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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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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수립된 공화국이다.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일과의 합병을 추진했으나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생제르맹 조약으로 영토가 축소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1920년 이후 기독교사회당이 정권을 잡고 오스트리아 파시즘 체제를 구축했으나, 1938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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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지도 정보
오스트리아 연방국 (1938년) 지도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위치 (1938년)
기본 정보
정식 명칭독일어: (1918년 - 1919년)
독일어: (1919년 - 1934년)
독일어: (1934년 - 1938년)
약칭오스트리아
존속 기간1919년 – 1934년
수도
공용어독일어 (오스트리아 독일어, 바이에른 오스트리아어)
종교기독교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 유대교
국가"독일 오스트리아, 그대 훌륭한 땅이여" (1920년–1929년)
"끝없이 축복받으소서" (1929년–1934년)
오스트리아 국기 (1919년–1934년)
오스트리아 국기 (1919년–1934년)
오스트리아 국장
오스트리아 국장
정치
정치 체제연방제 의회 공화국
대통령카를 자이츠 (1919년–1920년)
미하엘 하이니슈 (1920년–1928년)
빌헬름 미클라스 (1928년–1934년)
총리카를 레너 (1919년–1920년, 초대)
엥겔베르트 돌푸스 (1932년–1934년, 마지막)
의회오스트리아 의회
상원연방평의회
하원국민평의회
역사
시대양차 대전 사이
건국생제르맹 조약 (1919년 9월 10일)
주요 사건7월 폭동 (1927년 7월 15일)
오스트리아 의회 자진 해산 (1933년 3월 4일–15일)
오스트리아 내전 (1934년 2월 12일–15일)
멸망5월 헌법 (1934년 5월 1일)
이전 국가독일계 오스트리아
이후 국가오스트리아 연방국
인구
최대 도시
경제
통화오스트리아 크로네 (1919년–1924년)
오스트리아 실링 (1924년–1938년)
기타
현재 국가오스트리아
민족오스트리아인

2.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면서 제국은 해체되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독일계 오스트리아로 분리되었다.[1]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사회민주당 주도로 공화국을 수립하고 독일과의 합병(앙슐루스)을 추진했으나, 전승국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1918년 독일-오스트리아가 주장한 영토


1919년 생제르맹 조약으로 독일-오스트리아는 국경이 축소되었고, 수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독일계 남티롤은 이탈리아에, 알프스 지방 일부는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에 할양되었다.[1]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을 금지했고, 독일-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1]

카린티아 주민투표를 통해 카린티아 남동부 지역은 오스트리아에 잔류했고, 부르겐란트는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1921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주민투표 결과 주도 쇼프론은 헝가리에 남았다.[1]

생제르맹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인구에게 14개 조항의 "자결권" 침해라는 비판을 받았고, 많은 이들은 오스트리아가 독일과의 통합 없이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1]

제1차 세계 대전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총력전 체제가 붕괴되고 여러 민족들이 분리 독립하면서, 카를 1세는 제국 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1] 사회민주당레너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1918년 11월 12일 공화국 성립을 선언했다.[1] 초기에는 독일과의 합병을 목표로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 국호를 사용했다.[1]

사회민주당은 선진적인 사회 정책을 추진하며 점진적 사회 혁명을 진행했지만, 생제르맹 강화 조약에서 앙슐루스가 부정되고 기독교사회당과의 대립으로 1920년 정권에서 이탈하면서 오스트리아 혁명은 종결되었다.[1]

3. 건국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의해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해산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7] 이 조약으로 수데텐란트 내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티롤 내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다.[7] 또한 남쪽 지역 일부는 유고슬라비아왕국으로 흡수되었다.[7]

카린티아 남동부와 부르겐란트주는 주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았다. 카린티아 남동부는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1920년 10월 20일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오스트리아에 남게 되었다.[7] 부르겐란트주는 1647년부터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며 '서헝가리'라고 불렸는데, 독일어 사용 주민이 대다수였으나 일부 헝가리어크로아티아어 사용 주민도 거주하고 있었다. 생제르맹 조약에 의해 1921년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으나, 쇼프론 시는 주민투표 결과 헝가리에 남았다.[7][1]

