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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눌푸스 레멘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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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눌푸스 레멘시스는 루이 4세의 손자이자 로테르 2세의 아들로, 989년 랭스 대성당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촌인 로렌의 샤를을 지지하며 위그 카페에 대항했으나 실패하고, 991년 반역죄로 폐위되었다가 교황의 지원으로 복직했다. 아르눌푸스는 1017년 위그 마그누스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켰으며, 1021년 사망할 때까지 랭스 대주교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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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눌푸스 레멘시스

2. 생애

루이 4세의 손자이자 로테르 2세의 아들이며, 국왕 루이 5세의 동생이다. 일설에는 로테르 2세의 서자라고도 한다.[1] 사제가 되어 랭스 대성당에 있다가 989년 1월 랭스의 주교 아달베론(Adalberon)이 죽자 랭스 대성당 주교에 임명되었다. 그가 사제가 된 배경에 대해서는 로렌의 샤를이 레온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삼은 뒤 그를 자신의 보호하에 랭스 성당의 사제로 만들었다는 설과, 987년 형 루이 5세 사후 위그 카페에 의해서 강제로 머리 깎여서 승려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아달베로와 제르베르는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유족인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의 왕위계승권 요구를 묵살하고 위그 카페 공작을 왕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아르눌프는 삼촌인 로렌의 샤를을 도왔지만 결국 실패했고, 987년의 귀족회의에서는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된다. 샤를은 이에 대항하여 왕위를 요구하며 저항했고, 위그의 비서이자 고문이었던 제르베르는 샤를이 위그를 폐위시키려 하자 위그와 함께 이에 대항했다. 989년 1월 전임자인 아달베로가 죽기 전 제르베르를 자기 후임자로 지목했으나,[1] 위그 카페는 카롤링거 왕조를 예우하는 뜻에서 아르눌프를 대주교 후보로 천거했다. 아르눌프는 무난히 랭스 대성당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아르눌프는 랭스를 자기 삼촌 샤를에게 팔아넘겼고, 샤를은 제르베르를 감금했다. 그러나 8개월 후 제르베르는 간신히 도망쳐나와 위그의 궁전으로 피신했으나, 공작 샤를과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990년 6월 위그 카페는 주교들을 설득 교황 요한네스 15세에게 아르눌프를 단죄하여 물러나게 하고 그들이 새로운 대주교를 축성한 것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991년 3월 샤를과 함께 위그 카페에 의해 체포되어 랭스 근처에 있는 생발드 베르지에서 공의회를 열고 아르눌프를 파면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된 제르베르는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곧 교황청과 불화를 겪게 되었다. 991년 길베르트 드 오리아크와 로렌의 샤를이 위그 카페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투옥된 뒤 다시 랭스 대성당 대주교에 임명됐다. 이후 1021년 임종시까지 랭스 대주교직을 지냈다. 일설에는 아르눌프도 로렌의 샤를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다가 체포,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직을 강요당했으나 버텼다는 설도 있다.

아르눌푸스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었으며, 프랑스에서 아르눌푸스의 이복형제인 루이 5세가 자식 없이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가 끝났다. 위그 카페가 그의 후임으로 왕으로 선출되었다. 위그 왕은 989년 3월 아르눌푸스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했는데[1], 이는 전임 대주교 아달베론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아달베론은 오리약의 게르베르를 후임으로 원했었다. 9월, 아르눌푸스는 자신의 삼촌인 로렌 공작 샤를을 프랑스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지지했다. 샤를은 잠시 랭스와 라옹을 점령했다. 990년 아르눌푸스는 생리스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을 거부했고, 3월 29일에 샤를과 함께 투옥되었다.

991년 6월, 센스의 대주교 세귄이 생 바슬 성당에서 랭스 공의회를 주재하여 게르베르를 옹호하며 아르눌푸스를 반역죄 혐의로 폐위시켰다. 그러나 이 폐위는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교황 요한 15세는 로마의 성 보네파시오와 알렉시우스의 수도원장 레오를 교황 특사로 파견하여 995년 6월 2일 무종에서 시노드를 주재하게 했다. 게르베르는 주교직에서 정직되었다. 7월 1일에 열린 두 번째 시노드는 폐위와 임명의 모든 절차가 불법이며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아르눌푸스는 복직되었다.

