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벨 (덴마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벨은 에스트리센 가문 출신으로, 1232년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었다. 1250년 형 에리크 4세가 살해된 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1252년 프리슬란트에서 반란을 진압하다가 사망했다. 그는 형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유령 이야기와 후손들의 영토 분쟁으로 묘사되었다. 아벨의 후손들은 1375년까지 남유틀란트를 통치했으며, 덴마크 왕위 계승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18년 출생 - 훌라구
    훌라구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로, 몽케 칸의 명을 받아 서방 원정을 이끌고 일 칸국을 건국하여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쿠빌라이 칸을 지지하고 문화와 과학 발전에 기여하다가 1265년에 사망했다.
  • 1218년 출생 - 루돌프 1세 (독일)
    루돌프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으로, 독일 왕으로 재임하며 가문의 영지를 확장하고 오타카르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으로 만들었으며, 교황과의 관계 개선과 제국 내 평화 유지에 힘썼다.
  • 1252년 사망 - 오굴 카미시 카툰
    오굴 카이미시는 13세기 몽골 제국 귀유크 칸의 황후이자 섭정이었으나, 정치적 능력 부족과 몽케 칸과의 대립으로 암살 음모 혐의를 받아 처형당하며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의 권력 다툼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1252년 사망 - 페르난도 3세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을 통합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레콩키스타를 추진하여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함락하고 1671년 시성되었다.
  • 에스트리센가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에스트리센가 - 발데마르 4세
    발데마르 4세는 에스트리센 왕조 출신으로 덴마크 국왕(1340~1375)이며, 파산하고 분할된 덴마크를 재건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나 과도한 세금 정책과 한자 동맹과의 갈등을 겪어 덴마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아벨 (덴마크)
기본 정보
아벨, 덴마크 국왕 (크론보르 성의 크론보르 태피스트리에 묘사됨)
국왕덴마크 국왕
벤드족의 국왕벤드족
재위1250년 11월 1일 – 1252년 6월 29일
대관식1250년 11월 1일
이전 국왕에리크 4세
다음 국왕크리스토페르 1세
배우자마틸다 폰 홀슈타인
자녀발데마르 3세,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 1세,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 랑엘란의 영주
가문에스트리센 가문
아버지발데마르 2세
어머니베렌가리아 데 포르투갈
출생1218년
사망1252년 6월 29일
사망 장소아이더슈테트
매장 장소슐레스비히 대성당, 이후 고토르프 성으로 이전
결혼 및 자녀
배우자メクチルド・フォン・ホルシュタイン
자녀ヴァルデマー3世
에리크1세
아벨

2. 생애

1232년에리크 4세가 발데마르 2세와 함께 덴마크의 공동 군주로 즉위하면서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었다. 1237년 4월 25일에는 홀슈타인의 마틸다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 장인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 백작이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그의 아들들인 홀슈타인-킬의 요한 1세와 홀슈타인-이체호의 게르하르트 1세의 후견인을 맡기도 했다.

1241년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고 형 에리크가 에리크 4세로 즉위하자, 아벨은 슐레스비히의 독립을 주장하며 갈등을 빚었다.[4] 1250년 아벨의 여동생 브란덴부르크의 소피아가 중재에 나설 때까지 분쟁이 이어졌다.[4]

같은 해 에리크 4세가 슐레스비히에 있는 아벨의 관저로 초대를 받아 방문했다가 살해당했다.[5] 아벨은 24명의 귀족들과 함께 결백을 맹세했지만,[5] "이름은 아벨이지만, 행적은 카인과 같다"는 비난을 받았다.[5] 그럼에도 1250년 11월 1일 비보르 의회에서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었다.[6]

1252년 6월 29일, 프리슬란트에서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수레바퀴 제조인 헤네르(Henner)에게 살해당했다.[6] 아벨의 아들 발데마르는 쾰른 대주교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6] 동생인 크리스토페르 1세12월 25일 룬드 성당에서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다.[6]

