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 아르두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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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데 아르두앵은 1898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태어난 케이준 음악가로, 케이준 음악에서 아코디언을 처음으로 녹음한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데니스 맥기와 협연하며 1929년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6곡을 녹음했고, 이후 여러 차례 추가 녹음을 진행하여 총 34곡의 음원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케이준 음악과 자이데코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9년 인종차별적 폭행을 당한 후 정신 질환을 겪다 1942년 사망했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케이준과 크리올 음악의 핵심 레퍼토리로 평가받으며, 동상이 세워지는 등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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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 아르두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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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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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메데 아르두앵 |
출생일 | 1898년 3월 11일 |
출생지 | 미국 루이지애나주 에반젤린 패리시 배질 근처 |
사망일 | 1942년 11월 3일 |
사망지 | 미국 루이지애나주 파인빌 |
직업 |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아코디언 연주자 |
장르 | 크리올 음악 자이데코 |
악기 | 보컬 케 Cajun 아코디언 |
레이블 | 컬럼비아 레코드 브런즈윅 레코드 보컬리온 레코드 데카 레코드 멜로톤 블루버드 레코드 아홀리 레코드 톰킨스 스퀘어 레코드 |
2. 생애
아메데 아르두앵은 케이준 음악과 자이데코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초기 음악가이다. 데니스 맥기 등과 함께 짐 크로우 시대 남부에서 "음악적 인종 차별의 경계"를 넘어, 여러 인종의 청취자들에게 존경받으며 문화적 교류가 가능한 사회적 공간을 만들었다.[11] 인류학자 사라 르 메네스트렐은 "아르두앵은 이제 대부분의 지역 음악가들에게, 그들이 어떤 하위 범주의 음악(예: 케이준 또는 크리올)을 식별하든,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로 여겨진다"라고 언급한다.[13]
그는 케이준 프랑스어만 사용했고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는데, 당시 케이준 컨트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흔한 일이었다. 농사일 대신 음악적 재능을 키운 그는 댄스 파티에서 연주했는데, 종종 바이올린 연주자인 알퐁스 라플레르와 더글라스 벨라드와 함께 케이준 청중을 위해 연주했다.[6]
아르두앵의 음악은 "스윙 및 신코페이션과 같은 유럽 노래 형식과 아프리카 리듬 접근 방식을 결합"하였으며, "이 문화적 혼합을 구현하고 그의 능숙한 기술과 즉흥 연주 능력으로 그 발전을 향상"시켰다. 아르두앵은 혼자 연주하면서도 군중을 춤추게 할 수 있는 활기차고 창의적인 아코디언 연주자였으며, "길고 높은 음을 사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낸 감성적인 스타일의 소울풀한 가수"였다.[9]
아르두앵이 녹음한 31곡은 "케이준과 크리올 음악의 핵심 레퍼토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그의 아코디언 연주와 보컬은 케이준 음악과 자이데코에 큰 영향을 미쳤다.[6]
2018년 3월 11일, 생트랜드리 교구 방문자 센터에서 아르두앵의 실물 크기 동상이 공개되었다. 이 동상은 그가 가톨릭교회의 견진성사를 받았을 때의 잘 알려진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4][15] 이 동상 프로젝트는 루이지애나의 전직 계관 시인이자 교수인 대럴 부르크가 주도했다. 그의 시집 'If You Abandon Me: An Amédé Ardoin Songbook'은 피에르 부르크의 삽화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음악 활동
아메데 아르두앵은 1898년 3월 11일 루이지애나주 랑세 루조에서 태어났다.[16][18] 그의 부모는 모두 노예였지만, 아르두앵이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157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연주하지 못해 자신에게 준 아코디언을 배웠다.[20]10대 시절, 아르두앵은 루이지애나 주 각지를 옮겨 다니며 농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음악 활동을 병행했다. 랑세 루조에 있는 루조 농장에서 일할 때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알폰스 라플뢰르의 집에 자주 방문했다. 그는 라플뢰르 혹은 벨레어 코브 출신의 흑인 바이올리니스트 더글라스 벨라드와 춤추는 곳에서 자주 공연했는데, 주 관객은 하룻밤에 2.5USD를 지불한 백인이었다.[18]
오스카 코모의 농장에서 그는 유니스 출신의 백인 바이올리니스트 데니스 맥기(Dennis McGee)를 만났다. 그 둘은 1921년부터[16] 하우스 파티에서 자주 협연했다. 아르두앵의 사촌인 알폰스 아르두앵이 자주 참여했다. 코모가 농장을 팔자 그는 맥기와 유니스로 가서 셀레스틴 마르캔텔의 농장에서 일했다. 마르캔텔은 음악을 좋아해서 자주 그 둘을 공연에 데리고 갔다.[18] 캔레이 폰테노의 아버지인 아담 폰테노는 아르두앵에게 초기 음악적 영향을 미쳤다.[6]
2. 2. 음반 녹음과 활동
1929년, 데니스 맥기와 함께 뉴올리언스에서 컬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처음으로 음반을 녹음했다.[8] 이들은 1930년 뉴올리언스, 1934년 8월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서 추가 녹음을 진행했다.[3] 아르두앵은 1934년 12월 뉴욕 시에서 솔로 녹음을 하기도 했다.[3] 이 음반들은 브런즈윅, 보칼리온, 데카, 멜로톤, 블루버드 등 다양한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9] 총 34개의 아르두앵이 아코디언을 연주한 녹음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그의 음반과 공연은 루이지애나 남부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다.[9] 1930년대 후반, 그는 루이지애나 주 유니스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사디 쿠르빌과 정기적으로 연주했지만, 둘은 함께 녹음하지는 않았다.[7]
2. 3. 인종차별적 폭행과 죽음
1939년경, 아르두앵은 백인들이 춤추는 곳에서 연주하던 중 땀을 닦을 헝겊을 요청했다. 이에 농부의 백인 딸이 그에게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2명이 그가 다시는 공연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고선, 그날 밤 그의 집까지 따라가 무자비하게 구타했다.[17][24][25] 몇몇 사람들은 포드 모델 A 자동차로 그의 머리와 목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17][24][25]사건 이후에도 아르두앵은 활동했으나 예전만 못했다.[26] 결국 1942년 9월, 파인빌의 주립 정신 병원에 입원했고, 11월 3일 그곳에서 성병으로 사망했다.[16][17][18] 사후 파인빌 병원 묘지에 안장됐다.[16][17][18]
아르두앵이 죽음에 이르게 된 정황과 최종적인 사인은 오랫동안 불확실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아르두앵이 말년에 정신적, 음악적 능력이 손상되었다고 말했다.
