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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보가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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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보가스트는 4세기의 프랑크족 출신으로, 서로마 제국의 장군이었다. 그는 발칸 반도에서 고트족과의 전쟁에 참여했고, 383년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싸웠다. 바우토가 사망한 후 이탈리아 군의 보병 사령관이 되었으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과 관련되어 논란이 있다. 이후 에우제니우스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테오도시우스 1세와의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 아르보가스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권력욕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에 대한 책임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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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보가스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아르보가스트
다른 이름아르보가스테스
직함군사령관
출생 연도4세기
출생지갈라티아 미노르
사망일394년 9월 8일
사망 장소프리기두스 강 근처
소속서로마 제국
복무 기간? – 394년
계급군사령관
주요 전투프리기두스 전투
친척리코메레스 (삼촌)

2. 초기 생애와 경력

아르보가스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지 않으며, 자료마다 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아르보가스트가 바우토의 아들이며 리코메레스의 조카라고 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이 내용이 확인되지 않아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2] 조시모스는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아르보가스트와 바우토가 모두 프랑크족 출신이며, 로마인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기록했다.[3]

아르보가스트는 4세기 프랑크족 출신으로, 서로마 제국의 장군이었던 리코멜의 조카였다고 알려져 있다. 381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플라비우스 바우토의 군대와 함께 발칸 반도로 보내 고트 전쟁을 지원하면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때 바우토는 군사령관이었고, 아르보가스트는 부사령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직함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서방과 동방의 연합군은 고트족 지도자 프리티게른을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마케도니아테살리아에서 하부 모에시아의 트라키아로 몰아냈으며, 382년 고트족과의 평화 조약 체결을 도왔다.[4] 이후 바우토와 아르보가스트는 메디올라눔으로 돌아가 그라티아누스에게 복귀했다.

383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단이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로마 황제로 선언하고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했다. 388년에는 그라티아누스의 공동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마저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자, 아르보가스트는 리코멜 등과 함께 군단을 지휘하여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싸웠고, 트리어에 있던 막시무스의 공동 황제 빅토르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2. 1. 출신 배경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아르보가스트가 바우토의 아들이자 리코메레스의 조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이러한 가족 관계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있다.[1][2] 조시모스는 아르보가스트와 바우토 모두 프랑크족 출신이며 로마에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기록했다.[3]

2. 2. 군사 경력

아르보가스트는 381년, 서로마 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명령으로 플라비우스 바우토가 이끄는 군대와 함께 발칸 반도로 파견되어 고트 전쟁에 참전했다.[4] 이때 바우토는 군사령관이었고, 아르보가스트는 부사령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직함은 알려져 있지 않다.[4]

서방과 동방의 연합군은 고트족 지도자 프리티게른을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마케도니아테살리아에서 하부 모에시아의 트라키아로 몰아냈다.[4] 결국 382년 고트족과의 평화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며, 이후 바우토와 아르보가스트는 메디올라눔으로 돌아가 그라티아누스에게 복귀했다.[4]

3.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

383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장교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고, 갈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그라티아누스를 공격하기 위해 대륙으로 이동했다.[5] 파리 근처에서 벌어진 5일 동안의 교전에서 그라티아누스의 군대는 그를 버리고 막시무스에게 합류했으며, 그라티아누스는 도망쳤지만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5]

3. 1.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즉위와 아르보가스트의 역할

383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단이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로마 황제로 선언하고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했다.[5] 그라티아누스의 죽음으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제로서 두 번째 즉위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게 되었고, 막시무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비공식적인 휴전 상태로 유지했다.[6]

