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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니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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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운디드니 학살은 1890년 12월 29일, 미국 제7기병대가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에서 라코타족을 상대로 자행한 사건이다. 당시 유령 춤을 추며 백인에 저항하던 라코타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무장 해제 과정의 갈등으로 시작된 총격전으로 인해 다수의 라코타족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문화를 말살하려는 백인들의 횡포 속에서 발생했으며, 300명에 달하는 라코타족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학살 이후, 생존자들은 고통 속에 살았으며, 이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극적인 역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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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니 학살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운디드니 학살 이후 라코타족 시신들의 집단 매장지
운디드니 학살 이후 라코타족 시신들의 집단 매장지
위치운디드니 지류, 사우스다코타주, 미국
기본 정보
분쟁 명칭운디드니 학살
분쟁의 일부영혼춤 전쟁 및 수 전쟁
날짜1890년 12월 29일
결과전투 및 학살 섹션 참고
교전 세력
교전국 2라코타족
지휘관
미국제임스 W. 포사이스
라코타족웅팡 글레스카
병력 규모
미국490명
라코타족120명
사상자
미국사망 31명, 부상 33명
라코타족사망 90명, 부상 4명 (전투원)
라코타족 (민간인)사망 200명, 부상 46명
추가 정보

2. 발단

19세기 말, 인디언들은 백인에 의해 생활 환경을 파괴당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파이우트 족의 워보카를 교주로 하는 고스트 댄스가 서부 인디언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고스트 댄스는 유령 춤을 춤으로써, 인디언들의 자유 세상과 함께 들소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종말론적 신앙이었다. 수족에게 마법사 키킹 베어는 "이것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스트 셔츠'를 입으면, 백인의 총탄을 맞아도 관통하지 않고 괜찮아진다"는 교리가 추가 되었다.

백인 측은 이 가르침으로 인디언들이 반항적이 된다며 철저하게 탄압했다. 수족에게 무능하고 겁쟁이라고 멸시받던 파인리지 보호구역 감독관 대니얼 F. 로이어는 인디언을 강하게 경계하며 고스트 댄스의 유행을 수족 반란의 전조로 간주하고, 1890년 11월 중순에 "눈 속에서 인디언들이 춤을 추며 난폭해지고 있으니, 지금 당장 우리를 보호해 달라"며 미국 정부에 전보를 쳤다. 이 보고를 받아 미군이 수천 명 규모로 수족 보호구역에 잇따라 도착했다. 백인에 의한 학살을 두려워한 많은 수족들이 서쪽의 바위 산지 배드랜즈 국립공원(마코시카)로 도망쳤다.

유령춤 묘사


더욱이 스탠딩록 보호구역 감독관 제임스 맥로린은 수족의 정신적 지주인 시팅 불(타탄카 이요타케)에게 "고스트 댄스를 선동하고 있다"는 누명을 씌워 1890년 12월 14일, 수족 인디언 경찰을 이용해 그를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서부가 술렁이는 가운데, 시팅 불을 따르던 수족들(대부분 어린이, 노인, 비무장 남녀였다)은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배드랜즈를 내려와,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샤이엔 강(굿 강) 근처에 있던 미네코니주 족 빅풋(시하 탕카) 추장의 밴드로 도망쳤다. 빅풋 추장이 이끄는 밴드는 약 400명 규모였는데, 전사는 10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노인, 여자, 어린아이였다. 빅풋 추장은 폐렴을 앓고 있어 썰매로 옮겨졌다.

미네코니주족은 오글라라 수족의 지파 중 하나로, 빅풋 추장이 속한 밴드는 고스트 댄스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스트 셔츠를 가진 이들 곁이라면 기적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빅풋 밴드는 연금(식량) 보급을 받기 위해 미주리 강 근처의 베넷 요새 보호구역 관리 사무소로 향하고 있었다.

인디언 사회에서 추장은 분쟁의 표면에 서서 평화 협상을 하는 "조정자"이며, "수장"이나 "지도자"가 아니다. 인디언 사회는 합의제이며, 부족민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추장(치프)"을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고스트 댄스"가 수족 사이에서 유행했을 때, 시팅 불을 이 종교의 선동자라고 단정하고, 결국에는 암살했다.

