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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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계 전쟁은 1929년 장제스와 신광서파 군벌 간에 벌어진 내전으로,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은 장제스가 국민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와 광시 군벌의 세력 확장이 충돌하면서 발발했다. 후난성에서의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신광서파를 공격했고, 광시 군벌은 광둥을 공격하며 맞섰다. 그러나 결국 신광서파는 패배하여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이 국외로 도피했다. 이 전쟁으로 장제스는 경쟁 군벌 세력을 약화시켰지만, 광시 군벌은 6개월 만에 재건하여 중원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은 공산 게릴라의 세력 확대를 초래하고, 광시 지역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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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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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분쟁 명칭 | 장계 전쟁 |
시기 | 1929년 3월 ~ 6월 |
장소 | 허베이, 후베이, 광시, 광둥 |
부분 | 중원 대전의 제1단계 |
결과 | 장개석의 승리, 신광시파 지도자들(이종인, 백숭희, 황소굉)의 하야 및 망명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신계계 |
교전국 2 | 국민정부 |
지휘관 | |
신계계 | 이종인, 백숭희, 황소굉, 후종탁, 하위, 도균 등 |
국민정부 | 장개석, 천제탕, 탕성지, 류치, 장발규, 한푸취 등 |
병력 규모 | |
신계계 | 약 20만 명 |
국민정부 | 약 40만 명 |
관련 전투 | |
전투 목록 | 청위안-스룽 전투 제1차 구이린 전투 제2차 후이저우 전투 제2차 광저우 전투 류저우 전투 구이핑 전투 |
2. 배경
1928년 국민당의 북벌 완료로 형식적인 중국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리쭝런의 신광서파, 옌시산의 산서파, 펑위샹의 서북파 등 주요 군벌 세력 간의 긴장은 여전히 높았다. 각 파벌은 북벌 과정에서 점령한 지역에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고 군벌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929년 초 '선후편견회의'를 소집하여 군대 감축 및 재편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각 파벌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군축 논의는 파벌 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난항을 겪었고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3]
특히 장제스와, 북벌 과정에서 후난, 후베이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장제스의 잠재적 경쟁자로 부상한 리쭝런의 신광서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29년 2월 신광서파가 독단적으로 후난성 주석 루디핑을 축출한 '상안'(湘案)과, 3월 장제스가 신광서파의 동맹인 리지선을 구금한 사건을 직접적인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 국민정부가 신광서파 토벌을 선언하면서 결국 장제스와 신광서파 간의 전면적인 군사 충돌인 장계전쟁이 발발했다.
2. 1. 국민당의 북벌과 군벌 간 갈등
1927년 말, 영한 분열 국면에서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는 대립했다. 리쭝런이 이끄는 신광서파는 난징 정부 측의 주요 군벌로 부상했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에 충성하던 탕성즈의 군대를 영한 전쟁에서 격파하고 그의 부대를 흡수하여 후난과 후베이 지역까지 장악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3] 이 과정에서 리쭝런의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은 급증하여 장제스의 지도력에 도전할 만한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11월, 장제스 측 장파쿠이와 황치샹 등이 광저우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면서 신광서파의 중앙 권력 장악 시도는 잠시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신광서파는 북벌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1928년, 장제스, 리쭝런(신광서파), 옌시산(산서파), 펑위샹(서북파, 국민군)의 4대 파벌은 연합하여 약 40만 명의 병력으로 북벌 2단계를 개시했다. 이들은 펑톈 군벌을 격파하며 화북으로 진격했다. 펑톈 군벌의 수장 장쭤린은 중국 동북부로 퇴각하던 중, 그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은 일본 관동군에 의해 열차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928년 12월 29일 역치(易幟, 기를 바꾸어 국민정부에 복속함을 의미)를 선언하며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이로써 북벌은 종결되고 형식적으로나마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북벌 과정에서 신광서파는 허베이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북벌이 끝났지만, 4대 파벌은 여전히 각자 점령지에 수십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 국민정부는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군벌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선후편견회의'(善後編遣會議, 군대 정편 및 재정 선후 처리 회의)를 소집하여 군축을 시도했다.
당시 각 파벌의 세력은 다음과 같았다.