380년대 중반,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바우토가 사망하고 아르보가스트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았다.[7] 아르보가스트의 좋은 평판 덕분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동의 없이 이탈리아 군의 ''보병 사령관''(magister militum)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발렌티니아누스가 실제로 이 임명을 거부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8] 아르보가스트의 경험과 군대에 대한 친숙함은 휴전 상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그를 사령관으로 선택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8] 그는 서부 지역에서 지배적인 군사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로마 군대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보병 사령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88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방하자, 아르보가스트는 리코멜 등과 함께 군단을 지휘하여 막시무스와 싸웠고, 트리어에 있던 막시무스의 공동 황제를 사로잡아 처형했다.[9]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방 궁정에 복귀시켰지만, 주요 행정관을 차례로 테오도시우스의 측근으로 교체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감시역으로 아르보가스트를 제국 서반의 마기스터 밀리툼에 임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테오도시우스의 꼭두각시라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테오도시우스 개인에게만 충성을 맹세했으며, 발렌티니아누스에게는 주군처럼 행동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아르보가스트를 강등시키려 하자, 아르보가스트는 "나를 임명한 것은 당신이 아니다"라며 이를 거절했다.

3. 2. 막시무스와의 전쟁

387년, 마그누스 막시무스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발렌티니아누스 2세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9]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군대는 포에토비오 전투에서 승리했고,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도망쳤다. 아퀼레이아의 불만을 품은 수비대는 막시무스를 체포하여 테오도시우스에게 처형하도록 넘겨주었다.[9] 아르보가스트는 테오도시우스의 명령에 따라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으로 가서 막시무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빅토르를 암살했다.[9]

4.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의 갈등

아르보가스트는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될 수 없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워 권력을 행사했다.[11]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비엔에 고립되었고, 아르보가스트의 동맹 세력에게 궁정이 장악되었으며, 서방 군대의 통제권은 아르보가스트의 프랑크족 용병들이 쥐고 있었다.[12] 군사령관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그의 고문들에게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고, 황제의 친구 하르모니우스는 뇌물 혐의로 발렌티니아누스 앞에서 살해당했다.[13]

조시무스에 따르면 서부 군대는 아르보가스트를 "용감하고 전쟁 경험이 풍부하며 돈을 경멸한다"고 존경했으며, 그는 황제 앞에서 매우 자유롭게 말하고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에 거부권을 행사할 정도로 큰 권력을 얻었다.[15]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1세암브로시우스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14] 아르보가스트에게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요청했다.[14]

4. 1. 권력 장악과 갈등 심화

아르보가스트는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허수아비 황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 아르보가스트는 황제가 되는 것보다 황제를 조종하는 것이 더 쉽고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비엔에 고립되었고, 그의 궁정은 아르보가스트의 동맹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12] 서부 군대의 통제권은 아르보가스트의 프랑크 용병이 가지고 있었다. 군사령관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그의 고문들에게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했고, 뇌물 혐의를 받은 황제의 친구 하르모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앞에서 살해당했다.[13]

조시무스는 서부 군대가 아르보가스트를 존경했으며, 아르보가스트는 황제 앞에서 매우 자유롭게 말하며 거부권을 행사할 정도로 큰 권력을 얻었다고 기록했다.[15]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1세암브로시우스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14] 아르보가스트의 손에 곧 죽을까 두려워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요청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이 테오도시우스 1세의 꼭두각시라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만 충성을 맹세했으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는 주군처럼 행동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아르보가스트를 강등시키려 하자, 아르보가스트는 "나를 임명한 것은 당신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4. 2.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 2세비엔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이 죽음을 자살로 발표하고 시신을 메디올라눔으로 보내 장례를 치렀다.[14]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은 여러 의혹을 낳았다. 아르보가스트는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허수아비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1]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비엔에 고립되어 사실상 사적인 신분으로 전락했고, 그의 궁정은 아르보가스트의 동맹에 의해 지배되었다.[12] 그는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요청할 정도로 아르보가스트에게 죽을까봐 두려워 했다.[14]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르보가스트를 해임하려 했으나, 아르보가스트는 "폐하께서는 제게 명령을 내리지도 않으셨고,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라며 해임 명령서를 땅에 던지고 나가버렸다.[13] 필로스토르기우스는 황제가 아르보가스트를 찌르려 했지만 궁궐 경비병에게 저지당했다고 주장한다.

