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대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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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왕대비 소피아는 그리스의 파블로스 국왕과 프레데리키 왕비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1975년 스페인 왕비가 되었다. 2014년 남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퇴위한 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펠리페 6세의 모친이다. 소피아는 스페인 왕비로서 공식 행사 참석 외에도 유니세프, 소피아 여왕 재단 등에서 활동하며, 국립 소피아 여왕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공항의 이름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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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대비 소피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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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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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자녀 | 루고 여공작 인판타 엘레나 스페인 인판타 크리스티나 펠리페 6세 |
풀네임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페데리카 |
출생명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
왕가 | 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생 시) 부르봉 왕가 (결혼 후) |
아버지 | 파울로스 1세 |
어머니 | 프레데리카 폰 하노버 |
출생일 | 1938년 11월 2일 |
출생지 | 타토이 궁전, 아테네, 그리스 왕국 |
종교 | 가톨릭교회 (이전: 그리스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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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왕비 즉위 | 1975년 11월 22일 |
퇴위 | 2014년 6월 19일 |
즉위식 | 1975년 11월 27일 |
직위 | 스페인 왕비 |
기타 | |
그리스어 | Σοφία |
2. 젊은 시절과 가족
1938년 11월 2일,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와 그의 왕비 하노버의 프레데리키의 장녀로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 동생들로는 콘스탄티노스 2세와 이리니 공주가 있다.
소피아는 1954년 그리스 제도 유람 중, 훗날 스페인의 국왕이 되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만났다.[6] 1961년 6월 요크 민스터에서 열린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에서 다시 만났으며,[6] 1962년 5월 14일 아테네에 있는 성 디오니시오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족과 함께 그리스를 떠나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엘 나스르 여학교에서 조기 교육을 받기도 했다.[3] 1946년 그리스 귀국 후, 독일 잘렘성 왕실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아테네에서 육아, 음악, 고고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수학하기도 했다.[4]
1960년 하계 올림픽에서 그리스 요트 국가대표팀 예비 선수로 활동했다.[5]
3. 결혼과 가족
소피아는 결혼을 위해 그리스 정교회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했고,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부부는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8]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은 소피아 왕대비의 당숙이다. 소피아의 할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 안드레아스가 필립 공의 아버지이다.
4. 스페인 왕비 시절의 활동
1975년 남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면서 스페인 왕비가 된 소피아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1976년 마드리드의 베 야아코브 회당을 방문하여, 현대 스페인 역사상 왕족 최초로 유대교 예배당을 방문한 사례를 남겼다.[9] 이후 남편과 함께 공식 방문 및 행사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단독으로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소피아 왕대비는 소피아 여왕 재단의 집행 이사이며, 스페인 장애인 교육 및 관리 왕립 위원회, 마약 중독자 지원을 위한 스페인 재단의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부터 소피아 여왕 스페인 연구소의 후원자로 활동하고 있다. 마약 중독 방지 프로그램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국내외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국립 소피아 여왕 미술관, 테네리페의 레이나 소피아 공항 등이 소피아 왕대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원과 스페인 왕립 역사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며, 로사리오 대학교, 바야돌리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에보라 대학교, 세인트 메리 대학교, 뉴욕 주립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부터 스페인 유니세프 위원회의 명예 회장을 맡았다.[10]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을 지원하고, 방글라데시, 칠레,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멕시코 등을 방문하여 활동을 지원했다. 캄보디아 아동 매춘 및 노예 제도 근절을 위한 NGO '소말리 맘'을 지원했으며, 1998년 소피아 왕대비가 참석한 가운데 아스투리아스 공작 부인 국제 협력상을 수상했다.
2012년 7월, 소피아 왕대비는 필리핀을 방문하여 필리핀 국립 도서관, 필리핀 국립 박물관, 산토토마스 교황청 및 왕립 대학교 등을 방문했다. 또한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이 주최한 말라카냥 궁전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 참석하여[19][20] 필리핀 교육 시스템에서 스페인어를 장려한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21]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우승이 걸린 결승전을 관전했다. UEFA 유로 2008 결승전도 관전했으며, 스페인 대표팀이 우승하자 경기 후 선수들의 라커룸을 방문하여 선수들을 칭찬했다.
