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바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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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다 바이간은 1685년 일본 단바국에서 태어난 에도 시대의 사상가로, 석문심학(石門心学)이라는 독자적인 철학을 확립했다. 그는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농공상 신분 차별을 비판하고, 마음을 다해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성학(性學)"을 주창했다. 주요 저서로는 『도비문답』과 『검약제가론』이 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그의 사상이 실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시다 바이간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선구적인 사상을 제시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현대에도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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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심학 - 성실
성실은 공정하고 솔직하게 행동하거나 사실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러 문화권과 종교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지만, 지나치게 솔직한 것은 무례함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 단바국 사람 - 덴 겐지로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였던 덴 겐지로는 체신대신, 대만 총독, 법무대신, 농상무대신, 추밀원 의원 등을 역임하며 일본 제국주의 시기 활발히 활동했고, 대만 총독 재임 시 사회적, 정치적 동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재건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 단바국 사람 - 마루야마 오쿄
마루야마 오쿄는 에도 시대 중기의 일본 화가로, 사실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화풍을 창시하여 마루야마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서양화 기법과 동양 회화 전통을 융합하여 자연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하고 사생을 중시하는 태도로 많은 걸작을 남겨 당대 상인 계층에게 큰 인기를 끌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마루야마파는 교토 화단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 18세기 학자 - 혼다 도시아키
혼다 도시아키는 에도 시대 후기 가가 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사회 문제와 북방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급진적인 서구화, 에조치 개발, 해외 영토 획득, 막부 주도 교역, 중상주의적 개혁론을 주장했고, 그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주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 18세기 학자 - 안도 쇼에키
안도 쇼에키는 18세기 일본의 사상가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하며 평등 사회를 주장했고, 의사이자 선승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상 사회를 제시했으며, 20세기에 재조명되어 현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시다 바이간 | |
---|---|
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石田 梅岩 |
본명 | 石田 勘右衛門 (이시다 칸에몬) |
출생 | 1685년 |
사망 | 1744년 10월 29일 |
직업 | 사상가, 윤리학자 |
주요 사상 | 석문심학 |
인물 정보 | |
출생지 | 일본 교토 |
활동 시기 | 에도 시대 중기 |
영향 | 일본의 상업 윤리에 큰 영향을 미침 |
학문 분야 | 유학, 불교, 신도 등을 융합한 독자적인 사상 체계 구축 |
사상적 특징 | 사무라이 계급 윤리와 상인의 실용주의적 윤리 결합 시도 사회 계층 간의 조화 강조 |
저서 | 도이문답 (問答) 수학요령 (修學要領) |
2. 생애
이시다 바이간은 1727년 재가 불자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사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29년(교호 14년) 45세에 자택에서 소개나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무료 강좌를 열고 평생 포교에 힘썼다.[3][5]
바이간 사상의 핵심은 "마음을 다해 성(性)을 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성(性)"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마땅히 해야 할" 행동 규범을 찾고자 했다.[3] 무사와 서민은 다르지 않으며, 사농공상의 신분은 인간의 가치 차이가 아니라 직분이나 직역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았다.[3]
1744년 60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동산 조변야의 연년사[6]에 묻혔다. 주요 저서로는 『도비문답』, 『검약제가론』이 있다. 1917년(다이쇼 6년) 정오위가 추증되었다.[7]
바이간 사후, 테지마 토안 등을 중심으로 그가 세운 사상과 조직이 정비되어 "이시다 심학"이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다. 메이지 시대 이후 심학의 가르침을 계승한 실업가로는 노마 세이지 등이 있다.[8] 검약 장려와 부의 축적을 천명의 실현으로 보는 그의 생각은,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니일리 벨러에 의해 칼뱅주의 상업 윤리의 일본판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산업혁명 성공의 원동력으로 여겨졌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시다 바이간에게 경도되었다는 속설이 있으나,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배운 우사미 타이이치로(주식회사 뉴포트 대표이사)의 상세한 조사에 의해 이는 명확히 부정되었다.[9]
2. 1. 어린 시절과 도제 생활
이시다 바이간은 1685년 단바국 구와다군(지금의 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 백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4] 1692년 8세에 교토의 상가에 데치(丁稚)로 들어갔으나, 7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3] 1695년 11세 때 교토의 포목상에서 도제 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대우가 좋지 않아 4-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향에서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던 이시다 바이간은 1707년 23세 때 다시 포목점 쿠로야나기가에 들어가 도제로 일했다.[3]
