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 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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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이다. 기원전 39년에 태어나 여러 차례 정략 결혼을 거쳤으며, 아그리파와의 결혼을 통해 다섯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간통 혐의로 기원전 2년에 추방되었고, 유배 생활을 하다 14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당대 로마 사회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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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아우구스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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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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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율리아 마이오르 |
로마자 표기 | Yullia Maioreu |
설명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
기본 정보 | |
출생일 | 기원전 39년 10월 30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로마 공화국 |
사망일 | 서기 14년 (52세) |
사망지 | 레기움, 이탈리아, 로마 제국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아버지 | 아우구스투스 |
어머니 | 스크리보니아 |
배우자 | 마르켈루스 (기원전 25년–기원전 23년 9월, 사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기원전 21년–기원전 12년, 사별) 티베리우스 (기원전 11년–기원전 2년, 이혼) |
자녀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율리아 미노르 (아그리파)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아그리피나 마이오르 (아그리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아그리파) 티베릴루스 (티베리우스)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2. 생애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9년, 율리아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날 율리아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아를 데려갔다.[2] 그는 로마 관습에 따라 율리아에 대한 완전한 부모로서의 통제권을 주장했다. 율리아는 계모인 리비아와 함께 살면서 귀족 교육을 받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율리아는 학업 외에도 실 잣기와 직조를 배웠다.[3] 마크로비우스는 "그녀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상당한 교양은 그 집안에서 얻기 쉬운 것이었다"라고 언급했다.[4]
율리아의 사회생활은 엄격히 통제되어, 아버지의 승인을 받은 사람들과만 대화할 수 있었다.[5] 옥타비아누스는 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최고의 교사들에게 교육받도록 했다. 마크로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전한다. "나는 다루어야 할 두 명의 제멋대로인 딸이 있다. 로마 공화국과 율리아가 바로 그들이다."[6]
율리아는 대부분의 로마 귀족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결혼과 그로 인한 가족 간의 결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들을 원했고, 그의 유일한 자녀인 율리아는 상속자로 입양할 손자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7]
율리아는 세 번 결혼했다.
- 첫 번째 남편은 마르켈루스로 기원전 25년에 율리아가 14세의 나이로 세 살 연상인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기원전 23년에 마르켈루스가 사망하면서 결혼 생활은 2년 만에 끝났다. 이 결혼으로 자녀는 없었다.
- 두 번째 남편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로 기원전 21년, 18세가 된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장군이었던 아그리파와 결혼했다. 아그리파는 율리아보다 25살이나 많았으며, 전형적인 정략 결혼이었다.[12] 이 결혼으로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자녀 이름 | 출생/사망 |
---|---|
가이우스 카이사르 | 기원전 20년 출생 |
율리아 소(小)녀 | 기원전 19년 출생 |
루키우스 카이사르 | 기원전 17년 출생 |
아그리피나 (대)녀 (칼리굴라의 어머니) | 기원전 14년 출생 |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 기원전 12년 출생(사후 출생) |
- 세 번째 남편은 티베리우스로 아그리파가 사망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장려하려 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1년에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결혼은 시작부터 거의 파탄났으며, 율리아가 낳은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했다.[23]
기원전 2년에 율리아는 간통과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에게 결혼 무효를 선언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또한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24] 율리아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추방되었고,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강요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를 판다테리아 섬에 유배시켰는데, 그곳에서 남자들과의 접촉은 물론 포도주조차 마실 수 없었다.[26] 그녀의 어머니 스크리보니는 유배 생활을 함께 했다.[27][28]
