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르비에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르비에토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에 위치한 요새 도시로,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로마 시대, 중세 시대를 거쳐 교황령의 지배를 받았다. 주요 명소로는 고딕 양식의 오르비에토 대성당, 루카 시뇨렐리의 벽화 "최후의 심판",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 등이 있으며, 슬로 시티 운동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또한, 오르비에토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탈리아의 바위 지형 - 크라스
    크라스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에 걸쳐있는 석회암 지형의 고원 지대로, 카르스트 지형, 동굴, 복류수와 같은 독특한 경관과 보라 바람, 테란 와인, 카르스트 프로슈토로 유명하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여 슬로베니아인과 이탈리아인이 고유한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다.
  • 이탈리아의 화산 - 솔파타라산
    솔파타라산은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활화산으로, 푸마롤과 머드 풀 같은 화산 지형을 특징으로 하며, 과거 기독교 순교지로도 알려져 있고, 2017년에는 안전사고가 있었다.
  • 이탈리아의 화산 - 스트롬볼리섬
    스트롬볼리섬은 티레니아 해의 이탈리아 섬으로, 활화산인 스트롬볼리 산이 잦은 화산 활동을 보이는 곳이며, 스트롬볼리식 분화, 쓰나미, 인구 감소, 관광 산업, 영화 및 문학 작품 등 대중 문화에 영향을 미친 섬이다.
  • 슬로시티 - 조안면
    조안면은 남양주시에 위치하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지닌 곳으로, 다산 정약용 유적지 등 관광 명소가 있고 수도권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면이다.
  • 슬로시티 - 피우미치노
    피우미치노는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 수도권의 코무네로, 1992년 로마에서 분리되어 자치시가 되었으며, 티레니아해 연안의 어업 및 해변 관광 중심지이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이 있는 교통 요충지이며, 과거 그리스 군사 정권에 저항한 해군 운동의 망명지였다.
오르비에토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르비에토 전경
오르비에토 전경
공식 명칭오르비에토 시
현지 명칭Città di Orvieto
지리 좌표42°43′06″N 12°06′37″E
위치움브리아주 테르니도
분구 (Frazioni)바니 디 오르비에토, 바르다노, 바스키 스칼로, 베나노, 비아조, 보토 디 오르비에토, 카날레 디 오르비에토, 카노니카, 카프레타, 치코니아, 콜로네타 디 프로도, 코르바라, 포사텔로, 모라노, 오르비에토 스칼로, 오스테리아 누오바, 파델라, 프로도, 로카 리페세나, 산 파우스티노, 스페라카발로, 스타치오네 디 카스틸리오네, 수카노, 티타냐노, 토르디몬테, 토레 산 세베로
시장로베르타 타르다니
시장 소속 정당P
면적281.27 km²
고도325 m
인구 (2017년 12월 31일 기준)20,253명
인구 밀도72명/km²
인구 약칭오르비에타니
시간대CET (UTC+1)
우편 번호05018
지역 번호0763
ISTAT 코드055023
세무 코드G148
지진 분류확인 필요
수호 성인나자렛의 요셉
축일3월 19일
공식 웹사이트오르비에토 시 공식 웹사이트
일본어 정보
명칭オルヴィエート (오루비에-토)
테르니 현의 오르비에토 코무네 지도
테르니 현 내 오르비에토 코무네 위치
인구19367 명 (2024년 1월 1일 기준)
면적281.16 km²
인구 밀도68.9 명/km²
인접 코무네확인 필요
지진 분류확인 필요

2. 역사

오르비에토는 에트루리아 문명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고대에는 ''urbs vetus''(오래된 도시)라고 불렸으며, 에트루리아의 벨즈나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있다.[16] 오르비에토는 에트루리아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현재 오르비에토 칸니첼라 묘지에는 "나는 아빌레 카타치나의 후손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 남아있다. 이는 에트루리아-라틴식 이름과 켈트족 기원의 성씨가 함께 나타나는 흥미로운 사례로, 고대 이탈리아의 복잡한 민족 관계를 보여준다.[16]

기원전 3세기, 오르비에토는 로마에 합병되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오르비에토는 로마 제국 붕괴 이후에도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고트족과 롬바르드족의 지배를 거쳐 10세기에는 중세 코뮌이 설립되었고, 집정관들이 주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도시를 통치했다. 교황 베네딕토 7세는 조카와 함께 오르비에토를 방문했고, 그의 조카는 이후 정착하여 1016년 집정관이 되었다.[16]

