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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마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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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옵티마테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원로원 중심의 귀족 정치를 지향하던 정치 세력이었다. 로마의 잦은 전쟁과 영토 확장으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포풀라레스와 대립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에 반대하며 세력을 과시했고, 술라의 독재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등장과 암살 이후 정치적 종말을 맞이했다. 현대에는 19세기까지 로마의 대립을 양극 구조로 보던 시각에서, 개인적인 관계와 사회적 위치를 중시하는 시각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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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티마테스
지도
기본 정보
구분고대 로마 공화정의 귀족 파벌
활동 시기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주요 인물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키케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정치 이념
정치 성향보수주의
지지 계층원로원 의원 및 부유층
반대 세력포풀라레스
목표원로원 권한 강화
귀족 특권 유지
포풀라레스 견제
역사적 맥락
등장 배경로마 공화정 말기의 사회적, 정치적 갈등 심화
주요 활동그라쿠스 형제 개혁 반대
술라의 내전 승리
제1차 삼두정치 시기 활약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시도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
몰락 원인내분 심화
포풀라레스와 갈등 격화
카이사르의 등장과 로마 제정 전환
특징
특징귀족 중심 정치
기존 질서 유지
원로원 권한 옹호
포풀라레스와 대립
어원"최고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라틴어 "optimus"에서 유래
같이 보기
관련 항목로마 공화정
포풀라레스
원로원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2. 역사

공화정 말기 로마에서는 잇따른 전쟁과 영토 확장으로 경제 구조가 크게 변화하고 정치에 왜곡이 생겨났다. 불평등 심화에 따른 평민의 곤궁과 몰락, 그리고 그에 따른 군사력 저하가 주요 문제였다. 당시 로마군은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가진 시민으로부터 징병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 구제 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원로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빌레스는 이 개혁에 반발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 지위를 이용하여 법안을 켄투리아 민회트리부스 민회가 아닌 플레브스 민회에서 통과시키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원로원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와 그 일파는 숙청되고 개혁은 실패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에도 평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원로원에 대항하려는 포푸라레스가 잇따라 등장했다. 그중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는 군대 개혁(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 곤궁한 평민을 군에 고용하여 구제 및 군사력 회복)으로 얻은 군사력과 민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원로원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군사력 재건을 위해 평민 구제가 시급했기에 결국 마리우스 등 포푸라레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마리우스 사후, 그의 정적인 술라독재관에 취임하면서 옵티마테스의 정치적 사상이 최대한 적용되었다. 그러나 술라 사후 그가 건설한 체제는 점차 무너졌다. 이후 카이사르의 등장과 함께 포푸라레스는 부활했지만, 옵티마테스도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내전 끝에 옵티마테스를 격파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제2차 삼두 정치에서 옵티마테스는 다수 숙청되어 정치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로마 정치는 카이사르 후계자를 둘러싼 포푸라레스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이행되었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옵티마테스 부활의 싹은 제거되었다.

2. 1. 공화정 로마의 정치 구조와 옵티마테스의 등장

로마 공화정에서는 오랫동안 원로원의 주도 하에 정치를 해 왔다. 옵티마테스는 원로원 주도의 정치 체제 유지를 도모하였던 이들의 총칭이며, 원로원의 명예를 중시하였다. '옵티마테스'는 라틴어의 ‘좋은’ 또는 ‘최상의’를 뜻하는 옵티머스(optimus)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옵티마테스로 불리는 이들은 원로원의 다수파를 차지하는 노빌레스들이 흔했지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소 카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노부스 호모(Novus homo)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옵티마테스는 원로원 주도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사람들을 통칭하며, 그 이름은 라틴어 "최고의"라는 뜻의 최상급 형용사 옵티무스(optimus)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최고의 인물들'''"로 번역되기도 한다. "선량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보니(boni)라는 표현도 있지만, 이 표현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저서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옵티마테스로는 노빌레스(신귀족)가 많았으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소 카토가 꼽힌다.