율리아는 서기 14년에 사망했다.[36] 티베리우스가 그녀를 굶겨 죽였다는 설과, 포스투무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녀가 절망하여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설이 있다.[37][38][39]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을 통해 그녀를 자신의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2. 1. 초기 생애와 첫 번째 결혼
Julia Augusti filiala는 기원전 39년에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가 태어날 당시에는 아직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지 못했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로 알려져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그를 율리아가 11살이 되던 기원전 27년까지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렀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아가 태어난 날 율리아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아를 데려갔다.[2] 그는 로마 관습에 따라 율리아에 대한 완전한 부모로서의 통제권을 주장했다. 율리아는 계모인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되었고, 나이가 들면서 귀족이 되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교육은 엄격했고 다소 구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율리아는 학업 외에도 실 잣기와 직조를 배웠다.[3] 마크로비우스는 "그녀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상당한 교양은 그 집안에서 얻기 쉬운 것이었다"라고 언급했다.[4]율리아의 사회생활은 심하게 통제되어, 그녀는 아버지의 승인을 받은 사람들과만 대화할 수 있었다.[5]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최고의 교사들에게 교육받도록 했다. 마크로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전한다. "나는 다루어야 할 두 명의 제멋대로인 딸이 있다. 로마 공화국과 율리아가 바로 그들이다."[6]
기원전 37년, 율리아가 어린 시절,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인 가이우스 마케나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경쟁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약혼으로 확정되었는데, 안토니우스의 10살 된 아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가 당시 두 살이었던 율리아와 결혼하기로 한 것이다.
이 약혼은 내전이 발발하면서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파했다. 패배한 두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했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율리아는 당시 대부분의 로마 귀족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결혼과 그로 인한 가족 간의 결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들을 원했고, 그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율리아는 그가 상속자로 입양할 손자를 아버지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7]
기원전 25년, 율리아는 14세의 나이로 세 살 연상인 아버지의 누이 옥타비아의 아들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스페인에서 전쟁을 치르고 병에 걸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아그리파에게 의식을 주관하고 부재 중에 축제를 열도록 위임했다.[8]
율리아와 마르켈루스의 결혼,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를 교황과 안찰관으로 지명한 것은[9] 그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겨졌다.[10] 이는 사람들이 마르켈루스의 권력 승계를 반대할 것이라고 믿었던 아그리파와 갈등을 빚게 했고, 마르켈루스에 대한 분명한 선호는 아그리파가 그리스의 미틸레네로 물러나게 한 촉매제였다고 전해진다.[11] 그러나 율리아가 16세였던 기원전 23년 9월에 마르켈루스가 사망했다. 이 결혼으로 자녀는 없었다.
2. 2. 아그리파와의 결혼
기원전 21년, 18세가 된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신뢰받는 장군이자 친구였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 아그리파는 율리아보다 25살이나 많았으며, 전형적인 정략 결혼이었다.[12] 이 시기에 율리아가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타키투스는 그를 "끈기 있는 정부"라고 묘사했다.[13]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율리아는 결혼한 상태에서도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에게 애정을 품었고,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14]신혼 부부는 로마에 있는 빌라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현재 파르네시나 근처, 트라스테베레에서 발굴되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자녀 이름 | 출생/사망 |
---|---|
가이우스 카이사르 | 기원전 20년 출생 |
율리아 소(小)녀 | 기원전 19년 출생 |
루키우스 카이사르 | 기원전 17년 출생 |
아그리피나 (대)녀 (칼리굴라의 어머니) | 기원전 14년 출생 |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 기원전 12년 출생(사후 출생) |
기원전 20년 6월부터 기원전 18년 봄까지 아그리파는 갈리아 총독이었고, 율리아는 그를 따라 알프스를 건넜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도착한 직후 첫째 아이 가이우스가 태어났고, 기원전 19년 율리아는 빕사니아 율리아를 낳았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셋째 아이인 루키우스가 태어났다. 기원전 17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갓 태어난 루키우스와 세 살 된 가이우스를 입양했다.[15] 그는 그들의 교육을 직접 돌보았다.
