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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히터나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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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히터나흐는 698년 잉글랜드 출신 수사 윌리브로르드가 설립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장한 룩셈부르크의 도시이다. 로마 시대 별장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이 유럽적인 명성을 얻었다. 1236년 도시 헌장을 받았고, 1737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쇠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춤 행렬, 국제 음악 축제 등이 열리는 문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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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히터나흐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히터나흐
에히터나흐 전경
에히터나흐 문장
에히터나흐 문장
에히터나흐 지도
룩셈부르크 지도 (에히터나흐 강조 표시)
행정 구역
국가룩셈부르크
광역 행정구그레벤마허
칸톤 (현)에히터나흐
LAU 2LU0001005
지리
면적20.49 제곱킬로미터
면적 순위100개 코뮌 중 위
최대 고도m
최대 고도 순위100개 코뮌 중 위
최소 고도m
최소 고도 순위100개 코뮌 중 위
인구
총 인구
인구 순위100개 코뮌 중 위
인구 밀도자동 계산
인구 밀도 순위100개 코뮌 중 위
정치
시장Carole Hartmann
시장Théo Thiry
시간대
시간대CET
협정 세계시 (UTC)+1
하계 시간CEST
협정 세계시 (UTC)+2
기타 정보

2. 역사



에히터나흐의 역사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의 저택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5]。 본격적인 도시의 발전은 698년, 잉글랜드 출신의 수사 성 윌리브로르드가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 귀족들의 기증을 받아 수도원을 세웠고[7], 이곳은 중세 시대 동안 중요한 종교 및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은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으며[9], 수도원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1236년에는 도시 헌장을 받았다.

수도원은 1737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기도 했으나,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7년에 수사들이 추방되고 수도원이 해체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흩어지기도 했다. 19세기 들어 철도 개통과 관광객 유입으로 도시는 점차 활기를 되찾았으며, 1815년 빈 회의 결과 룩셈부르크 대공국에 속하게 되었다[10]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벌지 전투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에는 성 윌리브로르드를 기리는 전통적인 에히터나흐 춤 행렬이 열린다[6]

2. 1. 초기 역사

에히터나흐 지역에서는 선사 시대의 거주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로마 제국 시대의 저택, 집락을 둘러싼 방비 시설, 묘지 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5]。 특히 60년/70년경에 건설된 로마 시대의 웅장한 저택(Palastvilla) 유적은 1975년/1976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 저택은 4세기까지 확장을 거듭하여 전성기에는 면적이 124m x 72m에 달했고, 지하에 약 70개의 방을 갖추고 있었다[5]。 당시 에히터나흐를 지나는 자우어 강(Sauer)은 현재 룩셈부르크독일의 국경을 이루지만, 로마 제국 말기나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이 지역의 경계선 역할을 하지 않았다.

698년, 잉글랜드 리폰 출신의 노섬브리아 왕국 수사였던 성 윌리브로르드가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창건하면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초대 위트레흐트 주교가 되어 프리지아인의 기독교화에 헌신했으며, 739년 사망할 때까지 에히터나흐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냈다. 697년/698년, 프랑크 왕 다고베르트 2세의 딸이자 트리어 오렌(Trier-Oeren)의 원장이었던 성녀 이르미나(Irmina)는 자신이 소유했던 로마 시대 저택(villa Epternacus)과 교회 시설을 윌리브로르드에게 기증했다[7]706년에는 이르미나의 딸 플렉트루드(Plektrud)와 피핀 3세(소 피핀)가 저택의 나머지 부분을 기증하여 수도원 시설이 완성되었다[7]。 에히터나흐는 샤를마뉴 가문으로부터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다.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셋째 날)에는 윌리브로르드를 기리는 에히터나흐 춤 행렬이 열린다[6]