빅풋은 평화 협상가로서 인망이 두터웠던 노추장으로, 백인과는 우호적이었고, "현명하고 분별 있는 조정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백인들은 시종일관 이 일행은 빅풋이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당시 이미 폐렴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BIA(인디언 관리국)의 보호구역 감독관은 고스트 댄스를 신봉하는 빅풋 밴드의 움직임을 경계하여,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제8기병연대의 E. V. 섬너 대령을 파견했다.

빅풋 밴드는 이동 중에 포큐파인 절벽 근처에서 미군의 습격을 받았고, 그들은 즉시 항복했다. 섬너의 심문에 대해 빅풋은 온화하게, 교전 의사가 없다는 것, 시팅 불의 캠프에서 도망친 부족원을 숨긴 것은 "38명의 남녀가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프고, 눈 속에서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조정자"인 빅풋은 부족민의 행복을 도모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대답했다.

수족 학살을 지휘한 제임스 포르시스 대령


이에 대해 섬너는 서쪽의 샤이엔족의 캠프까지 동행할 것을 명령했고, 빅풋 밴드는 얌전히 따랐다. 섬너 등 백인들은 빅풋이 이 밴드의 "지도자"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빅풋 개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의 "겨울 마을"에 도착했을 때, 빅풋은 "이제 집에 갈 생각이고, 아무것도 쫓겨날 이유는 없고, 더 이상 앞으로 갈 생각은 없다"라고 섬너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날 밤 동쪽에서 더 많은 기병대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두려워하며 당황하여, 배드랜즈 국립공원(마코시카)로 도망치는 자들이 생겼다.

수족 인디언 사회는 고도의 개인주의 사회이며, 지파 집단에서 작은 밴드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에게 통솔되는 사회가 아니다. 부족민이 미군을 두려워하여 도망쳤을 때, 추장(조정자)인 빅풋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없었다.

12월 28일, 빅풋 밴드는 "도망자를 쫓아 체포하라"는 마일즈 장군의 명령에 따라, S. M. 화이트사이드 소령의 기병대에 의해 추격당해 체포되었다. 빅풋은 더 이상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백기를 들고 항복을 알렸다. 그들은 섬너의 명령을 받고 운디드니 강가까지 연행되었다. 여기서 야영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들은 티피를 세웠다. 그들의 캠프는 리틀 빅혼 전투에서 전멸한 제7기병대의 잔당을 포함한 제임스 포르시스 대령 지휘하에 총 470명, 기병 4개 중대와 포병 1개 중대가 포위했다. 포르사이드는 폐렴에 걸린 빅풋을 위해 난로를 준비시켰다. 밤이 되자 병사들은 "따뜻하게 하기 위해"라며 위스키 통을 열고, 떠들썩하게 놀기 시작했다. 이 현장에서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샤이엔 크릭 근처에는 같은 수족의 야영지가 있었고, 마을에서 속속 진군해 오는 미군을 보고, 그들은 불안감을 더해갔다. 이 야영지 안에는 블랙 엘크도 있었다.

3. 학살의 전개

1890년 12월 28일, 미니코주 라코타 부족의 빅풋 추장과 그의 부족민 350명은 새뮤얼 M. 화이트사이드 소령 휘하의 제7기병대와 마주쳤다. 라코타 혼혈인 정찰병이자 통역가인 존 샹로는 기병대에게 라코타 족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지 말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폭력 사태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대는 원주민들을 서쪽으로 약 약 8.05km 떨어진 운디드니 크릭까지 호송했고, 그곳에서 야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저녁 제임스 W. 포사이스 대령과 나머지 제7 기병대가 도착하여 운디드니의 기병대 수는 500명이 되었다.[31] 반면, 라코타족은 350명으로 남성 120명, 여성과 어린이 230명이었다.[13] 기병대는 스포티드 엘크의 야영지를 포위하고 4문의 속사 M1875 산포를 설치했다.[32]

병사들은 운디드니에서 사용된 4문의 핫치키스 설계 M1875 산악포 중 3문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2월 29일 새벽, 포사이스는 무기 반납을 명령하고 "군사 작전 구역"에 있던 라코타족을 대기 중인 열차로 즉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야영지를 수색한 결과 소총 38정이 압수되었고, 병사들이 라코타족을 수색하면서 더 많은 소총이 압수되었다. 옐로우 버드라는 이름의 무당은 수색에 흥분한 젊은이들을 격렬하게 비난했고, 긴장은 병사들에게까지 번졌다.

