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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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우는 당나라 시대의 인물로, 《다경》을 저술하여 동아시아 차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차성(茶聖)'으로 추앙받는다. 3살 때 버려져 절에서 자랐으며, 유교를 배우려다 절을 나와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천보 연간에 학문을 배우고, 안사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며 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4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780년에 《다경》 3권을 저술했으며, 이 책은 차의 기원, 재배, 음용법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육우는 조정의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하며, 안진경 등과 교류했고, 《다경》은 차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육우는 후베이성 톈먼 시 출신으로, 3살 때 호숫가에 버려져 용개사(龍盖寺)의 주지 지적선사(智積禪師)에게 거두어졌다. 지적선사는 육우의 성을 '육(陸)', 이름은 점괘에 따라 '우(羽)'로 지었다. 육우는 말더듬이였지만 웅변에 능했다. 지적선사는 육우가 불경을 읽고 승려가 되기를 바랐으나, 육우는 유교를 배우고자 하였다.
茶經|다경중국어은 총 3권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첫 3장, 2권은 4장, 3권은 5장에서 10장으로 구성되었다.[4] 당나라 이후 세 권은 한 권으로 묶여, 세 권짜리 버전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4]
육우는 《다경》을 통해 차의 기원, 재배 및 음용 방법, 다구 등 차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담아 자신의 열정을 드러냈다. 당시 찻집 상인들은 육우의 도자기 조각상을 만들어 '차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1]
2. 생애
육우는 절에서 도망쳐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활약했다. 천보 연간(742~756년)에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제물(李齊物)의 추천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경릉 사마(司馬) 최국보(崔國輔)를 만나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정신'을 배웠다.[7]
지덕 원년 (756년), 안사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피신하였고, 상원 연간(760년경) 저장성 우싱 구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며 '상저옹(桑苧翁)'이라 칭하고 저술에 힘썼다. 그곳에서 승려 교연(皎然)과 교류하며 차를 연구했다. 조정에서 관직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건중(建中) 원년 (780년) 《다경》 3권을 저술했다.
대력 연간(766~779년) 안진경과 교류하며 《운해경원》(韻海鏡源) 편찬에 참여했고, 이계향(李季鄕)과의 일화로 〈훼다론〉을 썼다.
육우는 스승 쭤푸쯔에게 6년간 후오먼산에서 공부하며 차를 배웠다. 룽가이 사찰에서 배운 지식으로 동료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샘물을 발견, 차 맛이 좋아지는 것을 알고 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쭤푸쯔는 우물을 팠다.
1768년 청나라 시대, 징링 가뭄 때 육우의 우물에서 물이 계속 나와 "루위 오두막"과 "문학의 샘"이 건설되었다.
752년 육우는 징링으로 돌아와 이제물(李齊物)을 만났으나, 장안으로 간 이제물 대신 추이궈푸(崔国辅)를 만났다. 추이궈푸와 차, 문학, 시에 대한 관심이 같아 친구가 되었다. 함께 시를 쓰고 책을 집필했다. 추이궈푸는 육우의 문학적 소양을 키워주었고, 이 시기 육우는 『다경』을 저술했다.
2. 1. 출생과 성장
733년 후베이성 톈먼 시에서 태어난 육우는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용개사(龍盖寺)의 지적선사(智積禪師)에게 거두어졌다.[4] 지적선사는 육우에게 불경을 가르치려 했으나, 육우는 유교 경전을 배우고자 했다.[4] 이는 훗날 육우가 차 문화에 유교적 소양을 접목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육우는 절에서 도망쳐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활동했으며, 천보 연간(742년 ~ 756년)에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제물(李齊物)의 눈에 띄어 그의 추천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경릉 사마(司馬)인 최국보(崔國輔)를 만나 그와 어울렸으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정신'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7]
2. 2. 학문적 성장과 은거
육우는 톈먼 태수 이제물(李齊物)과 징링 사마 최국보(崔國輔)의 후원을 받으며 학문을 닦았다.[7] 이제물은 육우가 지식인 계층과 교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최국보는 육우의 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최국보는 육우와 함께 차, 문학, 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육우가 『다경』을 저술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756년 안사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한 후, 760년경 저장성 우싱 구에 은거하며 '상저옹(桑苧翁)'이라 자칭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승려 교연(皎然)과 교류하며 차에 대한 연구를 심화했다. 조정에서 태자문학이나 태상시태축에 임명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차 연구에 몰두하여 780년에 『다경』 3권을 저술하였다.
2. 3. 《다경》 저술과 차 문화 확산
760년 무렵, 육우는 호주의 조계로 피난하여 암자를 짓고 은거하며 저술을 시작했다. 10여 년간의 차 연구를 집대성하여 780년 (건중 원년)에 《다경》 3권을 완성했다.[1] 《다경》은 차의 기원, 재배, 제조, 음용 방법, 다구(茶具) 등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전문 서적이다. 《훼차론》과 더불어 《다경》이후, 당나라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1] 《다경》은 차를 단순한 기호품이 아닌, 정신 수양과 예절을 갖춘 문화적 행위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시 찻집 상인들은 육우의 도자기 조각상을 만들어 "차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2. 4. 만년과 평가
육우는 조정에서 태자문학이나 태상시태축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7] 780년(건중 원년), 14년 동안의 차 연구를 정리하여 3권짜리 《다경》을 저술하였다.