13세기 말, 오르비에토는 인구 약 3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1201년부터 군사 총독과 포데스타가 협력하여 도시를 통치했으며, 도시는 네 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2년부터 1264년까지 오르비에토에 머물렀다.[16]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르비에토에서 가르치면서, 도시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6년 오르비에토에 ''studium generale''를 부여했고, 이는 현재 페루자 대학교의 일부가 되었다.[16]

오르비에토 지역은 오랫동안 교황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1860년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교황령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2. 1. 에트루리아 시대

고대 도시(라틴어로 ''urbs vetus'', 여기서 "오르비에토"가 유래)는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일반적으로 에트루리아의 벨즈나와 연관되어 왔지만, 일부 현대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16] 오르비에토는 확실히 에트루리아 문명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고고학 박물관(Museo Claudio Faina e Museo Civico)에는 이 지역에서 발굴된 에트루리아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16] 오르비에토 칸니첼라 묘지에 있는 한 무덤에는 "mi aviles katacinas", 즉 "나는 아빌레 카타치나의 후손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16] 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은 에트루리아-라틴식 이름인 아울루스를 가지고 있었고, 켈트족 기원으로 추정되는( "Catacos"에서 파생됨)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16] 이 흥미로운 유물은 고대 이탈리아의 복잡한 민족 관계와 그러한 관계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6]

또한 이 지역에는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된 골리니 무덤이 있다.[16] 이 무덤의 벽화는 장례 연회를 묘사하여 귀족 에트루리아인의 죽음 이후 열린 실제 모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16] 그림에는 하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회를 준비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16]

오르비에토는 언덕 위에 건설된 요새 도시이다.[16] 오래 전부터 에트루리아인이 살았으나 기원전 280년경에 로마인에게 함락되어 인근 지역으로 도망쳤다.[16] 이후 이 도시를 "울부스 베투스 (urbs vetus)"(라틴어로 "오래된 도시"라는 뜻)라고 부른 것이 변형되어 오르비에토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6]

2. 2. 로마 및 로마 이후 시대

오르비에토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에 합병되었다. 화산암인 응회암의 높고 가파른 절벽 위에 위치한 이 도시는 사실상 난공불락이었다.[16] 로마 제국 붕괴 후, 방어 가능한 이 입지는 새로운 중요성을 얻었다. 볼세나에서 주교좌가 옮겨졌고, 고트족과 롬바르드족이 이 도시를 점유했다. 10세기에 중세 코뮌이 설립되었고, 이 코뮌에서는 집정관들이 주교에게 봉건주의적 충성 서약을 하고 통치했다. 오르비에토는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10세기에 교황 베네딕토 7세가 조카 필리포 알베리치와 함께 오르비에토를 방문했는데, 필리포 알베리치는 나중에 그곳에 정착하여 1016년에 도시 국가의 집정관이 되었다. 13세기까지 세 개의 교황 궁전이 건설되었다.[16]

오래 전부터 에트루리아인이 살았으나 기원전 280년경에 로마인에게 함락되어 인근 지역으로 도망쳤다. 이후 이 도시를 "울부스 베투스 (urbs vetus)"(urbs vetus|오래된 도시la)라고 부른 것이 변형되어 오르비에토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6]

2. 3. 중세 시대

피렌체와 로마 사이, 키아나 강을 가로지르는 길목의 난공불락 바위 위에 자리 잡은 오르비에토는 13세기 말 인구가 약 3만 명에 달하는 큰 도시였다.[4] 1157년 교황 칙서에서 이미 인정된 시립 기관[5]을 갖춘 오르비에토는 1201년부터 군사 총독인 "인민의 대장"과 협력하는 포데스타를 통해 스스로를 통치했으며, 포데스타는 대개 주교였다. 도시는 세란시아, 산 조베날레, 포스티엘라, 산타 파체의 네 개 구역(리오네)으로 나뉘었다. 13세기에는 도시가 격렬한 불화로 분열되었으며, 부의 절정에 달했지만 파문 아래에서도 교황청과 자주 대립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2년부터 1264년까지 오르비에토에 머물렀다.

