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 (성양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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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장(성양경왕)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주허후에 봉해진 후 여씨 일족의 전횡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을 세워 성양왕에 봉해졌다. 그는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을 제거하는 데 기여했으며, 유항의 즉위 후 성양왕이 되었으나 2년 만에 사망했다. 유장의 사후, 그의 영토에서는 성양경왕을 숭배하는 신앙이 생겨났으며, 후한 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후한 말 조조에 의해 숭배가 금지되면서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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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0년 출생 - 가의 (전한)
가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학가로, 문제의 중용을 받았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좌천되었으며, 유가 사상을 바탕으로 내외 정책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펼친 인물이다. - 기원전 177년 사망 - 관영 (전한)
관영은 전한 시대의 무장으로, 유방을 섬겨 진나라와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 건국 후 진희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여씨의 난 때 유씨 가문을 지지하여 문제의 즉위에 기여한 인물이다. - 기원전 177년 사망 - 심이기
심이기는 전한 초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유태공을 보좌하다 고황후 여치의 측근으로 우승상까지 올랐으나 여후 사후 면직되었고, 회남왕 유장에게 살해당한 후 유후로 시호를 받았으나 아들의 모반으로 후국이 단절되었다. - 중국의 신 - 성황묘
성황묘는 성벽과 해자를 신격화한 사당으로, 중국에서 기원하여 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중국, 한국, 베트남 등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 중국의 신 - 삼황오제
삼황오제는 중국 문명의 기원과 관련된 신화적 존재로, 세 명의 황과 다섯 명의 제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며 시대와 문헌에 따라 구성원에 차이가 있지만 인류 문명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유장 (성양경왕)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유장 |
로마자 표기 | Yu Zhang |
생몰년 | 기원전 222년 ~ 기원전 177년 |
봉호 | 성양경왕 |
작위 | 왕 |
시대 | 전한 |
출생지 | 패현 |
사망지 | 함양 |
아버지 | 한 고조 유방 |
어머니 | 조희 |
형제 | 제 도혜왕 유비, 초 원왕 유교, 대 효왕 유항, 회남 여왕 유장, 조 은왕 유우, 연 영왕 유건, 대왕 유회, 조 공왕 유회 |
자녀 | 유희, 동모후 유흥 |
생애 | |
주요 활동 | 여씨 숙청 공모 |
관련 사건 | 여씨 숙청 |
기타 | |
평가 | 여후 사후 주발, 진평 등과 함께 여씨 일족을 숙청하는 데 공헌함. |
2. 생애
유장은 여씨 일족의 전횡을 타도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황제가 되지 못하고 기원전 178년 성양왕에 봉해졌다. 그는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봉지로 향했다.[2] 기원전 177년, 유장은 재위 2년 만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고, 아들 유희가 뒤를 이었다.
유장이 죽은 후, 그의 영지였던 성양 근처에는 유장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건립되어 백성들의 신앙 대상이 되었다. 신나라에 대항하여 산동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을 때, 성양경왕을 신앙하는 집단은 유장의 후손 중에서 제비를 뽑아 유분자를 옹립하기도 했다.
후한 말기에도 성양경왕 신앙은 이어졌으나, 조조가 제남국의 상이 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보고 사당을 모두 철거하고 제사를 금지했다. 후세에도 "주허후지이망(朱虛侯之已亡)" (낙빈왕의 격문)에서처럼, 유장은 분기를 촉구하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여씨 타도
기원전 186년, 유장은 형 유양을 대신하여 동생 유흥거와 함께 입조해 주허후(朱虛侯)에 봉해졌고, 유흥거는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졌다. 유장은 고황후의 조카인 여록의 딸과 결혼했으나, 고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여씨 일족의 전횡을 불쾌하게 여겼다.기원전 181년, 유장은 고황후에게서 연회를 관리하는 주리(酒吏)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고, 군법에 따라 진행을 지휘하겠다고 청하여 허락받았다. 유장은 연회에서 민요를 부르는 척하며 고황후가 있음에도 여씨 일문의 전횡을 비판하고, 그들이 곧 보복당해 파멸할 것이라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유장은 연회 도중 자리를 뜨려 한 여씨 일족 한 명을 베어 죽이고 고황후에게 "군법에 따라 처형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고황후는 자신이 허락한 일이었기에 유장을 비난할 수 없었다. 유장은 이후 기개 있는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였다.[1]
