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내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월터 내시는 1882년 영국에서 태어나 뉴질랜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9년 헛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38년 이상 재임했으며, 제1차 노동당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뉴질랜드 총리를 지냈으며, 외무장관, 마오리 장관, 통계 장관을 겸임했다. 그는 1960년 총선 패배 이후 야당 대표를 맡았으며, 1968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뉴질랜드의 외무장관 -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뉴질랜드 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총리직에 올라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방송 국영화 등 정책을 추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고 뉴질랜드 복지 국가 설계자로 평가받았다. - 뉴질랜드의 외무장관 - 노먼 커크
노먼 커크는 1923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뉴질랜드 총리를 역임하며 복지 국가 증진과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다 1974년 사망한 정치인이다. - 잉글랜드에서 뉴질랜드로 이민간 사람 - 베아트리스 틴슬리
베아트리스 틴슬리는 은하 진화와 우주론 연구에 기여한 뉴질랜드 출신 천문학자로, 여성 과학자로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일 대학교 최초 여성 천문학 교수가 되었으며, 가속 팽창 우주 연구 등의 업적과 함께 여성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 잉글랜드에서 뉴질랜드로 이민간 사람 - 케이트 셰퍼드
케이트 셰퍼드는 뉴질랜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여성 기독교 금주 연합 활동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여 대규모 여성 참정권 청원 운동을 주도, 1893년 뉴질랜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 통과에 기여하며 뉴질랜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뉴질랜드의 총리 - 저신다 아던
저신다 아던은 뉴질랜드의 제39대 총리로, 노동당 당수로서 2017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취임하여 아동 빈곤 감소, 기후변화 대응, 코로나19 팬데믹 대처 등에 주력하고 다자주의 외교를 추진했으며 2023년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 뉴질랜드의 총리 -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뉴질랜드 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총리직에 올라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방송 국영화 등 정책을 추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고 뉴질랜드 복지 국가 설계자로 평가받았다.
월터 내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월터 내시 |
존칭 접두사 | 각하 |
출생일 | 1882년 2월 12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우스터셔, 키더민스터 |
사망일 | 1968년 6월 4일 |
사망지 | 뉴질랜드, 로어헛 |
국적 | 뉴질랜드 |
정당 | 뉴질랜드 노동당 |
배우자 | 로티 메이 이튼 (1906년 6월 16일 결혼, 1961년 12월 12일 사망) |
자녀 | 4명 |
친척 | 스튜어트 내시 (증손자) |
![]() | |
수상 직책 | |
직위 | 제27대 뉴질랜드의 총리 |
국왕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찰스 리틀턴 |
임기 시작 | 1957년 12월 12일 |
임기 종료 | 1960년 12월 12일 |
부총리 | 제리 스키너 |
이전 수상 | 키스 홀리오크 |
다음 수상 | 키스 홀리오크 |
외무부 장관 직책 | |
직위 | 제14대 뉴질랜드 외무부 장관 |
총리 | 본인 |
이전 외무부 장관 | 톰 맥도널드 |
다음 외무부 장관 | 키스 홀리오크 |
임기 시작 | 1957년 12월 12일 |
임기 종료 | 1960년 12월 12일 |
노동당 당수 직책 | |
직위 | 제5대 뉴질랜드 노동당 당수 |
임기 시작 | 1951년 1월 17일 |
임기 종료 | 1963년 3월 31일 |
부당수 | 제리 스키너 프레드 해켓 |
이전 당수 | 피터 프레이저 |
다음 당수 | 아놀드 노드메이어 |
재무부 장관 직책 | |
직위 | 제27대 뉴질랜드 재무부 장관 |
총리 | 마이클 조셉 새비지 피터 프레이저 |
이전 재무부 장관 | 고든 코츠 |
다음 재무부 장관 | 시드니 홀랜드 |
임기 시작 | 1935년 12월 6일 |
임기 종료 | 1949년 12월 13일 |
세관부 장관 직책 | |
직위 | 제35대 뉴질랜드 세관부 장관 |
총리 | 마이클 조셉 새비지 피터 프레이저 |
이전 세관부 장관 | 고든 코츠 |
다음 세관부 장관 | 찰스 보든 |
임기 시작 | 1935년 12월 6일 |
임기 종료 | 1949년 12월 13일 |
노동당 총재 직책 | |
직위 | 제14대 뉴질랜드 노동당 총재 |
임기 시작 | 1935년 4월 24일 |
임기 종료 | 1936년 4월 14일 |
