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어스트라드클리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어스트라드클리드는 고대 브리튼족의 왕국으로, 현재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담노니족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거주했으며, 410년 로마군의 철수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7세기에는 달 리어타, 노섬브리아 등 주변 국가들과의 경쟁 속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나, 870년 바이킹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에 통합되었으며, 11세기 초까지 스코틀랜드의 지배를 받았다.

2. 기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는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침공과 로마령 브리타니아 설립 무렵, 스코틀랜드 남부에 살았던 여러 부족을 열거하고 있다.[3] 담노니족 외에도 오탈리니족, 셀고바족, 노반타에족이 있었고, 메타에족은 스털링 주변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담노니족의 수도는 덤바턴 근처의 카먼으로 추정된다.

아일랜드해를 가로지르는 스트래스클라이드, 802년의 대영제국 지도


6세기부터 870년까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주요 요새였던 덤바턴 록을 북쪽으로 바라본 모습. 요새 '알트 클루트'는 오른쪽에 있는 정상에 있었다.


덤바턴이 저조시 클라이드 강 어귀 건너편에서 보인다.


클라흐 남 브레탄, 글렌 팔로흐, 아마도 스트래스클라이드의 북쪽 경계


로마령 브리타니아의 북쪽 국경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이었으나, 장벽 북쪽의 로마 영향력은 불분명하다. 로마 요새는 장벽 북쪽에 존재했으며, 크래몬드와 같은 요새는 장기간 점령되었을 수 있다. 공식 국경은 세 번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매번 곧 철수했다. 로마군은 국경 북쪽으로 징벌 원정을 벌였고, 북부 원주민들도 무역, 약탈, 로마군 복무를 위해 장벽 남쪽으로 이동했다. 로마 상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로마 보조금 또는 뇌물이 부족과 지도자들에게 보내졌다. 로마령 브리타니아가 얼마나 로마화되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4]

로마령 브리타니아의 마지막 기간에는 픽트족, 스코티족, 아타코티족의 공격이 증가했다.[5] 410년경 로마군의 최종 철수는 담노니족에게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경제적 영향은 상당했을 것이다.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경계는 지명학과 지형을 바탕으로 추측할 수 있다. 클라흐 남 브레탄은 알트 클루트의 북쪽 경계 표시로 여겨진다.[6] 캠프시 펠스와 로크 로먼드와 스털링 사이의 습지는 또 다른 경계를 나타냈을 수 있다. 남쪽으로 왕국은 클라이드의 스트라스를 따라 상당한 거리를 뻗어 있었고, 해안을 따라 아마도 에어 방향으로 남쪽으로 뻗어 있었을 것이다.[7]

2. 1. 로마 제국 시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는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침공과 로마령 브리타니아 설립 무렵, 스코틀랜드 남부에 살았던 여러 부족을 열거하고 있다.[3] 담노니족 외에도 오탈리니족, 셀고바족, 노반타에족이 있었고, 메타에족은 스털링 주변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담노니족의 수도는 덤바턴 근처의 카먼으로 추정된다.

로마령 브리타니아의 북쪽 국경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이었으나, 장벽 북쪽의 로마 영향력은 불분명하다. 로마 요새는 장벽 북쪽에 존재했으며, 크래몬드와 같은 요새는 장기간 점령되었을 수 있다. 공식 국경은 세 번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매번 곧 철수했다. 로마군은 국경 북쪽으로 징벌 원정을 벌였고, 북부 원주민들도 무역, 약탈, 로마군 복무를 위해 장벽 남쪽으로 이동했다. 로마 상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로마 보조금 또는 뇌물이 부족과 지도자들에게 보내졌다. 로마령 브리타니아가 얼마나 로마화되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4]

로마령 브리타니아의 마지막 기간에는 픽트족, 스코티족, 아타코티족의 공격이 증가했다.[5] 410년경 로마군의 최종 철수는 담노니족에게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경제적 영향은 상당했을 것이다.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경계는 지명학과 지형을 바탕으로 추측할 수 있다. 클라흐 남 브레탄은 알트 클루트의 북쪽 경계 표시로 여겨진다.[6] 캠프시 펠스와 로크 로먼드와 스털링 사이의 습지는 또 다른 경계를 나타냈을 수 있다. 남쪽으로 왕국은 클라이드의 스트라스를 따라 상당한 거리를 뻗어 있었고, 해안을 따라 아마도 에어 방향으로 남쪽으로 뻗어 있었을 것이다.[7]

