 잡고 스테판에게 대항했다.

스테판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1402년 11월 트리폴레 전투에서 브란코비치의 군대를 격파했다.[45] 1403년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요새를 건설했으며, 마나시야 수도원을 건립하고 레사바 학파를 조직했다.[45]

1403년 또는 1404년 초, 스테판은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지역을 공격하여 세르비아 동부와 코소보 지역을 회복했을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브란코비치와 평화를 맺고 술레이만과도 화해했다. 1405년, 헬레나 가틸루시오(Helena Gattilusio)와 결혼하였고, 두브로브니크(Dubrovnik)(라구사 공화국(Republic of Ragusa))와 상인 특권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여 칙령을 발표하였다.

1405년 초, 스쿠타리 지역에서 베네치아 지배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스테판의 조카 발샤 3세(Balša III)가 개입했다. 스테판은 평화 협상 중재자로 나섰지만, 1408년 6월에 체결된 평화 협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갈등은 계속되었다.

1408년 12월, 스테판은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의 첫 번째 기사가 되었고, 그의 궁정에도 용의 상징이 있었다.

1408년 말, 스테판은 동생 부크와 갈등을 빚었다. 부크는 술레이만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1409년 초 오스만 군대가 세르비아로 진입했다. 스테판은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았지만, 격렬한 전투 끝에 후퇴하여 베오그라드에 갇혔다. 결국 스테판은 동생과 협상하여 국가를 분할했고, 부크는 남부 지역을 통치하며 술레이만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13]

스테판과 부크 (루데니차(Rudenica) 수도원 프레스코화, 1402~1405년)


1409년, 술레이만은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그의 형제 무사 첼레비는 유럽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스테판은 무사와 동맹을 맺었고, 1410년 초 무사는 갈리폴리를 점령하고 술레이만의 군대를 격파했다.[15] 술레이만은 비잔티움 황제 만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지원을 받아 유럽으로 돌아왔고, 스테판과 무사는 술레이만의 군대 수송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410년 6월 15일,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무사의 군대는 패배했고, 스테판은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했다.[19] 만누엘 2세는 스테판에게 성대한 환영식을 열고 데스포트 칭호를 확인해주었다.[11] 이후 스테판은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술레이만은 스테판을 폐위시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1411년 초 무사는 술레이만의 군대를 물리치고 술레이만을 살해했다. 무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역 통치자가 되었다.

3. 3. 3.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411-1413)

1393년, 스테판은 성년이 되어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수녀가 되어 류보스틴야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그 해 바예지드 1세는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의 연루 의혹으로 불가리아 봉신들을 다스렸고, 벨리코 트르노보가 포위되면서 불가리아 통치자이자 스테판의 매부였던 이반 시시만이 위기에 처하자 많은 불가리아 학자들이 세르비아를 포함한 인근 기독교 국가들로 피난하였다.[9]

1393년 말과 1394년 초, 바예지드 1세는 세레스에서 기독교 봉신들을 소집했는데, 여기에는 스테판, 황제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 그의 조카 요한 7세, 모레아의 테오도로스 1세, 세르비아 영주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 등이 포함되었다. 바예지드 1세는 이 회의에서 봉신들을 죽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일부는 귀국시키고 나머지는 테살리아테살로니키 정복에 활용하였다.

1394년 가을, 바예지드는 발라키아 호이보데 미르체아 1세에 대한 원정을 위해 군대를 모았고, 스테판은 세르비아 중기병을 직접 이끌었다. 세르비아 귀족들인 프린스 마르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 콘스탄틴 발시치도 참전했다. 1395년 5월 17일 로비네 전투에서 발라키아가 승리했지만, 마르코와 드라가시가 사망하고 바예지드는 그들의 땅을 합병했다.[9] 철학자 콘스탄티노스에 따르면, 마르코는 전투 전 "나는 기독교인들을 돕고 이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자 중 하나가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9]

이후 오스만 군대는 비딘을 점령하고, 1396년 여름 세르비아 분견대의 지원을 받아 바나트로 진군하여 프리슈티나를 포함한 부크 브란코비치의 땅 대부분을 정복했다. 로비네 전투의 승리는 지기스문트 황제가 주도하는 대규모 십자군을 촉발시켰고, 이들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중기병은 헝가리 전열을 돌파하고 지기스문트 왕을 포위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0] 요한 실트베르거는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묘사하며, 그들이 헝가리 깃발을 짓밟고 부수었다고 기록했다.[10]

니코폴리스 전투의 패배는 발칸 기독교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아테네가 점령되고(1397년), 모레아 데스포트국은 황폐화되었으며, 부크 브란코비치의 지역은 오스만에게 점령되었다. 부크 브란코비치는 포로로 잡혀 사망했고(1397년), 그의 지역 대부분은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통제하에 놓였다.

