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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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파기는 탐라국 왕자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일본서기』에는 508년경 탐라가 백제에 통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며, 아파기는 661년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천황에게 헌상되었다. 아파기의 일본 파견은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탐라의 독자적인 외교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아파기는 일본에서 사이메이 천황 또는 덴지 천황을 알현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며, 이 사건 이후 사이메이 천황은 붕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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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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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가문 | 하타케야마씨(畠山氏) |
이름 | 아파기(阿波伎) |
다른 이름 | 아와키(淡置) |
생애 | |
생몰년도 | 미상 |
아버지 | 하타케야마 이에나가(畠山家長)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2. 기록
일본서기에 따르면, 탐라(耽羅)는 508년경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된다.[1] 아파기(阿波伎)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며, 661년 탐라가 왕자 아파기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2] 당시 탐라는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와 일본(왜)에 사신을 보내며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했고, 백촌강 전투에서 일본과 함께 종군하며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파기의 알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메이 천황이 붕어했다.[3]
2. 1. 『일본서기』의 기록
게이타이 천황 2년(추정 508년) 12월, 남쪽 바다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에 통하였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에 탐라(耽羅)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다.[1]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따르면, 탐라는 476년에 백제의 문주왕에게 조공했고, 498년에 동성왕에게 복속되었다.아파기(阿波伎)라는 이름은 『일본서기』 권 제26에만 나타나며, 본문에는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 등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고 기술되어 있다.[2]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길박덕서』에는 쓰모리노기쇼를 장으로 하는 견당사 항해기 일부가 게재되어 있다.
辛酉年(=사이메이 천황 7년, 661년) 正月二十五日、還着於越州。四月一日、從越州發向東歸。七日、至着案山南。八日寅時、從西南風、放船於大海。於海路迷、漂蕩辛苦。經九日八夜、僅得着於耽羅嶋。便喚嶋人王子阿波伎等九人、慰勞、載客船、欲獻天皇。五月廿三日、奉進於朝倉橘廣庭宮。耽羅始入朝貢自此始也일본어
신유년(=사이메이 천황 7년, 661년) 1월 25일에 엣슈(항저우만 남안)에 도착했다. 4월 1일 엣슈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7일, 챙안산의 남쪽에 도착했다. 8일 새벽, 서남풍을 타고 배를 대해에 내보냈다. 해상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며 고생했다. 9일 8야가 지나 겨우 탐라섬에 도착했다. 섬 사람의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초대해 위로하고, 사신의 배에 태워, 천황에게 헌상하기로 했다. 5월 23일, 아사쿠라 조정에 헌상했다. 탐라 사람이 입조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한국어
당시 탐라는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660년)으로 인해, 『당회요』에 있는 것처럼 당에 사신을 파견함과 동시에 일본(왜)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고 있었다. 『구당서』 권 제84 중의 「유인궤전」에 따르면, 백촌강 전투에서의 항복자 중에 "탐라국 사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과 함께 종군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탐라는 동국 구원 거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파기가 아사쿠라 타치바나 히로니와노미야에서 사이메이 천황 혹은 나카노오오에 황자에게 알현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입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메이 천황은 붕어했다.[3]
2. 2. 『삼국사기』의 기록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 탐라는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2]津守吉祥|쓰모리노기쇼일본어를 장으로 하는 견당사의 항해기 일부가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길박덕서』에 게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661년 1월 25일, 엣슈(항저우만 남안)에 도착했다. 4월 1일 엣슈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7일, 챙안산의 남쪽에 도착했다. 8일 새벽, 서남풍을 타고 배를 대해에 내보냈다. 해상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며 고생했다. 9일 8야가 지나 겨우 탐라섬에 도착했다. 섬 사람의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초대해 위로하고, 사신의 배에 태워, 천황에게 헌상하기로 했다. 5월 23일, 아사쿠라 조정에 헌상했다. 