니콜라우스와 요세푸스는 율리아가 아그리파와 결혼한 동안 그가 원정을 벌이던 곳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했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트로이 (일리움)에서 갑작스러운 홍수에 휩쓸려 거의 익사할 뻔했다.[16] 아그리파는 격분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100000드라크마의 벌금을 부과했다. 유대 왕 헤로데가 아그리파에게 사면을 요청한 후에야 벌금을 철회했다. 기원전 16년 봄에 아그리파와 율리아는 동부 지역을 순회하며 헤로데를 방문했다. 기원전 14년 10월, 부부는 아테네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율리아는 네 번째 아이인 아그리피나를 낳았다.
겨울이 지난 후, 가족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율리아는 곧 다시 임신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기원전 12년 3월 캄파니아에서 갑작스럽게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묻혔다. 율리아는 그의 이름을 기려 사후 아들을 마르쿠스라고 지었다. 그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리고 율리아가 아직 상중에 있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그녀를 약혼시키고[20] 의붓오빠인 티베리우스와 재혼시켰다.
2. 3. 티베리우스와의 결혼과 간통죄
아그리파가 사망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왕조적 이익을 위해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장려하려 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1년에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그가 몹시 사랑했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먼저 이혼해야 했다.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가 율리아의 인격을 낮게 평가했다고 주장했고,[21] 타키투스는 그녀가 티베리우스를 부적합한 상대라 경멸했으며 심지어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쓴 편지를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 그를 비난했다고 주장한다.[22] 결혼은 시작부터 거의 파탄났으며, 율리아가 낳은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했다.[23]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가 로도스로 떠났을 때, 아니 그 이전부터 부부는 별거했다.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가 그녀의 어머니와 혼인하여 정당한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를 가졌다. 가부장적 권위는 가문의 가장인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거나 자녀를 해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이자, 그의 두 후계자인 루키우스와 가이우스의 어머니(이제는 법적으로 여동생),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의 미래는 모두에게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원전 2년에 그녀는 간통과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결혼 무효를 선언하는 편지를 보냈다(당시 티베리우스는 로도스 섬에 있어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는 또한 공개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24]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가치를 장려하는 법률, 통칭 율리아법을 통과시키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를 고발하는 것을 한동안 망설였다. 율리아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몇몇 남자들은 추방되었고, 특히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그랬으며, 율루스 안토니우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의 아들)는 자살을 강요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율리아의 연인으로 알려진 자들이 티베리우스를 실각시키고 안토니우스를 그 자리에 앉히려는 그녀의 도시 파벌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라쿠스가 쓴 편지, 즉 아우구스투스에게 율리아가 티베리우스와 이혼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25]
2. 4. 유배와 죽음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 아우구스투스를 처형하는 대신 판다테리아 섬에 유배시켰는데, 그곳에서 남자들과의 접촉은 물론 포도주조차 마실 수 없었다.[26] 그녀의 어머니 스크리보니는 유배 생활을 함께 했다.[27][28] 율리아는 아버지의 허가를 받아야만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고, 방문객의 키, 피부색, 반점이나 흉터까지 아버지에게 알려야 했다.[29]서기 4년경, 율리아는 본토의 레기움으로 옮겨졌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에게 재산과 연간 소득을 허락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했다.[30]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고,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마 국민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그녀의 소환을 여러 번 청원했다.[31]
서기 6년, 율리아의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유배되었고, 서기 8년에는 큰딸 소 율리아가 간통 혐의로 트레미루스로 유배되었다.[32]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나 그녀의 자녀들을 언급할 때마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이 없이 죽었더라면"이라고 말하며 불행한 심정을 드러냈다.[33] 율리아를 탈출시키려는 음모도 있었는데,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와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가 그녀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군대에 합류시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32]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즉위했다. 티베리우스는 율리아에게 더욱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에 없다는 이유로 율리아의 지참금과 연간 소득을 몰수하고, 그녀가 집을 떠나거나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을 금지했다.[30][35]
율리아는 서기 14년에 사망했다.[36] 티베리우스가 그녀를 굶겨 죽였다는 설과, 포스투무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녀가 절망하여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설이 있다.[37][38][39]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을 통해 그녀를 자신의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율리아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케르케나에서 1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후, 티베리우스의 사주[22] 또는 L.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의 독자적인 결정에 따라 처형되었다.