학살의 방아쇠를 당긴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옐로우 버드는 고스트 댄스를 추기 시작하여 라코타족에게 그들의 "유령 셔츠"가 "방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긴장이 고조되자 블랙 코요테는 소총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귀가 먹었으며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다른 라코타족은 "블랙 코요테는 귀가 먹었다"고 말했고, 병사가 계속하자 "멈춰라. 그는 당신의 명령을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순간, 두 명의 병사가 블랙 코요테를 뒤에서 붙잡았고, 싸움 과정에서 그의 소총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옐로우 버드는 공중에 먼지를 뿌렸고, 약 5명의 무기를 숨긴 젊은 라코타족들이 담요를 던져 버리고 제7기병대의 K 중대에 소총을 발사했다. 이 초기 교환 이후, 사격은 무차별적으로 변했다.[33]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블랙 코요테의 총은 병사들이 뒤에서 붙잡았을 때 발사되었다.[34] 와수마자(빅 풋의 전사였고 나중에 듀이 비어드로 개명)는 블랙 코요테가 들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이 그를 내버려두었다면 그는 총을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붙잡아 동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는 그때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총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도는 그 총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가와 그가 내려놓으려던 총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이 그를 돌린 직후 총소리가 났고 꽤 컸습니다. 누구가 총에 맞았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 후에 충돌이 있었습니다."[35] 제7기병대의 테오도르 라그나르도 블랙 코요테가 귀가 먹었다고 말했다.[36]

넬슨 A. 마일스 사령관에 따르면 "한 손에 [소총을] 든 귀가 먼 전사와 두 명의 병사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소총이 발사되었고, 전사들뿐만 아니라 아픈 스포티드 엘크 추장과 들판으로 도망쳐 흩어지려던 많은 수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사냥당해 살해되었다."[38]

처음에는 모든 사격이 근거리에서 이루어졌고, 라코타족 남성의 절반이 총을 쏠 기회도 없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일부 라코타족은 압수된 무기 더미에서 소총을 잡아 병사들에게 발포했다. 엄폐물이 없고, 라코타족 중 많은 사람이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은 기껏해야 몇 분 동안 지속되었다. 라코타족 전사와 병사들이 근거리에서 총을 쏘는 동안, 다른 병사들은 여성과 아이들로 가득 찬 티피 야영지에 핫치키스 총을 사용했다. 많은 병사들이 그들 자신의 핫치키스 총의 오발로 희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라코타족 여성과 아이들은 야영지를 탈출하여 교차 사격으로부터 근처 계곡에서 피난처를 찾았다.[40] 장교들은 부하들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잃었다. 일부 병사들은 흩어져 부상자들을 마무리했다. 다른 병사들은 말에 올라타 원주민(남성, 여성, 어린이)을 쫓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들판을 가로질러 몇 마일을 쫓아갔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최소 150명의 라코타족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했다. 다른 추정치에 따르면 원래 350명 중 거의 3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눈보라로 인해 학살 이후 즉시 수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병사들은 51명의 생존자(남성 4명과 여성 및 어린이 47명)를 마차에 태워 파인 리지 보호 구역으로 데려갔다.[41] 군인 사상자는 25명이 사망했다.[41] 블랙 코요테는 운디드니에서 사망했다.[42]

4. 학살 이후

운디드니 학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학살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명예 훈장이 수여되기도 했다.[16][17][63] 학살 이후,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으며, 학살의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학살로 인해 인디언 측 사망자는 300명 가까이 이르렀고, 폭설 속에서 시체는 3일 동안 방치되었다. 1891년 1월 1일, 매장대가 파견되어 총좌가 설치된 언덕 위에 단 하나의 구덩이를 파고 유해를 던져 넣었다.[98]