파벌 | 지도자 | 명칭 | 병력 (추정) | 주요 통제 지역 |
---|---|---|---|---|
장제스파 | 장제스 | 제1집단군 | 50만 명 이상 | 장강 이남 (강남) |
신광서파 | 리쭝런, 바이충시 | 제4집단군 | 약 20만 명[3] | 광시, 후난, 후베이, 허베이 일부 (산하이관-톈진) |
산서파 | 옌시산 | 제3집단군 | 20만 명 이상 | 산시, 허베이 북부, 베이징, 톈진 |
서북파 (국민군) | 펑위샹 | 제2집단군 | 약 40만 명 | 서북 지역, 허난 |
신광서파는 광둥을 장악한 리지선과 오랫동안 정치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면 장제스는 국가 주석이라는 정치적 우위와 함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1929년 초 열린 선후편견회의에서 각 파벌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최대한 유지하려 하면서 군축 논의는 난항을 겪었다. 회의에서는 각 군을 사단으로 축소 재편하고, 4대 파벌이 각각 약 10만 명 전후의 병력을 보유하며 중앙 정부가 20만 명을 할당받아 총 병력을 60만 명 이내로 유지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졌으나[3], 파벌 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각 파벌은 회의 결의에 따라 부대 정리를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장계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건, 이른바 '상안'(湘案, 후난성 사태)이 발생했다. 1928년 초, 신광서파는 후난성을 장악하기 위해 성 주석 청첸을 연금하고 허젠과 루디핑을 공동 주석으로 임명했으나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1929년 2월, 루디핑이 장제스 측에 가담하자 장제스는 그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허젠은 즉시 우한 정치분회에 이를 보고했다.
2월 21일, 신광서파의 군 간부 샤웨이, 후종둬, 예치 등은 리쭝런이나 바이충시와의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우한 정치분회 명의로 루디핑의 모든 직위를 해임하고 군대를 동원해 창사에서 그의 부대를 무장 해제시킨 뒤 축출했다. 당시 난징에 머무르고 있던 리쭝런은 이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급히 상하이로 피신했다. 장제스와 리쭝런은 전보를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장제스는 신광서파가 중앙 정치회의의 결의를 위반했다며 군대를 동원해 토벌할 준비를 시작했다.
3월, 신광서파의 오랜 동맹이었던 광저우 정치분회 주석 리지선이 장제스와 신광서파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난징으로 갔으나, 오히려 장제스에게 구금되었다. 이와 함께 웨계(粤系, 광둥군) 군 간부 천지탕, 천밍수 등이 장제스에게 투항하면서 신광서파와 웨계의 정치적 연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3월 21일, 국민정부는 리쭝런, 바이충시, 리지선의 모든 직무를 해임하고 신광서파에 대한 무력 토벌을 준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펑위샹과 옌시산이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신광서파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립되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 2. 신계계의 세력 확장과 장제스의 견제
1927년 말 영한 분열 중 신계계(신광서파)는 국민정부 내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며 왕조명과 장개석 모두를 견제하는 위치에 섰다. 영한 전쟁 과정에서 신계계는 우한 정부 측 당생지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부대를 흡수하여 후난성과 후베이성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1] 리쭝런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그는 중국 국민당 내에서 장제스의 지도력에 도전할 수 있는 실력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1927년 11월, 장파쿠이와 황치샹이 주도한 광저우 장황 사변으로 인해 리쭝런의 정치적 입지가 잠시 흔들리기도 했으나, 신계계는 북벌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1928년 국민정부는 북벌 2단계를 개시했다. 장제스, 이종인(신계계), 옌시산, 펑위샹의 4대 파벌 연합군 약 40만 명이 펑톈 군벌을 격파하고 화북 지역 점령에 성공했다. 북벌 과정 중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장쭤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장쉐량이 이끄는 동북군이 12월 29일 역치청천백일기를 게양하고, 국민정부에 복속을 표명하는 것.를 선언하며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형식적인 전국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신계계는 허베이성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북벌 완료 후, 국민정부는 각 지역 군벌의 병력을 감축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제스 주도로 '선후편견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주요 파벌들의 세력 범위와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파벌 | 지도자 | 관할 지역 | 병력 (추정) | 주요 부대 명칭 |
---|---|---|---|---|
장제스 계열 | 장제스 | 강남 지역 | 약 20만 명 이상 | 제1집단군 |
신계계 (신광서파) | 리쭝런, 바이충시 | 광시, 후난, 후베이, 허베이 (산하이관-톈진 일대) | 약 20만 명 | 제4집단군 (16개 군, 6개 독립 사단) |
산서파 | 옌시산 | 산시, 허베이 북부, 베이징, 톈진 | 약 20만 명 | 제3집단군 |
서북군 (국민군) | 펑위샹 | 서북 지역, 허난 등 | 약 30만 명 | 제2집단군 |
1929년 초, 신광서파가 후난성에서 장제스 측 인사를 축출한 '후난 사건'을 계기로 양측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장제스는 이를 빌미로 신광서파의 동맹인 광둥의 리지선을 난징으로 유인해 구금하고, 3월 21일 리쭝런, 바이충시, 리지선 등을 국민당에서 제명하며 토벌을 공식화했다.