그녀의 딸 소 율리아는 20년의 유배 생활 후 서기 28년에 사망했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의 묘에 매장되지 못했다.
3. 유산
율리아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로, 현대 작가들에게는 방탕하고 문란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그녀를 "사치와 색욕에 물든" 인물로 묘사하며, 율루스 안토니우스 등 여러 인물을 그녀의 연인으로 언급했다.[40] 세네카는 "떼를 지어 들어온 간통자들"을 언급했고,[40] 플리니우스는 그녀를 "''방종의 전형''"이라고 칭했다.[40] 디오 카시우스는 율리아가 포럼과 로스트라에서 밤에 축제와 술 파티를 벌였다고 기록했다.[40] 세네카는 율리아가 자신의 아버지가 간통 금지법을 제안했던 로스트라를 "방탕"을 위한 장소로 선택했으며, 특히 매춘을 언급하며 "간통녀의 역할을 버리고, 그곳 [''포럼에서''] 자신의 호의를 팔았으며, 심지어 낯선 애인과 함께 모든 방종을 누릴 권리를 추구했다."고 기록했다.[40]
마크로비우스는 율리아의 재치와 성격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41] 그녀의 아이들이 모두 아그리파를 닮은 것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배의 짐칸이 다 찼을 때만 승객을 받는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42] 마크로비우스는 율리아가 낭비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고 공감하는 성격과 학구적인 면모로 널리 칭송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운명의 총애와 그녀의 아버지의 지위를 남용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문학에 대한 사랑과 광범위한 지식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고... 그녀의 친절함, 동료애, 잔혹함의 부족으로 칭송받았다."[43]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5세기에 글을 쓰면서,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시''에 나오는 코리나를 율리아로 처음 동일시한 인물이었다.[44]
3. 1. 대중문화
현대 작가들은 율리아를 대체로 방탕하고 문란한 인물로 묘사한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그녀를 "사치와 색욕에 물든" 인물로 묘사하며, 율루스 안토니우스, 퀸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그녀의 연인으로 언급한다.[40] 세네카는 "떼를 지어 들어온 간통자들"을 언급했고,[40] 플리니우스는 그녀를 "''방종의 전형''"이라고 칭했다.[40] 디오 카시우스는 "포럼과 심지어 로스트라에서 밤에 벌어진 축제와 술 파티"를 언급한다.[40] 세네카는 로스트라가 "그녀의 아버지가 간통 금지법을 제안했던 곳"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을 자신의 "방탕"을 위한 장소로 선택했다고 말하며, 특히 매춘을 언급하며 "간통녀의 역할을 버리고, 그곳 [''포럼에서''] 자신의 호의를 팔았으며, 심지어 낯선 애인과 함께 모든 방종을 누릴 권리를 추구했다."고 기록했다.[40]마크로비우스는 그녀의 재치와 성격에 대한 귀중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는데,[41] 그녀의 아이들이 모두 아그리파를 닮은 것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배의 짐칸이 다 찼을 때만 승객을 받는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42] 그녀의 성격에 대해, 그는 율리아가 낭비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고 공감하는 성격과 학구적인 면모로 광범위하게 찬사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운명의 총애와 그녀의 아버지의 지위를 남용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문학에 대한 사랑과 광범위한 지식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고... 그녀의 친절함, 동료애, 잔혹함의 부족으로 칭송받았다."[43]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5세기에 글을 쓰면서,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시''에 나오는 코리나를 율리아로 처음으로 동일시한 인물이었다.[44]
- 벤 존슨의 희극 ''시인 비평가''(1601)에서 율리아는 오비디우스의 로맨틱한 연애 대상이다.[45] 이 희곡 자체는 율리아와 오비디우스가 ''로미오와 줄리엣''과 유사한 발코니 장면을 연출하는 당시의 문학계를 풍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46]