빅풋 밴드의 사망자 수에 관해서는 학살한 측과 학살당한 측의 증언이 엇갈린다. 백인 측은 150명에서 200명 정도로 보고, 수족 측은 약 300명 이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살해한 수족의 수를 기록하지 않았고, 충분한 검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블랙 엘크는 훗날 운디드니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4. 1. 드렉셀 선교 전투

드렉셀 선교 전투는 1890년 12월 30일, 운디드니 학살 다음 날,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라코타 전사들과 미국 육군 사이에 벌어진 무력 대치였다. 이 전투는 운디드니 학살과 관련된 적대적인 상황에서 도망쳐 온 라코타족이 캠프를 세운 파인 리지에서 북쪽으로 약 약 24.14km 떨어진 화이트 클레이 크릭에서 발생했다.[33]

드렉셀 선교 전투가 벌어진 '피 묻은 주머니'


운디드니 학살에 관여했던 제7 기병 연대 K 중대는 라코타족이 각자의 보호구역에 배정된 지역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일부 "적대 세력"은 로즈버드 인디언 보호구역 출신의 브륄레 라코타족이었다. K 중대는 라코타 연합군에 의해 계곡에 갇혔고, "버팔로 솔저"라는 별명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대인 제9 기병대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다.[60]

라코타 전사들 중에는 펜실베이니아의 칼라일 인디언 학교에서 5년 만에 돌아온 로즈버드 출신의 젊은 브륄레족 플렌티 호시스가 있었다. 이 전투 일주일 후, 플렌티 호시스는 샤이엔 정찰대(제8 기병대 L 중대)의 사령관인 에드워드 W. 케이시 육군 중위를 총으로 쏴 죽였다.[61] 플렌티 호시스의 재판에서 제시된 증언과 그의 후속 무죄 방면은 운디드니에서 발생한 사망에 대한 미국 육군의 법적 책임도 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62]

4. 2. 명예 훈장 취소 논란

운디드니 학살에 가담한 미군 병사들에게 수여된 명예 훈장은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1890년 작전에서 미 육군은 31개의 명예 훈장을 수여했으며, 이 중 19개는 운디드니에서의 공로에 대한 것이었다.[16][17][63]

네브래스카 주 역사 협회는 1916년 이전의 명예 훈장이 더 관대하게 수여되었다고 해석했지만, "훈장의 수는 다른 전투에서 수여된 훈장과 비교했을 때 불균형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베어 포우 산 전투의 5일간의 포위전에 수여된 3개의 훈장과 운디드니 학살에 수여된 20개의 훈장을 비교했다.[64] 역사학자 윌 G. 로빈슨은 4년간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우스다코타 주민 64,000명 중 단 3개의 명예 훈장만이 수여되었다고 언급했다.[65]

아메리카 원주민 활동가들은 이 훈장을 "불명예 훈장"이라고 칭하며 철회를 촉구했다. 라코타 부족 출신 윌리엄 썬더 호크는 "명예 훈장은 영웅적인 행동을 한 군인에게 보상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운디드니에서는 영웅심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잔혹함을 보여주었다"라고 비판했다. 2001년, 미국 원주민 민족 회의는 명예 훈장 수여를 비난하는 두 건의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미국 정부에 취소를 요구했다.[67] 운디드니에서 군인들에게 수여된 훈장의 여러 인용문에는 그들이 도망치거나 숨으려는 라코타 족을 추격했다고 명시되어 있다.[68]

2021년 2월, 사우스다코타 주 상원은 만장일치로 미국 의회에 7기병대의 학살 참여에 대해 수여된 20개의 명예 훈장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훈장을 취소하려는 이전의 시도는 실패했다.[70] 2021년 3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은 운디드니 학살을 저지른 군인들에게 수여된 명예 훈장을 폐지하는 법안을 재발의했다.[71] 그러나 이 조항은 2022 회계 연도 국방 수권법에서 삭제되었는데, 이는 훈장 수여가 대통령의 특권이므로 의회가 취소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였다.[72][73]