1398년 1월, 오스만 제국은 보스니아 왕국을 공격했으나, 혹독한 겨울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1] 같은 해, 일부 귀족들은 스테판을 왕위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노박 벨로크르비치 공작과 니콜라 조이치 공작은 스테판이 헝가리와 관계를 맺고 오스만에 대항하려 한다고 고발했으나, 스테판은 음모를 알고 노박 공작을 살해했다. 오스트르비차로 도망친 니콜라 조이치는 수도사가 되어 목숨을 건졌다.[12]

스테판의 어머니와 예피미야 수녀는 바예지드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스테판은 바예지드를 만나 자신을 변호했다. 바예지드는 스테판을 존중했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스테판은 바예지드에게 "나는 당신을 가장 크고 총애하는 아들로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를 얻었다.[14]

1408년 말, 스테판은 그의 동생 부크와 갈등을 빚었다. 부크는 술레이만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1409년 초 술레이만의 오스만 군대가 세르비아로 진입하여 프리슈티나 근처를 파괴했다.[11] 스테판은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아 맞섰고, 격렬한 전투 끝에 베오그라드에 틀어박혔다. 결국 스테판은 동생과 협상하여 국가를 분할했고, 부크는 남부 지역을 통치하며 술레이만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1409년, 술레이만은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그의 형제 무사 첼레비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술레이만에 맞서 싸웠다. 스테판과 무사는 동맹을 맺었고, 스테판 외에도 브란코비치 가문과 블라트코 라자레비치도 무사에게 합류했다. 1410년 초 갈리폴리가 점령되었고, 2월 13일에는 술레이만의 수비군을 물리쳤다.[15] 술레이만은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지원을 받아 유럽으로 돌아왔고, 무사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빠르게 술레이만 쪽으로 돌아섰다.

스테판과 무사는 술레이만의 군대가 유럽으로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갈라티아에서 함대를 공격했지만, 술레이만의 군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1410년 6월 15일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무사의 군대는 패배했고, 스테판은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했다. 만누엘 2세는 스테판에게 성대한 환영식을 열고 데스포트 칭호를 확인해주었다.[11] 스테판은 흑해와 도나우 강을 통해 골루바츠[11]에 7월 말이나 8월 초에 도착했다.[18]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승리한 술레이만은 스테판을 폐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1410년 7월 11일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무사는 패배했고, 라자르 브란코비치는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나라로 돌아와 동생 블라트코 왕자가 다스렸던 남부 지역을 포함하여 나라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무사는 세르비아의 스테판에게 은퇴했고, 1411년 초 세르디카에서 술레이만의 수비군을 물리쳤다.[15] 술레이만은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치다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당했고(2월 17일), 무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무사 첼레비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1411년 말까지 스테판과 스코페, 키우스텐딜 베일러베이들이 무사의 영토를 공격했다.[11] 1412년 초, 무사는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노보 브르도로 진군했으나, 스테판의 군대 도착 소식을 듣고 테살로니키테살리아로 갔다.

1413년, 무사는 스브를리그와 소코 그라드를 공격하여 함자 베이를 처형하고, 모라바 계곡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다.[20] 스테판은 지기스문트와 그의 사위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 군대를 모았고, 크루셰바츠 근처에서 메흐메트 1세의 사령관들과 만났다.[18] 도브리치에서 그들은 무사 지지자들과 합류했고, 오브체 폴레로 이동했다. 스테판,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 요반 모로비치는 스콥스카 크르나 고라에 군대를 남겨두고 세르비아로 돌아갔고,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지휘를 맡았다.[11]

1413년 7월 15일, 카무를루 전투에서 무사의 군대는 패배했고, 무사는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스테판과 듀라지는 메흐메트 1세의 지배를 인정했고, 메흐메트 1세는 스테판에게 풍부한 선물과 즈네폴레 요새, 코프리얀 지역을 주었다.[18]

