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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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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는 1884년 포르투갈의 카스트루베르드에서 태어난 공화주의자이자 아나코-생디칼리스트였다. 그는 저널리스트, 서점 운영, 쿠데타 시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프리메이슨으로도 활동했다. 1908년 1월 28일에는 리스본 시립 도서관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같은 해 2월 1일에는 마누엘 부이사와 함께 카를루스 1세 국왕과 왕세자를 암살했다. 암살 직후 체포되어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공화주의자들의 추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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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
기본 정보
본명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
직업홍보 담당자
편집자
기자
사무원
출생일1883년 11월 24일
출생지카제벨, 카스트루베르드 시
사망일1908년 2월 1일
사망지리스본, 포르투갈
사인경찰의 총격
부모마누엘 루이스 다 코스타
마리아 주앙 다 코스타
범죄 정보
날짜1908년 2월 1일
시간알 수 없음
목표카를루스 1세 국왕
아멜리 도를레앙 여왕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
마누엘 2세 왕자
주앙 프랑코 총리
장소테헤이루 두 파수
사망자2명
부상자1명
무기브라우닝 리볼버

2. 생애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는 1884년 알렌테주 지방카스트루베르드에 있는 카제벨 마을에서 태어났다. 리스본으로 이주하여 삼촌 밑에서 일하면서 글을 배웠고, 리스본 상업 노동자 협회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1]

1908년 1월 28일, 리스본 시립 도서관 엘리베이터에서 공화주의 단체들과 함께 주앙 프랑쿠 총리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다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는 현장에서 탈출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1908년 2월 1일,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마누엘 부이사와 함께 카를루스 국왕과 루이스 필리프 드 포르투갈 왕세자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암살 직후, 현장에 있던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1] 코스타는 미혼으로 상업 업무에 종사하는 직원이자 여러 출판물에 기고하는 주간지 '''O Caixeiro'''의 편집자였다.

2. 1. 초기 활동

알렌테주 지방카스트루베르드 카제벨(Casével) 마을에서 소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마누엘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마리아 주앙 다 코스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리스본 상업 노동자 협회 회원이던 삼촌과 함께 리스본을 여행하기도 했다.[1] 이후 전국을 여행하며 판매원으로 일했으며, 앙그라 두 에로이즈무에서 상업 노동자를 위한 노동 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매주 기사를 기고했다. 앙그라에 있는 동안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청년 센터'''(Núcleo da Juventude Anarco-Sindicalista)의 핵심 인물로도 활동했다.[2] 1903년 에스트레모즈에서 공화주의 선전가로 활동하며 지역 신문에 기고했다. 아킬리누 히베이루와 함께 작은 서점 'A Social Editora'를 설립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팸플릿을 편집하고 배포했는데, 여기에는 왕족을 비판하는 내용의 'A Filha do Jardineiro'(정원사의 딸)도 포함되었다.

그는 극단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공화주의 급진주의자였으며, 프리메이슨 회원으로서 아킬리누 히베이루, 루즈 드 알메이다, 마차도 산토스와 같은 동시대 인물들과 함께 리스본 마운틴 로지에서 활동했다.

2. 2. 프리메이슨 활동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서 아킬리누 히베이루, 루즈 드 알메이다, 마차도 산토스와 같은 동시대 인물들과 함께 리스본 마운틴 로지에서 활동했다.[2] 그는 극단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공화주의 급진주의자였다.[2]

3. 1908년 리스본 국왕 암살 사건

1908년 1월 28일 엘리베이터 쿠데타 실패 후,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는 마누엘 부이사 등 다른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국왕 암살 계획을 구체화했다.[4] 이들은 카르보나리아라는 비밀 조직 회원이었다.[5]

1908년 2월 1일, 알프레두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는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카를루스 국왕과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를 암살했다.[6] 알프레두 코스타는 마차에 뛰어올라 국왕과 왕세자에게 총을 쏘았다.[6] 아멜리 도를레앙 왕비가 저항했지만, 코스타는 왕세자에게 총격을 가했다.[6] 총격전 중 코스타는 부상 후 체포되었으나, 경찰서 이송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6]

알프레두 코스타, 카를루스 1세와 왕세자 암살 사건 직후 사망, 1908년 2월 2일


부검 결과, 알프레두 코스타의 몸에는 11개의 상처가 있었으며, 폐를 관통한 총상이 치명상이었다.[8] 이 총알은 포르투갈 경찰 표준 총기가 아닌 곳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어, 암살 배후 의혹이 제기되었다.[9]

3. 1. 엘리베이터 쿠데타 (1908년 1월 28일)

1908년 1월 28일,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는 리스본에 있는 시립 도서관 엘리베이터에서 공화주의 단체들과 함께 주앙 프랑쿠(João Franco) 총리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해로 쿠데타는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던 많은 공화주의 인사들이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는 현장을 탈출하여 체포를 면했다.