2024년 7월, 국방부 장관은 운디드니 명예 훈장을 취소하는 것을 고려하기 위한 국방부/내무부 공동 검토를 발표했다.[75]

명예 훈장 인용문 (운디드니)[77]
윌리엄 오스틴 상사운디드니의 계곡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사격 지시
모셰임 피스터 사병뛰어난 용맹함으로 노출된 위치로 진격하여 이를 사수
매튜 해밀턴 사병12월 29일 사우스다코타 운디드니 크릭에서 적대적인 수족 인디언과의 전투, 12월 30일 사우스다코타 화이트 클레이 크릭의 가톨릭 선교 근처에서의 냉정함과 용맹함
조슈아 하르초그 사병부상당한 지휘관을 구출하여 적의 총기 사정거리 밖으로 옮김
마빈 힐록 사병사우스다코타 화이트 클레이 크릭의 가톨릭 선교 근처(전쟁성 목록의 오류로 운디드니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음)에서 적대적인 수족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함을 보였으며,[78][79] 고통스러운 부상에도 불구하고 계속 복무
베른하르트 제터 상사운디드니에서 "B 중대의 부상자를 죽이려던 인디언을 사살"한 뛰어난 용맹함
조지 로이드 상사운디드니에서 폐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 용감함
앨버트 맥밀런 상사계곡에 숨어 있는 인디언과 교전하는 동안 교전선에 있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사격을 지시하며, 사기를 북돋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운디드니에서 적을 몰아냄
토마스 설리번 사병운디드니의 계곡에 숨어 있는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눈에 띄는 용맹함
제이콥 트라우트만 상사근거리에서 적대적인 인디언을 사살했으며, 퇴역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디드니 작전이 끝날 때까지 남았음
제임스 워드 상사사우스다코타 운디드니 크릭에서 적대적인 수족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함을 보였으며,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싸웠음
허먼 지그너 사병12월 29일 사우스다코타 운디드니 크릭의 계곡에 숨어 있는 적대적인 수족 인디언과의 공격, 12월 30일 사우스다코타 화이트 클레이 크릭의 가톨릭 선교 근처에서 언덕 꼭대기를 방어하는 눈에 띄는 용맹함
존 클랜시 음악가두 번이나 자발적으로 적의 공격을 받으며 부상당한 동료들을 구출
어네스트 갈링턴 중위뛰어난 용감함
존 초닝 그레샴 중위자발적으로 계곡으로 부대를 이끌어 그 안에 숨어 있는 수족 인디언을 몰아냈다. 그는 이 작전 중에 부상을 입었음
해리 호손 소위적대적인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행동
조지 호브데이 사병전투에서 눈에 띄고 용감한 행동
프레데릭 토이 상사적대적인 수족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눈에 띄는 용맹함과 침착함
폴 와이너트 하사심각한 부상을 입은 지휘관을 대신하여 용감하게 포를 사용했으며, 발사 후 더 나은 위치로 진격
아담 네더 사병사우스다코타 운디드니 크릭에서 적대적인 수족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였으며, 부상을 입었음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운디드니 학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국 정부의 인디언 정책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19세기 말, 인디언들은 백인들에 의해 생활 환경을 파괴당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파이우트 족의 워보카를 중심으로 고스트 댄스가 유행했는데, 이는 인디언들의 자유와 버팔로의 귀환을 약속하는 종말론적 신앙이었다. 수족 주술사 키킹 베어는 "고스트 셔츠를 입으면 총알을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2] 백인들은 이를 반란의 징조로 보고 탄압했다.

넬슨 A. 마일스 장군은 1890년 12월 19일 존 스코필드 장군에게 보낸 전보에서 인디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조약 의무 불이행과 식량 부족에 있다고 지적했다.[30]

마일스 장군의 전보
넬슨 A. 마일스



미니코주 족, 라코타 수족 추장 스포티드 엘크가 1890년 운디드니 학살 이후 죽어있다.


