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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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트 폰 헤센다름슈타트는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의 딸로, 1864년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으며, 빌헬름 2세, 찰스 몬태규 경 등 여러 인물에게 청혼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1884년, 사촌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하여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남편이 모스크바 총독으로 임명된 후 사회 봉사 활동을 펼쳤다. 1905년 남편이 암살당한 후 수녀원을 설립하여 자선 사업에 헌신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체포되어 1918년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후 유해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으며,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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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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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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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릭스 (Elisabeth Alexandra Luise Alice)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
출생 | 1864년 11월 1일 |
출생지 | 헤센 대공국 베순겐 |
사망 | 1918년 7월 18일 |
사망지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알라파옙스크 |
묻힌 곳 | 예루살렘 게쎄마네 막달라 마리아 교회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개종 전 루터교) |
신분 | |
작위 | 러시아의 대공비 |
가문 | 헤센-다름슈타트 가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84년 6월 15일) |
아버지 |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
어머니 | 영국의 앨리스 공주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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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엘리자베트는 1864년 11월 1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앨리스 공주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1] 애칭은 '엘라'였다. 유년 시절 비교적 검소하게 자랐으나, 1878년 디프테리아로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 마리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2]
젊은 시절 유럽에서 손꼽히는 미인으로 알려졌으며, 사촌인 빌헬름 2세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의 구애를 받았다.[4][5] 1884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아들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하여 러시아 대공비가 되었다. 결혼 후 189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ru)라는 이름을 받았다.[10]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1892년 모스크바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며, 1901년부터는 시동생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자녀인 마리아 파블로브나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 양육하기도 했다.[13]
1905년,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혁명가 이반 칼랴예프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1][40] 이 사건 이후 엘리자베타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삶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09년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모스크바에 마르타와 마리아 수도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전념했다.[1][40]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주변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러시아에 남았다. 1918년 7월 18일, 볼셰비키 체카에 의해 다른 황족들과 함께 알라파예프스크 인근 폐광산에서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이후 예루살렘의 막달라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으며,[40]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64년 11월 1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와 그의 부인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앨리스 공주 사이의 둘째 딸로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1] 전체 이름은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아리체(Elisabeth Alexandra Luise Alice|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리체de)였으며, 애칭은 '엘라'(Ella|엘라de)였다. 이름은 헝가리의 공주 성 엘리자베트의 이름에서 따왔다. 언니 빅토리아는 필립 공의 외할머니이며, 여동생 알릭스는 훗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하여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되었다.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엘리자베트와 가족들은 왕족 기준으로는 비교적 검소하게 생활했다. 아이들은 직접 바닥을 쓸고 방을 청소했으며,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아이들의 옷을 직접 만들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중에는 어머니를 따라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영국식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영어가 모국어였고, 나중에 친구에게 가족 내에서 어머니와는 영어로, 아버지와는 독일어로 대화했다고 밝혔다.
1878년 가을, 디프테리아가 헤센 가문에 퍼져 11월 16일 막내 여동생 마리가 사망했고, 12월 14일에는 어머니 앨리스 공주마저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는 발병 초기에 친할머니(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댁으로 보내져 병을 피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당시를 "끔찍하게 슬펐다"고 회상하며 모든 것이 "끔찍한 꿈 같았다"고 말했다.[2] 어머니를 잃은 후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했다.
엘리자베트는 어릴 때부터 빼어난 미모와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촌인 독일의 빌헬름 2세는 11살 무렵의 엘리자베트에게 반해 훗날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바덴의 프리드리히 2세 대공 역시 청혼했으나 거절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아쉬워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외할머니인 아우구스타 황후는 불쾌하게 여겼다. 이 외에도 맨체스터 백작 찰스 몬태규, 헨리 윌슨 등 여러 숭배자가 있었다.