2. 2. 사상가의 길
1727년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에게서 배워 사상가의 길을 시작했으며, 45세에 소개장이나 성별 구분 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무료 강좌를 자택에서 개설했다.[16] 이후 석문심학으로 알려지는 사상을 강의했는데, "학문이란 마음을 다하고 본성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마음과 자연이 하나 되는 질서와 이치를 깨닫는 학문이었다. 이시다는 스스로를 유학자라 칭했고, 그의 학문은 성리학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보통 심학으로 불린다.3. 석문심학(石門心学)
1724년경 석문심학이라는 독자적인 철학을 확립하고, 1729년(교호 14년) 45세에 자택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포교에 힘썼다.[3] 이시다 바이간의 강의는 소개가 필요 없고 성별에 관계없이 무료였다.[5]
이시다 바이간 사상의 핵심은 "마음을 다해 성(性)을 안다"는 것으로,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성(性)"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마땅히 해야 할" 행동 규범을 구하는 데 있었다.[3] 그는 무사와 서민은 다르지 않으며, 사농공상의 신분은 인간 가치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직분이나 직역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았다.[3] 이시다 바이간은 스스로를 유학자라 칭하며 자신의 학문을 "성학(性學)"이라고도 했지만, 테지마 토안 등 제자들에 의해 "심학(心學)"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1744년 60세로 사망하여 동산 조변야의 연년사[6]에 매장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도비문답』, 『검약제가론』이 있으며, 1917년(다이쇼 6년) 정오위에 추증되었다.[7]
이시다 바이간 사상의 근저에는 송학의 흐름을 잇는 천명론이 있었다. 스즈키 쇼조의 직분불행설이 사농공상 중 상인의 직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과 달리, 이시다 바이간은 오랜 상가 생활을 통해 상업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업의 본질은 교환의 중개업이며, 그 중요성은 다른 직분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워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전성기에는 문하생이 400명에 달했고, 테지마 토안, 「송옹도화」를 저술한 후세 마츠오, 심학 도화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구옹도화」의 시바타 구옹 등 뛰어난 인재를 배출했다. 이시다 바이간 사후에는 테지마 토안 등을 중심으로 그가 구축한 사상과 조직이 정비되어 "이시다 심학"이 일본 각지로 확산되었다.
3. 1. 사농공상 평등 사상
이시다 바이간은 성리학의 천명론을 바탕으로, 스즈키 쇼조의 직분설과 달리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상업의 본질이 교환 및 중개업이며, 그 중요성이 다른 직업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제자가 400명에 달했다.[18]이시다는 "마음을 다해 성(性)을 안다"는 것을 강조하며,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성(性)"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마땅히 해야 할" 행동 규범을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사와 서민은 다를 바 없으며, 사농공상의 신분은 인간 가치에 의한 차별이 아니라 직분이나 직역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3]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은 사농공상의 직업관 속에서 상업의 의미를 명확히 설명하고, 상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3. 2. 영향
이시다 바이간 사상의 근저에는 성리학의 천명론이 있다. 이시다는 스즈키 쇼조의 직분설(職分説)이 사농공상의 직업관에서 상업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과 달리, 상인으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상업의 본질을 잘 알았다. 그는 상업의 본질은 교환/중개업이고 그 중요성은 다른 직업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商業の本質は交換の仲介業であり、その重要性は他の職分に何ら劣るものではない」라는 그의 설명은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18] 전성기엔 제자가 400명까지 되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테지마 도안(1718년~1786년): 좌담수필의 저자
- 나카자와 도니: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심학에 입문시킴
- 후세 쇼오(1725년~1784년): 「松翁道話」의 저자
- 시바타 규오(1783년~1839년): 심학강의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는「鳩翁道話」의 저자
- 사이토 젠몬(斎藤全門), 오시마 우린(大島有隣), 오쿠다 라이조(奥田頼杖) 등
메이지 시대 이후 심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인물 중에는 노마 세이지가 대표적이다.[18] 검약과 부의 축적을 천명으로 삼아 실천한다는 생각은 로버트 벨라가 일본판 칼뱅주의 상업관으로 포장하기도 했으며, 일본 산업혁명을 이끈 주요 윤리관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이 커지고 기업들의 환경 범죄가 늘어나면서 서구권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이중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달콤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말(「二重の利を取り、甘き毒を喰ひ、自死するやうなこと多かるべし」)이나, 진짜 상인은 타인을 먼저 세우고 자신도 똑바로 서는 것을 생각한다(「実の商人は、先も立、我も立つことを思うなり」)는 등의 쉬운 표현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런 이시다 사상은 오우미 상인들의 삼면이 좋다(「三方よし」) 사상과 함께 일찍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 사상은 기업의 영리활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사업 발전의 관점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며, 기부나 원조처럼 본업 이외의 사회공헌을 강조한 서구의 사회적 책임론과는 조금 다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시다 바이간에 심취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관련자들은 마쓰시타가 이시다 바이간을 언급한 적이 없거나[19] 아예 몰랐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20] 기업인 중에서는 스미토모의 오구라 마사츠네(小倉正恒)가 석문심학회 회장을 맡은 바 있다.
