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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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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나리노부는 사쓰마 번의 10대 번주로, 1773년에 태어나 1841년에 사망했다. 1787년 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의 은거로 번주가 되었으나 실권은 아버지에게 있었으며, 1809년 근사록 붕괴의 책임을 지고 장남 시마즈 나리오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했다. 국학자 다카야마 히코쿠로와 친교가 있었으며, 일본 천황 나루히토는 그의 증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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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마즈 나리노부 초상화
시마즈 나리노부 초상화 (쇼코슈세이칸 소장)
씨명시마즈씨
시대에도 시대 후기
출생안에이 2년 12월 6일 (1774년 1월 17일)
사망덴포 12년 10월 24일 (1841년 12월 6일)
묘소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이케노우에정의 시마즈 가문 묘지
신호마스키요타테헤키네노미코토 (真清竪碧根命)
계명대자원전순옹계산대거사 (大慈院殿舜翁渓山大居士)
초명타다타카 (忠堯)
아명토라쥬마루 (虎寿丸)
통칭마타사부로 (又三郎)
개명나리노부 (斉宣)
관직
관위정4위상 좌근위중장
수령분고노카미, 사쓰마노카미, 수리대부
가계
아버지시마즈 시게히데
어머니슌코인
양어머니야스히메
형제자매케이히메
고다이인
오쿠다이라 마사타카
타다아츠
아리마 카즈즈미
타카히메
쿠로다 나가히로
치카히메 (親姫)
난부 노부유키
시토히메 (淑姫)
토레이인
정실사타케 요시아츠의 딸 우메히메
계실니와 나가타카의 딸 쿄히메 (享姫)
측실사타케 요시마사의 양녀
하야카와 카네미츠의 차녀 우라하시
자녀나리오키
아야히메 (操姫)
고노신 (剛之進)
쇼쥬인
타다키미
쇼쿠노스케 (職之助)
즈이히메 (随姫)
타케고로 (武五郎)
사토히메 (聡姫)
진노신 (秦之進)
타다타케
이쿠히메
켄지로 (謙次郎)
한노신 (範之進)
카츠히메
세이지로 (清二郎)
마츠다이라 카츠요시
아리마 하루히메
타네가시마 히사미치
슈쿠노조 (夙之丞)
신파치로 (信八郎)
총희 (寵姫)
정치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사쓰마 가고시마 번주
막부에도 막부

2. 생애

1773년 12월 6일, 제8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1787년 1월, 아버지 시게히데의 은거로 번주의 지위를 이어받았지만 실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다. 1805년 12월에는 「귀학문답」을 저술해 번정의 개혁방침을 제시했지만, 아버지와의 주도권 분쟁이 격화되어 근사록 붕괴라는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1809년 6월, 근사록 붕괴의 책임을 지고 장남인 시마즈 나리오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강제은거를 당하게 된다.

1841년 10월 에도의 사쓰마 번 교외 별장에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2. 1. 번주 취임과 갈등

1787년 1월, 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가 은거하면서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실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다.[1] 1805년 12월, 시마즈 나리노부는 「귀학문답」을 저술하여 번정 개혁 방침을 제시했지만, 아버지와의 주도권 다툼이 격화되었다.[1] 게다가 사쓰마 번의 재정 개혁 문제 등으로 인해 근사록 붕괴라는 내분이 발생하였다.[1] 이로 인해 1809년 6월, 시마즈 나리노부는 아버지 시게히데로부터 근사록 붕괴의 책임을 추궁당해 장남인 시마즈 나리오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강제로 은거하게 되었다.[1]

2. 2. 은거와 죽음

1809년 6월, 근사록 붕괴의 책임을 지고 장남인 시마즈 나리오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강제 은거당했다.[1] 이후 에도에서 생활하였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고향(사쓰마) 은거를 막부에 여러 번 요청했으나, 누이 시게히메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1841년 10월, 에도의 사쓰마 번 교외 별장에서 사망했다.[1] 향년 69세였다.[1]

3. 인물

국학자 다카야마 히코쿠로와 친교가 있었다.[1] 아버지 시게히데는 나리노부에게 문제가 생기면 에도에서는 오쿠다이라 마사타카, 사쓰마 번에서는 시마즈 다다아쓰와 상담하라고 지시했는데, 두 사람 모두 나리노부의 이복형제였다는 점에서 나리노부가 번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1] 시게히데와 나리노부 두 명 모두 은거 후 에도에서 생활하여 사쓰마 번은 과다 지출에 시달렸다.[1] 현재 일본 천황 나루히토는 나리노부의 증손에 해당한다.[1]

4. 가계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1745-1833)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쓰쓰미 다케나가(堤代長)의 딸 슌코인(春光院)(お千万の方일본어, 1747-1811)이다. 양어머니는 야스히메(保姫)(1747-1769)이다.