2. 2.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 시대에 이용 가능한 기록 자료는 주로 아일랜드어와 웨일스어로, 400년부터 600년 사이의 시기와 거의 동시대에 쓰인 자료는 매우 적다. 아일랜드 자료는 덤바턴 왕국과 아일랜드의 관련성이 있을 때만 사건을 보고한다.[8] 6세기의 예레미야인 길다스의 작품과, 특히 6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y Gododdin''을 포함하여 탈리에신과 아네이린의 시는 예외로 하고, 웨일스 자료는 일반적으로 훨씬 후대의 자료이다. 일부는 9세기 이후 웨일스에서 만연했던 정치적 태도에 영향을 받았다. 베다는 편견이 분명하며, 브리튼인을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언급할 때도 대개 비판적인 어조로 말한다.[8]

200px


이 초기 시대의 동시대 자료에 두 명의 왕이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성 파트리치오의 편지를 받은 사람으로 알려진 코로티쿠스 또는 체레티크 굴레티크(Ceredigcy)이다. 7세기의 전기 작가는 그를 클라이드 고지의 왕, 즉 덤바턴 록의 왕으로 묘사하여 5세기 후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파트리치오의 편지에서 체레티크가 기독교인임이 분명하며, 이 지역의 지배 계층도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후손인 리더르흐 하엘은 아돔난의 ''성 콜룸바의 생애''에 언급되어 있다.[8] 리더르흐는 달 리아타의 아에단 막 가브란, 레게드의 우리엔과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다양한 전통과 이야기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노섬브리아의 아델프리드(Æthelfrith of Northumbria)와도 동시대 인물이였다.[8]

따라서 코로티쿠스에게 보낸 파트리치오의 편지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에게 보낸 것이었다면, 초기 역사 자료가 등장했을 때 남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더 남쪽인 위쏜에서는 5세기 후반에 기독교 비문이 발견되었으며, 아마도 새로운 교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성 문고(Cyndeyrn Garthwyscy)는 클라이드의 브리튼인들의 사도라고 여겨지지만, 콜룸바와 달리 희미한 인물이며, 조슬린 오브 퍼니스의 12세기 ''생애''는 늦게 쓰여졌고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지만, 잭슨[8]은 조슬린의 버전이 초기 캄브리아어 원본에 기초했을 수 있다고 믿었다.

3. 역사

600년 이후,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에 대한 정보가 자료에서 조금 더 흔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러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견을 보여왔다.[9] 7세기 초, 달 리어타의 Áedán은 알트 클루트의 지배권을 빼앗았을 수도 있다. Áedán의 지배는 약 604년에 데그스탄 전투에서 에델프리드에게 패배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9]

에드윈과 그 이후의 버니시아 및 노섬브리아 왕들이 남부 스코틀랜드로 세력을 확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울스터 연대기의 638년 기록인 "글렌 무이레산 전투와 에튼 포위"는 오스왈드에게 에이딘이 함락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연대기에는 함락이나 노섬브리아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10]

642년, 유게인이 이끄는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들이 달 리어타의 군대를 격파하고 돔날 브렉을 살해했다.[10] 이 승리는 ''Y Gododdin''의 부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의 장소는 반나우그(Bannawg)로 알려진 지역이며, 배녹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로크 로몬드와 포스 강 사이의 광대한 습지와 늪, 그리고 북쪽의 언덕과 호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10]