- 아프라 벤의 풍자적인 영웅적 서간시, ''오비디우스가 율리아에게. 편지''(1685). 이 시는 미래의 앤 여왕에게 구애를 시도하여 1682년 궁정에서 추방된 제1대 버킹엄과 노먼비 공작 존 셰필드를 풍자한 것이다.[47]
- 샤를로트-앙투아네트 드 브레세의 서간체 소설, ''율리아가 오비디우스에게 보낸 편지, 오비디우스가 율리아에게 보낸 편지'' (1753).[48]
-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클라우디우스다''(1934).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클라우디우스는 율리아가 리비아에게 속아 성욕을 증가시키는 최음제를 복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녀의 불륜과 궁극적인 추방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한다. 그레이브스는 마크로비우스의 율리아에 대한 설명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클라우디우스는 그녀를 "쾌락과 흥분을 좋아하지만, 나에게 친절한 말을 해준 유일한 나의 여성 친족이며, 품위 있고 마음씨 좋은 여자"라고 묘사한다.
- 테일러 콜드웰의 소설 ''사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의사'' (1958)는 율리아를 티베리우스의 불행한 아내이자 젊은 복음 전도자 성 루카의 유혹자로 묘사한다.
- 엘리자베스 도레드의 소설 ''나는 티베리우스를 사랑했다'' (1959)에서 율리아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불륜과 현대 역사가들의 음모에 대한 추측 등 그녀에 대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묘사한다.[49]
- 율리아는 존 에드워드 윌리엄스의 서간체 소설 ''아우구스투스''(1972)의 여러 화자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이름으로 기고된 많은 글이 있는데, 판다테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가 쓴 일기의 일부로, 아버지, 결혼 생활, 연인과의 관계, 그리고 저명한 로마 귀부인으로서 그녀에게 가해진 제약들을 반영하고 있다.[50]
- 앨런 매시의 소설, ''아우구스투스''(1986)는 율리아를 동시대의 역사에 매우 가깝게 묘사하며, 그녀가 아버지의 법에 반항하여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후속작인 ''티베리우스''(1991)는 율리아가 마르켈루스와 결혼한 동안 티베리우스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 에드워드 버튼의 소설 ''카이사르의 딸''(1999)에서 율리아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율리아의 불륜을 축소하여 율루스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만을 묘사하고, 율리아의 추방을 티베리우스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쿠데타에 기인한 것으로 묘사한다.
- 율리아는 콜린 맥컬로의 ''로마의 지배자'' 시리즈의 마지막 소설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2007)에서 어린아이로 등장한다. 그녀를 매우 지적인 아이로 강조하며, 옥타비아누스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교육을 "남자와 같은" 방식으로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 미셸 모란의 소설 ''클레오파트라의 딸''(2009)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십 대의 율리아를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한다.[51]
- 1976년 영국 방송 공사(BBC)의 텔레비전 드라마 《클라우디우스 황제》에서 율리아는 프란시스 화이트가 연기했다.[52]
- 이탈리아의 미니시리즈 《임페리움: 아우구스투스》에서 율리아는 비토리아 벨베데레가 연기했다. 이 시리즈는 아우구스투스가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는지를 율리아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53] 율리아는 아버지와 리비아의 강요로 티베리우스와 학대적인 결혼을 하게 된 후,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불륜을 시작한다. 그는 이후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의 왕조 계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아우구스투스를 살해하려다 율리아는 추방당한다.[54]
- 영화 《성의》에서 그녀는 로잘린드 이반이 연기했으며, 티베리우스의 아내로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55]
- 2021년 TV 시리즈 《도미나》에서 그녀는 리아 오프레이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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