아르눌푸스는 1017년 카페 왕조의 전통에 따라 위그 카페의 후계자인 로베르 2세의 아들 위그 마그누스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새로운 왕조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그에게서 사라졌다. 그는 1021년 사망할 때까지 주교직을 유지했으며, 2년 후 사망한 사촌 루이를 제외하고는 생존한 장자 분가에서 카롤링거 가문의 유일한 직계 남자 후손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성직자 임명

루이 4세의 손자이자 로테르 2세의 아들이며, 국왕 루이 5세의 동생이다. 일설에는 로테르 2세의 서자라고도 한다.[1] 사제가 되어 랭스 대성당에 있다가 989년 1월 랭스의 주교 아달베론(Adalberon)이 죽자 랭스 대성당 주교에 임명되었다. 그가 사제가 된 배경에 대해서는 로렌의 샤를이 레온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삼은 뒤 그를 자신의 보호하에 랭스 성당의 사제로 만들었다는 설과, 987년 형 루이 5세 사후 위그 카페에 의해서 강제로 머리 깎여서 승려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아달베로와 제르베르는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유족인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의 왕위계승권 요구를 묵살하고 위그 카페 공작을 왕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아르눌프는 삼촌인 로렌의 샤를을 도왔지만 결국 실패했고, 987년의 귀족회의에서는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된다. 샤를은 이에 대항하여 왕위를 요구하며 저항했고, 위그의 비서이자 고문이었던 제르베르는 샤를이 위그를 폐위시키려 하자 위그와 함께 이에 대항했다.

989년 1월 전임자인 아달베로가 죽기 전 제르베르를 자기 후임자로 지목했으나,[1] 위그 카페는 카롤링거 왕조를 예우하는 뜻에서 아르눌프를 대주교 후보로 천거했다. 아르눌프는 무난히 랭스 대성당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아르눌프는 랭스를 자기 삼촌 샤를에게 팔아넘겼고, 샤를은 제르베르를 감금했다. 그러나 8개월 후 제르베르는 간신히 도망쳐나와 위그의 궁전으로 피신했으나, 공작 샤를과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990년 6월 위그 카페는 주교들을 설득 교황 요한네스 15세에게 아르눌프를 단죄하여 물러나게 하고 그들이 새로운 대주교를 축성한 것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991년 3월 샤를과 함께 위그 카페에 의해 체포되어 랭스 근처에 있는 생발드 베르지에서 공의회를 열고 아르눌프를 파면했다.

2. 2. 왕위 계승 분쟁과 대립

아르눌푸스는 루이 4세의 손자이자 로테르 2세의 아들이며, 국왕 루이 5세의 동생이다.[1] 일설에는 로테르 2세의 서자라고도 한다. 989년 1월 랭스의 주교 아달베론(Adalberon)이 죽자 랭스 대성당 주교에 임명되었다.[1]

사제가 된 배경에 대해서는 로렌의 샤를이 레온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삼은 뒤 그를 자신의 보호하에 랭스 성당의 사제로 만들었다는 설과, 987년 형 루이 5세 사후 위그 카페에 의해서 강제로 머리 깎여서 승려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아달베로와 제르베르는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유족인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의 왕위계승권 요구를 묵살하고 위그 카페 공작을 왕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아르눌프는 삼촌인 로렌의 샤를을 도왔지만 결국 실패했고, 987년의 귀족회의에서는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된다. 샤를은 이에 대항하여 왕위를 요구하며 저항했고, 위그의 비서이자 고문이었던 제르베르는 샤를이 위그를 폐위시키려 하자 위그와 함께 이에 대항했다.