부총재 | 제임스 로버츠 |
이전 총재 | 팀 암스트롱 |
다음 총재 | 클라이드 카 |
의회 의원 직책 | |
선거구 | 허트 (뉴질랜드 선거구) |
의회 | 뉴질랜드 |
임기 시작 | 1929년 12월 18일 |
임기 종료 | 1968년 6월 4일 |
이전 의원 | 토마스 윌포드 |
다음 의원 | 트레버 영 |
2. 초기 생애
월터 내시는 1882년 2월 12일 잉글랜드 워스터셔주의 도시 키더민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내시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킹 찰스 1세 문법학교 장학금을 받았지만, 추가 비용 때문에 입학하지 못했다. 내시는 키더민스터의 변호사 사무실과 버밍엄 근처 공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1]
1906년 6월 16일[1] 내시는 롯티 메이 이튼과 결혼하여 가게를 열었다. 그는 지역 사회에서 매우 활동적이었고 많은 사회 단체와 클럽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야간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더 받았다. 그러나 1908년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이 모두 병에 걸렸고 딸은 출산 중 사망했다. 게다가 다음 해 경기 침체로 인해 그의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가족은 영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1]
1909년 5월 웰링턴에 도착한 후 내시는 현지 재봉사의 서기가 되었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더 낳았다. 내시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도 이때부터 확고해졌는데,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기독교 신앙과 함께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커졌다. 내시는 평생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남았고, 두 가지 신념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믿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마이클 조셉 새비지, 밥 샘플, 해리 홀랜드와 같은 저명한 뉴질랜드 사회주의자들과의 우정에 영향을 받았다. 내시는 또한 평화주의자가 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는 잉글랜드 성공회 남성 협회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그의 평화주의가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기독교인들과의 이해를 촉구했다. 전쟁 중 뉴질랜드의 반독일 정서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독일인이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공개적인 평화주의와 홀랜드와 같은 다른 반전 운동가들과의 우정으로 인해 그의 우편물은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그 자신과 동료들의 반역죄 또는 모반죄 증거를 찾았다.
내시가 일했던(그리고 주주이기도 했던) 재봉사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그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다. 내시와 그의 가족은 파머스턴노스로 이사하여 양모 및 직물 상인의 영업사원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뉴플리머스에서 스트랫퍼드 출신 재봉사 빌 베즐리와 함께 재봉 회사를 설립했지만, 사업은 부진했다.[1]
3. 정치 경력
3. 1. 초기 정치 경력
내쉬는 1910년에 설립된 초대 노동당과 짧게 연루되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이 관계는 중단되었다. 1918년 그는 현대 노동당의 뉴플리머스 지부 설립을 도왔고, 지부 서기이자 1919년 지방 선거에서 노동당 후보를 위한 주요 조직자로서 매우 활동적이었다.[1] 노동당은 공동주택 건설과 시립 우유 공급 시스템 구축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내쉬는 시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지만, 노동당 후보 중에서는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다음 해 내쉬는 당의 전국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1]
1920년 내쉬와 그의 아내는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여러 사회주의 회의에 참석했다. 1921년 1월 뉴질랜드로 돌아왔을 때 내쉬는 "반역적인 문헌"을 수입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이 벌금으로 인해 동료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그에게 생긴 평판에도 불구하고, 내쉬는 노동당 내에서 비교적 온건한 당원 중 한 명이었다.[1] 1922년, 웰링턴으로 돌아온 지 1년 후, 내쉬는 노동당의 전국 서기로 선출되었다.[1] 전국 서기직에 당선된 후, 그는 당의 총 부채가 220파운드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메오릴랜드 워커''의 매니저인 존 글로버가 무이자로 약 100파운드를 빌려주면서 부채는 해결되었다.