이 도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곳의 ''studium''에서 가르치면서 당시 주요 문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작은 대학교(현재 페루자 대학교의 일부)는 1236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도시에 부여한 ''studium generale''에서 기원했다. 오르비에토에서 가르친 후, 아퀴나스는 새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4세의 교황 신학자이자 산타 사비나 ''studium provinciale'', 즉 교황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 '안젤리쿰'의 전신인 섭정 마스터로 활동하기 위해 1265년 로마로 소환되었다.

2. 4. 교황 통치

오르비에토 지역은 공식적으로 교황령에 편입되기 오래 전부터 교황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지역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로 통일 이탈리아에 병합될 때까지 교황령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3. 주요 명소

슬로 시티 가맹 도시로, 이 운동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루카 시뇨렐리의 벽화 "최후의 심판" 등으로 유명한 고딕 양식의 웅장한 대성당(두오모)을 비롯하여, 지금도 중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17] 화이트 와인의 산지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하 터널 시스템


16세기 로마 약탈을 피해 이 땅으로 도망쳐 온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만들게 한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il pozzo di San Patrizio)이라는 유적이 있다. 지름 13m, 깊이 62m의 큰 수직 구멍으로, 내벽을 따라 설치된 긴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 물을 긷는다. 물 운반의 편의를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이 별도로 설치된 이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도 공개되어 있으며, 실제로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

구시가지에는 극장, 미술관,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 두오모 등이 있으며, 도시 지하에는 그 자체로 유적이 나타난다. 산기슭에는 에트루리아인의 묘로 전해지는 유적도 있어, 이탈리아 국내외에서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시에는 구시가지 외에 신시가지, 공업 지대가 있으며, 움브리아 재즈 축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3. 1. 오르비에토 대성당

오르비에토의 기념비적인 오르비에토 대성당.


1290년 11월 15일, 교황 니콜라 4세는 현재 건물의 초석을 놓았고, 도시가 특별한 헌신을 해 온 축일인 성모 승천을 기념하여 봉헌했다. 이 설계는 종종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현대의 지배적인 의견은 석공장이 페루자 출신의 이름 없는 수도승 프라 베비냐테였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좁은 띠로 된 흰색 트라베르틴과 녹색을 띤 검은색 현무암으로 줄무늬가 져 있으며, 시에나 대성당과 그 시대의 다른 이탈리아 중부 대성당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 후 10년 동안 대성당 당국은 시에나 출신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로렌초 마이타니를 불러 건물을 안정시키고 파사드를 설계하게 했다. 그는 성가대석을 확장하고 두 개의 예배당이 있는 익랑을 계획했는데(1308~1330년경), 이 공간들은 그가 죽은 지 오래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대성당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5개의 종이 있으며, E 플랫으로 조율되어 있다.

파사드는 특히 인상적이며 로렌초 마이타니의 주목할 만한 조각품(14세기)을 포함하고 있다. 대성당 내부에는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산 브리지오 예배당의 프레스코화와 루카 시뇨렐리의 걸작인 그의 ''최후의 심판''(1449–51)이 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에서 볼 수 있는 볼세나 성체포는 1263년 볼세나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에서 유래되었는데, 축성된 성체가 사제의 미사에서 성찬례와 성배가 놓이는 작은 천인 성체포 위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17]

루카 시뇨렐리의 벽화 "최후의 심판" 등으로 유명한 고딕 양식의 웅장한 대성당(두오모)이다.

3. 2. 교황 거주지와 오르비에토 Città del Corpus Domini

11세기부터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교황령에서 정치적 입지를 유지했다. 여러 이탈리아 중부 도시들이 교황과 수행원들을 맞아 주교의 궁전에 숙소를 제공했다. 로마 외에는 오르비에토와 비테르보(그리고 결국 아비뇽)만이 교황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 아드리아노 4세(1154–59)는 오르비에토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의 후임인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도시에 침투한 카타리 이단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단을 근절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227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오르비에토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studium generale'', 즉 신학 학교를 인가했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학교 중 하나였다. 교황 우르바노 4세(1261–64)는 비테르보의 도미니크 교회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교황 재임 기간 대부분을 오르비에토에서 보낸 프랑스인이었는데, 그는 또한 이 도시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1263년, 그는 아마도 로마 외에서 최초의 교황 궁전을 짓기 시작했고, 새로운 오르비에토의 도미니크 교회를 봉헌했다.