대력년간(大曆年間)에 육우는 안진경이 호주자사(湖州刺使)로 있을 때 그와 교류하며, 《운해경원》(韻海鏡源) 편찬에 참여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이계향(李季鄕)과의 일화로 《훼다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구당서》에는 육우가 차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다경》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찻집 상인들은 육우의 도자기 조각상을 만들어 "차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계향은 당나라 동남 지역을 감독하는 황실 감독관이었다. 그는 차를 끓이는 명인인 상백웅과 육우를 알고 있었다. 이계경이 상백웅을 방문했을 때는 찻잔을 여러 번 들어 올리며 존경을 표했지만, 육우를 방문했을 때는 육우가 시골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례를 하지 않았다. 육우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차 문화를 망칠 수 있는 행동에 대한 책인 《훼차론》을 저술했다. 《다경》과 《훼다론》 이후, 당나라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3. 《다경》의 내용과 구성
송나라 학자들이 편찬한 당나라의 역사 기록인 《구당서》에는 육우가 차의 기원, 재배 및 음용 방법, 다구에 대한 세부 사항을 담은 3권짜리 책 茶經|다경중국어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있다.[5] 당시 찻집 상인들은 육우의 도자기 조각상을 만들어 "차신"으로 숭배하곤 했다.[5]
4. 평가와 영향
당나라의 황실 감독관이었던 이계경은 차를 끓이는 명인인 상백웅과 육우를 알고 있었다. 이계경은 상백웅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시골 사람 옷차림을 한 육우에게는 경례를 하지 않았다. 육우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차 문화를 망칠 수 있는 행동에 대한 책인 《훼차론》을 저술했다. 《다경》과 《훼차론》 이후, 당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1]
5. 관련 자료
5. 1. 저서
육우는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경》(茶經)이다. 《다경》은 780년(건중 원년)에 완성된 3권짜리 책으로, 육우가 14년 동안 차를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차의 기원, 재배 방법, 차를 끓이는 방법, 마시는 방법, 다구 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7] 당나라 이후에는 세 권이 한 권으로 묶여서 전해진다.
육우는 안진경이 《운해경원》(韻海鏡源)을 저술할 때 편집에 참여하기도 했다.[7] 또한, 어사대부(御史大夫) 이계향(李季鄕)과의 일화로 〈훼다론〉(毁茶論)을 쓰기도 했다. 〈훼다론〉은 이계향이 육우를 냉대한 것에 대한 반박으로, 차 문화를 망치는 행동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경》과 〈훼다론〉은 당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문화를 유행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찻집 상인들은 육우의 도자기 조각상을 만들어 "차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5. 2. 전기 자료
《신당서(新唐書)》 권196 열전 제121 은일(隱逸) 「육우전(陸羽傳)」[5]에 따르면, 육우는 복주(復州) 경릉군(竟陵郡, 현재의 후베이성 톈먼시) 출신으로, 3살 때 호숫가에 버려졌으나 용개사(龍盖寺)의 주지 지적선사(智積禪師)에게 거두어졌다.[7] 이후 주지의 성을 따 '육(陸)'으로, 이름은 점괘에 따라 '우(羽)'로 하였다. 그는 말더듬이였지만 웅변에 능했다. 지적선사는 육우가 승려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육우는 유교를 배우고자 하였다. 지적선사는 육우에게 힘든 일을 시켰지만, 육우는 몰래 글씨를 연습했다.
그 후, 육우는 절에서 도망하여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활약했다. 천보년간(天寶年間)에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제물(李齊物)의 추천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고, 경릉의 사마(司馬) 최국보(崔國輔)와 교류하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정신'을 이상으로 삼았다.[7]
지덕 원년 (756년), 육우는 안사의 난을 피해 강남(江南)으로 피신했다. 상원년간(上元年間)에 오흥(吳興, 현재의 저장성 우싱구)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며 '상저옹(桑苧翁)'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곳에서 승려 교연(皎然)과 교류하며 차를 연구했다. 조정에서 태자문학(太子文學)이나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으로 임명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건중(建中) 원년 (780년), 14년간의 연구를 정리해 《다경》 3권을 저술했다.
대력년간(大曆年間)에 육우는 호주자사(湖州刺使) 안진경(顔眞卿)과 교제하며 《운해경원》(韻海鏡源) 편집에 참여했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이계향(李季鄕)과의 일화로 〈훼다론〉(毁茶論)을 쓰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新唐書/卷196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https://zh.wikisourc[...]
2021-12-07
[2]
웹사이트
新唐書/卷196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https://zh.wikisourc[...]
2021-12-07
[3]
웹사이트
岡倉覚三 村岡博訳 茶の本
https://www.aozora.g[...]
[4]
서적
中国史重要人物101
新書館
2005
[5]
위키문헌
新唐書/卷196
[6]
서적
중국차 이야기
살림출판사
2012
[7]
서적
중국차 이야기
살림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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