생제르맹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인구를 분노케 했는데, 그들은 이 조약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 조항 중 모든 국가의 "자결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황제 중심의 총력전 체제가 붕괴되고, 헝가리인, 체코인 등 여러 민족들이 분리 독립의 움직임을 보였다. 카를 1세는 제국 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1918년 10월 사실상 퇴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회민주당바우어 등 좌파의 지도하에 이중 제국 유지를 포기하고, 레너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민주당·기독교사회당 연립 임시 정부는 11월 12일 공화국 성립을 선언했다. 이 공화국은 독일과의 합병(앙슐루스)을 목표로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4. 정치

새 헌법은 양원제 의회를 만들었는데, 상원인 연방평의회는 각 주의 대표들로 구성되었고, 하원인 국민평의회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연방 대통령은 양원 합동회의에서 4년 임기로 선출되었고, 총리는 국민평의회에서 선출되었다. 어떤 정당도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보수적인 기독교사회당과 우익 대독일인민당 또는 란트분트의 연정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1919년~1920년 사회민주당의 칼 레너의 첫 정부가 수립한 여러 진보적인 사회경제적 및 노동법제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1920년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기독교사회당이 지배했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당의 초대 총리 이그나츠 자이펠은 1922년 5월 집권하여 부유한 실업가들과 로마 가톨릭교회 간의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1920년 10월 17일 총선 이후 사회민주당은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고 1934년 돌푸스에 의해 금지될 때까지 야당으로 남았다. 기독교사회당은 85석, 사회민주당은 69석, 대독일당은 20석, 농민연합은 8석을 얻었다. 미하엘 하이니쉬가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0월 선거 이후 이그나츠 자이펠은 계속 집권하다가 1924년 11월 사임했고, 뒤를 이어 루돌프 라멕이 총리가 되었다.

1928년 12월 기독교사회당의 빌헬름 미클라스가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29년 12월 7일 헌법이 개정되어 의회의 권한이 축소되고, 연방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선출되며 연방 정부를 임명하고 긴급 법령을 발포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1930년 총선 이후 사회민주당이 72석으로 최대 정당이 되었지만, 기독교사회당의 총리 오토 엔더는 사회민주당을 배제하고 연정 정부를 구성했다.

4. 1. 양당 구도와 갈등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기독교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양당 구도로 운영되었다. 기독교사회당은 가톨릭 교회와 연계하여 보수층,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사회민주당은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붉은 빈'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1920년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기독교사회당이 주도했으며,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초대 총리 이그나츠 자이펠은 부유한 실업가들과 가톨릭 교회 간의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1920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고 야당으로 남았으며, 1934년 돌푸스에 의해 금지될 때까지 야당으로 존속했다.

양측은 각각 '방위군'(Heimwehr), '공화국 보호 동맹(Republikanischer Schutzbund)'이라는 준군사조직을 보유하며 무력 충돌을 빚기도 했다. 1927년 샤텐도르프에서 하임베어에 의해 노인과 어린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총격범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좌파 지지자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법무부 건물이 불타고, 경찰과 군대에 의해 89명이 사살되고 600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1927년 7월 폭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회민주당은 4일간의 총파업을 촉구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 정권 수립은 오스트리아 내부에 나치즘에 공감하고 나치 독일과의 합병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1932년 총리에 취임한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의회 내 야당의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자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4. 2. 오스트로파시즘