4. 1. 처와 자녀

배우자자녀
정실: 사타케 요시아쓰의 딸 우메히메(敦)
계실: 니와 나가타카의 딸 교히메
측실: 시마즈 히사타케의 딸
측실: 사타케 요시카즈의 양녀 - 스즈키 가쓰나오의 딸
측실: 하야카와 가네미쓰의 차녀 우라하시
측실: 아라타 쓰네아키의 딸 주히메(籌姫)
측실: 시마즈 히사타다의 양녀 - 기쓰카와 도키요시의 딸
측실: 아오키 모리요시의 딸
실: 하타모토·나카네 마사후사의 딸 오란(お蘭)
측실: 시마즈 쇼후의 양녀 햐쿠주(百十)
측실: 시마즈 나카히토의 딸
측실: 스야마 노리카쓰의 딸
측실: 사토씨(佐藤氏)


4. 2. 부모와 형제

항목내용
아버지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 (1745년 ~ 1833년)
어머니슌코인(春光院) (오치만노카타(お千万の方), 1747년 ~ 1811년) - 쓰쓰미 다케나가(堤代長)의 딸
양어머니야스히메(保姫) (1747년 ~ 1769년)
정실우메히메(梅姫), 아쓰(敦) - 사타케 요시아쓰(佐竹義敦)의 딸
계실다카히메(享姫) - 니와 나가타카(丹羽長貴)의 딸
측실시마즈 히사타케(島津久建)의 딸, 하야시 마사요(林昌世)의 딸, 사타케 요시마사(佐竹義和)의 양녀(스즈키 가쓰나오(鈴木勝直)의 딸), 우라하시(浦橋, 하야카와 가네미치(早川兼備)의 차녀), 주히메(籌姫, 아라타 쓰네아키(荒田常明)의 딸), 시마즈 히사타다(島津久尹)의 양녀(기쓰카와 도키요시(橘川時吉)의 딸), 아오키 모리아키(青木盛旻)의 딸, 오란(お蘭, 하타모토(旗本)·나카네 마사후사(中根正房)의 딸), 햐쿠주(百十, 신뇨인덴(真如院殿)·호주인(宝樹院)·시마즈 쇼후(島津樵風)의 양녀), 시마즈 나카히토(島津仲久隣)의 딸, 스야마 노리카쓰(須山則勝)의 딸, 사토씨(佐藤氏)
아들나오노스케(職之助), 야스노신(秦之進), 노리노신(範之進), 세이지로(清二郎),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1791년 ~ 1859년, 장남), 시마즈 다다카타(島津忠剛)(1806년 ~ 1854년, 7남, 시마즈 히사카타(島津久賢)·시마즈 다다타카(島津忠喬)의 양자), 다네가시마 히사타카(種子島久珍)(1822년 ~ 1854년, 12남, 다네가시마 히사미치(種子島久道)의 양자), 겐지로(謙次郎), 시마즈 다다키미(島津忠公)(1799년 ~ 1872년, 3남, 시마즈 다다쓰라(島津忠貫)의 양자), 마쓰다이라 가쓰요시(松平勝善)(1817년 ~ 1856년, 11남, 마쓰다이라 사다미치(松平定通)의 양자), 고노신(剛之進), 슈쿠노조(夙之丞), 신파치로(信八郎), 다케고로(武五郎)
아리마 하루히메(有馬晴姫)(세이운인(晴雲院), 1820년 ~ 1903년,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의 양녀, 아리마 요리나가(有馬頼永) 정실), 소히메(聡姫, 아베 마사즈미(阿部正篤) 정실), 스이히메(随姫, 시히메(祀姫)·스이신인(随真院), 다테 헤이고로(伊達兵五郎)의 약혼자, 이후 시마즈 다다테쓰(島津忠徹) 정실), 이쿠히메(郁姫)(오키코(興子), 1807년 ~ 1850년,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의 양녀, 고노에 다다히로(近衛忠煕) 정실), 쇼주인(松寿院)(린히메(隣姫)·오린(於隣)·고린노카타(御隣の方), 1797년 ~ 1865년, 다네가시마 히사미치(種子島久道)의 정실), 조히메(寵姫, 오쿠보 다다카쿠(大久保忠愨) 정실), 미사오히메(操姫, 혼다 야스테이(本多康禎) 정실), 가쓰히메(勝姫)(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의 양녀, 마쓰다이라 야스히데(松平康寿) 정실)


5. 관력


  • 1786년 종4위하, 시종 겸 부젠노카미(豊後守)가 되었다.[1]
  • 1787년 가독(家督)을 상속받았다. 이어서 좌근위권소장(左近衛権少将) 겸 사쓰마노카미(薩摩守)가 되었다.
  • 1794년 11월 27일, 종4위상 좌근위권중장(左近衛権中将)이 되었다. 사쓰마노카미(薩摩守)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 1809년 6월 17일, 은거(隠居)하였다. 수리직(修理職)인 수리대부(修理大夫)로 전임되었고, 좌근위권중장(左近衛権中将)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 1841년 윤(閏)1월 4일, 정4위상(正四位上)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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