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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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도종은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활약한 인물로, 당 고조 이연에게 략양공에 봉해졌다. 유무주를 격파하는 데 기여하고, 영주 지휘관으로 양사도를 격퇴하는 등 군사적 공을 세워 임성왕에 봉해졌다. 당 태종 시대에는 토욕혼 정벌에 참여하고, 고구려 정벌에도 참여했다. 당 고종 시대에 유배를 가던 중 사망했으나, 이후 관직이 복구되었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이도종을 당나라 초기 가장 유능한 왕족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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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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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 |
출생 | 591년 |
사망 | 645년 |
봉호 | 임해군공(臨海郡公) → 조왕(趙王) |
시호 | 장무(襄武) |
가족 | |
아버지 | 이효기 |
어머니 | 양씨 |
부인 | 원씨 |
아들 | 이경초 이옹 이수 |
주요 경력 | |
주요 활동 | 당나라의 장군 |
주요 전투 | 현무문의 변, 양산 전투, 안시성 전투 |
2. 생애
이도종은 603년 수 문제 재위 기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장은 북주의 관료였으며, 서위의 장군이자 당 고조의 조부인 이호의 아들이었다. 이호는 섭정으로 황위를 찬탈하려던 양견을 암살하려다 처형되었으나, 이장의 아들들은 처형되지 않았고, 그 중 한 명인 이소(李韶)가 이도종의 아버지였다.[1]
617년, 이연이 수 양제에 반기를 들고 618년에 당나라를 세워 당 고조가 되면서 이도종은 략양공(略陽公)에 봉해졌다.[1] 619년, 유무주가 당나라를 공격했을 때 이세민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위지공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데 기여했다.[1] 이후 영주(靈州, 대략 현대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 지휘관으로 양사도와 동돌궐의 공격을 격퇴하여 당 고조로부터 조위의 황족인 임성왕 조장에 비견된다는 칭찬과 함께 임성왕에 봉해졌다.[1]
626년 현무문의 변 이후 당 태종 즉위 후 제후 업무 담당자와 대법원 수석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630년 이정의 동돌궐 공격에 참여하여 가한을 포획하는 데 공을 세워 봉토가 늘고 사도(司徒)로 임명되었다.[2] 634년 토욕혼 정벌에 참여하여 모용복윤을 격파하고 모용순을 칸으로 옹립하는 데 기여했다.[2]
637년 강하왕으로 작위가 변경되고 악주(현재의 악주, 호북) 자사를 제수받았으나 장손무기의 반대로 영구적인 영토 하사는 취소되었다. 부패 혐의로 해임되기도 했으나, 곧 의부(儀部) 상서로 복직했다. 640년 후군집의 고창 정벌 이후, 후군집의 반역 가능성을 당 태종에게 경고했고, 643년 후군집이 처형되자 감사를 받았다.
641년 문성공주를 토번 왕 송첸 감포에게 시집보내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2] 645년 고구려 공격에 이세적의 보좌관으로 참전하여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부하의 실수로 책임을 지고 사죄하기도 했다.[2] 안시성 전투 이후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2]
649년 당 태종 사후 당 고종이 즉위하고, 652년 고양공주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653년 유배를 가던 중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사후 측천무후 집권기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구당서》는 이도종을 사촌 이효공과 함께 당나라 초기 가장 유능한 왕족으로 평가했다.
2. 1. 초기 생애와 당 고조 시대 (603년 ~ 626년)
이도종은 수 문제 재위 기간인 603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장은 북주의 관료였으며, 서위의 장군이자 당 고조의 조부인 이호의 아들이었다. 이호는 양견이 섭정으로 황위를 찬탈하려 할 때 북주의 우문조와 공모하여 양견을 암살하려다 북주 말기에 처형되었다. 이장의 아들들은 처형되지 않았고, 그 중 한 명인 이소(李韶)가 이도종의 아버지였다.[1]617년, 이연은 수 양제에 반기를 들었고, 618년에는 당나라를 세워 당 고조가 되었다. 그는 많은 친척들에게 작위를 내렸고, 이도종은 략양공(略陽公)에 봉해졌다.[1] 619년, 당나라의 주요 적이었던 유무주의 정양가한(定楊可汗)이 공격하여 현재의 산시성에 있는 당나라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하동(河東, 현대의 산시성 윈청시)으로 접근했다. 이도종은 진왕 이세민 휘하에서 유무주에 맞서 싸웠고, 그의 건의에 따라 이세민은 유무주와 즉시 교전하지 않고 유무주의 식량을 고갈시키는 전략을 택하여 결국 유무주를 격파할 수 있었다.[1] 또한, 이 작전 동안 이도종과 우문사기는 유무주의 장군 위지공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고, 위지공은 나중에 이세민 휘하의 중요한 장군이 되었다.[1]
이후 이도종은 영주(靈州, 대략 현대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의 지휘관이 되었다. 당시 양나라 황제 양사도의 동생인 양락인이 동돌궐의 지원을 받아 공격해 오자 이도종은 이를 격퇴했고, 나아가 동돌궐의 장군 아사나욱사를 오원(五原, 현대의 산시성 위린시)에서 몰아냈다.[1] 당 고조는 이도종의 공적을 조위의 황족인 임성왕 조장에 비유하며 이도종을 임성왕에 봉했다.[1]
2. 2. 당 태종 시대 (626년 ~ 649년)