교황 니콜라오 4세(1288–92)는 1291–92년에 교황청의 소재지로 고향인 로마 대신 오르비에토를 선택하여, 교황청 회의를 오르비에토에서 여는 전통을 확립했다. 그는 오르비에토 시민들로부터 포데스타(Podestà)와 카피타노 델 포폴로(Capitano del Popolo)로 선출되는 보상을 받았으며, 이는 도시에서 시민직을 맡은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의 후임인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오르비에토와의 교황적 관계를 이어갔다. 1297년과 1298년에 오르비에토 시민들은 그를 도시 카피타노와 포데스타로 선출하여 보니파시오를 기렸다. 그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교황 궁전인 팔라초 솔리아노를 건설했다. 그는 또한 도시의 주요 성문에 자신의 조각상을 기증했는데, 이는 그에게 많은 적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했다. 교황 베네딕토 11세(1288–1305)는 아비뇽 교황청 이전, 이탈리아에 거주한 마지막 교황이었다. 니콜라오 4세부터 베네딕토 11세까지 오르비에토는 로마보다 더 자주 교황을 맞이했고, 로마가 교황 도시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오르비에토에서 발표된 교황 칙서 Transiturus를 통해 전체 가톨릭 세계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을 기독교 세계에 제정하고 반포했다. 이 보편적인 기독교 성체 축일 제도의 지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바뇨레조의 보나벤투라 성인이며, 이들은 위그 드 생-셰르와 함께 오르비에토의 스투디움 쿠리아(Studium Curiae)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55)는 이 도시에 지원을 보냈다. 1449년의 서한에서 교황은 원래 니콜라오 4세의 계획이었던 주교 궁전 복원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또한 프라 안젤리코가 대성당의 카펠라 누오바에서 그림을 시작하도록 허락했다.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오르비에토로 피신했다. 카를의 군대에 의해 포위될 경우 도시의 물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그는 62미터 깊이의 웅장한 우물, 즉 ''포초 디 산 파트리지오'' 또는 "성 파트리치오 우물"을 의뢰했다. 이탈리아 이름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의 연옥이 연옥으로 가는 통로를 제공한다는 중세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깊은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건축은 건축 기술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가 맡았다. 중앙 우물 샤프트는 이중 나선의 경사로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는 살라딘의 우물과 유사했다. 이 경사로는 각각 일방 통행으로 설계되어 물 항아리를 실은 당나귀가 방해 없이 내려갔다가 올라갈 수 있었다. 우물에 새겨진 비문은 QUOD NATURA MUNIMENTO INVIDERAT INDUSTRIA ADIECIT ("자연이 공급을 억제한 것을 응용으로 공급했다")라고 자랑한다.

3. 3. 산 파트리지오 우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6세기에 로마 약탈을 피해 오르비에토로 도망쳐 온 후,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il pozzo di San Patrizio)을 만들게 했다.[17] 이 우물은 지름 13m, 깊이 62m의 큰 수직 구멍으로, 내벽을 따라 설치된 긴 나선형 계단을 통해 물을 긷는 구조이다. 물 운반의 편의를 위해 계단은 오르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이 별도로 설치된 이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도 우물은 공개되어 있으며, 실제로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

3. 4. 지하 터널 시스템

오르비에토 시는 지하에 숨겨진 동굴과 터널의 미로에 대한 비밀을 오랫동안 간직해 왔다. 화산암인 응회암 깊숙이 파여진 이 비밀스러운 터널들은 현재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들의 웅장한 특성은 많은 역사적, 고고학적 발견을 낳았다. 세인트 앤셀름 대학은 매년 여름, 학생들이 도시 외곽의 코릴리아 발굴 현장에 위치한 대학의 고고학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6]

지하 도시는 수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1200개 이상의 터널, 갤러리, 우물, 계단, 채석장, 지하실, 예상치 못한 통로, 저수조, 비둘기 둥지를 위한 수많은 작은 사각 틈새가 있는 겹겹이 쌓인 방들을 자랑한다. 많은 귀족 가문의 집에는 부드러운 암석에서 조각된 비밀 탈출 터널을 통해 포위 공격 시 높은 위치의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 갖춰져 있었다. 이 터널들은 도시 궁전에서 시작하여 도시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출구 지점으로 이어졌다.

