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18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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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병기(1891년)는 대한민국의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1891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 한문을 배우다 신학문을 접하고, 전주공립보통학교와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시조 부흥 운동을 펼치며 《가람 시조집》 등을 발간했고, 조선어 연구회 활동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교육계에 몸담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역임했다. 1968년 사망했으며,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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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189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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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이병기 |
한자 이름 | 李秉岐 |
로마자 표기 | I Byeonggi |
호 | 가람(嘉藍) |
출생지 | 조선전라북도익산시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국적 |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
신장 | 170cm |
종교 | 유교(성리학) → 대종교 |
![]() | |
학력 | |
학교 | 한성사범학교 졸업 |
경력 | |
직업 | 시조 시인 겸 국문학자 및 대학 교수 |
기타 경력 | 신문학원 감사 |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장 임기 | 1950년 10월 1일 ~ 1954년 10월 2일 |
대통령 | 이승만 |
국방부 장관 | 신성모 국방부 장관 장경근 국방부 장관 직무대리 이기붕 국방부 장관 신태영 국방부 장관 손원일 국방부 장관 |
활동 | |
주요 관심 분야 | 언어학(조선어)・문학 |
2. 생애
이병기는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 서울대학교 강사, 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그는 한글 사용을 장려하며 일본 제국에 저항했다. 그는 현대 한국 시를 장려하는 잡지 ''문장''을 창간했으며, 한중록(1939년 2월~1940년 1월)과 인현왕후전 등 많은 고전 작품들을 연재했다.
한국 독립 회복 후 서울대학교에 가람 문고를 설립했다.[6] 그는 시조 외에도 한국 문학 및 한국 역사에 대한 주석을 수집하고 작성했는데, 한중록, 인현왕후전, "열로원야화기", "춘향가" 등이 있다.[6]
다음은 이병기의 생애를 정리한 표이다.
연도 | 사건 |
---|---|
1891년 3월 5일 |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출생 |
1906년 12월 5일 | 충청남도의 김수와 결혼 |
1908년 | 장녀 순희 출생 |
1909년 4월 13일 | 일기 쓰기 시작 |
1909년 | 전주공립보통학교 입학 |
1910년 | 관립한성사범학교 입학 |
1921년 |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연구회 조직 |
1922년 | 동광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역임 (1942년까지) |
1922년 | 종로구 계동 79번지 13호로 이사 |
1924년 | 장남 동희 출생 |
1926년 | 차녀 한희 출생 |
1926년 | 「시조회」 발기 |
1929년 | 차남 경희 출생 |
1932년 | 삼남 송희 출생 |
1935년 |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 역임 |
1937년 | 덕수상업학교 강사 역임 |
1938년 | 연희전문학교 강사 역임 |
1942년 10월 23일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 |
1945년 8월 | 미군정청 편수관 역임 |
1946년 | 미군정청 편찬과장 역임 |
1946년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역임 |
1952년 |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취임 |
1954년 | 학술원 회원 역임 |
1956년 |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역임 |
1957년 | 뇌출혈로 쓰러짐 |
1958년 3월 | 고향으로 은퇴 |
1960년 | 학술원 공로상 수상 |
1961년 | 전북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취득 |
1968년 11월 29일 | 사망 |
2. 1. 출생과 성장
이병기는 1891년 3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 570번지에서 연안 이씨 이채와 파평 윤씨 사이의 6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는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개화인이었고, 집안은 유복했다. 이병기는 엄격한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신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한문을 배웠다. 1906년 12월 5일, 충청남도 광산 김씨의 딸 김수와 결혼했다.[2]량치차오를 읽고 개화 사상에 동경하여 1909년 전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좋아 6개월 만에 졸업하고 관립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에게서 조선어 문법을 배웠다.[2] 관립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에는 전라남도 남양, 전주제2학교, 여산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2]
2. 2. 교육 및 시조 부흥 운동
이병기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2]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2]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2]시조와 한국어 및 문학 연구로 알려진 그는,[1][4] 특히 시조 부활을 이끌어 수백 편의 시조를 썼고, 많은 논문에서 시조 기법에 대해 논했다.[1][4] 1926년, 이병기는 「시조회」를 발기하고, 1928년에 「가요연구회」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대하면서 시조 연구에 매진했다.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2] 1922년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국어 교육에 힘썼다.(1942년까지).[2]
2. 3. 조선어학회 사건과 투옥
이병기는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다.[2] 1942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 형무소에 투옥되었다.[3][1]1942년 10월 22일, 형사가 이병기 집을 방문하여 이병기를 연행했다.[1] 이로 인해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될 때까지 함흥 형무소 옥중에서 보냈다.[1]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냈다.[1]
2. 4.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8월,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이병기는 다시 시조 창작과 국문학 연구에 매달렸다. 미군정청 편수관을 시작으로 서울대학교, 단국대학교, 신문학원, 국민대학교, 동국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3][1]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수집한 서적을 트럭에 싣고 고향으로 피난하였다. 1952년에는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에 취임하였다.[3]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대에 진입할 때 '인민군의 서울 입성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대형 플래카드를 손수 정문에 내걸고 직접 환영을 나갔다는 증언이 있다.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좌익학생과 김삼불, 이명선 등과의 친분으로 곤경에 처하여, 고향 전북으로 낙향해 전시를 보냈다. 1950년 10월부터 1954년까지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근무하였다.[7]
1956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 기념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요양을 위해 모든 교편을 끊고 고향으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1968년 11월 28일 낮, 이병기가 쓰러졌고, 밤 1시에 숨을 거두었다. 그 유해는 전라북도 예총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생가 뒷산에 있는 묘소에 매장되었다.