아버지 루트비히 4세가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알렉산드르 2세의 아내)의 조카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러시아 황족들과 교류가 잦았다. 이 인연으로 훗날 남편이 되는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2. 2. 구혼자들과 세르게이 대공과의 결혼

빼어난 미모와 매력적인 성품으로 젊은 시절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4] 사촌인 마리는 "엘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4] 이러한 명성 덕분에 여러 명의 숭배자와 구혼자가 있었다. 맨체스터 백작 찰스 몬태규 경이나 훗날 저명한 군인이 되는 헨리 윌슨 경 등이 그녀에게 구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열렬한 구혼자 중 한 명은 사촌인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훗날 빌헬름 2세)였다. 그는 어린 시절 엘리자베트를 처음 만난 후 깊이 빠져들었으며, 그녀를 "매우 아름답다. 사실 내가 본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다"라고 칭찬했다.[5] 본 대학교 재학 시절 헤센을 자주 방문하며 엘리자베트와 사랑에 빠졌고,[7] 수많은 사랑 시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1878년 빌헬름은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했다.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프리드리히 2세를 좋은 신랑감으로 여겨 엘리자베트가 그의 청혼을 거절하자 "깊이 유감스러워했다".[8] 프리드리히의 할머니인 아우구스타 황후는 엘리자베트의 거절에 매우 분노하여 그녀를 용서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등이 그녀에게 매료되었음을 표현했다.

결국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러시아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루트비히 4세는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조카였기에,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 황족들과 교류가 있었다. 마리아 황후는 종종 아들들인 세르게이와 파벨을 데리고 헤센을 방문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에는 세르게이를 다소 거만하고 내성적인 인물로 여겼다.
그러나 1878년 어머니 앨리스 대공비를 디프테리아로 잃은 엘리자베트는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 마리아 황후를 여읜 세르게이 대공과 슬픔을 공유하며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예술을 사랑하고 신앙심이 깊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세르게이는 엘리자베트에게서 자신이 깊이 사랑했던 어머니의 성품과 비슷한 면을 발견하고 강하게 끌렸다고 한다.
1883년 봄, 세르게이 대공이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였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이 약혼에 반대하며 엘리자베트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해 늦가을 세르게이가 다시 청혼했을 때 엘리자베트는 다시 한번 그의 청혼을 수락하며 결혼 준비가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1884년 6월 15일 (구력 6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부속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1891년, 본래 루터교 신자였던 엘리자베트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할 법적 의무가 없었음에도 자발적으로 개종을 선택하고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ru)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받았다.[10] 그녀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한때 그녀를 열렬히 구애했던 빌헬름 2세는 "지나친 인기 추구"와 "진정한 종교심의 결여" 때문이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11]
2. 3. 러시아 대공비로서의 삶
1884년 6월 15일(율리우스력 3일), 엘리자베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궁정 교회에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다.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이름도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로 바꾸었다.[10] 이 결혼식에서 세르게이의 16세 조카인 니콜라이 2세는 훗날 황후가 되는 엘리자베트의 막내 여동생 앨릭스를 처음 만났다.
새로운 대공비 엘리자베타는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성품으로 남편의 가족인 러시아 황실과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며 빠르게 호감을 얻었다. 세르게이의 사촌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그녀는 사랑하는 다름슈타트에서 러시아에 온 순간부터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부부는 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에 정착했다.

엘리자베타는 원래 루터교 신자였으며, 러시아 황족과 결혼한 외국인 신부에게 정교회 개종이 의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1891년 자발적으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이는 개종하지 않은 루터교 신자 시누이 마리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녀와는 다른 행보였다. 마리 대공녀는 "독일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공주가 정교회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1] 한편, 젊은 시절 엘리자베타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했던 빌헬름 2세는 그녀의 개종 소식을 듣고 "지나친 인기 추구, 궁정에서의 입지 개선에 대한 욕망, 지능 부족, 그리고 진정한 종교심의 결여" 때문이라고 개인적인 감정이 섞인 비판을 하기도 했다.[11]
1892년,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그의 형인 황제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모스크바 총독으로 임명되자, 부부는 크렘린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에는 세르게이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모스크바 외곽의 일린스코예 저택에서 지냈다.