4. 2. 1. 죽음에 대한 논란

암브로시우스, 조시무스, 필로스토르기우스 등은 아르보가스트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19][21][22] 반면, 티라니우스 루피누스는 살인인지 자살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20]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에드워드 기번은 아르보가스트의 암살 음모를 주장한 반면,[25] 존 프레데릭 매튜스와 브라이언 크로크는 자살설을 지지한다.

크로크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사망 이후 4개월간의 공백기가 있었던 점을 지적하며, 이는 아르보가스트가 새로운 황제를 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제라드 프리엘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아르보가스트에 의해 여러 차례 권위가 훼손된 후 굴욕감에 자살했다고 제안한다. 토마스 호지킨은 "아르보가스트는 주인의 수명이 길어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무언가를 희망했다"고 주장하며 살인 쪽에 무게를 두지만,[26] 공백기가 아르보가스트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 사후 계획이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인정한다. 크리스토퍼 벤들은 공백기 자체가 아르보가스트가 자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에 대비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속임수의 일부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27]

5. 에우게니우스 옹립과 통치

392년 8월 22일, 아르보가스트는 수사학 교사였던 에우게니우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했다.[28]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죽은 뒤, 서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아르카디우스를 서방 정제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답을 하지 않았다. 3개월 동안 황제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이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자, 아르보가스트는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에우게니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후, 아르보가스트는 라인강 부근을 행군하여 변경의 게르만족에게 군사력을 과시하고,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을 진압하여 제국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5. 1. 에우게니우스의 통치와 종교 정책

에우게니우스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이교도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그라티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2세 치하에서 폐쇄되었던 이교 사원들을 다시 열도록 허용했다.[29] 또한 고대 로마의 전통을 존중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의견에 따라 포로 로마노에 있는 베누스와 로마 신전을 재건하고, 그라티아누스가 원로원에서 철거했던 빅토리아 여신의 을 복원했다.[37]

이러한 종교 정책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테오도시우스 1세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불만을 샀다.[37]

5. 2. 프랑크족과의 전쟁

393년, 아르보가스트는 라인 강 국경을 넘어 자신의 프랑크족과,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치세 동안 이 지역을 약탈했던 그들의 왕족 순노와 마르코머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군했다.[28] 이 원정에는 로마인들이 역사상 마지막으로 라인 강 동쪽 제방을 점령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쾰른 요새 도시를 재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28] 또한 아르보가스트는 프랑크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크족이 로마군에게 귀중한 병력을 제공하겠다고 약속받았다.[28]

6. 프리지두스 전투와 아르보가스트의 죽음

394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에우게니우스를 제거하고 서로마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군대에 패배한 아르보가스트는 알프스 산맥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닫고 며칠 뒤 자결했다.[38]

6. 1. 프리지두스 전투

394년 5월 중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6월 20일 아드리아노플을 거쳐 이탈리아로 향했다. 율리안 알프스를 통과하는 경로였고,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막기 위해 메디올라눔에 진을 쳤다. 점술로 그들의 승리를 예언한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도 합류했다.[35] 서방 군대는 알프스에 매복을 설치하여 테오도시우스 군대를 포위하려 했으나, 테오도시우스가 나타나지 않자 아르보가스트는 그가 우회하여 아드리아 해안에서 포위하려 한다고 판단, 산길 공격을 취소하고 남쪽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시르미움에서 증원군을 기다린 후 알프스를 통과하여 9월에 아르보가스트의 위치에 도착했다.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 군대는 프리지두스 강을 등지고 평원에 참호를 구축했고, 추가 병력이 인근 고지대를 점령했으며 남쪽은 측면 공격에 대비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정면 공격을 시작, 394년 9월 5일 전투가 시작되어 하루 종일 지속되었으나, 아르보가스트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동방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율리안 알프스로 후퇴했으나, 아르보가스트가 보낸 추격대는 테오도시우스의 뇌물을 받고 아군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다음 날,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좁은 길을 통해 전장에 접근했고, 줄어든 서방 군대가 매복하려 했으나, 보라라는 지역 기상 현상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산을 넘는 차가운 공기의 압력으로 발생한 시속 60마일(96.56km)의 사이클론성 바람이 아르보가스트 군대의 얼굴에 먼지를 날리고 투사 무기를 되돌려 테오도시우스의 승리를 도왔다.[36] 테오도레투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기독교 작가들은 신의 개입을 통해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테오도시우스가 이례적으로 대규모 야만 용병을 고용한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36]