내쉬는 효율적인 조직 구조를 구축하고 당의 부채를 청산함으로써 노동당을 완전히 기능하는 정당으로 변모시킨 공로를 인정받는다. 1922년 노동당 연례 총회는 내쉬에게 상설 전국 사무소 설립 책임을 맡겼고, 이는 노동당이 뉴질랜드 주요 정당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발걸음이었다.[4] 그는 당원 확보에 힘써 1919년 2만 1천 명에서 1925년 4만 5천 명으로 증가시켰다.
1927년 지방 선거에서 웰링턴 시의회 의원직 노동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5] 2년 후 1929년 선거에서 웰링턴 시장 자리에 출마했지만, 현직 시장 조지 트룹에게 패배했다.[6]
3. 2. 헛 지역구 의원
월터 내시는 1925년과 1928년 헛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1] 1929년 헛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38년 168일 동안 13선 의원을 지냈으며, 이는 뉴질랜드에서 4번째로 최장기 의원 기록이다.[2]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25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2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0.98% | 4,286표 | 2위 | 낙선 |
1928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3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5.08% | 5,978표 | 2위 | 낙선 |
1929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3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0.53% | 5,047표 | 1위 | ![]() |
1931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4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9.08% | 9,187표 | 1위 | |
1935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5대 | 뉴질랜드 노동당 | 74.25% | 11,873표 | 1위 | |
1938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6대 | 뉴질랜드 노동당 | 72.84% | 10,687표 | 1위 | |
1943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7대 | 뉴질랜드 노동당 | 60.87% | 8,823표 | 1위 | |
1946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8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8.67% | 8,025표 | 1위 | |
1949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29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7.68% | 8,153표 | 1위 | |
1951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30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7.73% | 8,872표 | 1위 | |
1954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31대 | 뉴질랜드 노동당 | 60.26% | 8,371표 | 1위 | |
1957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32대 | 뉴질랜드 노동당 | 62.63% | 8,975표 | 1위 | |
1960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33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4.26% | 7,614표 | 1위 | |
1963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34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8.61% | 8,865표 | 1위 | |
1966년 선거 | 하원의원 (허트 선거구) | 35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1.70% | 7,861표 | 1위 |
의회에 입성하자마자 내시는 뉴질랜드 노동당의 주요 재정 대변인 중 한 명이 되었고, 1932년 최고 재정 대변인이 되었다. 의회에 입성한 후, 내시는 자신이 대표하는 선거구에 집을 지었다. 세인트 올번스 그로브에 있는 소박한 방갈로인 이 집은 1930년에 완공되었고, 그는 여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3. 3. 재무부 장관
월터 내시는 1935년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관세, 통계, 마케팅, 세입, 사회복지부 장관을 겸임했다.[7] 그는 뉴질랜드 제1노동정부에서 새비지와 피터 프레이저에 이어 3위였다. 2023년 현재, 그는 해당 직책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속으로 근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선거 직후 실업자와 빈곤층에게 27만 파운드의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지급했다.내시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뉴질랜드 경제는 좋지 않았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누진적 토지세 재도입,[7] 뉴질랜드 준비은행 국유화를 추진했다.[1] 토지세는 정부 지출을 위한 추가 800만 파운드를 확보했다. 경제 정책의 변화에는 임금 삭감 철회, 연금 확대, 농가 가격 보장 및 통화 평가 절상이 포함되었다.