3. 5. 알보르노스 요새

카헨 광장에는 알보르노스 요새가 있다. 이 요새는 스페인 출신 추기경 알보르노스의 지시를 받아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명령으로 건설되었으며, 콘도티에로이자 군사 기술자인 우골리노 디 몬테마르테가 설계했다. 알보르노스 요새는 라틴어로 ''아우구랄레''(Augurale)로 알려진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원래 로카 디 산 마르티노(Rocca di San Martino)로 알려진 이 거대한 요새의 건설은 1359년 또는 1353년에 도시의 묘지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이 요새는 교회에 도시 내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고 추기경과 그의 대장들이 최근의 군사적 승리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원래 사각형 평면으로 설계된 요새는 정문 근처에 작은 건물이 있었고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도개교가 있었다. 그러나 로카는 1395년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재건 시도는 실패했다. 요새는 15세기 중반에 원래 계획과 추가적인 원형 요새선을 사용하여 최종적으로 재건되었다.

1527년 말 로마 약탈 이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오르비에토로 피신했다. 교황은 포위 공격 시 도시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현재 유명한 간정 우물 포초 디 산 파트리지오(1528–1537)을 파도록 명령했다.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교황은 요새에만 물을 공급할 두 번째 우물을 파도록 명령했다.

3. 6. 기타 명소


  • 팔라초 데이 세테와 토레 델 모로
  • 팔라초 델 카피타노 델 포폴로: 13세기에 지어진 시민 궁전이다.
  • 산 조베날레 성당: 1004년에 지어졌으며, 기존의 교회 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르비에토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3세기 프레스코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7]
  • 산 도메니코 성당: 도미니크 수도회의 첫 번째 교회와 수도원 중 하나이다.
  • 산 프란체스코 성당 (1266): 과거 프란체스코회 교회이다.
  • 산탄드레아 성당: 12각형 종탑으로 유명한 교회이다.
  • 산 로도비코 성당: 바로크 양식 교회이다.
  • 산 베르나르디노 성당: 베르나르디노 여성 수도원과 관련된 바로크 양식 교회이다.
  • 산 로렌초 인 비네이스

슬로 시티 가맹 도시이며, 이 운동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16세기에 로마 약탈을 피해 이 땅으로 도망쳐 온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만들게 한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il pozzo di San Patrizio)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다. 지름 13m, 깊이 62m의 큰 수직 구멍으로, 내벽을 따라 설치된 긴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 물을 긷는다. 물의 운반 편의를 위해 계단은 오르기 위한 것과 내려가기 위한 것이 별도로 설치되어 이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도 공개되어 있으며, 실제로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

구시가지에는 극장, 미술관,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 두오모를 가진 교회 등이 있으며, 도시의 지하를 파고 들어가면 그 자체로 유적이 나타나는 토지, 산기슭의 에트루리아인의 묘로 전해지는 유적 등, 이탈리아 국내,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다.

시로서는 구시가지와 별도로 교외에 신시가지, 공업 지대를 가지고 있으며, 움브리아 재즈 축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4. 경제


  • 도시 북동부에 위치한 오르비에토 지역의 화이트 와인은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레드 와인도 재배된다.
  • 오르비에토는 슬로우 푸드 운동인 치타슬로의 회원이며, 많은 레스토랑이 있다. 오르비에토의 특별 요리 중 하나는 트러플 파스타이다.
  • 이탈리아 은행 오르비에토 저축은행이 이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 주석 처리된 토기인 오르비에토 도자기는 원래 오르비에토에서 제조되었으며, 13세기부터 생산되었다.

5. 교통

오르비에토 기차역과 주변 지역 (2024년 6월)


오르비에토 푸니쿨라는 오르비에토와 유서 깊은 시내 중심가를 연결하는 교통 수단이다.

2016년 12월부터 오르비에토역은 오스트리아 철도(ÖBB)의 뮌헨 및 빈행 야간 침대 열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철도를 이용하면 1시간 10분, 피렌체에서는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오르비에토역에서는 푸니콜라레(케이블카)인 오르비에토 삭도를 이용하여 산 위에 건설된 구시가지까지 지하를 통해 갈 수 있다.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고속도로를 이용하며, 로마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역 반대편에 있는 현대적인 주차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시가지로 올라갈 수도 있다.

