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홍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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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홍은 촉한의 인물로, 유장의 부제군을 거쳐 유비가 촉을 평정한 후 공조, 촉군태수를 역임했다. 유비 사후에는 황원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며, 제갈량이 북벌을 준비할 때 상서와 월기교위를 지냈다. 장익의 등용에 반대하며 향랑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는 충실하고 이타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건흥 6년(22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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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교는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로 제갈근의 아들이었으나 제갈량의 양자가 되었고, 유선의 누이와 혼인하여 부마도위에 임명되어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서 활동하다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 촉한의 정치인 - 황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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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는 촉한의 정치가로, 제갈량 사후 군 철수 임무 수행과 위연 제거에 공을 세웠으나, 좁은 소견과 과도한 야심으로 장완에게 밀려 불만을 품고 자결하여 능력과 인격의 조화 및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 양홍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양홍 |
| 원어 이름 | 楊洪 |
| 로마자 표기 | Yáng Hóng |
| 자 | 계휴 (季休)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지 | 펑산(쓰촨성) |
| 사망년도 | 228년 |
| 관직 및 직위 | |
| 주요 활동 시기 | 후한 말 ~ 촉한 |
| 소속 | 유장 → 유비 → 유선 |
| 공조 (功曹) 임명 시기 | 214년 |
| 파직 시기 | 미상 |
| 촉군태수 임명 시기 | 219년 |
| 촉군태수 파직 시기 | 228년 |
| 월기교위 (越騎校尉) 임명 시기 | 223년 |
| 월기교위 파직 시기 | 228년 |
| 최종 관직 | 월기교위 |
| 작위 | 관내후 (關內侯) |
| 기타 | |
| 관련 장소 | 청두 무후사 |
2. 행적
양홍은 검위군 무양현(현재의 쓰촨성 펑산 구) 출신으로, 유장이 익주 자사로 있을 때 여러 군에서 차례로 복무했다. 유비가 익주를 정복한 후, 이엄의 추천을 받아 공조가 되었다. 이엄이 행정 본부를 이전하려 하자 양홍은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양홍은 공조직에서 물러났지만, 이엄은 여전히 양홍을 주도(州都)의 관료로 추천했다.[2]
어린 시절 양홍은 학문을 즐기지 않았지만, 충실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며 걱정했고, 계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엄의 휘하에서 일했지만, 개인적인 의견 차이로 은퇴했다. 그러나 이엄이 건위군 태수로 재직하는 동안, 양홍은 촉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이때, 양홍은 개인 보좌관으로 일했던 하지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는 재능이 뛰어나고 지략이 뛰어나 많은 업적을 세웠고, 곧 현령으로 승진했다. 몇 년 후, 광한군 태수로 승진했다. 양홍은 여전히 촉군 태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서쪽의 모든 사람들은 제갈량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철저하게 활용하는 능력에 감탄했다.[11]
2. 1. 유비 시대
214년, 유비가 촉 땅을 평정하자 귀순하여 공조(功曹)가 되고, 촉군태수(蜀郡太守)로 옮겼다.[2]유비가 하후연과 한중에서 싸울 때, 증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제갈량은 군량 조달을 담당하고 있었고, 양홍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양홍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3]
제갈량은 양홍의 의견에 동의했다.
같은 시기에, 촉군 태수 법정은 북쪽에서 유비를 돕고 있었다. 제갈량은 양홍에게 이 공석을 채우도록 요청하는 상소를 보냈고, 그는 재빨리 적응하여 많은 문제들을 곧 해결했기에 정식 임명을 받았다. 곧 그는 익주에서 다른 관직으로 옮겨졌다.[4]
2. 2. 유선 시대
222년, 유비가 육손에게 대패하여 후퇴했을 때 영안으로 돌아왔다.[8] 이릉 전투에서의 패전 후, 유비는 백제성에서 위독해져 제갈량도 문병을 위해 성도를 비웠다.223년, 한가태수(漢嘉太守) 황원(黃元)이 유비가 죽은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자 성도가 텅 비었는데, 계책을 내어 그를 사로잡아 관내후(關內侯)에 올랐다.[9] 유수를 지키는 태자 유선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여 진홀·정탁으로 하여금 황원을 사로잡게 했다. 건흥 원년(223년), 관내후에 봉해졌고, 다시 촉군 태수가 되어 충절장군에 임명되었다.
227년, 제갈량이 북벌을 준비할 때 상서(尙書)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월기교위(越騎校尉)까지 승진했다.[10] 후에 촉군 태수 직을 유지한 채 월기 교위가 되었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으로부터 류부장사로 장익을 임용하고 싶다는 상담을 받고, 장익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향랑을 추천했다.
같은 해, 제갈량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한중에 본거지를 두고, 장익을 그의 주부(長史)로 임명하려 하였고, 이에 대한 양홍의 의견을 물었다. 양홍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익은 본래 총명하고 통찰력이 있으며, 통치 능력과 성실함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의 재능만으로도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만, 이 특정한 임명에 있어 그가 공정하지 못할까 우려해야 합니다. 저는 차라리 본래 정직하고 성실한 상랑을 추천합니다. 장익은 그의 아래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최선을 다해 일할 것입니다.|張翼本來聰明하고 洞察力이 있으며, 統治能力과 誠實함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의 才能만으로도 이 任務를 遂行하기에 充分하지만, 이 特정한 任命에 있어 그가 公正하지 못할까 憂慮해야 합니다. 저는 차라리 본래 正直하고 誠實한 상랑을 推薦합니다. 張翼은 그의 아래에서 奉仕하며 자신의 潛在力을 開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最善을 다해 일할 것입니다.중국어
양홍과 장익은 젊은 시절 친한 친구였지만, 장익이 오나라에서 유배되었을 때 양홍은 그의 군(郡)을 잠시 맡아 관리했다. 그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작은 관리였던 그의 아들 장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장익이 촉나라로 돌아왔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양홍에게 원한을 품었고, 이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9] 두 사람은 한때 친구였지만, 양홍은 장익의 아들 장욱이 작은 죄로 벌을 받았을 때 특별한 온정을 베풀어 사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원한을 샀다.
이후, 양홍은 제갈량이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직접 장익을 찾아가 그에 대해 제갈량에게 조언한 내용을 말했다. 장익은 제갈량이 이미 자신을 임명했고, 그 뜻을 꺾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양홍이 장익 대신 주부가 되려고 하거나, 장익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중요한 일을 관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익은 그 직책에 있으면서 교위 진술과 갈등을 겪었고, 그들의 관계는 증오와 분노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이 사실을 알고 장익에게 편지를 보내 사적인 관계보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양홍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깨달았다.[10]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장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고, 어떤 사람은 장익이 요직에 앉아 후사를 처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후에 장익이 잠술과 다툼을 벌여 제갈량에게 질책을 받자, 사람들은 양홍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장익의 임관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8년에 재임 중에 사망했다.[8]
3. 평가
양홍은 어린 시절 학문을 즐기지 않았으나, 충실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며 걱정했고, 계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것으로 알려졌다.[11]
『삼국지』 촉서 「양홍전」에서는 "젊었을 적에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충의, 청렴, 성실,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공무를 걱정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집을 걱정하는 것과 같았다."라고 평가한다. 또한, "계모를 섬겨 효성을 다했다"고도 한다.[11]
하지의 재능을 간파하여 등용한 결과, 하지는 빠르게 양홍과 동격인 태수까지 승진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양홍과 그를 발탁한 제갈량을 칭찬했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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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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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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