2. 1. 초기 생애

에스트리센가 출신이다. 발데마르 2세 국왕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산슈 1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232년 자신의 형인 에리크가 아버지인 발데마르 2세와 함께 덴마크의 공동 군주로 즉위하면서 에리크의 뒤를 이어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237년 4월 25일에는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 백작의 딸인 마틸다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 아돌프 4세 백작이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에는 몇 년 동안 아돌프 4세의 아들인 홀슈타인-킬의 요한 1세와 홀슈타인-이체호의 게르하르트 1세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 2. 슐레스비히 공작으로서의 활동

1232년 자신의 형인 에리크가 아버지인 발데마르 2세와 함께 덴마크의 공동 군주로 즉위하면서 에리크의 뒤를 이어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임명되었다.[4] 1237년 4월 25일에는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Adolf IV) 백작의 딸인 홀슈타인의 마틸다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 아돌프 4세 백작이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에는 몇 년 동안 아돌프 4세의 아들인 홀슈타인-킬의 요한 1세와 홀슈타인-이체호의 게르하르트 1세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4]

1241년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형인 에리크가 덴마크의 에리크 4세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벨은 슐레스비히의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에 형인 에리크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북쪽으로 란데르스까지 진격하여 에릭의 지지자들을 약탈한 다음 퓐으로 이동했다. 에릭은 1년 후 반격하여 슐레스비히에 있는 아벨의 주둔지를 기습하여 아벨의 어린 딸 소피아가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도망치게 만들었다.[4] 에리크와 아벨 간의 분쟁은 1250년 아벨의 여동생인 브란덴부르크의 소피아(Sofia, 요한 1세 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첫번째 부인)가 중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4]

2. 3. 덴마크 국왕 즉위

1241년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에리크가 덴마크의 에리크 4세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벨은 슐레스비히의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에 형인 에리크 4세와 갈등을 빚었다. 에리크와 아벨 간의 분쟁은 1250년 아벨의 여동생인 브란덴부르크의 소피아가 중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250년 에리크 4세 국왕이 슐레스비히에 있던 아벨의 관저로 초대받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아벨이 에리크 4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아벨은 24명의 귀족들과 함께 자신이 결백하다고 맹세했다. 사람들은 "이름은 아벨이지만, 행적은 카인과 같다"(덴마크어, "''Abel af navn, Kain af gavn''")고 말했다.[5]

아벨은 1250년 11월 1일 비보르 의회에서 덴마크의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2. 4. 죽음

1250년 에리크 4세 국왕이 슐레스비히에 있던 아벨의 관저로 초대받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6] 아벨은 에리크 4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24명의 귀족들과 함께 자신이 결백하다고 맹세하여 혐의를 벗었다.[6] 사람들은 『구약성경창세기의 고사에 빗대어 "이름은 아벨, 행적은 카인"이라고 수군거렸다.

아벨은 1250년 11월 1일 비보르 의회에서 덴마크의 국왕으로 추대되었다.[6] 1252년 6월 29일 프리슬란트에서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 과정에서 수레바퀴 제조인 헤네르(Henner)에게 살해당했다.[6]

당시 아벨의 아들 발데마르(Valdemar)는 쾰른 대주교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6] 아벨의 동생인 크리스토페르 1세가 1252년 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룬드 성당에서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6]

2. 5. 사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형제를 살해한 것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여겼다. 아벨의 시신이 슐레스비히 대성당에 안치되자 수도사들은 밤에 교회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 후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아벨의 불경한 유령이 밤에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왕의 시신은 교회 밖으로 옮겨져 슐레스비히 외곽 고토르프 성 근처의 축축한 무덤에 안치되었다. 누군가 아벨의 가슴에 나무 말뚝을 박아 무덤에 확실히 묶어 두었다. 오랫동안 왕의 유령이 평화를 찾지 못했고, 때때로 "아벨의 야생 사냥"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데, 흰 말을 탄 검은 얼굴의 남자와 빛나는 사냥개들이 슐레스비히의 황무지와 숲을 가로질러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