2. 2. 그라쿠스 형제 개혁과 옵티마테스의 반발

공화정 말기 로마에서는 잇따른 전쟁과 영토 확대로 경제 구조가 변화하고 정치에 문제가 발생했다. 평민이 몰락하고 군사력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 구제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원로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빌레스는 이 개혁에 반발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의 입장에서 법안을 켄투리아 민회트리부스 민회가 아닌 플레브스 민회에서 통과시키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원로원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와 그 일파는 숙청되고 개혁은 실패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에도 평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원로원에 대항하려는 포풀라레스가 계속 나타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대 개혁(모병제 전환, 평민 고용)으로 얻은 군사력과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원로원은 이를 막으려 했으나, 평민 구제가 시급했기에 결국 마리우스 등 포풀라레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마리우스 사후 술라독재관에 취임하면서 옵티마테스의 정치적 사상이 최대한 적용되었다. 술라 시대에 민회는 정치력을 빼앗기고, 원로원 의원은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어났다. 많은 포풀라레스가 숙청되면서 옵티마테스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술라의 독재정치는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을 이상으로 하는 많은 옵티마테스에게도 호감을 얻지 못했고, 술라 사후 그 체제는 점차 무너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등장과 함께 포풀라레스는 부활했지만, 옵티마테스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내전 끝에 옵티마테스를 격파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그라쿠스 형제와 거의 같은 개혁을 실시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제2차 삼두 정치 시기에 옵티마테스는 다수가 숙청되어 정치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2. 3. 포풀라레스와의 대립과 갈등

공화정 말기 로마에서는 잇따른 전쟁과 영토 확대로 평민이 몰락하고 군사력이 저하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 구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원로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빌레스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 이후에도 평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원로원에 대항하는 포풀라레스(평민파)가 계속 등장했다. 그 중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사력과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잡으려 했다. 원로원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군사력 재건을 위해 평민 구제가 시급했기에 결국 마리우스 등 평민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마리우스 사후 술라독재관에 취임하여 옵티마테스(벌족파)의 정치적 사상을 최대한 적용했다. 술라 시대에 민회는 정치력을 잃었고, 원로원 의원 정원은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어났다. 많은 평민파가 숙청되면서 옵티마테스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술라의 독재정치는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을 이상으로 하는 많은 옵티마테스에게도 호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술라 사후 그가 구축한 체제는 점차 무너졌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대두하면서 평민파는 부활을 시도했지만, 옵티마테스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내전 끝에 옵티마테스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여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유사한 개혁을 실행했다. 하지만 이후 황제의 허락을 얻어 원로원 의원 신분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제2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면서 옵티마테스는 다수가 숙청되어 정치적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로마의 정치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둘러싼 포풀라레스 간의 권력 투쟁으로 바뀌었다.

2. 4. 술라의 독재와 옵티마테스의 전성기

가이우스 마리우스 사후, 그의 정적이었던 술라독재관에 취임하면서 옵티마테스의 정치적 사상이 최대한 반영되었다. 술라 시대에 민회는 정치 권력의 대부분을 잃었고, 원로원 의원의 정원은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많은 평민파 인사들이 숙청되면서 옵티마테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술라의 독재 정치는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많은 옵티마테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술라가 사망한 이후 그가 구축했던 체제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정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미 원로원 주도를 목표로 하는 정치 파벌에 의한 체제는 유지할 수 없었고, 이것은 옵티마테스의 정치적 한계를 의미했다.

2. 5. 카이사르의 등장과 옵티마테스의 몰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면서 평민파는 부활을 시도했지만, 옵티마테스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내전 끝에 옵티마테스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여, 이전에 실패했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유사한 개혁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황제의 허락을 얻어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남은 사람도 있었다. 이후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제2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 시기에 옵티마테스는 다수가 숙청되어 정치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로마의 정치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둘러싼 포풀라레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바뀌었다.

3. 주요 인물

원로원 주도 정치 체제 유지를 꾀한 사람들을 총칭하는 옵티마테스는 라틴어 "최고의"를 뜻하는 최상급 형용사 오프티무스(optimus)에서 유래하며, "'''최고의 인물들'''"로 번역되기도 한다. "선량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보니(boni)라는 표현도 쓰였지만, 이 표현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저서에 등장한다.

노빌레스(신귀족)가 원로원 다수파를 차지했으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카토 우티켄시스(소 카토)가 대표적인 옵티마테스로 꼽힌다.