포르투갈 공화당과 진보적 반체제 정당 세력은 카르보나리아, 포르미가 브란카, 프리메이슨 회원들과 함께 이 쿠데타를 계획, 자금 지원 및 무장했다. 이들은 공화국을 선포하거나 주앙 프랑쿠 총리를 암살하려 했다.

쿠데타 당일, 코스타는 마누엘 부이사를 포함한 20명의 남성을 이끌고 왕립 네세시다스 궁전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전략을 바꿔 쿼르텔 도스 로이오스를 공격했다. 그들은 주요 공격 신호인 박격포 폭발을 기다리던 중, ''산타 바르바라 거리'' 근처에서 여러 명의 ''과르다 무니시팔''(시립 경비대) 구성원과 대치했다.

경찰이 음모를 제보받고 도시 전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강화하면서 쿠데타는 실패했다. 많은 공화주의자들이 체포되었지만, 알프레두 코스타는 쿠데타를 위해 미리 지정된 위치에 없었기 때문에 경찰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카르보나리아와 공화주의자들이 자주 찾던 카페 젤로의 뒷방은 비교적 비어 있었다. 마누엘 부이사를 포함한 소수의 그룹과 함께 알프레두 코스타는 카페에 계속 모였다. 코스타는 동료들에게 투쟁을 계속할 것을 촉구하며 도시를 자유롭게 걸어 다녔다. 쿠데타 시도 직후 카페 젤로에서 마차두 산투스 및 소아레스 안드레아와 만났을 때, 그는 "만약 누군가가 나를 잡으려 한다면... 나는 그를 산산조각 낼 것이다."라고 단언하며 브라우닝 리볼버를 소지하고 있는 코트를 두드렸다.

3. 2. 암살 계획 및 실행 (1908년 2월 1일)

1908년 1월 28일,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는 리스본 시립 도서관 엘리베이터에서 공화주의 단체들과 함께 주앙 프랑쿠(João Franco) 총리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정부군의 방해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는 현장을 탈출하여 체포되지 않았다.[4]

1908년 2월 1일 아침, 알프레두 코스타는 마누엘 부이사와 다른 카르보나리아 회원들과 함께 리스본 올리바이스에 있는 킨타 두 제세에서 만나 주앙 프랑코와 왕족 암살 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국왕을 살해하기로 결정한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엘리베이터 쿠데타 시도 당시 알프레두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가 소속된 조직에 내려진 지시의 일부였다.[5]

오후 2시경, 마누엘 부이사와 다른 세 명은 카페 젤로의 주방 근처 구석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알프레두 코스타는 재빨리 식사를 마쳤고, 마누엘 부이사는 먼저 일어나 동료들에게 국왕의 페리가 도착하는 것을 맞이하겠다는 뜻으로 "배"를 잡으러 가겠다고 말했다.

오후 4시쯤, 알프레두 코스타, 파브리시우 데 레모스, 지메네스는 코메르시우 광장의 왕국 장관 아케이드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마누엘 부이사는 도밍고스 히베이루와 호제 마리아 누네스와 함께 왕실 일행의 예정된 경로를 따라가며, 조제 1세 동상 근처, 나무와 키오스크 옆에 자리를 잡았다. 6명의 비밀 조직 체계 세포는 도착하는 배를 주시하며 나머지 군중과 함께 왕족의 예정된 경로를 따라 대기했다.

오후 5시 20분경, 하선 후 마누엘 부이사가 란도에 총격을 가했다. 알프레두 코스타는 마차에 뛰어올라 이미 생명이 없는 카를루스 국왕의 시신에 두 발의 총을 쐈다. 부이사는 이미 첫 번째 총으로 국왕을 살해했다. 아멜리 도를레앙 왕비는 꽃다발을 들고 코스타에게 맞서며 "''인파메스! 인파메스!''"(''악명 높은!'')라고 외쳤다. 코스타는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에게 돌아서 가슴에 총을 쐈지만, 구경이 작아서 흉골을 관통하지 못했고, 왕세자는 자신의 군용 리볼버로 코스타에게 네 발의 총을 빠르게 발사했다. 코스타는 마차에서 떨어졌고, 부검 결과 총알이 코스타의 왼쪽 상완골을 부러뜨렸고,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란도의 가장자리를 잡는 것을 방해했다. 기병 장교인 피게이라 중위가 칼로 코스타를 공격하여 등과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그 후 시 경찰이 공격에 가담했고, 두 명의 요원이 그를 체포하여 시청 근처 경찰서로 끌고 갔다. 입구에서 그는 신원 미상의 경찰관 또는 시 경찰의 일원에 의해 총격을 받아 폐에 구멍이 났고, 결국 사망했다.[6]

