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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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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바일로는 13세기 불가리아의 돼지치기 출신으로,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1277년, 몽골의 침입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황제 콘스탄틴 티흐를 살해하고 불가리아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비잔틴 제국과 몽골의 정치적 간섭 속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몽골군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이바일로의 봉기는 유럽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이름은 불가리아와 남극의 지명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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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일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바일로 동상
칭호차르
재위 기간1278년 – 1279년
즉위1277년
퇴위1280년
이전콘스탄틴 티흐
이후이반 아센 3세
배우자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나
사망일1281년
출생알 수 없음
사망 장소알 수 없음
로마자 표기Ivaylo
불가리아어 표기Ивайло

2. 어원

현재 형태인 "이바일로"는 K. 이르체크의 작품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이 이름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바실 문법가가 남긴 다음 메모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신의 종 콘스탄틴 독자이자 바실 문법가라고 불리며, 타르노보 시가 그리스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바일 왕의 시대와 니시 주교 니코데무스 아래 서기 6787년(1279년)에 스베를리그 시에서 썼다...". 이 필사본의 낱장은 중세 도시 스베를리그 유적 근처의 이즈보르 마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스베를리그와 니시 교구가 불가리아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3]

이발이라는 형태는 추바슈 이름 아블라이, 에블레이와 유사하며, 아블라이는 다른 튀르크 민족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이블레이는 잉굴 강을 가리키는 쿠만 이름이다. 이블레이와 그 변형인 이블리, 이보일, 이보일로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 발견되며 튀르크(쿠만) 기원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튀르크어 ijivli - '굽은, 웅크린', 고대 튀르크어 동사 juv - '줄어들다, 축적하다'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인칭 이름의 기원에 대해 고대 튀르크어 javal, juvïl – '침착한, 겸손한', 그리고 '관대한, 자비로운', 또는 javlaq – '강한, 건강한'을 제안할 수도 있다.[4] T. 발칸스키 교수는 이발, 이바일이라는 이름이 불가리아 언어 환경에서 빠르게 볼로의 형태로 진화했다고 본다.[5]

2. 1. 코르도쿠바

지브코 보이니코프에 따르면,[2] 코르도쿠바는 이바일로의 가능한 별명이다. 비잔틴 자료는 그를 "1285년 돼지 농부"라고 묘사하며, 가난 때문에 양배추 "라하나"(불가리아 방언 라하나 - λαχανον)를 먹었다고 하여 라하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오르기 파히머는 그의 이름을 코르도쿠바/코르도쿠 바(Κορδόκουβας)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채소' 또는 '양배추'(λάχανο)를 의미했다.[2]

러시아 슬라브학자 스레즈네프스키는 파키머가 슬라브어 단어 "바르도크바"를 잘못 전달했다고 의도적으로 결정했다. 부르도크바는 상추, 샐러드, "푸른 담즙" 식물을 의미하며 19세기에 불가리아 방언 단어로 발견되었다. 19세기 초 러시아 학자들의 불가리아 역사에 대한 범슬라브주의적 해석 또한 시대를 고려하여 고려해야 한다. Κορδόκουβας의 의미가 "양배추"라는 점은 카자흐어에서 유사한 qыrыqqабат (кырыкбабат) - '양배추' (qyrık - 40과 клапа - 층에서 유래, 즉 많은 층과 많은 잎을 가진 채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 주어진 별명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더 넓은 의미로, 키르기스어에서는 korduk - '수치', korduktuu - '모욕당한, 굴욕당한' 및 üy - '집'을 의미한다. 고대 튀르크어 qor - '피해, 손실, 손상', 킵차크어 öv – '집'은 낮은 계급, 평민, 비귀족 출신을 의미한다. T. 발칸스키는 코르도코바를 고대 불가리아어 koroda - '검'을 통해 설명하지만, 이는 출처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언급은 1340년 헝가리 문서에 언급된 쿠만족 코르두크의 이름이다. 라쇼니는 이를 튀르크어 qur, qurtur - '정돈하다, 만들다'와 연결한다. 그러나 어떤 긍정적인 어원을 찾는다면, 몽골어 khurd - '속도', khurdan, khurddah - '빠른, 민첩한'과 연결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2]

2. 2. 이바일로

지브코 보이니코프에 따르면,[2] 이바일로는 코르도쿠바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쿠만족 출신의 하위 계층으로, 아마도 소규모 토지를 소유한 자유 전사이자 가축 사육에 종사하는 소규모 서비스 귀족이었을 것이다. 비잔틴 자료는 그를 "1285년 돼지 농부"라고 묘사하며, 가난 때문에 양배추 "라하나"(불가리아 방언 라하나 - λαχανον)를 먹었다고 하여 라하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오르기 파히머는 그의 이름을 코르도쿠바/코르도쿠 바(Κορδόκουβας)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채소' 또는 '양배추'(λάχανο)를 의미했다.[2]