7~8세기 남부 스코틀랜드의 언어권


7세기 마지막 4분기에, 브리튼인이 참여한 아일랜드에서 여러 전투가 보고되었으며, 대부분 아일랜드 해 해안을 따라 위치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브리튼인들은 용병이거나, 북부 브리튼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정복으로 인해 쫓겨난 망명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는 알트 클루트 왕들의 원정일 수 있으며, 그들의 왕국은 분명히 아일랜드 해로 연결된 지역의 일부였다. 노섬브리아, 픽트랜드, 달 리어타 등 알트 클루트의 모든 이웃 국가들은 때때로 아일랜드로 군대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8세기 초 울스터 연대기는 711년 "로르그 에클레트" (미상)와 717년 "미누이르크라고 불리는 바위"에서 알트 클루트와 달 리어타 사이에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고 보고한다.[11] 8세기 후반에 픽트 왕 오엔구스는 알트 클루트를 상대로 최소 세 차례의 원정을 감행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744년에는 픽트인들이 단독으로 행동했으며, 750년에는 오엔구스가 에드버트와 협력하여, 테우데부르에게 패배한 픽트인들의 대규모 패배로 사망했다. 에드버트는 750년에 현대 에어 주변의 카일 평원을 알트 클루트로부터 빼앗았다고 한다.[11]

756년에 오엔구스와 에드버트의 합동 공격에 직면한 것은 덤나구알이었을 것이다. 픽트인과 노섬브리아인은 덤바턴 록을 포위하고 덤나구알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버트의 군대는 노섬브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거의 전멸했다.[11]

이후 9세기까지 알트 클루트와 그 왕들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알트 클루트의 "방화"는 780년에 보고되었지만,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던블레인은 849년에 알트 클루트의 사람들이 불태웠으며, 아마도 아르트갈의 통치 시대였을 것이다.[11]

870년, Amlaíb Conung과 Ímar가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덤바턴 포위전을 일으켜 4개월 만에 알트 클루트(Alt Clut)를 함락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12] 871년, 이들은 알바에서 Áth Cliath (더블린)으로 돌아가 앵글족, 브리튼족, 픽트족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데려갔다.[12] 872년, "스트래스클라이드의 브리튼족 왕" 아르갈 압 디프날은 커스턴틴 막 키나다의 사주로 더블린에서 살해되었다.[12] 그의 아들 알트 클루트의 룬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룬은 커스턴틴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에오하이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 또는 알바 왕국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부터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알바 왕국의 지배를 주기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스트래스클라이드를 지배했다거나 컴브리아를 분봉령으로 통치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며, 스코틀랜드의 통제력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에는 노르드인 또는 노르드-게일 정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컴브라스 해안 지명과 고번의 호그백 무덤 등이 그 증거이다.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대략 서기 940년에 최대 규모였다.


9세기 말, 바이킹은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910년대 에드워드 1세와 애설플레드가 험버 남쪽 잉글랜드를 회복했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에 따르면, 애설플레드는 바이킹에 대항하여 스트래스클라이드 및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역사가 팀 클락슨은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가 노르드 바이킹의 희생으로 상당한 영토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920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이름 미상)을 포함한 브리튼 왕들이 에드워드에게 복종했다고 기록했지만,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권력이 남부 브리튼에 국한되었기에 이는 복종이 아닌 평화 협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0세기 초 스트래스클라이드의 통치자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디프날로 추정되며, 920년 이전에 아들 오와인이 계승했을 것이다.

927년,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탠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최초의 왕이 되었다. 7월 27일 이먼트 브리지에서 여러 왕이 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 2세도 포함되었다.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와인 또는 글리위싱의 오와인 압 하웰의 참석 여부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둘 다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934년,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고, 오와인은 스코틀랜드 왕의 동맹국이었으므로 스트래스클라이드 역시 황폐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와인은 931년과 935년에 애설스탠의 헌장에 부왕으로 증언했지만, 937년에는 콘스탄틴 및 바이킹과 함께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브루난부르 전투 이후, 오와인의 아들 오와인 압 디프날이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 되었다. 스트래스클라이드는 바이킹과의 동맹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945년, 에드먼드 1세는 스트래스클라이드를 황폐화시키고,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디프날의 두 아들을 눈멀게 하여 왕위 계승자를 빼앗았다. 에드먼드는 왕국을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에게 주었지만, 디프날은 곧 왕국을 회복했다. 그는 975년 로마 순례 중 사망했다.