신계계는 광둥성을 장악하고 있던 리지선과 오랜 정치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반면 장제스는 국가 주석이라는 직위를 통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1929년 초 열린 편견회의에서 각 파벌은 자신들의 군사력 감축을 최소화하고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회의 결과, 각 군을 사단으로 축소하고 4대 파벌이 약 10만 명 전후의 병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형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으나[3], 이는 파벌 간의 근본적인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회의 이후 각 파벌은 결의안에 따라 부대 정리를 시작했지만,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장계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상안(湘案)', 즉 후난성 문제였다. 1928년 초 신계계는 후난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성 주석 청첸을 연금하고 허젠과 루디핑을 후임으로 임명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1929년 2월, 장제스가 루디핑에게 무기를 지원하자, 허젠은 이를 신계계가 장악하고 있던 우한 정치분회후난성은 우한 정치분회의 관할이었다.에 보고했다.
2월 21일, 신계계 군 간부인 샤웨이, 후종둬, 예치 등은 최고 지도자인 리쭝런이나 바이충시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우한 정치분회 명의로 루디핑의 해임을 발표했다. 동시에 군대를 동원하여 창사에서 루디핑의 부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그를 축출했다. 당시 난징에 머무르고 있던 리쭝런은 이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하이 공동 조계로 피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와 리쭝런은 전보를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대립은 극으로 치달았다. 장제스는 신계계가 '정치분회는 관할 구역 내 인사를 임면할 수 없다'는 중앙 정치회의의 결의를 위반했다고 비판하며 군사적 대응 준비에 착수했다.
3월, 신계계의 정치적 동맹이었던 리지선이 장제스와 신계계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난징으로 향했으나, 오히려 장제스에게 구금되었다. 이와 함께 광둥성 군 간부인 천지탕, 천밍수 등이 장제스에게 투항하면서 광둥-광시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3월 21일, 국민정부는 리쭝런, 바이충시, 리지선의 모든 직무를 해임하고 신계계에 대한 무력 토벌을 준비한다는 성명을 공식 발표했다. 펑위샹과 옌시산은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고, 신계계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전개 과정
전쟁 개시 전, 장제스는 일본에 있던 탕성즈를 귀국시켜[4] 허베이에 주둔 중인 바이충시 휘하 신광서파 군대를 내부에서 와해시켰다. 군 통제권을 잃은 바이충시는 홍콩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3월 말, 장제스는 류즈, 주페이더 등의 부대를 동원해 우한 공격을 개시했다. 후난성 주석 청첸의 투항과 신광서파 내부의 리밍루이, 위쭤바이 등의 이탈로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신광서파는 4월 초 우한을 포기하고 후베이성 서부로 후퇴했다. 그러나 지휘관들의 연이은 이탈과 사기 저하로 후베이 주둔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뒤늦게 광시로 돌아와 황샤오훙과 합류했으나,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장제스가 광시 침공을 준비하며 항복을 압박하자, 신광서파는 5월 5일 '호당구국군'을 결성하고 장제스 토벌을 선언하며 광둥 선제공격에 나섰다. 북방의 펑위샹도 호응을 약속했으나 내부 배신으로 무산되었다. 신광서파 군대는 5월 중순 광둥으로 진격해 초기 승리를 거두었으나, 장제스가 동원한 주변 군벌과 광둥군의 반격으로 바이니 지구 전투에서 패배하여 광시로 퇴각했다.