1936년 내시는 무역 협상을 위해 영국을 방문하여 뉴질랜드의 쇠고기와 양고기 수출에 대한 가격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는 베를린과 모스크바 등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여 무역 협정을 모색했으며, 독일과 버터 수출에 대한 2자간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덴마크의 환율 통제 시스템을 연구하기 위해 코펜하겐을 방문했으며 파리와 암스테르담에서 추가적인 무역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뉴질랜드로 돌아온 후, 내시는 노동당 내 경제 정책 분쟁에 직면했다. 그는 사회신용주의자들과 당내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새비지와 프레이저의 지지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노동당의 사회보장 계획을 이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1938년 환율 위기 당시, 내시는 환율 통제와 수입 제한을 도입하여 뉴질랜드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다. 이는 1932년 영국 연방 경제 회의의 합의와 상충되어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전체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1939년 영국을 방문하여 대출을 얻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방위 협정을 논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과 수출 협정을 체결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그는 이전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버리고 독일의 공격적인 행동을 규탄했다.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사회보장 지출을 확대했다. 1941년 프레이저 부재 시 권한대행 총리를 역임했다.

1942년, 내시는 미국 주재 뉴질랜드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재무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그는 위임할 수 없었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서류를 쌓아 두었고, 직원들을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국제 연합 창설 회의에 참석하고, 국제통화기금 가입을 권고했다. 그는 또한 브레턴우즈 회의 및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초창기 등 전후 국제 회의에 뉴질랜드 대표로 참석했다.
3. 4. 야당 대표
1949년 선거 직후 피터 프레이저가 사망하자, 내시는 만장일치로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었다.[8][9] 내시는 1951년 항만 노동쟁의에서 "우리는 항만 노동자 편이 아니며,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1] 이어진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은 패배했다.[1]야당 대표로서 내시는 지도력 위기를 겪었다. 1954년에는 렉스 메이슨, 빌 앤더턴, 아놀드 노드마이어 등이 대표직 교체를 시도했으나, 노조와 당 지부의 지지로 내시는 대표직을 유지했다.[10] 1954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5석을 추가하고 국민당과 거의 동률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사회신용당의 등장으로 득표가 분산되었다.[11]
이후 내시는 1957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41석 대 39석으로 제2차 노동당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12]
3. 5. 총리 (1957-1960)
내시는 제2차 노동당 정부에서 자신을 외무장관, 마오리 장관(당시 표기법) 및 통계장관으로 임명했다.[13] 취임 즉시 국가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인지하고, 국제수지 문제 해결을 위해 재무장관 아놀드 노드마이어와 함께 "흑색 예산"을 발표했다.[13] 이 예산은 휘발유, 담배, 맥주 등에 대한 세금 인상을 포함하여 대중의 분노를 샀다.[13] 경제학자들은 재정 규율과 문제 해결 효과를 칭찬했지만, 야당은 내시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과장했다고 비판했다.[14] 잦은 해외 순방으로 인해 내시의 업무 처리가 지연되는 문제도 발생했다.[14]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내시는 대외 관계에 집중했다. 그는 지정학적 문제에 대한 지식으로 동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호주 외무장관 리처드 케이시는 내시를 세계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지도자로 인정했다.[15] 1958년 오타와 협정의 무역 및 관세 조항을 개정하고, 콜롬보 계획을 지지하며 아시아의 뉴질랜드 자금 지원 콜롬보 계획 프로젝트를 방문했다.[15] 또한 서사모아의 독립을 지원하여 1962년 독립을 달성했다.[15]

1960년 4월, 내시는 소련을 방문하여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만나 핵실험 중단을 영구적인 금지로 공식화할 것을 제안했다.[15] 그러나 소련은 1961년에 핵실험을 재개했다.[15]
196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럭비 투어에서 마오리족 선수 제외에 대해 개입을 거부하여 비판을 받았다.[16] 그는 럭비 당국이 결정할 문제라고 주장하며, 마오리족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할 것이라고 언급했다.[16] 이러한 결정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뉴질랜드의 국제적 위상에 악영향을 미쳤다.[16]
내시는 마오리 장관을 따로 임명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겸임했다. 그는 마오리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해 잭 훈을 임명하여 1960년 8월 '훈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으나, 선거에 집중하느라 선거 후까지 검토하지 않았다.[17] 이 보고서는 이후 국민당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17]
선거에서 노동당은 국민당에 패배했고, 내시는 야당 대표가 되었다.[18] 내시는 총리 재임 전후 야당 대표를 역임한 유일한 노동당 대표이다.[18]
4. 은퇴 이후
1960년 후반, 월터 내시는 거의 80세에 가까웠고, 청력과 기억력이 저하되는 것을 느꼈다. 1961년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점차 은퇴 요구가 빈번해졌지만, 내시는 업무를 계속하고 싶은 욕망과 아놀드 노드마이어가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을 원치 않아 사퇴를 거부했다. 제리 스키너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프레드 해킷이 부당수로 선출되었으나 해킷 또한 내시의 은퇴 전에 사망하였다. 1963년 2월, 내시는 마침내 노동당 당수직에서 은퇴했고, 노드마이어가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내시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오랫동안 의회에 남아있었으며, 언론에서는 종종 뉴질랜드 정치의 "원로 거장"으로 불렸다. 그는 외교 문제에 대해 자주 연설하고 해외 여행을 했다. 1963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영연방 의회 회의에 참석했고, 1964년에는 남극을 여행했다. 1966년에는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내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비록 1963년 소규모 비전투 고문단을 남베트남에 파병하는 정부 결정을 지지했지만, 그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에는 반대했다. 그는 북베트남 폭격을 규탄하며, 뉴질랜드 대학 캠퍼스에서 열린 많은 토론회에서 연설했다.