971년 쿨렌 막 이두일브와 그의 형제 에오카이드가 리더흐 압 드푸날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는 리더흐의 딸을 강간하거나 납치한 것에 대한 복수로 알려져 있다.[13] 리더흐의 후계자인 말 콜룸은 로마에서 사망한 드푸날 압 오와인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막 키나다와 오랫동안 혼동되었다.[13] 오웬 더 볼드가 말 콜룸의 뒤를 이었으며, 1018년 카르함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웬에게 후계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13]

1018년 이후, 1054년 이전에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에게 정복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1034년에 사망한 말 콜룸 막 키나다의 통치 기간이었을 것이다.[14] 1054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참회왕은 시워드 오브 노섬브리아를 스코틀랜드에 파견했는데, 맥 베다드 막 핀들라익 (맥베스)가 통치했으며, "컴브리아의 왕의 아들 말콤"도 함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막 돈카다 (말 콜룸 켄 모르)라고 추정했지만, 말콤/말 콜룸이 "컴브리아의 왕"이 되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얼마 동안 왕위를 유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5]

칼라일은 1066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일부였으나, 1092년에 윌리엄 루퍼스가 이 지역을 침략하여 컴벌랜드를 잉글랜드에 병합했다.[16] 칼라일 성의 건설은 1093년에 에덴 강 남쪽에 있는 로마 요새 부지에서 시작되었고, 1112년에 돌로 재건되었다.[16]

1070년대까지, 말 콜룸 막 돈카다의 통치 초기에 스코틀랜드가 다시 스트래스클라이드를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스트래스클라이드는 1107년에 알렉산더 1세에 의해 그의 형제 데이비드(나중에 데이비드 1세)에게 양도되었다.

3. 1. 초기 (6세기 ~ 8세기)

600년 이후,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에 대한 정보가 자료에서 조금 더 흔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러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견을 보여왔다.[9] 7세기 초, 달 리어타의 Áedán은 알트 클루트의 지배권을 빼앗았을 수도 있다. Áedán의 지배는 약 604년에 데그스탄 전투에서 에델프리드에게 패배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9]

에드윈과 그 이후의 버니시아 및 노섬브리아 왕들이 남부 스코틀랜드로 세력을 확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울스터 연대기의 638년 기록인 "글렌 무이레산 전투와 에튼 포위"는 오스왈드에게 에이딘이 함락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연대기에는 함락이나 노섬브리아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10]

642년, 유게인이 이끄는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들이 달 리어타의 군대를 격파하고 돔날 브렉을 살해했다.[10] 이 승리는 ''Y Gododdin''의 부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의 장소는 반나우그(Bannawg)로 알려진 지역이며, 배녹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로크 로몬드와 포스 강 사이의 광대한 습지와 늪, 그리고 북쪽의 언덕과 호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10]

7세기 마지막 4분기에, 브리튼인이 참여한 아일랜드에서 여러 전투가 보고되었으며, 대부분 아일랜드 해 해안을 따라 위치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브리튼인들은 용병이거나, 북부 브리튼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정복으로 인해 쫓겨난 망명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는 알트 클루트 왕들의 원정일 수 있으며, 그들의 왕국은 분명히 아일랜드 해로 연결된 지역의 일부였다. 노섬브리아, 픽트랜드, 달 리어타 등 알트 클루트의 모든 이웃 국가들은 때때로 아일랜드로 군대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8세기 초 울스터 연대기는 711년 "로르그 에클레트" (미상)와 717년 "미누이르크라고 불리는 바위"에서 알트 클루트와 달 리어타 사이에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고 보고한다.[11] 8세기 후반에 픽트 왕 오엔구스는 알트 클루트를 상대로 최소 세 차례의 원정을 감행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744년에는 픽트인들이 단독으로 행동했으며, 750년에는 오엔구스가 에드버트와 협력하여, 테우데부르에게 패배한 픽트인들의 대규모 패배로 사망했다. 에드버트는 750년에 현대 에어 주변의 카일 평원을 알트 클루트로부터 빼앗았다고 한다.[11]

756년에 오엔구스와 에드버트의 합동 공격에 직면한 것은 덤나구알이었을 것이다. 픽트인과 노섬브리아인은 덤바턴 록을 포위하고 덤나구알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버트의 군대는 노섬브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거의 전멸했다.[11]

이후 9세기까지 알트 클루트와 그 왕들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알트 클루트의 "방화"는 780년에 보고되었지만,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던블레인은 849년에 알트 클루트의 사람들이 불태웠으며, 아마도 아르트갈의 통치 시대였을 것이다.[11]