4. 1. 사회적 논란
2008년 10월, 필라르 우르바노의 저서 ''La Reina muy de cerca''(''가까이서 본 여왕'')에는 소피아 왕대비가 스페인 사회에서 논쟁이 된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소피아 왕대비는 아프가니스탄 군사 개입을 비판하고,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을 옹호했으며, 젠더 폭력에 대한 홍보가 새로운 사례를 조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또한 낙태와 안락사는 물론 동성 결혼에도 반대했다.[11][12] 왕실은 책의 내용이 "여왕 폐하가 말씀하신 것으로 알려진 주장은 [...] 폐하가 표현하신 의견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라고 논평했다.[13] 사회주의자와 국민당 등 두 주요 정당은 논평을 거부했지만,[14] 소피아 왕대비의 의견은 IU 및 ERC와 같은 공화당과 LGBT 활동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15][16][17]2012년 5월, 소피아 왕대비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 축하 행사에 참석이 거부되었는데, 이는 지브롤터에서의 어업권 분쟁에 따른 긴장 때문이었다고 한다.[18]
5. 왕대비
2014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퇴위한 이후, 소피아는 후원 활동에 집중하며[22] 사르수엘라 궁전과 여름에는 팔마데마요르카의 마리벤 궁전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아들 펠리페 6세와 그의 가족을 행사에 동반한다.[23][24]
6. 문장
소피아 왕대비의 전용 문장은 왼편에 스페인 왕실 문장(남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방패)을, 오른편에는 아버지 파블로스 국왕의 문장인 그리스 왕국의 국장(하늘색 바탕에 은백색 십자가)을 포함하고 있다. 방패 가운데의 작은 방패 무늬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신 요르요스 1세가 사용했던 덴마크의 국장이 있다. 은백색 십자가가 있는 방패에는 가는 띠 모양의 붉은 선으로 두른 덴마크의 국기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옛 칼마르 동맹에 포함되었던 덴마크, 슐레스비히,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 슈토르마른, 디트마르셴, 라우엔부르크, 올덴부르크, 델멘호르스트 그리고 덴마크 왕실의 명칭인 ''웬드족의 왕''과 ''고트족의 왕''을 나타내는 문장이 있다.
방패 위에는 스페인 왕관이 놓여 있으며, 둘레는 카를로스 3세 훈장 목걸이로 둘러싸여 있다.
6. 1. 상세 구성
소피아 왕비의 개인 문장은 남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문장(스페인 왕실 문장)과 아버지 파블로스 국왕의 문장(하늘색 바탕에 은백색 십자가가 있는 그리스 왕국의 국장)을 합친 것이다. 방패 가운데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신 요르요스 1세가 사용했던 덴마크의 국장이 작은 방패 형태로 들어가 있다. 이 덴마크 국장은 은백색 십자가가 있는 방패에 붉은색 가는 띠로 둘러싸인 덴마크의 국기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옛 칼마르 동맹에 속했던 여러 지역과 덴마크 왕실의 칭호를 나타내는 문장들이 있다.이 덴마크 국장(1819-1903년 버전)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문장 | 설명 |
---|---|
-- | 덴마크: 금색 바탕에 세 마리의 파란색 사자와 9개의 붉은색 심장 |
-- | 슐레스비히: 금색 바탕에 두 마리의 파란색 사자 |
-- | 칼마르 동맹: 파란색 바탕에 세 개의 금색 왕관 |
-- | 아이슬란드: 붉은색 바탕에 은색 매 |
-- | 페로 제도: 파란색 바탕에 은색 양 |
-- | 그린란드: 파란색 바탕에 은색 북극곰 |
-- | 고트족의 왕: 금색 바탕에 파란색 사자와 9개의 붉은색 심장 (4, 3, 2 배열) |
-- | 벤드족의 왕: 붉은색 바탕에 금색 왕관을 쓴 용 |
-- | 홀슈타인: 붉은색 바탕에 은색 쐐기풀 잎 |
-- | 슈토르마른: 붉은색 바탕에 금색 왕관을 쓴 은색 백조 |
-- | 디트마르셴: 붉은색 바탕에 금색 갑옷을 입고 파란색 방패를 든 기사 |
-- | 라우엔부르크: 붉은색 바탕에 금색 말머리 |
-- | 올덴부르크: 금색 바탕에 두 개의 붉은색 가로 줄무늬 |
-- | 델멘호르스트: 파란색 바탕에 금색 십자가 |
7. 기타
소피아 왕대비는 2010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하여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우승을 함께했다. UEFA 유로 2008 결승전도 관전했으며, 스페인 대표팀이 우승하자 선수들의 라커룸을 방문하여 선수들을 칭찬했다. 선수들은 땀 등으로 더럽혀져 있거나 옷을 갈아입느라 반라 상태였지만 개의치 않았다.[29]
7. 1. 가계도
그리스 국왕파블로스 1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
러시아 대공올가
소피아
독일 황제프리드리히 3세
영국 공주빅토리아
프레데리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노버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덴마크 공주테이라
빅토리아 루이제
독일 황제빌헬름 2세
아우구스테 빅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