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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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산박은 중국 산둥성 서부에 위치했던 습지 지형으로, 황하의 범람으로 형성되었다. 11세기 말부터 도적들의 소굴로 이용되었으며, 12세기 초 송강의 난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명나라 때 소설 《수호전》의 배경이 되었으며, 현재는 수박양산풍경구로 관광지화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수호전》의 영향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 또는 음식점 상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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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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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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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이름 | 량산 |
로마자 표기 | Liángshān |
위치 | 중국 산둥 성 량산 현 |
좌표 | 35°47′11.86″N 116°5′33.10″E |
역사 | |
관련 문화 | 수호전 |
관련 인물 | 양산박 영웅들 |
기타 | |
관련 용어 | 양산박 |
2. 역사
오대 십국 시대인 944년 황하의 범람으로 양산박이 형성된 이후, 북송 시대에도 1019년과 1077년 황하의 대범람으로 양산박은 더욱 커졌다. 11세기 말경, 양산박은 도적과 정부에 항거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송나라를 괴롭혔다.
금나라 시대인 1194년, 황하의 대범람으로 물길이 바뀌면서 양산박은 점차 메말라 소실되었다.
북송 말, 송강의 반란군은 양산박 근처에서 맹위를 떨쳤다. 원나라 때 편찬된 송사에는 송강과 36인이 관군에 대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송강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을 바탕으로 명나라 초에 수호전이 만들어졌다.
2. 1. 지리적 배경
양산박이 있던 자리(현재의 산둥성 서부)는 황하에 의해 형성된 해발 0미터 이하의 내륙 저지대이며, 일대는 예부터 황하의 범람이 반복됨에 따라 무수한 수로와 습지가 생겨났다. 특히 오대 십국 시대인 944년 황하의 범람 때, 제방이 터지면서 강물이 흘러들었고, 이 땅에는 큰 습지가 생겨났다. 양산박(梁山泊)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오대에서 북송 무렵으로, 인근에 양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었다 하여 양산박이라 불렀다.양산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현재의 허난성 동부에서는 황하의 대범람이 북송 때에도 1019년, 1077년으로 이어져 양산박은 더욱 규모를 키웠다. 이윽고 11세기 말경부터 수로와 과거에 구릉이었던 섬이 뒤엉킨 양산박은 도적과 정부에 항거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송나라를 크게 괴롭혔다.
북송을 대신하여 이 땅을 지배하던 금나라 때인 1194년에는 황하의 대범람이 일어나 강은 이 지역에서 남북으로 갈라지고, 산둥 반도의 남쪽, 회하 방면으로 흐르는 남류가 1855년까지 700년에 걸쳐 본류가 되는데, 처음에는 황하는 양산박에 쏟아져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잦은 하도의 변천을 거쳐 이윽고 메마르기 시작하여 소실되었다.
2. 2. 송강의 난과 《수호전》
양산박 근처에 횡행한 반란자 중에서도 북송 말기인 12세기 초 하북에서 봉기하여 산동 일대에서 10군을 제압한 송강의 반란군은 맹위를 떨쳤다. 14세기 원나라 때 편찬된 송사 후몽(侯蒙)전에는 '송강이 경동(북송 수도인 개봉부의 동쪽, 현재의 산둥성 서부)을 공격', '송강과 36인이 제(齊)·위(魏)에 횡행하여 관군이 수만 명이 되어도 감히 대항할 수가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곧이어 송강의 반란은 진압되지만, 이 사실을 바탕으로 양산박의 송강과 36명의 호걸들이 농성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명나라 초에 양산박에 모이는 108명의 호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수호전》이 정리되었다.현재의 양산박은 습지의 모습을 전혀 간직하고 있지 않으나 일대는 수박양산풍경구(水泊梁山風景區) 등 관광지화되어 소설 속 산채를 복원한 시설이 있다.

2. 3. 황하 유로 변경과 양산박의 소실
북송을 대신하여 이 땅을 지배하던 금나라 때인 1194년에 황하의 대범람이 일어났다. 이때문에 강은 이 지역에서 남북으로 갈라지고, 산둥 반도의 남쪽, 회하 방면으로 흐르는 남류가 1855년까지 700년에 걸쳐 본류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황하가 양산박에 쏟아져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잦은 물길의 변천을 거쳐 이윽고 메마르기 시작하여 소실되었다.[1]2. 4. 현재의 양산박
양산박이 있던 곳은 현재의 산둥성 서부로, 황하에 의해 형성된 해발 0m 이하의 내륙 저지대였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황하의 잦은 범람으로 수많은 수로와 습지가 생겨났다. 특히 오대 십국 시대인 944년 황하가 범람하여 제방이 터지면서 강물이 흘러들어 큰 습지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양산박의 시초이다. 양산박이라는 이름은 오대에서 북송 무렵부터 나타나며, 인근의 양산이라는 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양산박 상류에 해당하는 현재의 허난성 동부에서는 북송 때인 1019년, 1077년에도 황하의 대범람이 이어져 양산박은 더욱 커졌다. 11세기 말경, 수로와 과거 구릉이었던 섬이 뒤엉킨 양산박은 도적과 정부에 항거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송나라를 크게 괴롭혔다.