2. 5. 말년과 사망
1956년경부터 이병기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1] 1957년 10월 9일, 한글 기념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뇌출혈로 쓰러졌다.[1] 요양을 위해 모든 교편을 끊고 고향으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1] 1968년 11월 28일 낮, 이병기가 쓰러졌고, 밤 1시에 숨을 거두었다.[1] 그의 유해는 전라북도 예총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생가 뒷산에 있는 묘소에 매장되었다.[1]1969년, 전주시 다가공원에 「가람 시비」가 세워졌다.[1] 이병기 생가는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1]
3. 학력
- 전라북도 전주보통학교 졸업
- 한성사범학교 졸업
4. 저작
이병기는 시조 외에도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한국 문학 및 한국 역사와 관련된 주석을 수집하고 작성했다.[6]
4. 1. 시조집
이병기는 시조 부흥을 이끌며 수백 편의 시조를 썼고, 많은 논문에서 시조 기법에 대해 논했다.[1][4] 그의 가장 유명한 시조집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099 가람 시조집]''[5]으로,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947년에 재출판되었다.[1]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
1939년 | 『가람 시조집』 | 문장사 |
1940년 | 『역대 시조선』 | 박문서관 |
1940년 | 『인현왕후전』 | 박문서관 |
1948년 | 『의유당일기』 | 백양당 |
1948년 | 『근조내간선』 | 국제문화관 |
1957년 | 『국문학전사』 | 신문화사 (백철 공저) |
1961년 | 『국문학개설』 | 일지사 |
1966년 | 『가람문선』 | 신구문화사 |
4. 2. 저서
- 1939년 - 『가람 시조집』(문장사)
- 1940년 - 『역대 시조선』(박문서관)
- 1940년 - 『인현왕후전』(박문서관)
- 1948년 - 『의유당일기』(백양당)
- 1948년 - 『근조내간선』(국제문화관)
- 1957년 - 『국문학전사』(신문화사, 백철 공저)
- 1961년 - 『국문학개설』(일지사)
- 1966년 - 『가람문선』(신구문화사)
4. 3. 대표작
5. 연보
연도 | 내용 |
---|---|
1891년 3월 5일 |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출생.[2] |
1906년 12월 5일 | 충청남도의 김수와 결혼. |
1908년 | 장녀 순희 출생. |
1909년 4월 13일 | 일기 쓰기 시작. |
1909년 | 전주공립보통학교 입학. |
1910년 | 관립한성사범학교 입학. |
1921년 |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 |
1922년 | 동광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역임 (1942년까지). |
1922년 | 종로구 계동 79번지 13호로 이사. |
1924년 | 장남 동희 출생. |
1926년 | 차녀 한희 출생. |
1926년 | 「시조회」 발기. |
1929년 | 차남 경희 출생. |
1932년 | 삼남 송희 출생. |
1935년 |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 역임. |
1937년 | 덕수상업학교 강사 역임. |
1938년 | 연희전문학교 강사 역임. |
1942년 10월 23일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2] |
1943년 9월 18일 |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2] |
1945년 8월 | 미군정청 편수관 역임. |
1946년 | 미군정청 편찬과장 역임. |
1946년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역임.[3][1] |
1952년 |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취임.[3] |
1954년 | 학술원 회원 역임. |
1956년 |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역임. |
1956년 | 전북대학교 퇴임.[3] |
1957년 | 뇌출혈로 쓰러짐. |
1958년 3월 | 고향으로 은퇴. |
1960년 | 학술원 공로상 수상. |
1961년 | 전북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취득. |
1968년 11월 29일 | 사망. |
6. 관련 문화재
- 이병기 선생 생가 -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
- 이병기생가의탱자나무 - 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
7. 평가
이병기는 시조와 한국어 및 문학 연구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시조의 부활을 이끌어 수백 편의 시조를 썼고, 많은 논문에서 시조의 기법에 대해 논했다.[1][4] 그의 가장 유명한 시조집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099 가람 시조집]''[5]으로, 1939년 일제강점기에 처음 출판되었고, 1947년에 재출판되었다.[1]
그는 한글 사용을 장려하며 일제강점기에 저항했다. 그는 현대 한국 시를 장려하는 잡지 ''문장''을 창간했으며, 한중록(1939년 2월-1940년 1월)과 인현왕후전 등 많은 고전 작품들을 연재했다.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식민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한국 독립 회복 후 그는 서울대학교에 가람 문고를 설립했다.[6] 그는 시조 외에도 한중록, 인현왕후전, "열로원야화기", "춘향가" 등 한국 문학 및 한국 역사에 대한 주석을 수집하고 작성했다.[6]
참조
[1]
Wikidata
[2]
웹사이트
이병기 Encyclopedia of Korean Folk Culture: Lee Byeonggi
https://terms.naver.[...]
2023-06-12
[3]
웹사이트
SNU to open a classroom to honor modern poet Lee Byung-gi
https://www.donga.co[...]
2023-06-12
[4]
Wikidata
[5]
웹사이트
가람 Garam Sijo Collection
https://encykorea.ak[...]
2023-06-28
[6]
웹사이트
Upright Korean poet Lee Byeong-ki
https://www.donga.co[...]
2023-06-12
[7]
서적
역사 앞에서
창비
1993-06-24 #날짜는 추정치입니다. 원본에 년도만 있으므로 월일은 06-24로 임의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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