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움직임을 알아챈 유장은 형 유양에게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 거병하게 하고, 자신은 이에 호응하여 주발, 진평 등과 함께 장안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평이 장군 여록의 친구 역기를 이용해 여록을 속여 북군의 지휘권을 주발이 손에 넣었으나, 남군을 거느린 상국 여산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유장에게 1천 군대를 주어 황궁을 지키게 했다. 유장은 군대를 이끌고 입궁하던 중 궁에서 여산을 만나 그를 쫓아가 죽였다. 여산이 죽은 후에야 쿠데타 세력은 여씨 일족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 직후 대왕 유항이 장안에 들어와 황제에 즉위했다. 유장은 쿠데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쿠데타 직전 주발 등 중신들과 유양을 황제로, 유장을 제나라 또는 조나라 왕으로 세우기로 한 약속은 유양의 장인 사균 등 사씨 일족에 야심가가 많아 제2의 여씨 정권이 세워질 수 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고, 유항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유장은 내심 불만이 있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영지로 부임했다.[2]
2. 2. 성양왕 즉위와 죽음
기원전 186년, 유장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 유흥거와 함께 입조해 주허후(朱虛侯)에 봉해졌고, 유흥거는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졌다. 또한 고황후의 조카인 여록의 딸과 결혼했으나 고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여씨 일족의 전횡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기원전 181년, 고황후로부터 주리(酒吏-연회의 사회 간사장)를 맡도록 명령받고 이때 군법에 따라 진행을 지휘하는 것을 청하여 허용되었다. 연회에서 민요를 부른다는 구실로 고황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씨 일문의 전횡을 성토하고 머지않아 보복하고 파괴할 것이라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연석에서 마음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여씨 일족 한 명을 베어 죽이고 고황후에게 "군법에 따라 이를 처형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고황후는 자신이 허용한 것이므로 유장을 비난하지 못하였다. 유장은 이후 기개가 있는 사람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의 제위 찬탈 움직임을 알고, 형 유양에게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 거병하게 하고 자신은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주발, 진평 등과 함께 장안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평이 장군 여록의 친구 역기를 이용해 여록을 속여 그가 거느린 북군의 지휘권을 주발이 손에 넣었으나, 남군을 거느린 상국 여산과의 전투를 피해 유장에게 1천 군대를 주어 황궁을 지키게 했는데 유장이 이를 거느리고 입궁하던 차에 궁에서 여산을 맞닥뜨렸다. 유장은 여산을 쫓아가 죽이고, 여산이 죽은 후에 비로소 쿠데타 세력은 여씨 일족을 사로잡아 전부 주살했다. 이 직후 대왕 유항이 장안에 들어가 황제에 즉위했다. 유항의 즉위에 따라 아버지 유비가 생전에 노원공주에게 주었던 성양군은 제나라에 반환되었다.
쿠데타 공적으로, 기원전 178년에 유장은 성양왕에 봉작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결행 직전에 유장은 주발 등의 중신과 함께 유양이 황제로, 유장이 제나라 또는 조나라 왕이 되기로 약속을 맺었으나 유양의 장인 사균 등 사씨 일족에 야심가가 많아 제2의 여씨정권이 세워진다는 이유로 중단되었고, 유항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유장은 내심 불만이 있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영지에 부임했다.
기원전 177년에 유장은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요절했다.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아들 유희가 뒤를 이었다.
3. 성양경왕 신앙
성양경왕에 대한 신앙은 그의 사후 성양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으며, 후한 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조조가 제남국상이 되면서 성양경왕 신앙은 탄압을 받게 된다.[2]
3. 1. 성양경왕 신앙의 기원과 확산
그의 사후 그의 영토였던 성양 부근에 그를 모시는 사당이 많이 건립되어 많은 신앙을 모았다. 성양경왕은 여씨 통치기에 여씨와 맞서 싸운 인물로서, 이미 오초칠국의 난 때에도 외척세력에 반대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2] 그 때문에 전한 원제·전한 성제 무렵부터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자 성양경왕 신앙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2] 한편으로 성양경왕은 약속대로라면 원래 조나라 왕이 됐어야 했으나 공이 깎여 훨씬 작은 성양나라 왕이 됐기 때문에, 전한 황실에 대한 울분과 원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2] 전한 왕조를 강탈했던 신 때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군 적미군은 이런 성양경왕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성양경왕 사당의 무당이 내린 신탁에 따라 제비뽑기를 해서 후손 중 유분자를 선택해 옹립했다.[2]성양경왕은 자손 많기로 유명한 제도혜왕의 지파 중에서도 가장 번성해 왕가는 전한 멸망까지 다른 왕가에게 성양나라를 내준 적 없이 계속 성양나라를 이어받았고 성양나라의 왕자후(왕의 아들로서 봉해진 후작)는 54명으로 전한 왕가 중 가장 많았다.[2] 이 후작들의 봉국은 성양나라 외의 낭야군·태산군·동해군 등 인접국에까지 미쳤고, 여러 군에 흩어진 후작들이 각자 자기 봉국에 세운 조상의 사당들을 통해서 성양경왕 신앙이 퍼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2]