러시아 슬라브학자 스레즈네프스키는 파키머가 슬라브어 단어 "바르도크바"를 잘못 전달했다고 의도적으로 결정했다. 부르도크바는 상추, 샐러드, "푸른 담즙" 식물을 의미하며 19세기에 불가리아 방언 단어로 발견되었다. 19세기 초 러시아 학자들의 불가리아 역사에 대한 범슬라브주의적 해석 또한 시대를 고려하여 고려해야 한다. Κορδόκουβας의 의미가 "양배추"라는 점은 카자흐어에서 유사한 qыrыqqабат (кырыкбабат) - '양배추' (qyrık - 40과 клапа - 층에서 유래, 즉 많은 층과 많은 잎을 가진 채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 주어진 별명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더 넓은 의미로, 키르기스어에서는 korduk - '수치', korduktuu - '모욕당한, 굴욕당한' 및 üy - '집'을 의미한다. 고대 튀르크어 qor - '피해, 손실, 손상'. 킵차크어 öv – '집'. 또는 낮은 계급, 평민, 비귀족 출신을 의미한다. T. 발칸스키는 코르도코바를 고대 불가리아어 koroda - '검'을 통해 설명하지만, 이는 출처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언급은 1340년 헝가리 문서에 언급된 쿠만족 코르두크의 이름이다. 라쇼니는 이를 튀르크어 qur, qurtur - '정돈하다, 만들다'와 연결한다. 그러나 어떤 긍정적인 어원을 찾는다면, 몽골어 khurd - '속도', khurdan, khurddah - '빠른, 민첩한'과 연결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2]

현재 형태인 "이바일로"는 K. 이르체크의 작품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이 이름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바실 문법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나는 신의 종 콘스탄틴 독자이자 바실 문법가라고 불리며, 타르노보 시가 그리스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 책을 이바일 왕의 시대와 니시 주교 니코데무스 아래 서기 6787년(1279년)에 스베를리그 시에서 썼다...". 필사본의 잎은 중세 도시 스베를리그의 유적 근처인 이즈보르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시 스베를리그와 니시 교구가 불가리아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3] 이름의 형태 이발은 흥미롭게도 추바슈 이름 아블라이, 에블레이를 제공하며, 아블라이라는 이름은 다른 튀르크 민족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이블레이는 잉굴 강을 나타내는 쿠만 이름이다. 이블레이와 그 변형인 이블리, 이보일, 이보일로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 발견되며 튀르크(쿠만) 기원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튀르크어 ijivli - '굽은, 웅크린', 고대 튀르크어 동사 juv - '줄어들다, 축적하다'와 관련이 있다. (친척). 그러나 인칭 이름의 기원에 대해 고대 튀르크어 javal, juvïl – '침착한, 겸손한', 그리고 '관대한, 자비로운', 또는 javlaq – '강한, 건강한'을 제안할 수도 있다.[4] T. 발칸스키 교수는 이발, 이바일이라는 이름이 불가리아 언어 환경에서 빠르게 볼로의 형태로 진화했다고 믿는다.[5]

3. 생애

이바일로는 도브루자 지역의 돼지치기 출신으로, 1277년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여 불가리아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킵차크 칸국의 침입과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에 맞서 싸웠다.

이바일로는 터르노보를 점령하지 못하고 1279년 몽골군에게 포위되었다가 탈출했다. 1280년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가 새로운 차르로 옹립되면서 세력을 잃었고, 1280년 또는 1281년노가이 칸에게 망명했다가 암살당했다.

3. 1. 봉기 이전

이바일로는 도브루자 지역의 돼지치기 출신이었다. 당시 도브루자를 포함한 북동부 불가리아 지방은 킵차크 칸국에게 약탈당하고 있었고, 이바일로는 몽골의 침입을 격퇴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11] 1270년대 불가리아에서는 민중들 사이에서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불가리아 북부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조치 울루스에 의한 수탈이 반복되고 있었다.[11] 1277년 이바일로는 이를 실행에 옮겨 당시 상황에 불만을 품던 사람들을 모았다. 그의 부하들 중에는 후에 비잔티움 제국에 포로로 잡힌 후 귀순하는 흐라니슬라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불가리아의 황제 콘스탄틴 티흐는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바일로는 자신이 직접 차르를 죽였다. 그는 "제물로 바치는 동물처럼" 처형했다.[11] 이바일로는 불가리아의 다른 지역들도 점령하였으나, 수도 터르노보에서 법적 황제 미하일 아센 2세와 그의 모친 마리아 칸타쿠제나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바일로의 성공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를 자극하였다. 미카일 8세는 처음에는 이바일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혼인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반란의 성격을 알고 난 후 마음을 바꾸었다.[12] 미카일 8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있던 아센 왕가의 후손 이반 아센 3세를 자신의 딸 이레네와 결혼시켜 새로운 차르로 내세웠다.[12][13] 이는 이바일로와 마리아 칸타쿠제나의 동맹을 유발하였다.

