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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인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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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세인(1976년)은 대한민국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로, 1998년 5월 17일 동성애 혐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가족의 반대에 괴로워하며 자살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 창립에 참여했다. 커밍아웃 이후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회적 차별을 겪었으며, 그의 죽음은 동성애자 인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기일에는 추모식이 열리고, 시인 육우당이 그를 추모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2. 생애

오세인은 서울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중고교 시절에는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이었으나, 일찍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고 동성애자 모임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97년 정욜, 임태훈 등과 함께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 창립에 참여하였다.[1]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는 각종 과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했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과외 아르바이트가 모두 취소되고, 다른 과외도 거부당했다.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커밍아웃 후 가족에게 버림받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아 절망하였다.[1]

가정과 친지들로부터 추방당한 그는 평소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었으나,[2] 시중의 편견과 멸시, 비판에 좌절하여 1998년 4월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대동인 사무실 입구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그해 5월 17일 새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의 동인련 사무실 계단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이 날은 제8회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이었다.[1] 그는 "난 모든이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모두들 잘있어"라는 짤막한 유서를 남겼다.[2] 그의 죽음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던 일부 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보도를 거부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아버지와 일부 가족은 그의 장례식장에도 불참하였다. 시신은 화장되어 경기도 가평군의 야산 계곡에 뿌려졌다.

2. 1. 생애 초반

서울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중고교에서는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이었으나, 일찍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했던 그는 동성애자 모임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1997년에는 양지용, 임태훈, 정욜 등과 함께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 창립에 참여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그는 각종 과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했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과외 아르바이트가 모두 취소되고, 다른 과외도 거부당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1, 2등을 차지하는 수재였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었다. 동성애자임을 고백했다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아 절망하였다.

2. 2. 커밍아웃과 가정에서의 추방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쉽게 가족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다가 대학생이 되어서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였다.[1] 1997년 그는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 형, 누나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했고,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나 엄격했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쫓아냈다. 대동인 홍보국장 정민수는 "그는 이전에 가족 중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 형, 누나에게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하지만 그 사실이 엄격한 아버지에게 알려져 1998년 3월경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1]

이후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그는 비난과 편견, 멸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애인 역시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와 연락을 끊었다. 가정과 친지들로부터 추방당한 그는 괴로워했으나 다른 성 소수자 지인이 마련해준 거처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평소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2] 그는 코트형 우비(레인코트)를 즐겨 입었으며 이태원을 거닐었다고 한다. 대동인 회원들은 그에 대해 "사무실에 자주 나와 열심히 활동하고 취미로 사진도 찍는 등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2]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가정에서 외면당하고 천대받았다.[1]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몇몇 과외 아르바이트도 취소되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다른 아르바이트도 여러 번 거절당했다. 그밖에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자라며 멸시하거나 비방하였고, 동료들에게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

2. 3. 마지막 생애와 죽음

시중의 편견과 멸시, 비판에 좌절한 그는 1998년 4월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대동인 사무실 입구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자살을 시도하다 계단에서 굴러 다쳤던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2] 그해 5월 17일 새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의 동인련 사무실 계단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이 날은 제8회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이었고, 시신은 5월 17일 아침 출근한 정욜, 임태훈 등 대동인 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죽기 전 "난 모든이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모두들 잘있어"라고 쓴 짤막한 유서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2] 5월 17일 아침 제기동 대동인 사무실 입구 계단에서 목을 매고 죽은 그의 시신을 발견한 임태훈 등은 망연자실했다 한다. 대동인은 "오 씨와 가까이 살면서 그에게 큰 힘이 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다"며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천대받았던 그가 택할 수 있었던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던 것에 애도하고 분노한다"고 말했다. 대동인은 또 "이번 일을 단순한 동성애자의 죽음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현실의 문제로 인식하고 싸워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1] 그의 죽음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던 일부 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보도를 거부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아버지와 일부 가족은 그의 장례식장에도 불참하였다. 시신은 화장되어 경기도 가평군의 야산 계곡에 뿌려졌다.

3. 사후

오세인의 자살로 PC통신의 각 커뮤니티에 애도의 물결이 일어났다.[3] 그러나 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시중의 편견과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일각의 비난 여론에 의해 추모 분위기는 곧 묻혀졌다.

2002년 11월 시인 육우당은 설헌이라는 필명으로 그를 추모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2001년 5월 13일부터 매년 5월 오세인의 기일을 전후하여 동인련과 인권단체 등의 주도로 추모식이 개최되었고, 매년 5월 그의 사망일을 전후하여 인권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2003년 4월 26일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회원이자 시인인 육우당이 죽자 4월부터 육우당, 오세인 추모제가 동성애자인권연대 및 동성애자 단체, 인권단체, 시민단체 등에 의해 서울특별시에서 해마다 개최되었다.

2003년 5월 4일에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육우당, 오세인을 추모하는 조전을 보내기도 했다.

4. 기타

그는 바람에 펄럭이는 긴 우비를 즐겨 입었고, 중절모와 카우보이 모자 등을 썼다고 한다.

참조

[1] 뉴스 동성애 대학생 목매 자살:가정에서 외면받고 최후의 선택 http://sarangbang.or[...] 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 1998-05-20
[2] 뉴스 동성애 대학생 목매 자살 http://www.newscham.[...] 참세상 1998-05-20
[3] 웹사이트 한국 동성애 커뮤니티 연대기(1998년) - 한국성적소수자 문화인권센터 http://www.kscr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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