부부 사이에는 평생 자녀가 없었는데, 일각에서는 세르게이 대공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12] 하지만 엘리자베타는 아이들을 좋아하여 일린스코예 저택에서 자주 아이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 1901년에는 시동생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귀천상혼으로 러시아를 떠나게 되자, 그의 두 자녀인 마리아 파블로브나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의 양육을 맡게 되었다.[13] 훗날 마리아 파블로브나는 회고록에서 양부모의 관계가 그리 친밀하지 않았으며, 양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자신들에게 무관심하고 때로는 모욕적이었다고 주장했다.[14][15] 반면, 펠릭스 유수포프는 엘리자베타를 제2의 어머니처럼 여기며 어려운 시기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하여 상반된 평가를 남겼다.
엘리자베타는 1894년 여동생 앨릭스와 당시 황태자였던 니콜라이 2세의 결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앨릭스가 러시아 정교회로의 개종 문제로 니콜라이의 청혼을 망설이자, 엘리자베타는 앨릭스를 설득하여 개종을 격려했고 결국 결혼이 성사되도록 도왔다.
2. 4. 세르게이 대공 암살과 자선 활동
1905년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혁명가 이반 칼랴예프에게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1][40] 이 사건 이후, 엘리자베타는 큰 충격 속에서도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남편을 살해한 칼랴예프를 면회하고 그의 구명을 청원했으나, 칼랴예프는 이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1]남편의 죽음과 마리아 대공녀와 드미트리 대공의 양육을 마친 후, 엘리자베타는 세속적인 삶을 뒤로하고 종교적인 삶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09년,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석과 사유 재산을 모두 팔아 모스크바에 마르타와 마리아 수도원을 설립하고 스스로 원장이 되었다.[1][40] 이후 수녀로서 모스크바의 병들고 가난한 이들, 특히 고아들을 돌보는 자선 활동에 전념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1]
2. 5. 러시아 혁명과 최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주변 사람들은 엘리자베트에게 망명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이를 듣지 않고 러시아에 남았다. 결국 1918년 3월 20일,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체포되어 우랄 산맥 인근의 알라파예프스크로 이송되었다.1918년 7월 18일, 엘리자베트는 체카(비밀경찰)에 의해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 황족 등 다른 로마노프 황족 및 측근들과 함께 알라파예프스크 교외의 폐광산 갱도로 끌려가 산 채로 던져졌다. 체카 요원들은 갱도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어 이들을 살해했다. 희생자들 중 일부는 즉사하지 않았고, 엘리자베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부상당한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 황족의 머리를 자신의 손수건으로 감싸주는 등 다른 이들을 돌보았다고 전해진다. 이는 훗날 시신 수습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살해된 지 약 3개월 후인 1918년 10월 8일, 백군의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 부대가 알라파예프스크를 점령하면서 폐갱 속에서 엘리자베트를 포함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견했다. 유해는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이후 적군의 진격으로 인해 유해는 중국 베이징의 러시아 정교회 묘지로 옮겨졌다가, 1921년 1월 엘리자베트가 생전에 안장되기를 원했던 예루살렘의 겟세마네 동산에 위치한 막달라 마리아 교회에 최종적으로 안장되었다.[40] 함께 순교한 바르바라 야코블레바 수녀의 유해도 같은 곳에 묻혔다.
엘리자베트는 사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해외 러시아 정교회에서 1981년에,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서 1992년에 신성 순교자로 시성되었으며, 그녀가 사망한 7월 18일이 축일로 기념된다.
