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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지 웃다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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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지 웃다울라는 1756년 벵골의 나바브가 되었으나,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해되었다. 그는 알리바르디 칸의 외손자로서 1740년 해군 제독, 1748년 비하르 태수, 1749년 후글리 파우지다르 등을 역임했다. 나바브 즉위 후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세력 확장에 맞서 콜카타를 공격하고 윌리엄 요새를 점령하는 등 반(反)영국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인해 플라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미르 자파르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벵골의 마지막 독립 태수로 평가받기도 하며, 그의 통치 능력과 판단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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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지 웃다울라
기본 정보
시라지 우드다울라
군주호나와브
전체 이름마흐무드 알리 칸
출생일1728년 8월 6일 이전
출생지라지마할
사망일1757년 7월 4일
사망지무르시다바드 근교
매장일쿠슈바그
종교이슬람교
통치
칭호벵골 태수
재위 기간1756년 - 1757년
대관일1756년 4월 15일
가계
왕조아프샤르 왕조
아버지자이눗딘 아흐마드 칸
어머니아미나 베굼

2. 생애

시라지 웃다울라는 1728년 8월 6일 이전에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파트나의 장관이었고, 어머니는 벵골 나바브 알리바르디 칸의 딸이었다. 1752년 11월 7일, 할아버지 알리바르디 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1]

1756년 4월, 알리바르디 칸이 사망하면서 시라지 웃다울라가 벵골 태수 자리를 이어받았다.[1] 그러나 그의 고모 가시티 베굼, 사촌 샤우카트 장, 그리고 군 총사령관 미르 자파르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2]

시라지 웃다울라는 즉위 후, 영국 동인도 회사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갈등을 겪었다.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각각 샹델나고르와 캘커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시라지 웃다울라는 양측에 즉시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2] 프랑스는 따르겠다는 의향을 보였지만, 영국은 거부하고 태수의 명령을 무시했다.[2]

1756년 5월,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인을 벵골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캘커타를 공격, 윌리엄 요새를 점령했다.[6] 이 과정에서 영국군 포로 123명이 질식사하는 "블랙홀 사건"이 발생했다.[7]

이후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과 내통한 미르 자파르 등의 음모로 위기를 맞았다. 1757년 1월 2일, 영국군 사령관 로버트 클라이브는 캘커타를 탈환하고 시라지 웃다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7]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과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렬되었고, 결국 알리나가르 조약을 체결했다.[10]

1757년 6월 23일, 플라시 전투가 벌어졌다. 벵골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패배했다.[12] 시라지 웃다울라는 도주 중 붙잡혀 1757년 7월 4일에 살해되었고, 그의 유해는 무르시다바드의 쿠시바그에 매장되었다.[1]

2. 1. 즉위 이전

1728년 8월 6일 이전, 마흐무드 알리 칸, 즉 시라지 웃다울라가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인 자이누딘 아흐마드 칸은 파트나의 장관이었으며, 어머니는 벵골 나바브 알리바르디 칸의 딸이었다.

1740년, 시라지 웃다울라는 해군 소함대의 제독이 되었고, 1748년에는 비하르의 태수, 다음 해인 1749년에는 후글리의 파우지다르와 포병대 장군이 되었다.[1]

1752년 11월 7일, 시라지 웃다울라는 할아버지인 알리바르디 칸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1]

2. 2. 태수 즉위와 갈등

1756년 4월, 알리바르디 칸이 사망하면서 손자인 시라지 웃다울라가 벵골 태수 자리를 계승했다.[1] 그러나 그의 계승을 둘러싸고 세 명의 적대자가 있었다.[2]

첫 번째는 알리바르디 칸의 장녀이자 시라지 웃다울라의 고모인 가시티 베굼으로, 벵골 태수 후계자로 그를 부적합하다고 여겼다.[2] 그녀는 다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시라지 웃다울라의 적대자가 될 만한 자들에게 돈을 뿌리며 음모를 꾸몄다.[2]