6. 문화

오르비에토는 데이비드 소렌이 애리조나 대학교와 함께 설립한 고고학 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8] 세인트 안셀름 대학과 협력한다.

슬로 시티 가맹 도시이며, 이 운동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루카 시뇨렐리의 벽화 "최후의 심판" 등으로 유명한 고딕 양식의 웅장한 대성당을 비롯하여, 지금도 중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이다.[17] 화이트 와인의 산지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6세기에 로마 약탈을 피해 이 땅으로 도망쳐 온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만들게 한 '''산 파트리지오의 우물'''(il pozzo di San Patrizio)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다. 지름 13m, 깊이 62m의 큰 수직 구멍으로, 내벽을 따라 설치된 긴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 물을 긷는다. 물의 운반 편의를 위해 오르기 위한 계단과 내려가기 위한 계단이 별도로 설치되어 이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도 공개되어 있으며, 실제로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

구시가지에는 극장, 미술관, 성 파트리지오의 우물, 두오모를 가진 교회 등이 있으며, 도시의 지하를 파고 들어가면 그 자체로 유적이 나타나는 토지, 산기슭의 에트루리아인의 묘로 전해지는 유적 등, 이탈리아 국내,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다.

시는 구시가지와 별도로 교외에 신시가지, 공업 지대를 가지고 있으며, 움브리아 재즈 축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7. 자매 도시

오르비에토의 자매 도시
국가도시
بيت لحم|베이틀라훔ar베들레헴[19][10]
Givors|지보르프랑스어지보르
前橋市|마에바시시일본어마에바시시[18]
Aiken|에이컨영어에이컨
Seinäjoki|세이네요키fi세이네요키
Kerċem|케르쳄몰타어케르쳄



마에바시시와는 1997년 12월 12일 우호 도시 협약을 체결했으며, 이는 민간 교류가 깊어진 결과이다.[18]

참조

[1] 웹사이트 Comune di Orvieto http://elezioni.inte[...] 2014-12-17
[2] 웹사이트 Saint Joseph http://saints.sqpn.c[...] 2015-03-26
[3] 서적 Daily life of the Etruscans https://www.worldcat[...] Phoenix Press 2002
[4] 간행물 Il catasto d'Orvieto dell'anno 1292 Perugia 1896
[5] 문서 Codice diplomatico della città d'Orvieto Florence 1884
[6] 웹사이트 The Coriglia Excavation Project https://archive.toda[...]
[7] 서적 Hidden Rome https://books.google[...] Paulist Press
[8] 웹사이트 Arizona in Orvieto https://www.arizonai[...] 2022-10-07
[9] 웹사이트 "Hot" a Firenze. Il trio orvietano apre il concerto italiano di Marilyn Manson http://www.orvietone[...] 2019-05-11
[10] 웹사이트 Bethlehem Municipality:: http://www.bethlehem[...] bethlehem-city.org 2009-10-10
[11] 웹사이트 Tavola: Popolazione residente - Terni (dettaglio loc. abitat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3-04-27
[12] 웹사이트 Tavola: Superficie territoriale (Kmq) - Terni (dettaglio comunal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3-04-27
[13] 웹사이트 Popolazione residente per sesso, età e stato civile al 1° gennaio 2024 https://demo.istat.i[...] [[国立統計研究所 (イタリア)|国立統計研究所(ISTAT)]] 2024-06-02
[14] 웹사이트 Tabella dei gradi/giorno dei Comuni italiani raggruppati per Regione e Provincia http://efficienzaene[...] [[:it:Agenzia nazionale per le nuove tecnologie, l'energia e lo sviluppo economico sostenibile|新技術エネルギー環境局(ENEA)]] 2011-03-01
[15] 웹사이트 classificazione sismica aggiornata al aprile 2023 https://rischi.prote[...] [[イタリア市民保護局]] 2023-12-16
[16] 서적 イタリアの小さな工房めぐり [[新潮社]]
[17] 서적 世界の断崖おどろきの絶景建築 パイインターナショナル
[18] 웹사이트 姉妹(友好)提携情報 http://www.clair.or.[...] [[自治体国際化協会]] 2013-03-30
[19] 웹인용 ::Bethlehem Municipality:: http://www.bethlehem[...] www.bethlehem-city.org 2009-10-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