탐라 사람이 입조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탐라는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660년)으로 인해 당에 사신을 파견함과 동시에 일본(왜)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가의 존망을 걸고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고 있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 따르면, 백촌강 전투에서의 항복자 중에 '탐라국 사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과 함께 종군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탐라는 백제 부흥 운동 거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파기가 아사쿠라 타치바나 히로니와노미야에서 사이메이 천황 혹은 나카노오오에 황자에게 알현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알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메이 천황은 사망했다.[3]
3. 아파기의 일본 파견
탐라가 일본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 게이타이 천황 2년(추정 508년) 12월 조의 "남쪽 바다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에 통하였다"라는 기사이다.[1] 『삼국사기』에는 탐라가 476년에 백제의 문주왕에게 조공했고, 498년에 동성왕에게 복속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걸쳐 양국 간에 복속 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파기(阿波伎)라는 이름은 『일본서기』 권 제26에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 등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라는 기록에서 나타난다.[2]
3. 1. 『이길박덕서』의 기록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길박덕서』에는 쓰모리노기쇼를 장으로 하는 견당사 항해기의 일부가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다.辛酉年正月廿五日 還到越州 四月一日 自越州發向東歸 七日至|신유년 정월 25일, 엣슈(지금의 항저우만 남안)에 도착했다. 4월 1일 엣슈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7일일본어 챙안산((쵸우간잔)=숙안산)의 남쪽에 도착했다. 八日平旦 順西南風 放船于大海 於海中 迷途漂㳂辛苦 九日八夜 僅得至耽羅嶋 則勞饗嶋人王子阿波伎等九人 載于客船 欲獻天皇 五月廿三日 奉進|8일 새벽, 서남풍을 타고 배를 대해에 내보냈다. 해상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며 고생했다. 9일 8야가 지나 겨우 탐라섬에 도착했다. 섬 사람의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초대해 위로하고, 사신의 배에 태워 천황에게 헌상하기로 했다. 5월 23일일본어 아사쿠라 조정에 헌상했다. 탐라 사람이 입조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2]
당시 탐라는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660년)으로 인해, 『당회요』에 있는 것처럼 당에 사신을 파견함과 동시에 일본(왜)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고 있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 따르면, 백촌강 전투에서의 항복자 중에 "탐라국 사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과 함께 종군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탐라는 동국 구원 거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파기가 아사쿠라 타치바나 히로니와노미야에서 사이메이 천황 혹은 나카노오오에 황자에게 알현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입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메이 천황은 붕어했다.[3]
3. 2. 백촌강 전투 참전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길박덕서』에 따르면 백촌강 전투 항복자 중에 "탐라국 사신"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이는 탐라국이 일본(왜)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에 참전했음을 보여준다. 백제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탐라는 백제 구원군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2]。4. 아파기의 알현과 그 이후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길박덕서』에는 견당사의 항해기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661년 1월 25일, 견당사는 엣슈(항저우만 남안)에 도착했고, 4월 1일에 동쪽으로 출발했다. 4월 7일 챙안산 남쪽에 도착했고, 8일 새벽 서남풍을 타고 대해로 나아갔다. 그러나 해상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다가 9일 8야 만에 탐라섬에 도착했다. 섬사람의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초대해 위로하고 사신의 배에 태워 천황에게 헌상하기로 했다. 5월 23일, 아사쿠라 조정에 헌상했는데, 이때부터 탐라 사람이 일본에 입조하기 시작했다.[2]
당시 탐라는 백제가 멸망하면서 국가의 명운을 걸고 당나라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고 있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 따르면, 백촌강 전투 항복자 중에 '탐라국 사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탐라는 백제와 가까워 백제 구원 거점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파기가 아사쿠라 타치바나 히로니와 궁에서 사이메이 천황 혹은 나카노오오에 황자에게 알현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입공 직후 사이메이 천황은 붕어했다.[3]
참조
[1]
서적
日本書紀 継体天皇二年十二月条
[2]
서적
日本書紀 斉明天皇七年五月二十三日条
[3]
서적
日本書紀 斉明天皇七年七月二十四日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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