1932년 기독교사회당의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총리에 취임했다. 돌푸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1933년 '조국전선'을 창설하여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역사가들은 1934년부터 1938년 독일과의 병합 전까지의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 파치즘"(Austrofaschismusde) 통치 시기로 일컫기도 한다. 돌푸스 총리 하에서 수립된 이 독재 체제는 오스트로파시즘(Austrofaschismus)이라고 불린다. 여기서는 “직업 공동체(Berufskörper)”라고 불리는 7개의 직능 대표로 구성된 각 평의회 조직이 의회를 대신하여 정부에 대한 보조 기관으로서 조직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us) 체제가 채택되었다. 또한, 가톨릭 교회(Katholische Kirche)가 국교(Staatsreligion)로 규정되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공통점이 많은 이탈리아 왕국(Königreich Italien)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정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을 추구하는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및 그 의도를 구현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체제 수립 후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5일, 돌푸스는 쿠데타를 시도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총살당했다. 쿠데타 자체는 저지되었고, 후임 총리에는 쿠르트 슈슈니크(Kurt Schuschnigg) 교육부 장관이 취임했다. 쿠데타 실패 후, 히틀러 정권은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대사로 파견하여 양국 관계의 진정을 도모했지만, 호스바흐 각서(Hoßbach-Memorandum)에 있는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 합병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5. 경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3] 제국의 주요 경제 지역들이 분리 독립하면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등 주변국들이 무역 봉쇄를 단행하여 식량과 석탄 수입이 어려워졌다.[3] 1922년에는 1달러가 19,000크로네의 가치를 지닐 정도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인구의 절반이 실업 상태에 놓였다.[3]

25실링 금화, 순도 0.900


붉은 빈에 건설된 많은 아파트 건물 중 하나


1921년 12월, 오스트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라나 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국경을 인정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내 독일계 주민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5억 크로네의 차관을 제공받았다.[4] 1922년, 이그나츠 자이펠 총리는 국제 연맹에 지원을 요청하고 긴축 정책을 도입하여 경제 안정을 꾀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에 6억 5천만 골드 크로네의 차관을 제공했고, 오스트리아는 향후 20년간 독일과의 앙슐루스를 시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4] 그 결과, 1923년 오스트리아 국립은행이 재설립되고 판매세가 도입되었으며, 1924년 12월 오스트리아 실링이 크로네를 대체하는 등 경제 안정화 조치가 이루어졌다.[4]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오스트리아 경제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인 크레디탄슈탈트 은행이 파산하면서 경제난이 심화되었다.[5] 오스트리아는 경제 회복을 위해 오스트리아-독일 관세 동맹을 추진했지만, 프랑스와 소협상국 국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6. 멸망

1938년 2월 12일,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오버잘츠베르크의 베르크호프에서 쿠르트 슈슈니크 수상을 불러 오스트리아 내 나치당 정치범 석방과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다.(베르히테스가덴 협정/Berchtesgadener Abkommende) 군사적 조치를 시사한 이 요구에 슈슈니크 수상은 응했지만, 합병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독일의 압력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지원은 거절되었고, 3월 11일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침공을 위해 국경 지대에 진출하면서 슈슈니크는 수상직에서 사임했다. 후임으로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취임했으며, 그의 요청에 따라 독일군은 오스트리아에 진주했고, 슈슈니크는 체포되었다. 3월 13일, 자이스잉크바르트 수상 단독 서명(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의 서명을 얻지 못했다)으로 “합병법”이 공포되었다. 4월 10일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서 합병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양국에서 압도적인 찬성표(각각 전체의 99%)를 얻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병합되어 오스트리아 주(Land Österreich)가 되었고, 제1공화국은 소멸했다.

합병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용지. “당신은 1938년 3월 13일에 제정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재통일'''에 찬성하고, 우리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당에 찬성표를 던질 것입니까?”라고 적혀 있다. 중앙의 눈에 띄는 기입란 위에 “예”, 오른쪽 끝의 작은 기입란 위에 “아니오”라고 적혀 있다

7. 주요 정치 지도자

7. 1. 역대 대통령

연방대통령 목록은 다음과 같다.

7. 2. 역대 총리

연방총리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는 총리의 소속 정당을 나타낸다.