동방군은 적 진영을 덮쳐 에우게니우스를 사로잡아 참수했고, 아르보가스트는 알프스로 도망쳐 며칠 동안 방황하다 394년 9월 6일 이후 자살했다.[38]

6. 2. 아르보가스트의 죽음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패배한 아르보가스트는 알프스로 도망쳐 며칠 동안 혼자 방황했다. 394년 9월 6일 이후, 자신의 입장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하고 자결했다.[35]

7. 평가

아르보가스트는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토머스 호지킨은 그를 용감하고 훈련된 군인이자 로마 제국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했으며[37], 제라드 프리엘과 스티븐 윌리엄스는 훌륭한 기록을 가진 일류 지휘관으로 평가했다[38].

그러나 크리스토퍼 벤들은 아르보가스트가 군사적 역량보다는 개인적인 관계와 부하들의 충성심을 통해 권력을 얻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권력욕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에 대한 책임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다.

7. 1. 긍정적 평가

토머스 호지킨은 아르보가스트를 용감하고 훈련된 군인이자 로마 제국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37]. 제라드 프리엘과 스티븐 윌리엄스는 아르보가스트를 훌륭한 기록을 가진 일류 지휘관으로 평가했다[38].

7. 2. 부정적 평가

크리스토퍼 벤들(Christopher Bendle)은 아르보가스트가 군사적 역량보다는 개인적인 관계와 부하들의 충성심을 통해 권력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참조

[1] 논문 Bendle, Christopher 2024, 166; [[Arbogast (magister militum)#CITEREFJonesMartindaleMorris|Jones, Martindale & Morris]], 97; Cameron, Alan 2010, 85–86
[2] 문서 John of Antioch, fragment 187
[3] 문서 Zosimus, IV.33.1–2
[4] 논문 Bendle 2024, 102; Wolfram 1990, 132–134
[5] 논문 Zosimus 4.35.5; Bendle 2024, 106
[6] 논문 Bendle 2024, 106–108
[7] 문서 Eunapius Hist. fr. 58; Zosimus 4.53.1; John of Antioch fr. 187
[8] 논문 Bendle 2024, 109
[9] 문서 Zosimus, IV. 47 p. 180
[10] 논문 Bendle 2024, 111–113
[11] 논문 Philostorgius, 11.2; Bendle 2024, 184–186
[12] 문서 Gregory of Tours, II.9 p. 122
[13] 서적 Hodgkin, pp. 551–552
[14] 서적 Hodgkin, p. 554
[15] 문서 Zosimus, IV. 53 p. 186
[16] 문서 Philostorgius, 11.9 p. 143
[17] 서적 Matthews, p. 238
[18] 서적 Ambrose, p. 358
[19] 서적 Ambrose, p. 359
[20] 문서 Rufinus, XI. 31
[21] 문서 Zosimus, IV. 54 pp. 186–187
[22] 문서 Philostorgius, 11.1, p. 143
[23] 문서 Socrates, 5.11
[24] 문서 Orosius, 7.35
[25] 서적 Gibbon, ch 27
[26] 서적 Hodgkin, p. 592
[27] 논문 Bendle 2024, 117–118
[28] 문서 Gregory of Tours, II.9, p. 122
[29] 서적 Hodgkin, p. 560
[30] 문서 Zosimus, IV. 54 p. 187
[31] 간행물 Salzman, "Ambrose and the Usurpation of Arbogastes and Eugenius"
[32] 서적 Paulinus, p. 106
[33] 서적 Paulinus, p. 108
[34] 문서 Socrates, 5.18.14
[35] 서적 Hodgkin, p. 559
[36] 서적 Bendle 2024
[37] 문서 南川2018
[38] 문서 加納2018
[39] 문서 加納2018
[40] 문서 Fri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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