장제스는 신광서파에서 이탈한 리밍루이, 위쭤바이 등의 부대를 앞세워 광시를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우저우, 구이핑 등을 빠르게 점령했다. 결국 6월 27일, 리밍루이 부대가 난닝에 입성하자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은 하야를 선언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장제스는 리밍루이, 위쭤바이 등을 광시성의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하며 전쟁은 장제스의 완전한 승리로 종결되었다.
3. 1. 후난 사건과 갈등의 격화
1928년 북벌 완료 후 국민정부는 명목상 중국을 통일했지만, 장제스, 신광서파, 옌시산, 펑위샹 등 주요 파벌들은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군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929년 초 '선후편견회의'를 소집하여 군대 감축을 논의했다.[3] 이 회의에서 각 파벌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당시 신광서파는 광시, 후난, 후베이, 허베이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약 2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강력한 세력이었다. 리쭝런이 이끄는 신광서파는 광둥의 리지선과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 역시 약 20만 명의 병력과 부유한 강남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장계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후난 사건(湘案)'이었다. 1928년 초, 신광서파는 후난성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성 주석 청첸을 연금하고, 허젠과 루디핑을 후난성 정부 주석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허젠과 루디핑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1929년 2월, 루디핑은 비밀리에 장제스에게 협력하기로 했고, 장제스는 루디핑의 부대에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다. 이 사실은 곧 우한 정치분회(후난성은 우한 정치분회의 관할이었다)에 보고되었다.
2월 21일, 신광서파의 군 간부인 샤웨이, 후종둬, 예치 등은 파벌 수장인 리쭝런이나 바이충시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우한 정치분회 명의로 중앙정부에 루디핑의 모든 직위를 해임한다고 통보하고, 같은 날 군대를 이끌고 창사로 진입하여 루디핑 부대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그를 후난성에서 추방했다.
당시 난징에서 국민정부 직책을 맡고 있던 리쭝런은 이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급히 상하이 공동 조계로 피신했다. 장제스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지방 정치분회가 중앙정치회의 결의를 위반하고 임의로 인사를 임면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신광서파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 동원을 시작했다.
3월, 신광서파의 정치적 동맹이었던 광둥의 리지선은 장제스와 신광서파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난징으로 갔으나, 도착 직후 장제스에 의해 구금되고 반역 혐의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광둥의 군 간부 천지탕과 천밍수가 장제스 지지를 선언하면서 광둥-광시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3월 21일, 국민정부는 리쭝런, 바이충시, 리지선을 국민당에서 제명하고 모든 공직을 박탈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무력 토벌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한편, 펑위샹과 옌시산은 중립을 지키며 상황을 관망했고, 이로 인해 신광서파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립되어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 2. 군사적 충돌
장제스와 신광서파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허베이에 주둔하고 있던 신광서파 부대는 바이충시가 지휘하고 있었다. 바이충시는 바오딩을 점령한 후 진푸선 철도를 따라 남하하여 쉬저우를 거쳐 난징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주력 부대는 과거 탕성즈 휘하 병력이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탕성즈를 귀국시켜[4] 허베이로 파견했다. 탕성즈가 옛 부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자 바이충시는 군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비밀리에 배를 타고 허베이를 탈출해야 했다. 제36군 사령관이자 광시 출신인 랴오레이 역시 탕성즈가 허베이에 도착하자 사직했다. 이로 인해 허베이 주둔 신광서파 군대 내 다수의 광시 출신 장교들이 사직하고 남하하면서,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허베이에서의 신광서파 영향력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바이충시는 홍콩으로 탈출했다.
한편,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교통 문제로 인해 우한으로 돌아가 부대를 직접 지휘하기 어려웠고, 황샤오훙은 광시에 남아 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휘 공백 속에서 신광서파 부대는 각자 배치된 지역에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3월 말, 장제스는 류즈와 주페이더에게 부대 동원을 명령하여 우한 공격을 준비시켰다. 게다가 과거 신광서파에 속했던 후난성 주석 청첸이 장제스에게 투항했다. 신광서파 내부에서도 후종둬, 샤웨이, 타오쥔 등과 리밍루이, 위쭤바이 등 사이에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4월 초, 리밍루이, 위쭤바이, 양텅후이 등은 장제스와 접촉한 후 '내전 불참'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후베이 동부 방어선에 큰 공백이 생겼고, 신광서파는 우한을 포기하고 후베이 서부로 후퇴하여 수세에 몰렸다.