슐레스비히 외곽 숲(독일어: ''Tiergarten'', 덴마크어: ''Dyrehave'')에 있는 아벨의 사망 연도가 새겨진 기념비


아벨의 후손들, 즉 "아벨 가문"은 1375년까지 남유틀란트를 통치했으며, 종종 홀슈타인의 친척들과 협력했다. 그들은 덴마크 정부에 영구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그들의 통치는 프리슬란트, 홀슈타인, 그리고 대부분의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에서 결국 분리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증손자는 폐위되기 전 발데마르 3세로 잠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들은 그의 증손녀 슐레스비히의 헬비가 발데마르 4세와 결혼하면서 왕좌로 돌아왔다. 헬비의 혈통은 크리스토퍼 3세와 함께 끊어졌지만, 그의 계승자 크리스티안 1세는 그의 딸 소피를 통해 아벨의 후손이었다. 크리스토페르 1세부터 발데마르 4세까지를 제외하고, 그 이후의 모든 덴마크 군주들은 아벨의 인척 후손이다.

3. 가족 관계

아벨은 에스트리센가 출신으로, 발데마르 2세 국왕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산슈 1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237년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Adolf IV) 백작의 딸인 마틸다(Matilda)와 결혼하여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벨의 자녀
이름생몰년비고
발데마르 3세1238년 ~ 1257년슐레스비히 공작 (1254년 ~ 1257년)
소피1240년 ~ 1284년 이후안할트-베른부르크 공작 베른하르트 1세와 결혼
에릭 1세1241년경 ~ 1272년슐레스비히 공작 (1257년 ~ 1272년)
아벨1252년 ~ 1279년


4. 유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형제를 살해한 아벨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여겼다.[1] 아벨의 시신이 슐레스비히 대성당에 안치되자 수도사들은 밤에 교회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하며, 그 후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1] 그들은 아벨의 불경한 유령이 밤에 돌아다닌다고 믿었다.[1] 결과적으로 왕의 시신은 교회 밖으로 옮겨져 슐레스비히 외곽 고토르프 성 근처의 축축한 무덤에 안치되었고, 누군가 아벨의 가슴에 나무 말뚝을 박아 무덤에 확실히 묶어 두었다.[1] 오랫동안 왕의 유령이 평화를 찾지 못했고, 때때로 "아벨의 야생 사냥"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데, 흰 말을 탄 검은 얼굴의 남자와 빛나는 사냥개들이 슐레스비히의 황무지와 숲을 가로질러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1]

아벨의 후손들, 즉 "아벨 가문"은 1375년까지 남유틀란트를 통치했으며, 종종 홀슈타인의 친척들과 협력하여 덴마크 정부에 영구적인 문제를 야기했다.[1] 그들의 통치는 프리슬란트, 홀슈타인, 그리고 대부분의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에서 결국 분리되는 것을 의미했다.[1] 그의 증손자는 폐위되기 전 발데마르 3세로 잠시 왕위를 계승했다.[1] 그러나 아벨의 후손들은 그의 증손녀 슐레스비히의 헬비가 발데마르 4세와 결혼하면서 왕좌로 돌아왔다.[1] 헬비의 혈통은 크리스토퍼 3세와 함께 끊어졌지만, 그의 계승자 크리스티안 1세는 그의 딸 소피를 통해 아벨의 후손이었다.[1] 크리스토퍼 1세부터 발데마르 4세까지를 제외하고, 그 이후의 모든 덴마크 군주들은 아벨의 인척 후손이다.[1]

참조

[1] 블로그 The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http://mickhartley.t[...] mickhartley.typepad.com 2008-02-14
[2] 웹사이트 Abel, 1219-52, Konge https://runeberg.org[...] Dansk biografisk Lexikon 2018-08-01
[3] 웹사이트 Mechtilde (Mathilde), Dronning, –1288 https://runeberg.org[...] Dansk biografisk Lexikon 2018-08-01
[4] 웹사이트 King Abel https://web.archive.[...] danmarkskonger 2018-08-01
[5] 웹사이트 Gudmundsen, Lage, –o.1252, Ridder https://runeberg.org[...] Dansk biografisk Lexikon 2018-08-01
[6] 웹사이트 Valdemar (III), Hertug af Sønderjylland, –1257 https://runeberg.org[...] Dansk biografisk Lexikon 2018-08-01
[7] 웹사이트 Birger Magnusson https://sok.riksarki[...] Svenskt biografiskt lexikon 2018-08-01
[8] 서적 Medeltidens svenska krig
[9] 서적 Danmarks Riges Krønik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