4. 현대적 연구

19세기까지 자크 아미요와 몽테스키외 등은 로마의 대립을 원로원 중심의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의 양극 구조로 파악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프로소포그래피 방법이 확산되면서 마티아스 게르처와 에두아르트 마이어 등은 체제 측도 온건파인 포풀라레스(populares)를 포용해야 했으며, 클리엔테스(clientes), 친척, 거래 등 개인적 관계에 기반한 다원적 정당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관계가 귀족부터 체제 유지를 원하는 보니(boni)까지 확대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현재는 양극 구조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공화정 말기 로마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조사하면, 개인적 관계와 더불어 레스 푸블리카 지지 여부를 나타내는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레스 푸블리카 측은 "fortis(강한)", "bonus(좋은)", "optimus(최상의)" 등으로 표현된 반면, 반대 세력은 "popularis(민중적인)", "seditiosus(반항적인)", "perditus(파괴적인)", "hostis(공적)" 등으로 표현되었다. 키케로가 이러한 표현을 많이 사용했지만, 이는 단순한 법정 수사가 아니라 당시 로마인들이 개인의 정치적 위치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체제 지지 여부와 개인적 관계를 항상 의식했으며, 사회 위기가 고조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카이사르 시대 이후에는 개인적인 관계만이 주로 언급된다.

4. 1. 19세기까지의 관점

19세기까지 자크 아미요와 몽테스키외 등을 시작으로 로마의 대립은 당시 사회 상황으로 추론되는 양극 구조로 생각되어 왔다. 즉, 원로원에 의한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다. 19세기 말부터 프로소포그래피 방법이 확산되면서 마티아스 게르처와 에두아르트 마이어 등에 의해, 체제 측도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온건한 사람들(populus)인 포풀라레스(populares)를 포섭할 필요가 있으며, 개인적인 관계, 즉 클리엔테스(clientes)나 친척 관계, 거래 관계에 의해 다원적인 정당이 형성되었고, 그러한 관계는 귀족으로부터 체제 유지를 바라는 보니(boni)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현재는 양극 구조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 2. 프로소포그래피 방법의 확산과 새로운 견해

자크 아미요와 몽테스키외 등을 시작으로 19세기까지 로마의 대립은 당시 사회 상황으로 추론되는 양극 구조로 생각되어 왔다. 즉, 원로원에 의한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다. 19세기 말부터 프로소포그래피 방법이 확산되면서 마티아스 게르처와 에두아르트 마이어 등에 의해, 체제 측도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온건한 사람들(populus)인 포풀라레스(populares)를 포섭할 필요가 있으며, 개인적인 관계, 즉 클리엔테스(clientes)나 친척 관계, 거래 관계에 의해 다원적인 정당이 형성되었고, 그러한 관계는 귀족으로부터 체제 유지를 바라는 보니(boni)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현재는 양극 구조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공화정 말기에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조사해 보면,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와 함께 레스 푸블리카 측인지 아닌지를 나타내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레스 푸블리카 측에는 "fortis(강한)", "bonus(좋은)", "optimus(최상의)" 등이 사용되었고, 반대하는 자에게는 "popularis(민중적인)", "seditiosus(반항적인)", "perditus(파괴적인)", "hostis(공적)"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키케로가 많이 사용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법정에서의 수사법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당시 로마인들이 그 사람이 어떤 위치의 인물인지 매우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로마인들은 체제 측인지 아닌지, 어떤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지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고, 사회 위기가 고조될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카이사르 시대 이후에는 개인적인 관계에만 언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4. 3. 공화정 말기 표현 연구

19세기까지 자크 아미요와 몽테스키외 등을 시작으로 로마의 대립은 당시 사회 상황으로 추론되는 양극 구조, 즉 원로원에 의한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생각되어 왔다. 19세기 말부터 프로소포그래피 방법이 확산되면서 마티아스 게르처와 에두아르트 마이어 등에 의해, 체제 측도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온건한 사람들(populus)인 포풀라레스(populares)를 포섭할 필요가 있으며, 개인적인 관계(클리엔테스(clientes)나 친척 관계, 거래 관계)에 의해 다원적인 정당이 형성되었고, 그러한 관계는 귀족으로부터 체제 유지를 바라는 보니(boni)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현재는 양극 구조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공화정 말기에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조사해 보면,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와 함께 레스 푸블리카 측인지 아닌지를 나타내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레스 푸블리카 측에는 "fortis(강한)", "bonus(좋은)", "optimus(최상의)" 등이 사용되었고, 반대하는 자에게는 "popularis(민중적인)", "seditiosus(반항적인)", "perditus(파괴적인)", "hostis(공적)"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키케로가 많이 사용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법정에서의 수사법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당시 로마인들이 그 사람이 어떤 위치의 인물인지 매우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로마인들은 체제 측인지 아닌지, 어떤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지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고, 사회 위기가 고조될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카이사르 시대 이후에는 개인적인 관계에만 언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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