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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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외는 후한 말기의 관료로, 자는 차양이며 사도와 태부를 역임하고 도향후에 봉해졌다. 하진과 함께 당고의 금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중앙 관직으로 복귀시키는 데 힘썼다. 동탁이 원소의 숙부라는 이유로 원외와 그 삼족을 멸했다. 마융의 딸 마륜과 혼인하였으며, 세 아들을 두었다.
후한의 관료. 젊을 때부터 남양태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영제 즉위 초기에 구경(九卿)에 이르렀으며, 형 원봉보다 먼저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르렀다. 사도에 두 번 취임하였으며, 후에 상공(上公)인 태부(太傅)가 되어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원외는 원봉과 함께 조카 원소를 기대하였는데, 그 결과 원소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1]
원외는 젊은 시절부터 남양태수 등의 관직을 거쳐 영제 초기에 구경(九卿)에 올랐으며, 형 원봉보다 먼저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다. 사도에 두 번 임명되었고, 이후 상공(上公)인 태부(太傅)가 되어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원외는 원봉과 함께 조카 원소를 기대하였고, 그 결과 원소는 성인이 되기 전에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원외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젊어서부터 남양 태수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영제 즉위 초에는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고, 형 원봉보다 먼저 삼공(三公)의 지위, 즉 사도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 이후 상공(上公)인 태부(太傅)가 되면서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원외는 원봉과 함께 조카 원소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그 결과 원소는 성인이 되기 전에 낭중(郞中)에 임명되기도 했다.
[1]
서적
후한서 제9권
https://zh.wikisourc[...]
2. 생애
원씨는 환관들과 가까웠는데, 《영웅기》에 따르면 젊은 원소가 당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벼슬을 사양하여 환관들의 미움을 받자, 가문을 멸망시킬 작정이냐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원소가 마침내 벼슬에 응했다. 하지만 《후한서》에서는 원소가 원외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고 하여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1]
사도가 된 후, 원외는 대장군 하진과 함께 당고의 금에 연루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중앙으로 복귀시켰다. 한때 실각하였으나, 소제가 즉위한 후 후장군(後將軍)에 이어 태부에 임명되었다.[1]
곧바로 소제의 폐위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동탁과 원소는 대립하여 원소는 떠났으나, 원외는 낙양에 남아있었다. 이듬해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맹주 원소의 숙부라는 점으로 인하여 동탁은 원외를 죽였으며 삼족을 멸하였다.(190년 3월 11일)[1]
원외에게는 문하생과 그를 섬긴 관리가 많았는데, 이들이 원외의 시신을 빼앗으려 하자 동탁은 시신을 숨겼다. 훗날 동탁이 주살되자, 원외의 문하생과 옛 관리들은 동탁의 시신을 훼손한 후 땅에 묻었다.[1]
원외에게는 원만래(袁滿來)[2] · 원의달(袁懿達)[3] · 원인달(袁仁達)[3]이라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원만래는 영제 말기에 1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사료에 따라 동탁이 원외의 '''삼자'''(三子)를 멸하였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삼족'''(三族)을 잘못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1]
3. 평가
원씨 가문은 환관들과 가까웠다.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젊은 원소가 당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벼슬을 사양하여 환관들의 미움을 받자, 원외는 가문을 멸망시킬 작정이냐며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원소가 마침내 벼슬에 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원소가 원외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고 하여 어느 기록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사도가 된 후, 원외는 대장군 하진과 함께 당고의 금에 연루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중앙으로 복귀시켰다. 한때 실각하였으나, 소제 즉위 후 후장군(後將軍)에 이어 태부에 임명되었다.
동탁과 원소가 대립하여 원소가 떠났으나, 원외는 낙양에 남아있었다. 이듬해 반동탁연합이 결성되자, 맹주 원소의 숙부라는 이유로 동탁은 원외를 죽이고 삼족을 멸하였다.(190년 3월 11일)[1]
원외에게는 문하생과 그를 섬긴 관리가 많았는데, 이들이 원외의 시신을 빼앗으려 하자 동탁은 시신을 숨겼다. 훗날 동탁이 주살되자, 원외의 문하생과 옛 관리들은 동탁의 시신을 훼손한 후 땅에 묻었다.
원외에게는 원만래(袁滿來)[2] · 원의달(袁懿達)[3] · 원인달(袁仁達)[3]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원만래는 영제 말기에 1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사료에 따라 동탁이 원외의 '''삼자'''(三子)를 멸하였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삼족'''(三族)을 잘못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4. 가계
원외는 여남 원씨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남양 태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여남 원씨는 혼인 외교로 유명하며, 원외의 아내 마륜은 마융의 딸이다. 마륜은 재주가 뛰어나고 변론에 능했으며, 결혼 직후 원외를 당황하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이 내용은 『후한서』 열녀전에 기록되어 있다.[1]
5. 기타
원씨 가문은 환관들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젊은 원소가 당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벼슬을 사양하여 환관들의 미움을 사자, 원외는 가문을 멸망시킬 셈이냐며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원소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원소가 원외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어느 쪽이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도 재임 시절, 원외는 대장군 하진과 함께 당고의 금으로 인해 억압받던 사람들을 중앙 정계로 복귀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때 실각하기도 했으나, 소제 즉위 후 후장군(後將軍)을 거쳐 태부에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제의 폐위 문제가 불거졌고, 동탁과 원소는 이 문제로 대립했다. 원소는 낙양을 떠났지만, 원외는 낙양에 남았다. 이듬해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동탁은 연합군의 맹주인 원소의 숙부라는 이유로 원외와 그의 삼족을 멸하였다(190년 3월 11일).[1]
원외를 따르던 문하생과 관리들은 그의 시신을 되찾으려 했으나, 동탁은 이를 숨겼다. 훗날 동탁이 주살된 후, 이들은 동탁의 시신을 훼손하고 땅에 묻었다.
원외에게는 원만래(袁滿來)[2], 원의달(袁懿達)[3], 원인달(袁仁達)[3]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원만래는 영제 말기에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료에는 동탁이 원외의 '삼자'(三子)를 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삼족'(三族)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참조
[2]
문서
원만래비명(袁滿來碑銘)
[3]
문서
사도원공부인마씨비명(司徒袁公夫人馬氏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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