성양경왕 신앙은 민간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후한에서는 일찍이 성양나라를 폐지하고 낭야나라에 편입시켰으나, 낭야나라의 관리가 계속 성양경왕을 제사지냈으며, 낭야효왕 시절에는 성양경왕의 신탁에 의지해 서울을 거현에서 개양현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개양현이 동해군의 속현이기에 동해군의 개양·임기현과 낭야나라의 화·개·남무양·원구·공유현을 맞바꾸기까지 했다.[2] 이는 조정에서 지역 통치에 성양경왕의 권위를 이용할 정도로 성양경왕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짐작하게 한다.[2]
성양경왕 신앙은 후한 말까지 이어졌는데, 《삼국지·위지》 무제기와 배송지의 주석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진 성양경왕 신앙이 특히 강성한 제남국에서 신분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사치를 퍼트리며 제사 비용 때문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폐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2] 조조는 제후상이 되었을 때, 신앙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사당을 모두 철거하고 제사를 금지했다.[2] 근본적으로 성양경왕 신앙은 반국가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후한 말의 혼란기에 탄압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2]
3. 2. 성양경왕 신앙의 영향력
그의 사후 그의 영토였던 성양 부근에는 그를 모시는 사당이 많이 건립되어 많은 신앙을 모았다. 성양경왕은 여씨 통치기에 여씨와 맞서 싸운 인물로서, 이미 오초칠국의 난 때에도 외척 세력에 반대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전한 원제·전한 성제 무렵부터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자 성양경왕 신앙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2] 한편으로 성양경왕은 약속대로라면 원래 조나라 왕이 됐어야 했으나 공이 깎여 훨씬 작은 성양나라 왕이 됐기 때문에, 전한 황실에 대한 울분과 원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2] 전한 왕조를 강탈했던 신 때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군 적미군은 이런 성양경왕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성양경왕 사당의 무당이 내린 신탁에 따라 제비뽑기를 해서 후손 중 유분자를 옹립했다.[2]성양경왕은 자손 많기로 유명한 제도혜왕의 지파 중에서도 가장 번성해 왕가는 전한 멸망까지 다른 왕가에게 성양나라를 내준 적 없이 계속 성양나라를 이어받았고 성양나라의 왕자후(왕의 아들로서 봉해진 후작)는 54명으로 전한 왕가 중 가장 많았다.[2] 이 후작들의 봉국은 성양나라 외의 낭야군·태산군·동해군 등 인접국에까지 미쳤고, 여러 군에 흩어진 후작들이 각자 자기 봉국에 세운 조상의 사당들을 통해서 성양경왕 신앙이 퍼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2]
성양경왕 신앙은 민간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후한에서는 일찍이 성양나라를 폐지하고 낭야나라에 편입시켰으나, 낭야나라의 관리가 계속 성양경왕을 제사지냈으며, 낭야효왕 시절에는 성양경왕의 신탁에 의지해 서울을 거현에서 개양현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개양현이 동해군의 속현이기에 동해군의 개양·임기현과 낭야나라의 화·개·남무양·원구·공유현을 맞바꾸기까지 했다.[2] 이는 조정에서 지역 통치에 성양경왕의 권위를 이용할 정도로 성양경왕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짐작하게 한다.[2]
성양경왕 신앙은 후한 말까지 이어졌는데, 《삼국지·위지》 무제기와 배송지의 주석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진 성양경왕 신앙이 특히 강성한 제남국에서 신분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사치를 퍼트리며 제사 비용 때문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폐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2] 조조는 제후상이 되었을 때, 신앙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사당을 모두 철거하고 제사를 금지했다.[2] 근본적으로 성양경왕 신앙은 반국가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후한 말의 혼란기에 탄압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2]
3. 3. 성양경왕 신앙의 쇠퇴
성양경왕에 대한 신앙은 후한 말까지 이어졌다. 《삼국지·위지》 무제기와 배송지 주석에 따르면, 성양경왕 신앙은 제남국에서 특히 강성하여 신분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사치를 조장했으며, 제사 비용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등 폐단이 있었다.[2] 조조는 제후상이 되었을 때 이러한 폐단을 보고 사당을 모두 철거하고 제사를 금지했다.[2] 성양경왕 신앙은 근본적으로 반국가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후한 말의 혼란기에 탄압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2]참조
[1]
기타
4th month of the 3rd year of Emperor Wen's reign
Zizhi Tongjian
177 BCE-05-19 ~ 177 BCE-06-16
[2]
저널
中國 古代 齊 지역의 祭儀 習俗과 지역지배 : 八神祭·城陽景王 숭배를 중심으로
[3]
기타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 (제천왕)|유명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4]
기타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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