역사적으로 운디드니 학살은 인디언 전쟁의 종말로 여겨지지만, 이후에도 드렉셀 선교 전투와 같은 충돌이 있었다.[59]

1891년, 운디드니 학살에서 사망한 사람이 입었다고 여겨지는 유령 셔츠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켈빙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에 판매되었다가 1998년 운디드니 생존자 협회에 반환되었다.[80]

운디드니 언덕, 전투 중 핫치키스포가 배치되었던 곳이자, 그 후 아메리카 원주민 희생자들의 집단 매장지


1903년, 희생자들의 후손들은 묘지에 기념비를 세웠다.[5] 운디드니는 1965년 미국 국립 역사 유적지로, 1966년 미국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1986년부터 "빅풋 기념 라이더스"라는 단체가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52]

오늘날 운디드니 학살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권리 투쟁과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6. 기념 및 추모 사업

운디드니 학살 현장은 1965년에 미국 국립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고, 1966년에는 미국 국립 사적지로 등재되었다.[81] 1903년, 학살 희생자들의 후손들은 묘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운디드니에서 사망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81]

> 이 기념비는 생존한 친척들과 기타 오갈라 및 샤이엔 강 수 족 인디언들이 1890년 12월 29일 대추장 빅풋 학살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미국 군대의 지휘관은 포사이트 대령이었습니다. 빅풋은 수 족 인디언의 위대한 추장이었습니다. 그는 자주 '나는 마지막 날까지 평화롭게 서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백인과 적인을 위해 많은 선하고 용감한 행위를 했습니다. 잘못을 알지 못하는 많은 무고한 여성과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1986년부터 "빅풋 기념 라이더스"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죽은 자들을 기리는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52] 이 행사는 매년 더 많은 참가자를 끌어모으고 있으며, 라이더와 그들의 말들은 가족들이 운디드니로 향했던 길을 되짚어가며 추위, 음식과 물 부족 속에서 생활한다. 그들은 세계 평화를 염원하고 희생자들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흰색 깃발을 들고 다니며, 그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한다.[52]

제7 기병 연대가 사우스다코타 주 파인 리지에서 포트 라일리로 복귀했을 때, 연대 군인들은 운디드니에서 사망한 연대원들을 위한 기념비 건립 기금을 모금했다. 약 1950USD가 모금되었고, 1893년 7월 25일, 5,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82]

6. 1. 고스트 셔츠의 반환

1999년 8월 1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켈빙그로브 미술관·박물관에서 수족에게 '고스트 댄스 상의' 반환이 이루어졌다. 켈빙그로브 미술관·박물관 관장 패트리샤 알렌에 따르면, 이 '고스트 댄스 상의'는 운디드니 학살에서 사망한 전사에게서 벗겨진 것으로, 1891년에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글래스고 순회 공연 때, 쇼의 통역이었던 조지 크레이거라는 인물에 의해 모카신과 다른 물품과 함께 '인디언의 진귀한 물품'으로 박물관에 반입되었다.[80]

1992년 9월, 영국 투어 중에 이 박물관을 방문하여 이것을 발견한 조지아주 우드스톡의 인디언 변호사 존 얼에 의해 이 유물의 수족에 대한 반환 요구가 제기되었다. 당시 박물관에서는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 기념 전시'로서 맥밀란 갤러리에서 '고스트 댄스 상의'가 전시되고 있었다. 얼은 귀국 후 수족의 유족회에 이를 보고하고, 아트 갤러리와 박물관을 관할하는 글래스고 지구 의회의 관리 부문까지 찾아가 줄리안 스포울딩 관장에게 편지를 쓰고 정식으로 박물관 측에 유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박물관은 이를 거부했다.