두 번째는 알리바르디 칸의 손자이자 시라지 웃다울라의 사촌인 샤우카트 장이다.[2] 그는 자신이 벵골 태수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2][3]

세 번째는 벵골 군의 총사령관 미르 자파르이다. 그는 시라지 웃다울라에게 일단 협력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벵골 태수가 되려고 획책했다.[2]

즉위 후 시라지 웃다울라는 가시티 베굼에게 협력한 다카 시장 후세인 쿨리 칸을 살해했다. 가시티 베굼은 이에 대항하여 라자 라지 발라브를 후임 시장으로 임명했다.[2] 시라지 웃다울라는 라자 라지 발라브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하며 재산 몰수를 시도했지만, 그의 아들 크리슈나 다스는 콜카타의 영국인 거류지로 도망쳤다.[2]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각각 샹델나고르와 콜카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시라지 웃다울라는 양측에 즉시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2] 또한 영국에는 회사 직원의 사적 무역분 관세 지불과 크리슈나 다스의 인도를 요구했다.[2]

프랑스는 샹델나고르 요새 공사 중단 요구에 따르겠다는 의향을 보였다. 하지만 영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시라지 웃다울라의 사자를 내쫓았으며, 서신을 찢어 버리는 행동을 했다.[2] 영국은 태수의 명령을 무시하고, 주권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자세를 보였다.[5]

2. 3. 벵골에서의 반(反)영국 투쟁

윌리엄 요새의 블랙홀 감옥


1756년 5월,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인을 벵골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수도 무르시다바드의 영국 공장을 습격하여 공장장 등을 포로로 잡았다.[6]

같은 해 6월 14일, 시라지 웃다울라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15,000명의 군사, 500마리의 코끼리, 50문의 대포로 캘커타를 공격하여 윌리엄 요새를 포위했다. 영국군 수비대 사령관 드레이크는 도망쳤고, 6월 19일 부사령관 홀웰과 요새의 병사들은 항복했다. 그날 밤 영국군 포로 146명이 윌리엄 요새 내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는 작은 감옥에 수용되었고, 그 결과 123명이 질식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7] 이는 시라지 웃다울라의 부하가 윌리엄 요새나 이 감옥을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인들은 이를 "블랙홀 사건", "블랙홀의 비극"으로 불렀다. 그 후,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의 공장을 파괴하고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으며, 캘커타를 알리나가르로 개명했다.[8]

같은 해 10월 중순, 시라지 웃다울라는 사촌 샤우카트 정의 군대를 전투에서 격파하고 살해했다.[8] 샤우카트 정을 살해한 것은 미르 자파르였다.

시라지 웃다울라는 이러한 승리로 위신을 높였지만, 더욱 오만해졌고, 궁정에서는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꾸며졌다. 시라지 웃다울라에게 냉대받은 힌두교 고관과 사람들 앞에서 모욕당한 귀족 등이 미르 자파르를 중심으로 영국과 결탁하여 그를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8] 영국은 시라지 웃다울라를 옹호하던 캘커타의 장관 마니크 찬드, 벵골의 대상인 아미 찬드, 벵골 최고의 금융업자 자갓 세트 등과 접촉했다.[9]

2. 4. 영국의 반격과 미르 자파르의 배신

12월 중순, 영국의 군 사령관 로버트 클라이브는 보병 150명, 포병 100명, 인도인 용병 1,200명을 이끌고 마드라스에서 도착하여 캘커타로 진군했다.[7] 1757년 1월 2일 캘커타를 탈환하고 시라주 웃다울라에게 선전포고를 한 후, 후글리에 있는 네덜란드인 거류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8] 얼마 지나지 않아 시라주 웃다울라도 후글리에 도착하여 영국에 사업 재개의 허가를 내줄 의향을 보였다.[8]