5. 사망과 국장
월터 내시는 1968년 5월 중순 "관찰과 휴식"을 위해 헛 병원에 입원했고, 며칠 후 심장마비를 일으켜 1968년 6월 4일에 사망했다.[21] 그의 시신은 웰링턴 의사당에 안치되었고, 1950년 프레이저 이후 처음으로 국장이 거행되었다. 장례식은 로어헛 세인트 제임스 성공회 교회에서 열렸으며, 뉴질랜드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23][24] 그는 아내 곁에 카로리 묘지에 묻혔다.[25]
6. 영예
1935년 월터 내시는 조지 5세 즉위 25주년 기념 은메달을 수여받았다.[28] 1946년에는 영국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29] 1959년에는 명예 동반자 훈장(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을,[30] 1965년에는 세인트 마이클과 세인트 조지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31] 노동당의 원칙에 따라 기사 작위를 받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2년이 걸렸으며, 노드마이어와 당 집행부와 상의한 후에야 기사 작위를 받아들였지만, 두 번이나 종신 귀족 작위와 상원 의석을 거절했다. 1957년 일본 스카우트 협회에서 최고 훈장인 황금 꿩 훈장을 수여받았다.[32] 1963년에는 웰링턴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7. 명칭 사용
뉴질랜드 여러 도시와 그의 출생지인 영국 키더민스터에는 내시의 이름을 딴 많은 도로와 공공 시설이 있다.[33] 마운트 로스킬(Mount Roskill), 오클랜드(Auckland)의 내시 로드(Nash Road),[33] 타이타, 로어헛(Lower Hutt)의 내시 스트리트(Nash Street), 월터 내시 센터(Walter Nash Centre), 월터 내시 공원(Walter Nash Park), 월터 내시 스타디움(Walter Nash Stadium),[34][35] 카웨라우(Kawerau)의 월터 내시 애비뉴(Walter Nash Avenue), 뉴플리머스(New Plymouth)의 내시 스트리트(Nash Street),[36] 왕가누이(Whanganui)의 월터 내시 플레이스(Walter Nash Place), 키더민스터(Kidderminster)의 월터 내시 로드 이스트(Walter Nash Road East) 등이 있다.
8. 개인 생활
월터 내시는 크리켓을 좋아했으며 통계에도 관심이 많아 유명 크리켓 선수들의 평균 점수를 기억했다. 기독교 신학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평생 성공회 신자로 종교적 관용을 믿었다. 1930년대부터 66개 클럽과 단체의 후원자 및 회장을 역임했다.
셀리 오크 우체국 부서장 친구를 통해 아내 로티 메이 이튼을 만났다. 내시는 열렬한 독서가였으며, 아내와 달리 수영을 싫어해 아내가 수영하는 동안 책을 읽었다.