아르두앵을 알았던 가족 구성원들과 음악가들의 후손들은 현재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주장했는데, 1939년경에 그가 인종 차별적 공격으로 심하게 구타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니스 근처의 집에서 춤을 춘 후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집주인의 딸인 백인 여성이 아르두앵에게 손수건을 빌려줘 그의 얼굴에서 땀을 닦게 하자 몇몇 백인 남성들이 분노했다고 한다.[9][10] 아르두앵은 이 공격에서 완전히 정신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1]
PBS의 ''아메리칸 패치워크''에서 음악가 캔레이 폰테노트와 웨이드 프루제는, 아르두앵이 유니스를 떠나던 중 모델 A 자동차에 치여 머리와 목이 짓눌려 성대가 손상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가 다음 날 도랑에 누워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연구 결과, 그의 사망 원인은 성병으로 밝혀졌다.[7] 그는 말년에 루이지애나주 파인빌의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1942년 9월에 입원했다. 그는 두 달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병원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3][12]
아메데의 정확한 사망 날짜와 장소는 불분명하다. 친족과 동료 뮤지션들의 증언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9년 사이에 유니스 근처에서 인종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아메데가 인기를 얻던 중에, 백인 여성이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 땀을 닦아준 것에 분노한 백인 남성 두 명이 아메데를 린치하여 연주를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후, 그는 루이지애나 주 파인빌의 요양 시설에서 생활하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동료 뮤지션이 질투하여 독을 탔다거나, 아메데가 백인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린치를 당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어 정확하지 않다.
2. 4. 개인적인 면모
아르두앵은 키가 152cm로 작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어 농장에서 비교적 쉬운 일을 맡았다. 닭에게 먹이를 주거나 풀을 다듬고 기술적인 일을 하는 등 농장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20] 그는 가족을 부양하고 싶지 않아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노래에는 사랑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20][26]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쾌활했다는 평가와 허세를 부리고 말을 함부로 했다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20][26]
3. 음악적 유산과 영향
아르두앵이 녹음한 31곡은 "케이준과 크리올 음악의 핵심 레퍼토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의 아코디언 연주와 창법은 케이준 음악과 자이데코에 큰 영향을 미쳤다.[6]
아르두앵은 데니스 맥기와 같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짐 크로우 시대에 "음악적 인종 차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양쪽 인종의 청취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임시적인 사회적 공간을 만들었다.[11] 인류학자 사라 르 메네스트렐은 "아르두앵은 이제 대부분의 지역 음악가들에게, 그들이 어떤 하위 범주의 음악(예: 케이준 또는 크리올)을 식별하든,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로 여겨진다"라고 언급했다.[13]
2018년 3월 11일, 아르두앵의 실물 크기 동상이 생트랜드리 교구 방문자 센터에서 공개되었다. 이 동상은 그가 가톨릭교회의 견진성사를 받았을 때의 잘 알려진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4][15] 이 동상 프로젝트는 루이지애나의 전직 계관 시인이자 교수인 대럴 부르크가 주도했다. 그의 시집 'If You Abandon Me: An Amédé Ardoin Songbook'은 피에르 부르크의 삽화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원래 케이준 음악에서는 피들(바이올린)이 중심이었고, 아코디언은 포함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경 크리올계 흑인이 아코디언을 도입하면서 케이준 음악에 변화가 생겼다. 아메데 아르두앵은 케이준 음악 최초로 아코디언을 녹음한 인물이다.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아르두앵은 1929년 컬럼비아 사의 아코디언 콘테스트에서 우승했고, 백인 피들 연주자 데니스 맥기와 함께 1929년 12월 컬럼비아 사에서 6곡을 녹음했다. 현재 총 34곡의 녹음물이 남아있다. 그의 음악은 전통적인 케이준 곡이 주를 이루지만, 싱코페이션이 강한 비트와 샤우트 창법이 특징적이다.
4. 음반 목록
아메데 아르두앵의 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컴필레이션 음반은 아메데 아르두앵#컴필레이션 음반을 참조.
4. 1. 컴필레이션 음반
아마데 아르두앵 – 루이지애나 케이준 음악 Vol. 6 : 아마데 아르두앵 – 최초의 흑인 자이데코 녹음 예술가 (1928–1938)케이준 아코디언의 선구자 1926–1936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자이데코의 뿌리
아메데 아르두앵 – 엄마, 오래 떠나 있을 거예요: 아마데 아르두앵의 모든 녹음 1929–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