3. 3. 4. 평화와 번영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대공의 아들로서 1389년에 권좌를 계승하였다. 1402년에 티무르아나톨리아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적으로 붕괴된 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비잔티움 황제에게서 전제공 작위를 받았다. 스테판의 첫 정책은 오스만의 봉신에서 벗어나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스테판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었다. 지기스문트는 스테판이 헝가리의 종속권을 받아들일 경우, 스테판이 살아있는 동안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마치바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1403년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전제공 스테판의 탑을 포함한 요새를 건설했다.[45] 1404년에는 제문, 슬란카멘, 쿠피니크 등 보이보디나 지역을 지기스문트에게서 받았다. 1417년에는 아파틴도 그의 영토로 언급됐다.

그의 통치 시기, 1412년 세르비아의 경제 중심지인 노보브르도의 광산법을 발표하였다. 그의 유산으로는 마나시야 수도원과 레사바 학파가 있다.[45]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남기고 1427년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8월 1일 그를 기념하고 있다. 그는 코포린 수도원에 묻혔다가 마나시야 수도원으로 옮겨졌다.[45]

1403년 또는 1404년 초, 스테판은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지역을 공격했다. 그는 브란코비치와 평화를 맺고, 어머니를 통해 술레이만과 화해했다.

벨그라드 점령 직후, 1397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된 벨그라드의 요새를 재건하고 도시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1405년 초, 수도를 크루셰바츠(Kruševac)에서 벨그라드로 옮겼다. 같은 해 9월, 헬레나 가틸루시오(Helena Gattilusio)와 결혼했지만, 두 달 후 어머니가 사망했다. 1405년 12월 2일 보라치에서 발행된 칙령에서 두브로브니크(Dubrovnik)(라구사 공화국(Republic of Ragusa)) 상인들의 거래 특권을 확인했다.

1405년 초, 스쿠타리 지역 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스테판의 조카 발샤 3세(Balša III)가 개입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도시들을 회복하려 했다. 스테판은 평화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지만, 1408년 6월에 체결된 평화 협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408년 12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은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을 창설했고,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첫 번째 기사였다. 그는 부다에서 열린 기사단을 위한 의식에 참석했고, 용의 상징은 그의 궁정에도 있었다.

스테판의 즉위는 발칸 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는 피로트 지역으로 진입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고, 무사를 사절로 보내 회담을 제안했을 때에야 공격이 멈췄다.[11]

지기스문트 1세와 스테판의 협력은 1411년까지 계속되었다. 스테판은 지기스문트로부터 헝가리의 옛 영토를 받았다.[11] 늦여름, 지기스문트 1세는 보스니아의 왕 및 귀족들과 평화를 맺었다. 스레브레니차는 아마도 그 해에 데스포트 스테판에게 넘어갔을 것이다.[11] 연말에 스테판의 누이 옐레나는 산달리흐 흐라니치 코사차와 재혼했다. 이듬해 5월, 스테판은 유럽 귀족들의 대규모 회의에 참석했다.

동시에 스테판의 누이 마라는 그와 연락을 취했고, 아들 주라지를 대신하여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시키려 했고, 성공했다. 1411년 가을 무사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 근처 셀림브리아 마을을 공격했다. 그 후 테살로니키에서 그는 1412년 가을 세르비아로 돌아와 삼촌 스테판과 화해하여,[11] 세르비아를 분열시켰던 두 가문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3. 4. 죽음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27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의 조카인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남겼다.[45]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베오그라드 하늘이 검게 변하고 천둥이 치는 신비로운 폭풍을 동반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최후의 심판과 같은 재앙으로 여겼다.[22] 그의 마지막 말은 "듀라지를 불러와! 듀라지를!" 이었다고 전해진다.[22]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죽음은 세르비아 국가와 국민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를 알리는 사건으로, 국가의 멸망과 정체성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23] 당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새로운 시대의 선택받은 사자"의 죽음으로 슬퍼하며 애도했다.[22]

1427년 데슈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 기념비


그가 말에서 떨어진 자리에는 돌 표지가 세워졌고,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대리석 기념비를 세워 충성과 존경의 메시지를 남겼다.[24] 이 기념비는 글라바 마을의 귀족 듀라지 주브로비치와 데슈포트의 호위 기사에 의해 건립되었다.[24]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코포린 수도원에 묻혔다가 마나시야 수도원으로 옮겨졌다.[45]

데슈포트 스테판의 유물이 있는 상자, 코포린 수도원


마나시야 수도원에 있는 데슈포트 스테판의 묘


많은 연구자들은 그의 사망 원인을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로 추정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친서방 성향 때문에 독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25]

4. 유산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였으며,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주변 국가에서 온 학자들에게 지원과 피난처를 제공했다.[21] 그는 부모에게서 교육받았고, 세르보슬라브어를 말하고 쓸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숙했다.