3. 유해와 성인 추대
1918년 10월 8일, 백군 병사들은 알라파옙스크 교외 폐갱도에서 엘리자베트와 다른 황족들의 유해를 발견했다. 살해된 지 3개월 가까이 지났음에도 유해는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적군이 접근해오자, 백군은 유해를 더 동쪽으로 옮겨 중국 베이징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 묘지에 임시로 매장했다.[40]
1921년, 엘리자베트와 그녀와 함께 순교한 바르바라 야코블레바 수녀의 유해는 엘리자베트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올리브 산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에 안치되었다.[40] 이 교회는 엘리자베트와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건립을 도왔던 곳이다. 베이징의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은 1957년에 철거되었고, 묘지 터는 1986년에 주차장이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1981년 러시아 정교회 해외교회에 의해, 그리고 소련 붕괴 후인 1992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에 의해 '신성 순교자 엘리자베스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녀의 주요 성지는 그녀가 모스크바에 설립한 마르포-마린스키 수도원과 그녀의 유해가 안치된 예루살렘의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이다.
성녀 신(新) 순교자 엘리자베스는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력에서 여러 차례 기념된다. 주요 기념일은 러시아 정교회의 신 순교자와 참회자 축일(1월 25일(구력)/ 2월 7일(신력)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 순교일(7월 5일/ 18일), 그리고 유해가 광산에서 발굴된 날(9월 28일/ 10월 11일)이다. 러시아 정교회 해외교회에서는 유해가 예루살렘으로 이송된 날(1월 17일/ 30일)도 기념한다.[28]
엘리자베트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서문 위에 조각상으로 세워진 전 세계 20세기 순교자 10인 중 한 명으로 기념되고 있다.[29] 또한 2015년 4월 세인트 올반스 대성당에 복원된 내브 스크린에도 그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30] 소련 붕괴 이후 모스크바에 있는 그녀의 수녀원 정원에는 "엘리자베스 표도로브나 대공녀에게: 참회와 함께"라는 비문이 새겨진 동상이 세워졌다.
2009년 6월 8일, 러시아 검찰총장은 엘리자베트 표도로브나를 포함한 여러 로마노프 왕족들을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후 사면했다. 검찰청 관계자는 이들이 "체포, 추방, 그리고 체카에 의한 기소 없는 구금의 형태로 탄압을 받았다"고 밝혔다.[31]
4. 유산과 평가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는 생전에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동시대인과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그 미모와 매력적인 성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4][5][6] 러시아 황실로 시집온 후 초기에는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으나, 1905년 남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은 후, 그녀의 삶은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남편 사후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세속적인 삶을 떠나 자선과 봉사에 헌신했으며, 1909년 모스크바에 마르타와 마리아 수녀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쳤다.[20]
러시아 혁명의 격동 속에서 1918년 볼셰비키에 의해 다른 황족들과 함께 알라파예프스크에서 살해당했으며(알라파예프스크의 순교자), 이는 그녀의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한 사건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왕관을 쓴 덕은 백 명의 폭군 차르보다 세계 혁명의 더 큰 적"이라고 평가하며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24][25]
사후 그녀의 삶과 순교는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높이 평가받아, 1981년 러시아 정교회 해외교회와 1992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 의해 신성 순교자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로 시성되었다. 그녀의 주요 성지는 모스크바의 마르포-마린스키 수도원과 그녀의 유해가 안치된 예루살렘 올리브 산의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이다.
엘리자베타는 러시아 정교회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기억되고 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서쪽 문 위에는 20세기 순교자 10인 중 한 명으로 그녀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29] 세인트 올반스 대성당에도 그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30] 소련 붕괴 이후 모스크바의 마르타와 마리아 수녀원 정원에도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녀에게: 참회와 함께"라는 비문이 새겨진 동상이 세워져 그녀를 기리고 있다.