  • 카를 레너(Karl Renner, 1870-1950) - 재임: 1918.11.12-1920.7.7 (사회민주당·기독교사회당·대독일인민당 연립)
  • 미하엘 마이어(Michael Mayr, 1864-1922) - 재임: 1920.7.7-1921.6.21 (기독교민주당·사회민주당 연립)
  • 요한 쇼버(Johann Schober, 1874-1932) - 재임: 1921.6.21-1922.1.26 (기독교사회당·대독일인민당 연립)
  • 발터 브라이스키(Walter Breisky) - 재임: 1922.1.26-1.27 (기독교사회당)
  • 요한 쇼버 (제2차) - 재임: 1922.1.27-5.31 (기독교사회당·대독일인민당 연립)
  • 이그나츠 자이펠(Ignaz Seipel, 1876-1932) - 재임: 1922.5.31-1924.11.20 (기독교사회당·대독일인민당 연립)
  • 루돌프 라멕(Rudolf Ramek) - 재임: 1924.11.20-1926.10.20 (기독교사회당·대독일인민당 연립)
  • 이그나츠 자이펠 (제2차) - 재임: 1926.10.20-1929.5.4 (기독교사회당·대독일인민당·농민동맹 연립)
  • 에른스트 슈트레어루비츠(Ernst Streeruwitz, 1874-1952) - 재임: 1929.5.4-9.26 (기독교사회당·농민동맹 연립)
  • 요한 쇼버 (제3차) - 재임: 1929.9.26-1930.9.30 (기독교사회당)
  • 카를 파우고인(Carl Vaugoin, 1873-1949) - 재임: 1930.9-12.4 (기독교사회당)
  • 오토 엔더(Otto Ender, 1875-1960) - 재임: 1930.12.4-1931.6.20 (기독교사회당)
  • 카를 부레슈(Karl Buresch, 1878-1936) - 재임: 1931.6.20-1932.5.20 (기독교사회당·농민동맹 연립)
  •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ß, 1892-1934) - 재임: 1932.5.20-1933.3.4 (기독교사회당·농민동맹·애국단 연립)
  • 엥겔베르트 돌푸스 - 재임: 1933.3.4-1934.7.25 ('''조국전선''')
  • 쿠르트 폰 슈슈니크(Kurt von Schuschnigg, 1897-1977) - 재임: 1934.7.29-1938.3.11 ('''조국전선''')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ß-Inquart) - 재임: 1938.3.11-3.13 ('''나치당''')


요한 쇼버만 관료 출신 무소속이다. 이그나츠 자이펠은 총 5기, 미하엘 마이어는 총 2기, 에른스트 슈트레어비츠, 카를 파우고인, 오토 엔더는 각각 1기씩 총리직을 역임했다. 카를 슐레슈는 총 2기,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총 3기, 쿠르트 슈슈니크는 총 5기, 요한 쇼베르는 총 3기 동안 총리직을 역임했다.

7. 3. 기타 주요 인물

빅토르 아들러(1852-1918)는 레너 내각의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오토 바우어(1881-1938)는 레너 내각의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사회민주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율리우스 도이치(1884-1968)는 레너 내각에서 육군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공화국 방위 동맹"의 사령관을 맡았다. 에른스트 슈타르헨베르크(1899-1956)는 보국단의 지도자로, 돌푸스 내각 및 슈슈니크 내각에서 부총리를 역임했다. 에밀 파이(1886-1938)는 보국단 빈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돌푸스 내각에서 부총리를 지냈다. 발터 프파이머(1881-1968)는 보국단 슈타이어마르크 지부장을 지냈으며, 1931년 9월 폭동을 계획하여 체포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question of Western Hungary / Burgenland 1918–1923: a territorial question in the context of national and international policy https://jyx.jyu.fi/b[...] University of Jyväskylä 2008
[2] 뉴스 Divide on German Austria – Centrists Favor Union, but Strong Influences Oppose It.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1919-01-17
[3] 서적 Building an Unwanted Nation https://books.google[...]
[4] 서적 Modern Austria: Empire and Republic, 1815–1986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5] 웹사이트 1931 https://www.creditwr[...] 2009-03-11
[6] 웹사이트 1934 to 1938: Ständestaat in the Name of 'God, the Almighty' https://www.wien.gv.[...]
[7] 웹인용 저맨 오스트리아와 1차 공화국 http://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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