내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술은 적당히 마셨다. 키스 싱클레어는 내시가 워싱턴에서 장관으로 있던 기간에 대해 "좋은 음식과 술에 대한 그의 취향은 기회와 함께 확장되었고, 1930년대 그의 임무에서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내시의 증손자 스튜어트 내시는 국회의원을 지냈다.
참조
[1]
DNZB
2013-08-26
[2]
웹사이트
Longest serving members of Parliament
https://www.parliame[...]
New Zealand Parliament
2023-04-05
[3]
백과사전
Post-war taxation – 1950 to 1959
https://teara.govt.n[...]
2016-09-02
[4]
서적
Humanism in Politics: New Zealand Labour Party in Retrospect
New Zealand Worker Printing and Publishing
[5]
뉴스
Election Notices
https://paperspast.n[...]
1927-05-04
[6]
뉴스
Election Notices
https://paperspast.n[...]
1929-05-10
[7]
백과사전
First Labour government taxes – 1935 to 1949
https://teara.govt.n[...]
2016-09-02
[8]
뉴스
Choice of Successor – Probable Selection of Mr Nash
https://paperspast.n[...]
1950-12-13
[9]
뉴스
Opposition Leader to be Named on January 15
1951-01-08
[10]
웹사이트
HGR Mason: Father of New Zealand's decimal currency system
http://welovepukekoh[...]
We Love Pukekohe
2014-04-24
[11]
뉴스
Mr Nash Says Labour Will Continue Fight – A Statement Amended
1954-11-15
[12]
웹사이트
General elections 1890–1993
http://www.elections[...]
New Zealand Electoral Commission
[13]
백과사전
Balance of payments – What is the balance of payments?
https://teara.govt.n[...]
2010-03-11
[14]
웹사이트
The real power list: NZ's Prime Ministers rated
https://www.nzherald[...]
2024-11-08
[15]
백과사전
New Zealanders in the USSR, 1960
https://teara.govt.n[...]
[16]
웹사이트
'No Maoris – No Tour' poster, 1960
http://www.nzhistory[...]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2007-09-10
[17]
웹사이트
The Hunn Report
https://nzetc.victor[...]
2009
[18]
백과사전
Labour Party leaders, 1919–2017
https://teara.govt.n[...]
2015-06-01
[19]
뉴스
Leadership of Labour – Report Denied by Mr Nash
https://paperspast.n[...]
1962-05-01
[20]
뉴스
So it's Helen or the highway; Lack of a succession plan echoes ghosts of past Labour implosions
2008-02-15
[21]
뉴스
Sir Walter Nash Dies – Veteran Statesman Helped Shape Destiny of Country
1968-06-05
[22]
뉴스
Sir Walter Nash
https://paperspast.n[...]
1968-06-05
[23]
뉴스
Sir Walter Nash – Lying-in-State Arranged
https://paperspast.n[...]
1968-06-06
[24]
뉴스
Homage Paid To Sir Walter Nash At State Funeral
https://paperspast.n[...]
1968-06-08
[25]
웹사이트
A sad sight and a sorry plight: PMs' graves in Karori
https://www.stuff.co[...]
Stuff (website)
2020-05-16
[26]
뉴스
Age Limit on MPs But Sir Walter In Last Term
1967-05-09
[27]
뉴스
Returns At Hutt
https://paperspast.n[...]
1968-08-15
[28]
뉴스
Official jubilee medals
https://paperspast.n[...]
1935-05-06
[29]
런던 가제트
1946-01-01
[30]
런던 가제트
1959-06-13
[31]
런던 가제트
1965-06-12
[32]
웹사이트
http://reinanzaka-sc[...]
2014-05-23
[33]
Q
[34]
웹사이트
About the centre
http://walternashcen[...]
[35]
뉴스
Hutt stadium can handle anything
2016-03-30
[36]
웹사이트
Nash Street
https://terangiaoaon[...]
2012-11-10
[37]
서적
A Dictionary of New Zealand Political Quotations
Oxford University Press
[38]
뉴스
Labour Wins Big Share In Polls
1971-10-11
[39]
뉴스
Nash eyes standing for leadership
https://web.archive.[...]
2014-10-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