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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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남건은 고구려의 귀족으로,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연남생의 동생이다. 665년 연개소문 사후 형 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자 동생 연남산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했고,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후 보장왕에 의해 대막리지에 임명되었다.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군대를 지휘했으나,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당나라로 끌려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드라마와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 여러 배우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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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유는 고구려의 막리지로,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이며, 막리지 직을 역임하여 국정을 장악하고 연씨 가문이 고구려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연남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연남건 |
원어 이름 | 淵男建 |
로마자 표기 | Yeon Nam-geon |
출생 | 635년 ~ 638년 (추정) |
사망 | 미상 |
작위 | 고구려의 대막리지 |
대수 | 3대 |
전임 | 연남생 |
국적 | 고구려 |
군사 복무 | |
군주 | 고구려 보장왕 |
지휘 | 고구려군 |
참전 | 고구려-당 전쟁 |
가족 관계 | |
부친 | 연개소문 |
가문 | 연씨 |
형제자매 | 연남생, 연남산 |
친인척 | 연정토 |
2. 생애
665년 아버지 연개소문 사후, 형 연남생, 동생 연남산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연남생이 지방 순시를 떠난 사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고, 결국 형을 당나라로 축출한 뒤 666년 보장왕에 의해 대막리지에 임명되어 고구려의 실권을 잡았다.
대막리지로서 666년부터 시작된 당나라의 대규모 침공에 맞서 군대를 총지휘하며 항전했으나,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전쟁은 고구려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평양성 함락 직전까지 저항하다 내부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보장왕, 동생 연남산 등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지금의 쓰촨성 지역인 건주(黔州)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연남건 형제간의 분열은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만약 형제들이 단합했다면 고구려가 더 오래 존속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으며, 일각에서는 신라가 이들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첩자를 보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형제인 연남생과 연남산의 비석은 남아있으나, 연남건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족한 실정이다.
2. 1. 권력 장악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다. 연남생이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기 위해 수도를 비운 사이, 동생인 연남건과 연남산은 정변을 일으켜 수도 평양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연남건 등은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獻忠)을 살해하고, 보장왕의 명의를 빌려 연남생을 소환하려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당나라에 투항하였다.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자, 666년 8월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연남건은 고구려의 최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남생의 투항과 형제간의 권력 다툼은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이후 당나라의 침공을 용이하게 하여 결국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신라가 형제간의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측근들에게 첩자를 보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2. 2. 당나라와의 전쟁
665년 연개소문 사후,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었으나, 지방 순시 중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이 일으킨 정변으로 권력을 잃었다. 연남건과 연남산은 수도를 장악하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했으며, 왕명을 빌려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자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에 666년 8월,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大莫離支)로 임명했고, 연남건은 고구려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같은 해 12월, 당나라가 대규모 침공을 시작하자 연남건은 군대를 총지휘하여 맞섰다. 667년 9월,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에게 신성이 함락되자 15만 구원군을 보냈으나, 이들은 금산 전투에서 당군에게 대패했다. 또한 곽대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 침공해왔다. 당나라 관리가 압록강 방비의 허술함을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 편지를 입수한 연남건은 즉시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쳐 당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668년 초, 이세적과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에게 북쪽의 부여성마저 함락되자, 연남건은 다시 5만 구원군을 보냈지만, 이들 역시 설하수에서 이세적의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다.
668년 여름, 마침내 수도 평양성이 당군에게 포위되어 한 달 넘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보장왕과 연남산은 수령 98명을 이끌고 이세적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연남건은 성문을 닫고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며 군사를 이끌고 자주 출격했으나 번번이 패배했다. 그는 군사 지휘를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烏沙), 고요묘(高麗苗)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당군과 내통했다. 닷새 뒤, 신성이 성문을 열어주자 당군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불을 지르고 함성을 질렀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자 연남건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보장왕, 연남산 등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는 지금의 쓰촨성 지역인 건주(黔州)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연남건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은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만약 형제들이 협력했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으며, 일각에서는 신라가 형제 측근에 첩자를 보내 갈등을 부추겼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연남생과 연남산의 비석은 남아있지만, 연남건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족한 실정이다.
3. 평가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이미 당나라의 지속적인 침입과 백제 멸망 등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지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어려운 상황이었다.[1][2]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형 연남생과의 권력 다툼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3]
연남건은 동생 연남산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형 연남생을 축출하고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3] 이로 인해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었고, 이는 고구려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당나라의 침공을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2][3] 비록 연남건이 668년 당나라의 침공에 맞서 압록강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으나[3], 이미 내부 분열과 민심 이반으로 인해 효과적인 방어를 하지 못하고 결국 수도 평양성 함락과 함께 고구려 멸망을 막지 못했다.[2]
만약 연남건과 형제들이 힘을 합쳐 국가적 위기에 대처했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3], 그의 권력 장악 과정과 그로 인한 내부 분열은 국가 멸망을 자초한 중대한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신라가 형제간의 갈등을 이용한 측면도 있지만[3], 근본적으로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권력 다툼을 벌여 국론을 분열시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건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3]
4. 가계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증조부 | 연자유(淵子遊) | ||
증조모 | 미상 | ||
조부 | 연태조(淵太祚) | 568년 ~ 631년 | |
조모 | 소씨(蘇氏) | ||
아버지 | 연개소문(淵蓋蘇文) | 614년 ~ 666년 | |
어머니 | 고소연(高蘇淵) | ||
숙부 | 연정토(淵淨土) | ||
형 | 연남생(淵男生) | 634년 ~ 679년 | |
조카 | 연헌성(淵獻誠) | 651년 ~ 692년 | 연남생의 아들 |
조카 | 연헌충(淵獻忠) | 연남생의 아들 | |
동생 | 연남산(淵男産) | 639년 ~ 701년 |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내용 없음)
5. 1. 드라마
- 《삼국기》(KBS, 1992년~1993년) - 배우: 구한승
-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 배우: 김홍표
- 《대조영》(KBS, 2006년~2007년) - 배우: 안홍진
-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 배우: 김정민
5. 2. 영화
참조
[1]
문서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634년에 탄생했고 막내아들인 연남산이 639년 출생했으므로 적어도 1년 이상 차이가 난다.
[2]
문서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634년에 탄생했고 막내아들인 연남산이 639년 출생했으므로 적어도 1년 이상 차이가 난다.
[3]
웹사이트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people.aks.ac[...]
[4]
문서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634년에 탄생했고 막내아들인 연남산이 639년 출생했으므로 적어도 1년 이상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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