마나시야 수도원과 전제공의 탑.


《콘스탄츠 공의회》(1415년)에 나오는 라자레비치 가문의 문장 (울리히 폰 리헨탈 저)


마나시야 수도원


데스포트 스테판의 광산 규정


데스포트 스테판의 서명


1688-1690년 대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 중에 파괴된 베오그라드 요새 상층부 북서쪽에 있는 스테판의 성 유적. 이 성채 또는 내성은 12세기에 처음 비잔티움 요새로 설계되었다. 데스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 통치 기간인 1404년에서 1427년 사이에 재건되었다.


라자리차 교회(Lazarica Church), 베오그라드(Belgrade), 세르비아(Serbia)의 프레스코화


1412년 세르비아의 경제 중심지인 노보 브르도에서 광산 규정이 제정되었다. 그는 저술가이기도 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형 부크에게 헌정한 《사랑에 대한 찬사》(Slovo ljubve)와 《코소보 대리석 기둥 비문》(Natpis na mramornom stubu na Kosovo)이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마나시야 수도원에서는 레사바 학파(Resava School)가 발전하여 풍부한 사본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은 기독교 작품과 고대 문명의 주요 작품들이 필사되었다. 불가리아 출신의 콘스탄티누스 코스테네츠(Constantine of Kostenets)는 교회 문헌의 번역과 필사 오류를 수정하고 이전의 철자법을 변경하기 위해 레사바 정자법 학파를 설립했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1927년 8월 1일, 스테판의 사망 500주년을 맞아 그를 "세르비아의 성 데스포트 스테판(Saint Despot Stefan of Serbia)"으로 시성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장신의 성 스테판(Saint Stefan the Tall)"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머니 성 외게니아(Saint Eugenia)와 함께 8월 1일(율리우스력 7월 19일)에 기념된다.[26] 그의 유해가 담겨 있다고 믿어지는 성유물함은 코포린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성 데스포트 스테판의 축일인 8월 1일과 수도원 슬라바(Slava (tradition))이자 성 스테판의 유물 이전 축일인 8월 15일에 일 년에 두 번 개방된다.[27]

2023년, 성 데스포트 스테판은 그의 축일이 세르비아 군대의 슬라바가 되면서 세르비아 군의 수호성인으로 선정되었다.[28][29][30]

5. 저서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다음의 작품들을 저술했다.


  • 라자르 대공을 위한 무덤의 흐느낌 (1389)
  • 코소보 기둥에 새긴 글 (1404)
  • 사랑에 대한 경의 (1409) - 그의 형제 부크에게 보내는 시적인 서간.[45]
  • 광산법
  • "미래의 시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그리스어 작품 번역


그는 세르비아 채식본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후원한 세르비아 시편은 현재 뮌헨의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46]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마나시야 수도원에서 레사바 학파가 발전하여 많은 기독교 작품과 고대 문명의 주요 작품들이 필사되었다.

6. 칭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아버지로부터 "세르비아와 포두나블예의 모든 영주(Hospodar)"라는 칭호를 상속받았다.[32][33]

한 비문에는 그를 "모든 세르비아인과 포두나블예, 포사브예, 헝가리 영토 일부와 보스니아 영토, 그리고 해안 제타의 영주"[34]라고 칭하고 있다.

1402년 이후, 그는 "라슈카 왕국의 데스포트이자 세르비아의 영주"[35]로 불렸다.

1408년 용기사단 창립 헌장에는 "라슈카의 데스포트이자 영주"[36]로 기록되었으며, 그는 목록에서 첫 번째였다.

또한 그는 "모든 세르비아인과 해안 지방의 데스포트이자 영주"[37]로도 알려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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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서적 The Balkans, 1018-1499 Cambridge University Press
[45]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46] 웹인용 Serbian Psalter, Cod. slav. 4 //www.bsb-muenchen.d[...] Bavarian State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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