수도원은 중세 시대 동안 여러 변화를 겪었다. 849년부터 856년까지는 백작 아달하르두스의 소유가 되어 수도사들이 성당 참사 회원으로 대체되었고, 이후 백작 라기나르(864년)와 카를만(873년)이 차례로 소유했다. 수도사들이 다시 수도원에 거주하게 된 것은 973년이었다[8]1017년에는 화재로 윌리브로르드 시대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좌우 대칭의 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바실리카가 재건되었다. 이 바실리카의 지하 묘소에는 오늘날까지도 윌리브로르드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Echternacher Skriptorium)은 특히 8세기와 11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뛰어난 채색 필사본들을 제작했다[9]

수도원 외벽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에히터나흐는 점차 도시로 성장했고, 1236년도시 특권(도시 헌장)을 얻었다. 1737년에는 수도원이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재건되었다. 그러나 1797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수사들이 추방당하고 수도원은 약탈당했으며, 소장품과 유명한 도서관은 경매에 부쳐졌다. 이때 유명한 에히터나흐 복음서를 포함한 초기 필사본 일부가 파리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후 수도원 건물은 도자기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815년 에히터나흐는 룩셈부르크 영토가 되었다[10]

에히터나흐 춤 행렬

2. 2. 수도원 설립과 발전



에히터나흐 지역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5], 로마 제국 시대에는 60년/70년경 건설되어 4세기까지 확장된 웅장한 저택(Palastvilla)이 있었다. 이 저택 유구는 1975년/1976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전성기에는 크기가 124m × 72m에 달하고 약 70개의 방을 갖춘,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졌다[5].

본격적인 도시의 역사는 698년 잉글랜드 리폰 출신의 수사이자 노섬브리아 왕국 출신인 성 윌리브로르드가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6]. 그는 프랑크 왕국 다고베르트 2세의 딸이자 트리어 오렌(Trier-Oeren)의 원장이었던 이르미나로부터 697년/698년에 로마 시대 저택(villa Epternacus)과 교회 시설 일부를 기증받았다. 이후 706년에는 이르미나의 딸 플렉트루드와 피핀 3세로부터 나머지 부분을 기증받아 수도원 시설을 완비했다[7]. 윌리브로르드는 위트레흐트 대교구의 초대 주교로서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화하는 데 힘썼으며, 739년 사망할 때까지 에히터나흐 수도원수도원장을 지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또는 셋째 날)에는 춤을 동반한 예배 행진이 열린다[6].

수도원은 샤를마뉴 가문으로부터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으나, 9세기 중반부터 약 한 세기 동안 혼란기를 겪었다. 849년부터 856년까지 백작 아달하르두스가 수도원을 소유하며 수도사들을 성당 참사 회원으로 교체했고[8], 이어서 859년부터 971년 사이에는 트리어 주교의 교회 참사원들이 수사들을 대체하기도 했다. 또한 864년에는 백작 라기나르가, 873년에는 카를만이 수도원을 소유했다[8]. 수도사들이 다시 수도원에 거주하게 된 것은 973년이었다[8]. 1017년 윌리브로르드 시대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이후 재건된 로마네스크 양식바실리카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바실리카는 대칭적인 탑을 가지고 있으며, 지하 납골당에는 성 윌리브로르드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Echternacher Skriptorium)은 특히 8세기와 11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뛰어난 필사본들을 제작했다[9].

수도원이 번성하면서 그 외벽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에히터나흐는 1236년에 도시 헌장을 받으며 도시로 발전했다. 1737년 수도원은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재건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에히터나흐에도 미쳤다. 1794년 프랑스군에 의해 교회가 약탈당하고 수도원은 도자기 공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797년에는 결국 수도사들이 추방되고 수도원의 귀중한 소장품과 유명한 도서관은 경매에 부쳐졌다. 이때 흩어진 초기 필사본 중 일부, 예를 들어 유명한 에히터나흐 복음서는 현재 파리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세기에는 수도원 건물에 도자기 공장이 들어서는 등 쇠퇴기를 겪었으나, 철도가 개통되면서 관광객이 유입되어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과로 에히터나흐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에 속하게 되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12월 16일, 에히터나흐는 벌지 전투 당시 앤트워프 탈환을 목표로 한 독일 국방군의 공세가 미친 최남단 지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철저하게 복원되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자우어 강은 현재 룩셈부르크와 독일의 국경을 이루지만, 로마 제국 말기나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이 강이 지역의 경계선이나 변경지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2. 3. 중세 시대