4. 재평가와 현대적 의의
이시다 바이간은 성리학의 천명론에 기반하여 상업의 본질을 교환/중개업으로 보았고, 그 중요성이 다른 직업들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여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전성기에는 제자가 400명에 달했으며, 테지마 도안, 나카자와 도니, 후세 쇼오, 시바타 규오 등이 알려져 있다.[18]
메이지 시대 이후 이시다 바이간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노마 세이지가 대표적이다. 로버트 벨라는 이시다 바이간의 검약과 부의 축적을 천명으로 실천한다는 생각을 일본판 칼뱅주의 상업관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이는 일본 산업혁명을 이끈 주요 윤리관이 되었다.
2011년에는 이시다 바이간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스코트 캐릭터 '신가군'이 제작되었고,[11] 탈인형을 이용한 이벤트 출연 및 관련 상품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4. 1.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1970년대부터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기업들의 환경 범죄가 늘어나면서 서구권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이중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달콤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거나[18] "진짜 상인은 타인을 먼저 세우고 자신도 똑바로 서는 것을 생각한다"[18]처럼 쉬운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표현해냈다. 이런 이시다 사상은 오우미 상인들의 삼방향시(三方よし) 사상과 함께 일찍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 사상은 기업의 영리 활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지속 가능한 사업 발전의 관점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며, 기부나 원조처럼 본업 이외의 사회 공헌을 강조한 서구의 사회적 책임론과는 조금 다르다.4. 2. 마쓰시타 고노스케와의 관계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시다 바이간에 심취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관련자들은 마쓰시타가 이시다 바이간을 언급한 적이 없거나[19] 아예 몰랐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20] 기업인 중에서는 스미토모의 오구라 마사츠네(小倉正恒)가 석문심학회 회장을 맡은 바 있다.5. 성격 및 어록
이시다 바이간은 도리를 중시하는 원리주의자였으며,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미움받을 정도로 반골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21]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 따지기를 좋아해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14~15세 때 그런 성격을 깨닫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2]
이시다 바이간은 배운 것이 없으면서 글을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답했다.[23]
文字がなかった昔に、忠孝はなく、聖人はいなかったとでもいうのか。聖人の学問は行いを本とし、文字は枝葉なることを知るべし|문자가 없었던 옛날에, 충효는 없고 성인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성인의 학문은 행위를 본으로 하고, 글자는 가지와 잎임을 알아야 한다일본어
스스로 덕에 이르는 길을 실천하지 않고 글자에만 집착하는 자들을 '문자 기생(文字芸者)'이라고 불러도 좋겠다고 답했다.[13]
조닌의 유흥 문화에는 비판적이었으나, 사교를 위한 기예는 인정했다.[24] “지금에 와서는 친구들과의 교류(사교)도 많고, 우타이·고·다도 등도 익히지 않으면 교류가 나쁘다”라고 사교를 위한 여러 가지 예능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14]
사무라이를 농공상의 우두머리라고 하여 봉건적 신분제나 직업관을 인정했지만, 어디에서 태어나더라도 사람에겐 변화란 건 있기 마련이라며, 서민들 사이에서는 위아래 없이 대등하다고 했다.[25] “아랫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져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서민 사이에서는 서로 평등하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인 직인의 신분으로는 무사도 상인도 평등하다고 했다.[15]
6. 관련 시설
교토부 가메오카시의 도롯가 휴게소인 가레리아 가메오카 내에 이시다 바이간 기념 시설인 "바이간 학당"이 있다.[1]
좌상은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구의 스가와라 신사, 하시가미역으로 개축된 출신지 JR가메오카역 개찰구 앞, 출신지인 교토부 가메오카시 히가시벳핀초에 있는 가메오카시립 히가시벳핀 초등학교에 안치되어 있다.[2]
교토부 가메오카시 히가시벳핀의 출신지 주변은 "바이간의 마을"로서 탄생지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기념관 등이 2024년경까지 건설될 예정이다.[3]
참조
[1]
웹사이트
Ishida Baigan / Kotobank
https://kotobank.jp/[...]
[2]
서적
Ishida Bai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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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선생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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