626년, 이세민은 형 이건성 태자와 경쟁 관계에서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과 그를 지지하는 이원길 제왕을 죽였다. 이세민은 고조를 강요하여 황태자가 되고, 고조는 양위하여 당 태종이 되었다. 당 태종은 이도종을 영주에서 소환하여 제후 업무 담당자와 대법원 수석 재판관으로 임명했다. 630년, 이정이 동돌궐을 공격할 때 이도종은 그의 휘하에서 복무했고, 동돌궐의 가한을 포획하는 데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이도종의 부관 장보상(張寶相)이 실제 포획을 수행했다. 당 태종은 이도종의 봉토를 600호 늘리고 사도(司徒)로 임명했다.[2]634년, 이도종은 토욕혼의 모용복윤에 대한 작전에서 이정의 휘하에서 복무했다. 당나라는 초기에 승리했지만, 토욕혼 군대는 목초지를 불태워 당나라 군마의 식량 공급을 끊었다. 대부분의 당나라 장군들은 철수를 원했지만, 이도종은 계속 진격을 주장했고, 이정도 동의하여 승리했다. 모용복윤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당나라가 지지하던 모용순이 칸이 되었다.[2]
637년, 당 태종은 친척과 장군 및 관리들에게 영구적인 영토로 주(州)를 하사하려 했고, 이도종의 작위는 강하왕으로 변경되었고, 악주(현재의 악주, 호북)의 자리를 받았다. 그러나 장손무기의 반대로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이도종의 작위는 강하왕으로 유지되었고, 악주 자리에 머물렀다. 이도종은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해임되고 봉토가 축소되었지만, 왕으로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결국 의부(儀部) 상서가 되었다. 640년 후군집이 고창을 멸망시킨 후, 당나라가 고창을 병합하게 되었는데, 후군집은 당 태종이 예상만큼 자신에게 보상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고, 고창의 보물 창고에서 훔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도종은 후군집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당 태종에게 후군집이 반역을 저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643년, 후군집이 태자 이승건과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처형된 후, 당 태종은 이도종에게 감사했다.
641년, 이도종은 당나라와 토번 간의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문성공주를 토번 왕 송첸 감포에게 시집보냈다. 이도종은 싱슈하이 ( 자링호 근처 및 황하의 발원지)에서 토번의 호위대와 만났고, 장안으로 돌아갔다.[2]
645년, 이도종은 당 태종을 수행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며, 선봉 지휘관 이세적의 보좌관으로 복무했다. 그해 여름, 개모(蓋牟, 현재의 무순, 요녕)를 점령하고, 요동(遼東, 현재의 요양, 요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요동을 점령했다. 안시성 (현재의 안산, 요녕)에서 승리한 후, 당 태종은 안시성 포위에 갇혔고, 이도종은 안시성을 건너뛰고 평양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당 태종은 처음에는 동의했지만, 이세적과 장손무기는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시성의 수비수(양만춘으로 알려짐)가 후방을 공격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안시성 포위 중에 안시성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고, 당나라 군대는 진입할 기회를 얻었지만, 이도종 휘하의 장교 부복애 (傅伏愛)의 부주의로 고구려군이 틈새에서 싸워 나와 이도종이 담당했던 공격 토목 공사의 일부를 점령하여 방어에 사용했다. 당 태종은 부복애를 처형했고, 이도종은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자 당 태종은 그를 꾸짖었지만, 군대의 지휘를 유지하게 했다. 안시성의 방어가 굳건해지자 당 태종은 철수했고, 이세적과 이도종이 후위를 맡았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 이도종은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했고, 당 태종은 그를 황족 업무 담당자로 임명했다.[2]
2. 3. 당 고종 시대와 죽음 (649년 ~ 656년)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고 그의 차남인 이치가 고종으로 즉위했다. 고종의 삼촌인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수석 재상이 되었다. 652년, 당 태종의 딸 고양공주와 그의 남편 방유애를 중심으로 한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이들은 당 태종의 형제인 경왕 이원경(李元景)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장손무기는 수사를 확대했고, 653년 봄에 공모자들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모두 이도종과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도종, 재상 우문절, 그리고 장군 집실사력(執失思力)을 상주로 유배 보냈다. 이도종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아마도 656년경이었을 것이다.[1] 이후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고종의 부인 무후와 그녀의 측근들에게 몰락한 후, 이도종의 관직은 사후에 복구되었다.말년에 이도종은 학문에 정진하고 겸손했다고 한다. 《구당서》는 이도종과 그의 사촌 이효공을 당나라 초기 가장 유능한 왕족으로 칭찬했다.
3. 이도종이 등장한 작품
李道宗|이도종중국어이 등장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웹사이트
舊唐書 列傳 卷一至十
http://ef.cdpa.nsysu[...]
2007-03-30
[2]
웹사이트
唐書 列傳 第十一至二五
http://ef.cdpa.nsysu[...]
2007-12-18
[3]
웹사이트
舊唐書 列傳第一至十
http://ef.cdpa.nsysu[...]
2007-03-30
[4]
웹사이트
新唐書 列傳第十一至二十五
http://ef.cdpa.nsysu[...]
2007-12-18
[5]
문서
《정관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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