2009년 6월 8일, 러시아 검찰총장은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를 포함한 로마노프 왕족 희생자들을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면했다.[31]
4. 1. 종교적 헌신과 사회봉사
엘리자베트는 원래 루터교 신자였으나,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할 법적 의무는 없었음에도 1891년 자발적으로 개종을 선택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인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로 바꾸었다.[10] 이러한 결정은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그녀의 개종이 진정한 신앙심보다는 인기를 얻고 궁정 내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라고 평가절하했다.[11]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점차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1905년 2월 17일, 남편 세르게이 대공이 사회주의 혁명가 이반 칼랴예프에게 크렘린에서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르게이 대공은 과거 모스크바 총독 시절 약 2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로 추방하는 등 비판받을 만한 정책을 시행한 바 있었다.[16][17]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놀라운 침착함을 유지하며 슬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녀는 장례식 전날, 남편을 살해한 칼랴예프가 수감된 감옥을 찾아갔다. 엘리자베타는 칼랴예프에게 회개를 권하며 용서의 뜻을 전하고, 황제에게 그의 사면을 청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랴예프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며 죽음으로써 혁명에 기여하겠다며 이를 거부했다.[18] 이 일화는 깊은 신앙심에 기반한 그녀의 용서와 자비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칼랴예프는 결국 1905년 5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남편 사후, 엘리자베타는 세속적인 삶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종교적인 삶과 봉사 활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909년, 그녀는 자신의 보석류를 모두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모스크바에 마르타와 마리아 수녀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이 수녀원은 병원, 고아원, 무료 급식소 등을 운영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는 구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리자베타는 수녀들과 함께 직접 환자를 돌보고 빈민가를 방문하는 등 헌신적으로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15년 그녀의 후원 아래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이 조직되어 부상당한 군인들을 지원하는 등 구호 활동을 이끌었다.[19]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황족이었던 엘리자베타의 신변에도 위험이 닥쳤다. 주변의 망명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다. 1918년 3월, 블라디미르 레닌의 명령을 받은 체카에 의해 체포되어 처음에는 페름으로, 이후 예카테린부르크를 거쳐 알라파예프스크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콘스탄틴 대공,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공, 이고르 콘스탄티노비치 공,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팔레이 등 다른 황족 및 측근들과 함께 감금되었다.[22]
1918년 7월 18일 밤, 엘리자베타와 동료들은 체카 요원들에 의해 알라파예프스크 외곽의 시니아치하 마을 근처에 있는 깊이 20m의 버려진 광산 갱도로 끌려갔다. 체카 요원들은 그들을 구타한 뒤 산 채로 갱도에 던져 넣고 수류탄을 터뜨려 살해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엘리자베타는 갱도에 던져진 후에도 마지막까지 찬송가를 불렀다고 전해지나[23], 2019년 발표된 연구는 당시 조사 기록을 근거로 그녀가 살해 직전 재갈이 물려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순교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26][27] 레닌은 그녀의 죽음을 "왕관을 쓴 덕은 백 명의 폭군 차르보다 세계 혁명의 더 큰 적"이라며 환영했다고 전해진다.[24][25]
같은 해 10월, 백군이 알라파예프스크를 점령하면서 엘리자베타와 동료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유해는 이후 중국 베이징을 거쳐, 그녀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1921년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에 안치되었다.[40]
엘리자베타는 1981년 러시아 정교회 해외교회에 의해, 1992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 의해 신성 순교자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로 시성되었다. 그녀는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력에서 순교일인 7월 18일(구력 7월 5일)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기념되고 있다.[28] 또한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서쪽 문 위에는 20세기 순교자 10인 중 한 명으로 그녀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29] 소련 붕괴 후 모스크바의 마르포-마린스키 수녀원 정원에도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녀에게: 참회와 함께"라는 비문이 새겨진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4. 2. 한국과의 관계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음)5. 대중문화 속의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 오사라기지로의 단편 소설 『시인』은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와 그녀의 남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암살한 칼리예프의 대화를 소재로 다루었다. 작중에서는 엘리자베타가 칼리예프의 사면을 탄원한 이유에 대해, 칼리예프가 과거 세르게이 대공의 마차에 어린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다는 이유로 폭탄 테러 실행을 중지했던 일 때문이라고 묘사한다.
- 2017년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공연된 뮤지컬 『신들의 땅 ~ 로마노프 왕조의 황혼~』에서는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가 '이리나'(Irene|이레네de)라는 이름의 등장인물로 각색되었다. 극중 이리나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여동생으로 설정되었으며, 배우 레이미 우라라가 연기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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