3. 3. 부검 및 장례

알프레두 코스타는 1908년 2월 11일에 매장되었다. 그 전날, '''아소시아상 두 헤지스투 시빌'''(Associação do Registo Civil|시민 등록 협회pt) 회원 세 명이 영안실 밖에 나타나 장례식 책임자에게 민간 장례를 치러 줄 것을 설득했다.[7]

같은 날 초저녁에 부검이 진행되었고, 검시관은 그의 몸 전체에서 총 11개의 상처를 발견했다. 머리에 세 개, 등에 두 개, 가슴에 칼에 의한 것으로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 하나가 있었다. 일곱 번째 상처는 얼굴 왼쪽에 있었다. 나머지 상처는 총상으로, 허리 아래 한 곳, 겨드랑이와 상완골에 관통상 한 곳(두 상처 모두 루이스 필리페 왕자에 의한 것으로 추정), 가슴 윗부분에 맞아 폐를 관통하고 흉부를 가로질러 갈비뼈에 박힌 총알에 의한 상처가 있었다. 이 마지막 상처가 치명적이었고 코스타의 사망 원인이었다.[8] 탄환은 회수되지 않았지만, 묘사로 볼 때 당시 포르투갈 경찰의 표준이 아니었던 6.35–7.65 구경 자동 소총에서 발사된 5–10 mm의 작은 총알이었다. 이는 알프레두 코스타가 암살범이 심문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음모론을 강화했다.[9]

4. 사후

마누엘 부이차와 함께 알프레두 루이스 다 코스타의 시신은 수습되어 상 조앙 묘지로 운구되었다. 주앙 사비누는 혼란 중에 희생된 사람이다. 시신들은 도착 후 봉인되어 6044번 및 6045번 묘지에 매장되었고, 1914년에 암살자들의 유해는 4251번 묘실로 옮겨졌다.[10]

페레이라 두 아마랄의 찬성 정부는 공화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그들은 암살에 대해 사과했고 암살자들을 조국의 친구로 여겼다. 약 22,000명이 코스타와 부이차의 묘에 참배했고, 시민 행사는 시민 등록 협회가 조직했으며, 협회는 꽃을 제공하고 묘지에 나타난 사람에게는 500 레알, 아이에게는 200 레알을 지불했다.[10]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된 후, 같은 협회는 "조국의 영웅적 해방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건설하기 위해 묘지 부지를 매입했다. 리스본 시청에 보낸 청원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 기념비는 결국 에스타두 노부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고, 유해는 묘지 내 다른 장소로 이장되었으며, 기념비의 구성 요소는 방치되었다.

카를루스 국왕과 왕세자 암살 사건에 대한 최종 보고서는 1910년 10월 5일 혁명 직후인 포르투갈 제1 공화국 선포 직후(1910년 10월 25일) 사라졌다. 알메이다 이 아제베두 판사는 이 사건을 임시 정부 위원인 호세 바르보사 박사에게 제출했고, 바르보사 박사는 이 사건을 새로운 법무부 장관인 아폰수 코스타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었다.

5. 사진


참조

[1] 웹사이트 O Atentado de 1 de Fevereiro de 1908 (Regicídio)- Na versão de Aquilino Ribeiro http://www.laicidade[...]
[2] 웹사이트 A História na obra de Pedro da Silveira por José Guilherme Reis Leite http://www.triplov.c[...]
[3] 문서 The Library Elevator, which was dismantled in 1920, connected the ''Praça do Município'' (then called the ''Largo do Pelourinho'') with the ''Largo da Biblioteca'' in Lisbon, and was the site of the arrest of various revolutionaries involved in the attempted coup that was then referred to as the ''Janeirada'', but was popularly referred to as the ''Municipal Library Elevator Coup''
[4] 문서 From the story recounted by Fabrício de Lemos, one of the conspirators, later written down by António de Albuquerque in '''''A execução do Rei Carlos''''' (English: ''The Execution of King Carlos''); although with all probability the plans to kill the monarch had been completed, the team had met to adjust the details between the members, owing to the previous days detentions at the [[Municipal Library Elevator Coup|Municipal Library Elevator]].
[5] 서적 2007
[6] 서적
[7] 문서 The Association was created by Portuguese Masons and Republicans to facilitate the organization and development of a new Portuguese civil code as a prelude to the formation of a Republic. Formed in 1895, its precepts were institutionaliz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Civil Registry Code'' and the transfer of documents from Church to governmental institutions, in the ''Lei da Separação da Igreja do Estado'' (English: ''The Law on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8] 서적 2008
[9] 서적 2008
[10] 서적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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