금나라 때인 1194년, 황하의 대범람으로 강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산둥반도 남쪽, 회하 방면으로 흐르는 남류가 1855년까지 700년에 걸쳐 본류가 되었다. 처음에는 황하가 양산박으로 쏟아져 갈라졌다고 한다. 그 후 잦은 물길 변화를 거쳐 양산박은 점차 메말라 사라졌다.
현재의 양산박은 습지의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일대는 수박양산풍경구(水泊梁山風景區) 등 관광지로 개발되어 소설 속 산채를 복원한 시설이 있다.
3. 한국에서의 양산박
水滸傳|수호전중국어에서의 의미가 전환되어 '뛰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1]
3. 1. 상호 활용
대한민국에서는 일반 음식점과 중화요리집의 상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1]일본에서는 "양산박"이 유지들의 소굴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된다.[1] 예를 들어 메이지 초기, 오쿠마 시게노부의 도쿄 사저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 젊은 관료들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쓰키지 양산박"이라고 불렸다.[1]
데즈카 오사무, 후지코 후지오(후지코 F 후지오, 후지코 후지오 A), 아카츠카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등이 살았던 토키와 료는 "만화가들의 양산박"이라고 불렸고,[1] 히라츠카 라이쵸 등이 유명한 세이쇼도 "여성 양산박"이라고 불렸던 것을 이토 노에가 「잡음」(雑音)에 기록하고 있다.[1]
3. 2. 기타
- 水滸傳|수호전중국어에서의 의미가 전환되어 '뛰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 대한민국에서는 일반 음식점과 중화요리집의 상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일본에도 에도 시대에 전래되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고, 양산박(梁山泊)의 이름은 매우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양산박"이 유지들의 소굴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메이지 초기, 오쿠마 시게노부의 도쿄 사저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 젊은 관료들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쓰키지 양산박"이라고 불렸다.
- 그 외에도 데즈카 오사무, 후지코 후지오(후지코 F 후지오, 후지코 후지오 A), 아카츠카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등이 살았던 토키와 료가 "만화가들의 양산박"이라고 불렸다.
- 히라츠카 라이쵸 등이 유명한 세이쇼도 "여성 양산박"이라고 불렸던 것을 자신도 편집장을 지냈던 이토 노에가 「잡음」(雑音)에 기록하고 있다.
4. 일본에서의 양산박
수호전은 중국에서 사대기서 중 하나로 널리 읽혔다. 일본에도 에도 시대에 전래되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고, 양산박(梁山泊)이라는 이름은 매우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양산박"이 유지들의 소굴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4. 1. 《수호전》의 인기와 파생어
《수호전》에서의 의미가 전환되어 '뛰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반 음식점과 중화요리집의 상호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일본에도 에도 시대에 전래되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고, 양산박(梁山泊)의 이름은 매우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양산박"이 유지들의 소굴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메이지 초기, 오쿠마 시게노부의 도쿄 사저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등 젊은 관료들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쓰키지 양산박"이라고 불렸다.
그 외에도 데즈카 오사무, 후지코 후지오 (후지코 F 후지오, 후지코 후지오 A) , 아카츠카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등이 살았던 토키와 료가 "만화가들의 양산박"이라고 불렸다. 히라츠카 라이쵸 등이 유명한 세이쇼도 "여성 양산박"이라고 불렸던 것을 자신도 편집장을 지냈던 이토 노에가 「잡음」(雑音)에 기록하고 있다.
4. 2. '양산박'으로 불린 장소들
일본(日本)에서는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수호전이 전래되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고, 양산박(梁山泊)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양산박"이 유지들의 소굴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1]예를 들어 메이지(明治) 초기,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도쿄(東京) 사저에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젊은 관료들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쓰키지(築地) 양산박"이라고 불렸다.[1]
그 외에도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후지코 F 후지오(藤子・F・不二雄), 후지코 후지오 A(藤子不二雄A)), 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 등이 살았던 토키와 료(トキワ荘)가 "만화가들의 양산박"이라고 불렸다.[1] 히라츠카 라이쵸(平塚らいてう) 등이 참여했던 세이쇼(青鞜)도 "여성 양산박"이라고 불렸던 것을, 자신도 편집장을 지냈던 이토 노에(伊藤野枝)가 「잡음」(雑音)에 기록하고 있다.[1]
참조
[1]
뉴스
梁山是水浒文化的发源地和载体
http://www.jn001.com[...]
2009-09-23
[2]
뉴스
水泊梁山旅游风景区简介
http://www.sd.xinhua[...]
201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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