989년 1월 전임자인 아달베로가 죽기 전 제르베르를 자기 후임자로 지목했으나, 위그 카페는 카롤링거 왕조를 예우하는 뜻에서 아르눌프를 대주교 후보로 천거했다. 아르눌프는 무난히 랭스 대성당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아르눌프는 랭스를 자기 삼촌 샤를에게 팔아넘겼고, 샤를은 제르베르를 감금했다. 그러나 8개월 후 제르베르는 간신히 도망쳐나와 위그의 궁전으로 피신했으나, 공작 샤를과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990년 6월 위그 카페는 주교들을 설득 교황 요한네스 15세에게 아르눌프를 단죄하여 물러나게 하고 그들이 새로운 대주교를 축성한 것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991년 3월 샤를과 함께 위그 카페에 의해 체포되어 랭스 근처에 있는 생발드 베르지에서 공의회를 열고 아르눌프를 파면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된 제르베르는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곧 교황청과 불화를 겪게 되었다.

991년 길베르트 드 오리아크와 로렌의 샤를이 위그 카페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투옥된 뒤 다시 랭스 대성당 대주교에 임명됐다. 이후 1021년 임종시까지 랭스 대주교직을 지냈다. 일설에는 아르눌프도 로렌의 샤를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다가 체포,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직을 강요당했으나 버텼다는 설도 있다.

2. 3. 파면과 복직

989년 1월 랭스 대성당의 주교 아달베론(Adalberon)이 죽자 랭스 대성당 주교에 임명되었다.[1] 아르눌푸스는 랭스 대주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삼촌인 로렌의 샤를을 프랑스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지원했다. 샤를은 잠시 랭스와 라옹을 점령했다. 990년 아르눌푸스는 생리스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을 거부했고, 991년 3월 샤를과 함께 위그 카페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991년 6월, 센스의 대주교 세귄이 생 바슬 성당에서 랭스 공의회를 주재하여 아르눌푸스를 반역죄 혐의로 폐위시켰다. 그러나 이 폐위는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교황 요한 15세교황 특사로 수도원장 레오를 파견하여 995년 6월 2일 무종에서 시노드를 주재하게 했다. 그 결과, 아르눌푸스는 복직되었다.

아르눌푸스는 1017년 위그 마그누스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는 1021년 사망할 때까지 주교직을 유지했다.

2. 4. 복직 이후

아르눌푸스는 991년 6월 센스의 대주교 세귄이 주재한 랭스 공의회에서 반역죄 혐의로 폐위되었으나,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1] 교황 요한 15세는 교황 특사를 파견하여 995년 6월 2일 무종에서 시노드를 주재하게 했고, 게르베르는 주교직에서 정직되었다. 7월 1일에 열린 두 번째 시노드는 폐위와 임명의 모든 절차가 불법이며 무효라고 선언했고, 아르눌푸스는 복직되었다.

아르눌푸스는 위그 카페에 의해 랭스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로렌의 샤를을 지지하여 랭스와 라옹을 점령하기도 했다. 990년에는 생리스 시노드에 참석을 거부했고, 샤를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991년 랭스 공의회에서 아르눌푸스가 반역죄로 폐위된 이후, 교황 요한네스 15세는 이 결정에 반대하여 교황 특사를 파견했고, 결국 아르눌푸스는 복직하게 되었다.

복직 후, 아르눌푸스는 1017년 위그 마그누스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는 1021년 사망할 때까지 주교직을 유지했으며, 카롤링거 가문의 유일한 직계 남자 후손이었다.

3. 가계

아르눌푸스의 할아버지는 루이 4세이고, 아버지는 로테르 2세이다.[2] 어머니는 이탈리아의 왕 로타리오 3세의 딸인 이탈리아의 엠므이다.[2] 그의 숙부는 샤를 드 로렌이며, 형은 루이 5세이고, 형수는 아키텐의 아델라이드이나 이혼하였다.

참조

[1] 서적 Politics and History in the Tenth Century: The Work and World of Richer of Reim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10-14
[2] 문서 일설에는 그녀의 소생이 아니라 서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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