에히터나흐는 698년, 잉글랜드 리폰 출신의 수사 윌리브로르드가 설립한 에히터나흐 수도원 주변으로 성장했다. 노섬브리아 왕국 출신인 그는 위트레흐트 대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어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힘썼다. 윌리브로르드는 739년 사망할 때까지 에히터나흐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에 에히터나흐 춤 행렬이 열린다.[6]

이 도시를 지나가는 자우어 강Sauerde은 현재 룩셈부르크와 독일의 국경을 이루지만, 로마 제국 말기나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이 지역의 경계선이 아니었다. 에히터나흐의 로마 시대 별장 유적은 1975년에 발견되었으며,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5] 이 별장과 교회 시설은 697년 또는 698년프랑크 왕국 왕 다고베르트 2세의 딸이자 트리어 오렌(Trier-Oeren)의 원장이었던 이르미나(Irmina)에 의해 윌리브로르드에게 기증되었다. 706년에는 이르미나의 딸 플렉트루드(Plektrud)와 피핀 3세가 별장의 나머지 부분을 기증하여 수도원 시설이 건설되었다.[7]

에히터나흐 수도원은 샤를마뉴 가문으로부터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849년부터 856년까지는 백작 아달하르두스의 소유가 되었고, 859년부터 971년 사이에는 수도사들이 트리어 주교의 교회 참사원들로 대체되기도 했다. 백작 라기나르(864년)와 카를만(873년)도 수도원을 소유했다. 수도사들이 다시 수도원에 거주하게 된 것은 973년이었다.[8] 1017년에 윌리브로르드 시대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재건된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바실리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대칭적인 탑과 지하 묘실에 윌리브로르드의 무덤을 간직하고 있다.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8세기와 11세기에 전성기)은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으며 뛰어난 필사본들을 제작했다.[9]

수도원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에히터나흐는 번성했고, 1236년에는 도시 헌장을 받았다. 수도원은 1737년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1794년 프랑스 군대에 의해 교회가 약탈당했고, 수도원은 도자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797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수사들은 추방되었고, 수도원의 소장품과 유명한 도서관은 경매에 부쳐졌다. 이때 흩어진 초기 필사본 중 일부, 예를 들어 유명한 에히터나흐 복음서는 현재 파리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4. 근세와 프랑스 혁명

1737년에는 수도원이 훌륭한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1794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교회가 약탈당하고 수도원은 도자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797년에는 혁명의 여파로 수사들이 추방되었으며, 수도원의 소장품과 유명한 도서관은 경매에 부쳐졌다.[10] 이 과정에서 유명한 에히터나흐 복음서를 비롯한 도서관의 초기 필사본 일부가 흩어져, 현재는 파리의 프랑스 국립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5. 근대와 현대



1797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수사들이 흩어졌고, 수도원의 소장품과 유명한 도서관은 경매에 부쳐졌다. 수도원 내에는 자기 공방이 만들어졌다. 19세기에는 도시가 쇠퇴했으나, 철도가 생기고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1815년룩셈부르크에 귀속되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 종전 몇 달 전인 1944년 12월 16일, 에히터나흐는 벌지 전투 동안 연합군을 공격하려던 독일 국방군의 최남단 전선이 되었다. 이 전투로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전쟁 후 철저하게 복원되었다.

오늘날 에히터나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로, 중세 시대의 벽과 탑이 여전히 남아 있다. 1975년부터 매년 5월과 6월에 국제 음악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에히터나흐에는 두 개의 주요 교회가 있다. 하나는 도시의 역사 지구에 있는 수도원 부속 바실리카이며, 다른 하나는 교구 교회인 성 베드로 성 바오로 교회이다.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수도원 건물은 현재 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3. 문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던 에히터나흐는 완전히 복구되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도시는 지금도 중세 시대의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히터나흐는 유서 깊은 종교 건축물과 박물관, 그리고 국제적인 음악 축제로 알려져 있다.[1][2]

3. 1. 종교

에히터나흐는 698년, 잉글랜드 리폰 출신의 수사 성 윌리브로르드가 세운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다. 노섬브리아 왕국(현재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출신인 그는 위트레흐트 대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어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힘썼으며, 739년 사망할 때까지 에히터나흐 수도원수도원장을 맡았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에는 에히터나흐 춤 행렬이라는 독특한 종교 행사가 열린다[6].

