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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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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양무는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 고려 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1221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나, 정확한 생애는 기록으로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 묘소가 있으며, 부인 삼척 이씨와 함께 1899년 고종에 의해 존호가 올려졌다. 이양무의 묘소인 준경묘와 관련된 백우금관 설화는 풍수지리 사상과 결합되어 조선 왕조의 건국과 관련된 이야기로 전해지며, 현재도 명당으로 여겨진다. 아들 이안사는 조선 목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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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양무
한자 표기李陽茂
로마자 표기I Yangmu
출생 및 사망
출생1186년
출생지전주, 전라북도, 고려
사망1231년 (44-45세)
사망지활기마을, 삼척시, 강원도, 고려
묘소이릉 / 준경묘 (333–360, 중영길, 미로면, 삼척시, 강원도)
가족 관계
배우자삼척 이씨 부인 (1201년 결혼)
자녀5남 (이안사 포함)
아버지이인
어머니남평 문씨 부인
관직 및 기타
추증 시호선조고 고려장군 존령
종교불교

2. 생애

2. 1. 출생과 가계

이양무는 전주 이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증조부는 이진유, 조부는 이궁진, 아버지는 내시집주 이린이다.[10] 어머니는 문극겸의 딸이다.[10] 부인은 삼척 이씨 이강제의 딸이다.[10]

이양무는 전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아들인 이안사와 함께 삼척으로 이주하여 1231년까지 살았다.[10]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에 위치한 준경묘(濬慶墓)에 묘소가 있다.[10] 부인 이씨 또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에 위치한 영경묘(永慶墓)에 안장되어 있다.[10] 1899년 4월 16일 조선 고종은 준경묘와 영경묘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 새겨 기록함)를 세웠다.[10]

2. 2. 관직 활동

고종 8년 4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선발한 과거 급제자 86인 중 한 명으로, '이양무'라는 이름이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다. 20세 전후로 등용되었다면 10년 후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은 확인하기 어렵다.

2. 3. 사망과 묘소

전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아들인 이안사와 함께 삼척 활기리로 이주하여 1231년까지 살았다. 현재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에는 준경묘(濬慶墓)가 있고, 부인 이씨는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에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1899년 조선 고종은 준경묘와 영경묘에 존호를 올리고 묘비와 음기를 세웠다.

3. 전해지는 이야기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소를 영경묘 · 준경묘라고 추정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는데 고종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 영경묘 · 재실 · 목조대왕 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13][14]

현재 활기리에서 고개를 넘어 준경묘에 가보면 강원도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있다.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 이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평가들이 나온다. 이것이 조선왕조가 장자보다 중자들이 계통을 잇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이 이곳에서 죽자, 목조대왕은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산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고 한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얘기가 전해지고 있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제일의 명당 중 하나로 보고 있다.[13][15]

3. 1. 준경묘와 영경묘 설화

이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소는 목조가 선친의 묘 자리를 찾던 중, 도승의 말을 듣고 명당 자리에 묘를 썼다는 설화가 전해진다.[13] 묘소는 강원도 두타산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15]

개토제 때 소 100마리 대신 흰 소 한 마리를, 금관 대신 황금빛 짚으로 관을 만들어 장례를 치렀다는 백우금관(白牛金冠) 설화가 전해진다.[13][15] 목조는 도승이 제시한 조건인 소 1백 마리와 금관을 마련하기 어려워, 처가에 있던 흰 소 한 마리로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황금 빛깔의 밀짚(혹은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을 대신했다고 한다.

백우금관 설화는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 왕조의 수명이 되었다는 민간 설화이다. 이는 풍수지리 사상과 결합하여 널리 퍼졌으며,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가들이 제일의 명당 중 하나로 꼽는 곳이다.[13][15]

3. 2. 풍수지리적 평가

준경묘는 강원도 두타산 줄기에 위치하며, 묘소는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배치되어 있다.[13] 안산을 바라보며 좌우로 근산과 대명산, 뒤로는 방위산과 역마산 등 5봉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우백호는 강하고 좌청룡은 약하여 전주 이씨 후손 중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풍수지리적 평가가 있다.[13] 이는 조선 왕조에서 장자 대신 중자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13]

조선 건국 160여 년 전, 목조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던 중, 도승으로부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13] 도승이 제시한 조건은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고 금관을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목조는 흰 소 한 마리로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황금 빛깔의 밀짚(또는 귀리짚)으로 금관을 대신하는 편법을 썼다.[13] 이로 인해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했으며,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 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 년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3]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 년이라 도합 5백 년의 조선 왕조 수명이 되었다고도 한다.[13] 이러한 연유로 준경묘는 오늘날에도 풍수가들에게 명당 중 하나로 여겨진다.[13][15]

4. 가계

이양무는 이강제(李康濟)의 딸 삼척 이씨(三陟 李氏)와 혼인하였다.[10] 삼척 이씨는 사후에 선조비 이씨(先祖妣 李氏)로 추존되었다.[10]

이양무의 조부는 대장군 이용부(大將軍 李勇夫)이고, 아버지는 내시집주 이린(內侍執奏 李璘)이다.

이양무와 삼척 이씨 사이에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은 목조대왕 이안사이고, 차남은 이영필(李英弼), 삼남은 이영밀(李英謐), 사남은 이영습(李英襲)이다.[10] 이안사는 삼척에서 의주(宜州)를 거쳐 오동(斡東, 알동)으로 이주하였다.[10]

참조

[1] 웹사이트 http://samcheok.gran[...] 2023-04-22
[2] 웹사이트 http://m.ksmnews.co.[...] 2020-04-13
[3]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4-22
[4]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2
[5]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2
[6]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2
[7]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2
[8]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2
[9]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2
[10] 서적 高麗朝鮮陵誌 https://books.google[...] Munseongdang 1991
[11] 문서 참고 http://sillok.histor[...]
[12] 문서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13] 웹사이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http://www.rfo.co.kr[...] 2006-04-03
[14] 뉴스 삼척 준경묘·영경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 http://www.kwnews.co[...] 강원일보 2012-04-27
[15] 뉴스 하국근의 風水기행, 삼척 준경묘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0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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