3. 2. 중기 (8세기 ~ 9세기)

600년 이후,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에 대한 정보가 자료에서 조금 더 흔하게 나타난다.[9] 7세기 초, 달 리어타의 Áedán은 북부 브리튼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을 것이며, 후기 웨일스 시가에서 Áedán의 별칭인 Aeddan Fradawg (반역자 Áedán)은 그가 알트 클루트의 지배권을 빼앗았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Áedán의 지배는 약 604년에 종말을 맞이했는데, 그의 군대는 데그스탄 전투에서 에델프리드에게 패배했다.[9]

엘멧 정복, 북 웨일스에서의 전쟁, 머시아와의 전쟁과 같은 증거를 바탕으로, 에델프리드, 그의 계승자 에드윈, 그리고 그 이후의 버니시아 및 노섬브리아 왕들이 남부 스코틀랜드로 세력을 확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스터 연대기의 638년 기록인 "글렌 무이레산 전투와 에튼 포위"는 오스왈드에게 에이딘이 함락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연대기에는 함락이나 노섬브리아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10]

642년, 울스터 연대기는 유게인이 이끄는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들이 돔날 브렉을 스트래스캐론에서 살해했다고 보고하며, 이 승리는 ''Y Gododdin''의 부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의 장소는 반나우그(Bannawg)로 알려진 지역이며, 배녹번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로크 로몬드와 포스 강 사이의 광대한 습지와 늪, 그리고 북쪽의 언덕과 호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곳은 브리튼인의 영토와 달 리어타 및 픽트인의 영토를 분리한다.[10]

7세기 마지막 4분기에, 브리튼인이 참여한 아일랜드에서 여러 전투가 보고되었으며, 대부분 아일랜드 해 해안을 따라 위치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브리튼인들은 용병이거나, 북부 브리튼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정복으로 인해 쫓겨난 망명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는 알트 클루트 왕들의 원정일 수 있다.[11]

8세기 초 울스터 연대기는 711년과 717년에 알트 클루트와 달 리어타 사이에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고 보고한다. 8세기 후반에 픽트 왕 오엔구스는 알트 클루트를 상대로 최소 세 차례의 원정을 감행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750년에는 오엔구스가 에드버트와 협력하여, 오엔구스의 형제인 탈로르간이 테우데부르에게 패배한 픽트인들의 대규모 패배로 사망했다. 에드버트는 750년에 현대 에어 주변의 카일 평원을 알트 클루트로부터 빼앗았다고 한다.[10]

테우데부르는 752년경에 사망했으며, 756년에 오엔구스와 에드버트의 합동 공격에 직면한 것은 그의 아들 덤나구알이었을 것이다. 픽트인과 노섬브리아인은 덤바턴 록을 포위하고 덤나구알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버트의 군대는 노섬브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거의 전멸했다.[10]

이후 9세기까지 알트 클루트와 그 왕들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알트 클루트의 "방화"는 780년에 보고되었지만,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던블레인은 849년에 알트 클루트의 사람들이 불태웠으며, 아마도 아르트갈의 통치 시대였을 것이다.[10]

3. 3. 바이킹 시대 (9세기 ~ 11세기)

870년, Amlaíb Conung과 Ímar가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덤바턴 포위전을 일으켜 4개월 만에 알트 클루트(Alt Clut)를 함락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12] 871년, 이들은 알바에서 Áth Cliath (더블린)으로 돌아가 앵글족, 브리튼족, 픽트족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데려갔다.[12] 872년, "스트래스클라이드의 브리튼족 왕" 아르갈 압 디프날은 커스턴틴 막 키나다의 사주로 더블린에서 살해되었다.[12] 그의 아들 알트 클루트의 룬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룬은 커스턴틴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에오하이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 또는 알바 왕국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부터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알바 왕국의 지배를 주기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스트래스클라이드를 지배했다거나 컴브리아를 분봉령으로 통치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며, 스코틀랜드의 통제력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에는 노르드인 또는 노르드-게일 정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컴브라스 해안 지명과 고번의 호그백 무덤 등이 그 증거이다.