에히터나흐 수도원은 샤를마뉴 가문으로부터 꾸준한 후원을 받았다. 859년부터 971년까지는 수도사들 대신 트리어 주교 휘하의 성직자들이 수도원을 관리하기도 했다[8]. 1017년 화재로 성 윌리브로르드 시대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바실리카로 재건되었다. 이 바실리카는 좌우 대칭의 탑이 특징이며, 지하 납골당에는 성 윌리브로르드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스크립토리움)은 중세 유럽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으며, 특히 8세기와 11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9].

1737년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개축되었다. 그러나 1794년 프랑스군에 의해 교회가 약탈당했으며, 1797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수도원이 해산되고 수사들은 흩어졌다. 이때 수도원의 귀중한 소장품과 유명한 도서관 장서들이 경매로 넘어갔는데, 대표적인 초기 필사본인 에히터나흐 복음서 등 일부는 현재 파리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에히터나흐에는 두 개의 주요 교회가 있다. 하나는 도시의 역사 중심지에 위치한 성 윌리브로르드 수도원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원래 수도원의 일부였으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중요한 기념물이다[1]. 현재는 18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건물(지금은 학교로 사용됨)에 둘러싸여 있다. 다른 하나는 성 베드로와 바울 교구 교회로, 이 교회의 제단 아래에 성 윌리브로르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3. 2. 에히터나흐 춤 행렬

잉글랜드 리폰 출신 수사이자 노섬브리아 왕국 출신인 성 윌리브로르드는 698년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이후 초대 위트레흐트 주교가 되어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화하는 데 헌신했으며, 739년 사망할 때까지 에히터나흐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냈다.[6]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셋째 날)에 춤을 동반한 유명한 예배 행진이 열린다.[6]

3. 3. 에히터나흐 국제 음악 축제

에히터나흐에서는 1975년부터 매년 5월과 6월에 국제 음악 축제가 열린다.

3. 4. 박물관

에히터나흐 지역에서는 선사 시대의 거주 흔적이 발견되었다.[5] 이곳에는 선사 시대 박물관이 있으며, 이 박물관은 지난 100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다룬다.[2]

4. 인물

쥘 아. 호프만, 2011

4. 1. 정치인


  • 카스파 마티아스 스푸 (1837–1914): 룩셈부르크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다.
  • 로베르 샤프너 (1905–1979): 룩셈부르크의 정치인으로, 에히터나흐 시장을 두 차례(1945-1947, 1970-1979) 역임했다.
  • 마리-조제 프랑크 (1952년 에히터나흐 출생): 룩셈부르크의 정치인이다.
  • 마르셀 자우버 (1939년 출생): 룩셈부르크의 정치인이다.
  • 페르낭 보덴 (1943년 출생): 룩셈부르크의 정치인으로,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정부 장관을 지냈다.

참조

[1] EB1911 Echternach
[2] 웹사이트 Musée de préhistoire http://museedeprehis[...] 2011-03-07
[3] 웹사이트 Population par canton et commune https://statistiques[...] 2022-01-11
[4] 웹사이트 エヒテルナハ(エヒテルナハ)とは https://kotobank.jp/[...]
[5] 서적 Lexikon des Mittelalters Artemis
[6] 서적 Lexikon des Mittelalters Artemis
[7] 서적 Lexikon des Mittelalters Artemis
[8] 서적 修道院 近藤出版社
[9] 서적 Kunst des frühen Mittelalters Chr. Belser Verlag
[10] 서적 Historisches Lexikon der deutschen Länder C.H.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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