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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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은 로마 포룸에 위치한 고대 로마 신전으로, 141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사망한 아내 파우스티나 황후를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사후에는 그를 기리는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코린토스 양식 기둥과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7세기에는 산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으로 개조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1602년에 재건축되었고, 라파엘로의 약 영수증 등 예술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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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 |
---|---|
기본 정보 | |
![]() | |
위치 | 포로 로마노 |
로마자 표기 | Templum Antonini et Faustinae |
이탈리아어 | Tempio di Antonino e Faustina |
세부 정보 | |
종류 | 로마 신전 |
위치 | Regio IV Templum Pacis |
건설 시작 | 141년 |
건설 주체 | 제15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
2. 신전
14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자신의 사별한 아내였던 파우스티나 황후를 기리기 위해 건설하였다. 파우스티나 황후는 이로 인하여 포룸 로마눔에 이름이 남겨진 첫 황후가 되었다.[1]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죽어 신격화되자, 그의 후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신전을 안토니누스 황제와 파우스티나 황후에게 공동으로 헌사하였다.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은 7세기경 성 로렌초 인 미란다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조되었다. 이 성당은 성 라우렌시오가 순교한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2]
신전은 사각형의 응회암 바위들을 깎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앞의 계단에는 2개의 청동판이 붙어있었는데, 그 청동판에는 "Divo Antonino et Divae Faustinae Ex S.C."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국어로 해석하면 "원로원이 신성하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신성하신 파우스티나 황후께,"라는 의미가 된다. 주랑 현관에 세워져 있는 8개의 코린토스식 기둥들은 각각 높이가 17m였으며, 코니스 아래에 새겨져 있던 프레이제에는 그리핀, 촛대, 두루마리 등이 풍부한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이 조각들은 19세기에도 여러 예술가들이 본따 그리고는 하였다. 이 신전은 본디 비아 사크라에서 울타리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신전 안에는 거대한 파우스티나 황후와 안토니누스 황제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조각상들의 일부가 이후 신전의 앞 뜰 유적에서 발굴되었다.[4]
3. 성당
가톨릭 교회는 신전을 기독교화하여 보존했지만, 완벽하게 모든 손상을 막지는 못했다. 신전 앞뜰의 대리석 보도는 뜯겨나갔고, 기둥에는 깊은 홈이 파여 있다. 이는 중세 시대에 건물을 파괴하려는 시도이거나, 주랑에 지붕을 설치하기 위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계단은 현재 흙에 묻혀 사용할 수 없다. 교회 앞부분은 1546년, 1810년, 1876년에 발굴되었다.[5]
1429년 또는 1430년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성당을 '화학자들과 약학자들의 대학'(Universitas Aromatorium)에 주었다.[6] 이 대학은 현재도 성당 일부를 사용하며, 라파엘로가 서명한 약 영수증이 있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성당에는 건축적 조화를 위해 동쪽 후진(apse)이 없다.
153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방문을 위해 성당은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 현재 성당은 1602년에 재건되었으며,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가 그린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가 제단에 걸려 있다.
3. 1. 산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황후 파우스티나를 기려 141년에 건립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서거한 후,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대 파우스티나를 함께 모시는 신전이 되었다.
응회암으로 지어진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건물에 새겨진 비문에는 ''Divo Antonino et Divae Faustinae Ex S.C.'' (해석: 원로원에서, 신군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에게 헌정)라고 적혀 있었다.
포르티코를 지탱하는 코린트식 원주는 높이가 17m에 달하며, 코니스의 프리즈에는 그리핀과 촛대 부조가 조각되어 있었다. 늦어도 7세기경에 로마 가톨릭 교회인 '''산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으로 개조되었지만, 11세기 저작인 ''로마의 경이''에서 처음 언급되었다.[2] "미란다"는 자선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수 있다.[3] 당시에는 이곳이 성 라우렌시오, 집사 겸 순교자가 로마의 행정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은 장소로 여겨져 헌당되었다.