3. 2. 이바일로의 봉기 (1277-1280)

1277년 이바일로는 도브루자 지역의 돼지치기 출신으로, 당시 킵차크 칸국에게 약탈당하던 북동부 불가리아의 상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다. 그의 부하 중에는 흐라니스라프가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에 포로로 잡혔다가 귀순하였다. 당시 불가리아 황제 콘스탄틴 티흐는 이바일로의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바일로는 자신이 직접 황제를 죽였다고 전해진다.[11]

이바일로는 불가리아의 다른 지역들을 점령해 나갔지만, 수도 터르노보에서는 법적 황제 미하일 아센 2세와 그의 모친 마리아 칸타쿠제나가 저항하고 있었다. 이바일로의 성공은 비잔틴 황제 미카일 8세를 자극했고, 미카일 8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있던 아센 왕조의 후손 이반 아센 3세를 자신의 딸 이레네와 결혼시켜 새로운 차르로 내세웠다.

이러한 상황은 이바일로와 마리아 칸타쿠제나의 동맹을 유발했고, 이바일로는 그녀와 결혼하여 1278년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반 아센 3세를 옹립하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1279년까지 북쪽에서 몽골의 침입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279년 몽골의 대군에게 드러스터르 요새에 3개월간 포위되었다.[6] 이바일로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지자 터르노보는 혼란에 빠졌고, 귀족들은 이반 아센 3세를 황제로 인정하였다. 이반 아센 3세가 황제가 된 후 마리아 칸타쿠제나와 미하일 아센 2세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추방되었다.[15]

얼마 후 이바일로는 몽골군의 포위를 뚫고 터르노보로 돌아왔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데비나 전투와 발칸 가도에서 비잔티움의 구원병을 연달아 격파하였다.[7] 1280년 이반 아센 3세는 터르노보에서 도망쳤고,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가 새로운 차르로 옹립되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귀족들을 통합하였고, 이바일로는 점차 세력을 잃었다. 1280년 (혹은 1281년) 그는 몽골의 노가이 칸에게 망명하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노가이는 결국 이바일로를 암살하였다.[8]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이바일로의 반란을 유럽사 최초의 위대한 농민 반란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3. 3. 몰락과 죽음

1277년 농민 반란을 일으켜 황제 콘스탄틴 티흐를 살해하고 불가리아의 차르가 되었던 이바일로는, 1279년 몽골군에 의해 드러스터르 요새에 포위되었다. 이바일로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지자 터르노보 귀족들은 이반 아센 3세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바일로는 몽골군의 포위를 뚫고 터르노보로 돌아왔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 대신 데비나 전투 등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구원병을 연이어 격파하며 세력을 유지했다.[7]

1280년 이반 아센 3세가 터르노보에서 도망치고, 게오르기 테르테르가 새로운 차르로 옹립되면서 이바일로는 점차 세력을 잃었다.[11] 결국 1280년 또는 1281년에 몽골의 노가이 칸에게 망명하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노가이는 이반 아센 3세의 편을 들어 이바일로를 암살했다.[8] 노가이와 이반 아센 3세는 모두 비잔티움 제국 황제 미카일 8세의 딸과 결혼한 사이였다.[8]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이바일로의 반란을 유럽 최초의 위대한 농민 반란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바일로는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 14세기 발칸반도에서 '가짜 이바일로'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4. 유산

이바일로의 반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유럽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칭송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1270년대의 어려운 사회적 상황이 반란에 기여한 것은 확실하지만, 이바일로의 권력 장악은 잔 다르크가 이끈 것과 같은 민족주의적 반응과 더 유사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처럼 이바일로 역시 대중의 상상 속에 살아남았고,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는 가짜 이바일로들이 나타났다(대부분 비잔틴 제국 영토에서).

남극 남셰틀랜드 제도 스노우 섬에 위치한 이바일로 만은 이바일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9]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인 이바일로브그라드가 있다.

이바일로의 사후에도 민중은 그의 이름을 잊지 못했다.[11]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에 침입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바일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 농민들을 오스만과의 싸움에 나서도록 부추겼지만, 동로마 황제에 의해 투옥되었다.[15]

5. 대중문화

실시간 전략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I: 결정판''에는 이바일로의 반란과 콘스탄틴 1세 암살로 시작하여, 이바일로가 노가이 칸 휘하의 몽골로 망명하여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으로 끝나는 5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바일로" 캠페인이 포함되어 있다.[10]

6. 가족

이바일로는 마리아 칸타쿠제나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이름은 출처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딸은 1279년 어머니가 임신한 채로 비잔티움 제국에 붙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될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1]

참조

[1] 웹사이트 Britannica http://www.britannic[...] 2014-07-25
[2] 간행물 SOME CUMANIAN NAMES AND APPELLATIONS DURING THE SECOND BULGARIAN EMPIRE https://www.uni-vt.b[...]
[3] 서적 Българи на Морава
[4] 서적 Древнетюркский словарь
[5] 서적 Българският цар Ивайло в светлината на езико вата археология
[6] 웹사이트 HTH article http://www.historyth[...] 2014-07-25
[7] 웹사이트 Ovech castle http://www.panacomp.[...] 2014-07-25
[8] 웹사이트 Inquire article http://www.inquireli[...] 2013-10-12
[9] 웹사이트 Ivaylo cove https://data.aad.gov[...] 2014-07-25
[10] 서적 ブルガリア 1
[11] 서적 東欧を知る事典
[12] 서적 ブルガリア 1
[13]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4]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5] 서적 ブルガリア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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