9세기 말, 바이킹은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910년대 에드워드 1세와 애설플레드가 험버 남쪽 잉글랜드를 회복했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에 따르면, 애설플레드는 바이킹에 대항하여 스트래스클라이드 및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역사가 팀 클락슨은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가 노르드 바이킹의 희생으로 상당한 영토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920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이름 미상)을 포함한 브리튼 왕들이 에드워드에게 복종했다고 기록했지만,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권력이 남부 브리튼에 국한되었기에 이는 복종이 아닌 평화 협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0세기 초 스트래스클라이드의 통치자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디프날로 추정되며, 920년 이전에 아들 오와인이 계승했을 것이다.

927년,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탠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최초의 왕이 되었다. 7월 27일 이먼트 브리지에서 여러 왕이 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 2세도 포함되었다.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와인 또는 글리위싱의 오와인 압 하웰의 참석 여부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둘 다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934년,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고, 오와인은 스코틀랜드 왕의 동맹국이었으므로 스트래스클라이드 역시 황폐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와인은 931년과 935년에 애설스탠의 헌장에 부왕으로 증언했지만, 937년에는 콘스탄틴 및 바이킹과 함께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브루난부르 전투 이후, 오와인의 아들 오와인 압 디프날이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 되었다. 스트래스클라이드는 바이킹과의 동맹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945년, 에드먼드 1세는 스트래스클라이드를 황폐화시키고,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디프날의 두 아들을 눈멀게 하여 왕위 계승자를 빼앗았다. 에드먼드는 왕국을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에게 주었지만, 디프날은 곧 왕국을 회복했다. 그는 975년 로마 순례 중 사망했다.

3. 4. 스코틀랜드 왕국으로의 통합 (11세기)

971년 쿨렌 막 이두일브와 그의 형제 에오카이드가 리더흐 압 드푸날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는 리더흐의 딸을 강간하거나 납치한 것에 대한 복수로 알려져 있다.[13] 리더흐의 후계자인 말 콜룸은 로마에서 사망한 드푸날 압 오와인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막 키나다와 오랫동안 혼동되었다.[13] 오웬 더 볼드가 말 콜룸의 뒤를 이었으며, 1018년 카르함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웬에게 후계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13]

1018년 이후, 1054년 이전에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에게 정복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1034년에 사망한 말 콜룸 막 키나다의 통치 기간이었을 것이다.[14] 1054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참회왕은 시워드 오브 노섬브리아를 스코틀랜드에 파견했는데, 맥 베다드 막 핀들라익 (맥베스)가 통치했으며, "컴브리아의 왕의 아들 말콤"도 함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막 돈카다 (말 콜룸 켄 모르)라고 추정했지만, 말콤/말 콜룸이 "컴브리아의 왕"이 되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얼마 동안 왕위를 유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5]

칼라일은 1066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일부였으나, 1092년에 윌리엄 루퍼스가 이 지역을 침략하여 컴벌랜드를 잉글랜드에 병합했다.[16] 칼라일 성의 건설은 1093년에 에덴 강 남쪽에 있는 로마 요새 부지에서 시작되었고, 1112년에 돌로 재건되었다.[16]

1070년대까지, 말 콜룸 막 돈카다의 통치 초기에 스코틀랜드가 다시 스트래스클라이드를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스트래스클라이드는 1107년에 알렉산더 1세에 의해 그의 형제 데이비드(나중에 데이비드 1세)에게 양도되었다.

4. 문화

5. 결론

참조

[1] 서적 The Celts: History, Life, and Culture Bloomsbury 2012
[2] 간행물 Strathclyde and the Anglo-Saxons
[3] 간행물 The Oxford History of Ireland
[4] 간행물 Roman occupation
[5] 문서 The home of the Attacotti
[6] 서적 Vanished Kingdoms Penguin 2011
[7] 간행물 Excavations at Alt Clut
[7] 간행물 The Place of ''Y Gododdin''
[7] 간행물 Medieval Scotland
[8] 서적 Language and History in Early Britai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1956
[9] 간행물 Warlords and Holy Men
[9] 간행물 Kings and Warriors
[10] 간행물 Annals of the Four Masters
[11] 문서
[12] 논문 The Expansion of the Kingdom of Strathclyde https://www.reposito[...]
[13] 간행물 Kingship of the Scots
[14] 문서
[15] 간행물 Kingship of the Scots
[16] 간행물
[16] 간행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