같은 시기,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홍콩을 거쳐 광시로 돌아와 황샤오훙과 합류했지만, 이미 후베이의 전세를 뒤집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4월 11일, 국민정부는 '신광서파 군대에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신광서파의 '죄악'을 열거하고 소속 병사들에게 저항을 포기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후베이에 남아있던 신광서파 부대 지휘관들(후종둬, 샤웨이, 타오쥔, 예치 등)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결국 장제스와 개별적으로 협상한 끝에 사직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남은 부대는 장제스 군대에 흡수되어 재편되었다.
장제스는 즉시 광시 침공을 준비하면서 리쭝런과 바이충시에게 하야 후 출국할 것을 요구했다. 황샤오훙은 광시에 남는 것을 허용했지만, 리밍루이와 위쭤바이가 광시를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신광서파 지도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조건으로 여기고, 군대를 동원하여 항전할 준비를 했다. 5월 5일, 신광서파는 '호당구국군'의 성립을 선언하고 장제스 토벌을 내세웠다. 이들은 먼저 광둥을 공격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군사적 승리를 통해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다. 북방의 군벌 펑위샹도 5월 15일 신광서파와의 연합을 선언하고 장제스 공격을 위해 출병하려 했으나, 그의 부하인 스유산과 한푸쥐가 장제스에게 귀순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5월 중순, 신광서파 군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광둥으로 진격하여 초기에는 광둥군을 격파하고 광저우 성 외곽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동원한 후난, 구이저우, 윈난 군대가 광시를 공격하고, 광둥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특히 광둥성 바이니 지구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신광서파는 패배했고, 북방 동맹이었던 펑위샹의 실패 소식까지 전해지자 결국 광시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광시 내 구이린과 류저우 방어선에서는 후난, 구이저우, 윈난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장제스는 과거 신광서파 소속이었던 리밍루이, 위쭤바이, 양텅후이의 부대를 동원하여 광둥을 거쳐 광시 서부로 진격시켰다. 이들 부대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우저우와 구이핑을 빠르게 점령했다. 구이핑의 수비 사령관 웨이윈쑹은 도시를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 시점에서 신광서파는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힘을 잃었다.
6월 27일, 리밍루이의 부대가 난닝에 입성하자,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 세 사람은 하야를 선언하고 홍콩, 사이공, 하이퐁 등지로 망명했다. 이로써 신광서파 세력은 완전히 패배했으며, 장제스는 리밍루이, 위쭤바이, 양텅후이를 광시성 정부 주석으로 임명했다. 장계 전쟁은 장제스의 완전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및 영향
3개월간 지속된 장계 전쟁은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은 "녕한 전쟁"과 "제2차 북벌" 이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온 신광서파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신광서파는 근거지인 광시성을 포함한 모든 기반을 상실했으며, 보유했던 군사력도 거의 소진되었다. 전쟁 패배 후 신광서파의 핵심 인물인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은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비록 이들 3명은 약 반년 만에 다시 광시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했지만, 신광서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장제스는 이 전쟁을 통해 경쟁 군벌 세력이었던 신광서파를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었다.
신광서파의 패배는 다른 군벌들과 장제스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펑위샹, 옌시산과 장제스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이는 결국 여러 반(反)장제스 파벌이 연합하여 장제스와 맞선 중원대전으로 이어졌다.
한편, 전쟁 후 리밍루이, 위쭤보, 양텅후이가 장제스에 의해 광시성 정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띠고 있었고, 이로 인해 덩샤오핑 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세력이 광시 지역에서 활동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는 이러한 상황을 문제 삼아 불과 2~3개월 만에 다시 군대를 보내 리밍루이 등을 축출했다. 이 과정에서 광시의 정치 상황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 등 기존 신광서파 지도자들이 이 틈을 타 다시 광시에 대한 영향력을 일부 회복하기도 했다. 리밍루이 등 축출된 인사들 중 일부는 이후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장계 전쟁 이후의 혼란은 중국 공산당이 광시 지역에 침투하여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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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國大百科全書·軍事I
Encyclopedia of China Publishing House
1989-05
[2]
서적
蔣介石先生年表
Biographical Literature Publishing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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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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