기독교화는 수 세기 동안 사원의 첼라와 주랑 현관이 보존되는 것을 설명하지만, 모든 손상으로부터 건축물을 보존하지는 못했다. 원래 포디엄은 상단과 하단에 일치하는 대리석 몰딩과 함께 흰색 대리석 판으로 덮여 있었다. 대부분의 대리석 외장은 수거되었지만, 몰딩은 제외되었다.[4] 사원 기둥의 깊은 홈은 약탈품을 위해서든 이교 사원을 파괴하기 위해서든, 기둥이 있는 주랑 현관을 해체하려는 중세 시대의 시도로 추정된다. 홈은 또한 주랑 현관 위에 임시 지붕을 부착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4] 또한 중세 시대에는 포룸을 향한 측면에 계단이 건설되었지만, 현재는 계단 바닥과 청동문 사이에 약 6m의 간격이 있어 그쪽에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고학적 발굴 이전에는 지면이 이 문에 있었다. 사원 앞에서의 발굴은 1546년, 1810년, 그리고 1876년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5]
1429년 또는 1430년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당시 공식적으로 "Universitas Aromatorium"으로 불린 콜레지오 델리 스페치알리(약제사 길드)에 교회를 넘겨주었다.[6] 길드는 여전히 인접한 길드홀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라파엘로가 서명한 약품 영수증이 보관된 작은 박물관이 있다. 이 날짜 이후에 측면 예배당이 세워졌다. 교회에는 일반적인 동쪽 앱스가 없다. 사원의 구조적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되지 않았다.
1536년, 고대 사원을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로마 방문을 위해 복원하기 위해 교회가 부분적으로 철거되고 측면 예배당이 제거되었다.[7] 이제 사원의 첼라 내에 갇힌 교회는 1602년 오라치오 토리아니에 의해 재건되어 단일 본당과 세 개의 새로운 측면 예배당을 만들었다. 주 제단에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1646)가 있는 후면부 캔버스가 있고, 왼쪽 첫 번째 예배당에는 도메니키노의 ''성모자와 성인들''(1626)이 있다.
3. 2. 예술 작품
이 신전은 늦어도 7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인 '''산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으로 개조되었지만, 11세기 저작인 ''로마의 경이''에서 처음 언급되었다.[2] "미란다"는 자선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수 있다.[3] 당시에는 이곳이 성 라우렌시오, 집사 겸 순교자가 로마의 행정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은 장소로 여겨져 헌당되었다.
기독교화는 수 세기 동안 사원의 체라와 주랑 현관이 보존되는 것을 설명하지만, 모든 손상으로부터 건축물을 보존하지는 못했다. 원래 포디엄은 상단과 하단에 일치하는 대리석 몰딩과 함께 흰색 대리석 판으로 덮여 있었다. 대부분의 대리석 외장은 수거되었지만, 몰딩은 제외되었다.[4] 사원 기둥의 깊은 홈은 약탈품을 위해서든 이교 사원을 파괴하기 위해서든, 기둥이 있는 주랑 현관을 해체하려는 중세 시대의 시도로 추정된다. 홈은 또한 주랑 현관 위에 임시 지붕을 부착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4] 또한 중세 시대에는 포룸을 향한 측면에 계단이 건설되었지만, 현재는 계단 바닥과 청동문 사이에 약 6m의 간격이 있어 그쪽에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고학적 발굴 이전에는 지면이 이 문에 있었다. 사원 앞에서의 발굴은 1546년, 1810년, 그리고 1876년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5]
1429년 또는 1430년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당시 공식적으로 "Universitas Aromatorium"으로 불린 콜레지오 델리 스페치알리(약제사 길드)에 교회를 넘겨주었다.[6] 길드는 여전히 인접한 길드홀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라파엘로가 서명한 약품 영수증이 보관된 작은 박물관이 있다. 이 날짜 이후에 측면 예배당이 세워졌다. 교회에는 일반적인 동쪽 앱스가 없다. 사원의 구조적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되지 않았다.
1536년, 고대 사원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로마 방문을 위해 복원하기 위해 교회가 부분적으로 철거되고 측면 예배당이 제거되었다.[7] 이제 사원의 첼라 내에 갇힌 교회는 1602년 오라치오 토리아니에 의해 재건되어 단일 본당과 세 개의 새로운 측면 예배당을 만들었다. 주 제단에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1646)가 있는 후면부 캔버스가 있고, 왼쪽 첫 번째 예배당에는 도메니키노의 ''성모자와 성인들''(1626)이 있다.
참조
[1]
간행물
'Communicating a consecratio: the defecation coinage of Faustina I'
2012
[2]
서적
Le Chiese di Roma nel Medio Evo
Olschki
1927
[3]
문서
[4]
서적
Rome: An Oxford Archaeological Guide.
[5]
문서
[6]
문서
Descrizione delle Pitture, Sculture e Architetture esposte in Roma
1763
[7]
서적
Roma e dintorni
Touring Club Ital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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