1995년, 수족의 '운디드니 유족회(Wounded Knee Survivors' Association)'는 마르첼라 라 뷰를 특사로 하여 이 유물의 반환을 박물관 측에 강력히 요청했다. '고스트 댄스 상의'는 현재도 수족 사회에서 신성시되고 있다. 그러나 글래스고 박물관은 이것이 '미국 본토 이외에서는 여기에밖에 없는 희귀품'이며, '영국 시민에게 고스트 댄스와 운디드니 학살의 역사를 교육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에 보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7년 봄에는 이 '고스트 댄스 상의' 외에 학살 유물은 글래스고에서 초등학생 교육을 위한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1998년, 존 얼과 '운디드니 유족회', 박물관, 글래스고 시 참사회의 6년에 걸친 교섭 결과, 시 참사회는 마침내 만장일치로 유물의 반환을 결정했다. 107년의 세월을 거쳐, 마침내 수족에게 반환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정에 대해 '운디드니 유족회'에서 반환 운동을 계속했던 수족 유족 마르첼라 라 뷰는 감격하여 "우리는 글래스고 시와 그 주변 지역의 우정과 압도적인 지원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사의를 표했다.

1999년 7월 말, '고스트 댄스 상의'를 반환하기 위해 글래스고 평의원과 미술관 직원들을 포함한 대표단이 사우스다코타를 방문했다. 그들은 이 방문에서 "미국 외에서 이러한 유물의 반환은 미국 정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미국 본토의 법률의 한계를 부각시켰다"고 말했다. 수족 국가와 글래스고 사이에서, 마침내 대학살의 유물은 정식으로 반환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 일요일, 사우스다코타의 샤이엔 강 보호 구역에 있는 이글뷰트에서 글래스고 대표단이 참석한 반환 의식이 거행되었다. 수족은 이 역사적인 반환을 축하하며, 대량 학살의 피해자와 생존자의 자손 대다수가 참가하여 4일간의 의식을 거행했다. 글래스고 대표단은 수족 유족단과 함께 파인리지 보호 구역의 운디드니까지 이동했다. 수족에게 옛 영혼들의 수호자인 '와와얀카(얼룩수리)'가 상공을 날아다니고, 수족은 이를 '속죄의 징표와 영혼으로부터의 환영 메시지'라고 말했다.

다음날 8월 2일, 동주 피에르의 주 의사당에서 의식이 체결되었고, '고스트 댄스 상의'는 수족이 독자적인 미술관을 갖게 될 때까지 사우스다코타 주 역사 협회 박물관에서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2009년 8월 1일, '고스트 댄스 상의' 반환 10주년 기념식이 열렸고, 단 브로츠에 의해 상의가 운송되었다. 반환 10주년 기념식에서는 명예의 촛불이 켜지고, 운디드니 학살로 살해된 수족 피해자들의 이름이 불렸다.

7. 대중문화 속 운디드니

운디드니 학살은 문학,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대중문화에서 다뤄지며 널리 알려졌다. 특히 디 브라운의 저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운디드니 학살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스티븐 빈센트 베네트는 1931년 시 "미국의 이름들"에서 "내 심장을 운디드니에 묻어다오"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89] 이 구절은 디 브라운의 책 제목으로 사용되면서 대중적으로 운디드니 학살 사건과 연관되게 되었다.

이후 "내 심장을 운디드니에 묻어다오"라는 구절은 여러 음악에서 이 전투를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버피 세인트-마리는 1992년 앨범 ''Coincidence and Likely Stories''에 "내 심장을 운디드니에 묻어다오"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나이트위시, 마노워, 조니 캐시, 고든 라이트풋, 인디고 걸스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운디드니 학살을 소재로 한 노래를 발표했다.[90][91] 1973년, 미국 록 밴드 레드본은 "We Were All Wounded at Wounded Knee"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미국에서는 금지되기도 했다.[93]

영화에서도 운디드니 학살은 여러 번 다뤄졌다. 1992년작 《썬더하트》, 1994년작 《가을의 전설》, 2007년 HBO에서 제작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등이 대표적이다.[95] 2013년 비디오 게임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에서도 주요 등장인물들이 운디드니 참전 용사로 설정되어 있다.[96][97]

7. 1. 학살인가 전투인가

이 사건은 처음에는 "운디드니 전투"로 불렸으나,[88]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단체들은 이에 반대하며 "운디드니 학살"이라고 부른다. 분쟁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운디드니 전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 육군은 현재 이를 "운디드니"라고 부른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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