2월, 시라주 웃다울라는 영국과 후글리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고, 클라이브는 평화 협상 지속의 인상을 남기고 숙소로 돌아갔다.[8] 하지만 클라이브는 벵골군에 야습을 가했고, 기습을 당한 시라주 웃다울라의 군대는 대혼란에 빠진 후 흩어졌다.[8] 이때, 영국과 내통하고 있던 미르 자파르 등의 측근들이 시라주 웃다울라에게 강화를 강력히 권고했고, 그는 휴전 협정(알리나가르 조약)에 조인했다.[10]

3월, 영국은 프랑스의 벵골 거점 샹데르나고르를 맹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로써 프랑스는 벵골에서의 중요한 거점을 잃었다.[10] 시라주 웃다울라는 프랑스의 패배 소식을 듣고 영국에 축하의 뜻을 표했지만, 자신에게 도망쳐 온 프랑스인은 보호했고, 영국의 인도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10]

시라주 웃다울라는 자신을 향한 음모가 얽혀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지만,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아 그 기세는 더욱 커져갔다.[10] 영국은 미르 자파르와 은밀히 내통하여 6월 4일 시라주 웃다울라에 대한 비협조를 조건으로 벵골 태수 자리를 약속하는 조약을 비밀리에 맺었다.[7][10]

시라주 웃다울라는 불안해져서 미르 자파르를 불렀지만 응하지 않자, 직접 그의 저택으로 가서 우려를 전했다. 미르 자파르는 어떠한 적대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그와 함께 영국을 요격하기 위해 캘커타 근처의 플라시로 향했다.[11]

2. 5. 플라시 전투와 죽음

1757년 6월 23일, 플라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벵골군은 모한 랄과 미르 마단이 이끄는 보병 5,000명과 기병 7,000명, 미르 자파르가 이끄는 보병 35,000명과 기병 15,000명, 그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소수의 포병대로 구성되었다. 반면 영국군은 유럽인 병사 800명과 인도인 용병 2,300명으로 벵골군에 비해 매우 적었다.[12]

벵골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미르 자파르는 영국과의 비밀 협정에 따라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 벵골군 주력 5만 명이 방관했다.[12] 시라지 웃다울라는 미르 자파르의 작전을 의심하지 않았다.[12]

낮부터 몬순의 영향으로 폭우가 내려 벵골군은 화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12] 미르 마단이 전사하자 시라지 웃다울라는 미르 자파르에게 조언을 구했고, 미르 자파르는 전투 중지를 제안했다.[13] 시라지 웃다울라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벵골군은 붕괴되었고 그는 수도로 도망쳤다.[14]

7월 4일, 시라지 웃다울라는 도주 중 미르 자파르의 아들 미르 미란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그의 유해는 무르시다바드의 쿠시바그에 매장되었다.[1]

플라시 전투 이후 클라이브와 면담하는 미르 자파르

3. 평가

쿠슈바그에 있는 시라주 웃다울라의 묘


호리구치 쇼세이는 군 총사령관 미르 자파르를 전적으로 신뢰했던 시라지 웃다울라를 "구제불능의 호인"이라고 평가했다.[15]

1930년대 벵골 및 인도에서 반영 투쟁이 활발해지면서,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 지배에 저항한 "영웅"으로 여겨졌다. 당시 민족주의적인 역사가와 시인들은 시라지 웃다울라를 영국의 인도 침략 야망에 맞섰지만, 신뢰했던 측근들에게 배신당한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했다.[15]

그러나 호리구치 쇼세이는 이러한 평가에 부정적이다. 그는 "시라주 웃다울라가 벵골 혹은 인도의 단결을 굳건히 하고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정치력 앞에서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었을지, 혹은 늦출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16]

참조

[1] 웹사이트 Murshidabad 4 http://www.royalark.[...]
[2]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3] 웹사이트 Murshidabad 8 http://www.royalark.[...]
[4] 문서
[5] 서적 近代インドの歴史
[6]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7] 서적 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
[8]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9] 서적 近代インドの歴史
[10]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11]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12]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13]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14]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15] 서적 世界歴史叢書 バングラデシュの歴史
[16] 인용
[17] 웹인용 Trip Taken from June – 10th to 12th – 2006 http://www.historyof[...] History of Bengal 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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