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범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자는 공의이며 하내군 수무현 출신이다. 그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며 명성과 부를 멀리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조조를 섬기며 의랑과 참승상군사를 지냈다. 가족을 위해 재산을 남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으며, 21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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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범은 고관을 대대로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태부 원외에게서 사위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여러 차례 등용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12]
동탁이 횡포를 부리자 동생 장승과 함께 양주로 피신했다. 원술에게 초빙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장승을 대신 보냈다.[4] 산동의 도적에게 아들 장릉과 장승의 아들 장전이 사로잡히자, 직접 찾아가 장릉만 돌려받았다. 그러나 장전이 어린 것을 불쌍히 여겨 장전과 장릉을 바꾸자고 제안했고, 도적은 감동하여 둘 다 풀어주었다.[12]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고 장범을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동생 장승을 보냈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온 조조를 진국에서 만나 의랑, 참승상군사가 되었다. 조조가 원정을 떠날 때에는 병원과 함께 서울에 남아 조비를 보좌했다.[12]
장범은 동한 시대 하내군 수무 현(현재의 허난성 후오자 현)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1] 그의 할아버지 장신은 사도를, 아버지 장연은 태위를 지냈다.[1] 태부 원위가 자신의 딸과 장범의 혼인을 제안했지만, 장범은 이를 거절했다.[1]
2. 2. 은거 생활
장범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며 명예와 재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나라 조정의 벼슬 제안을 거절하고 은거 생활을 하였다.[2]유수에 머물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고아와 과부들을 보살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쓰지 않고 보관했다가 떠날 때 돌려주었다.[12]
2. 3. 조조의 초빙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후 사자를 보내 장범을 초빙했으나, 장범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고 대신 동생 장승을 보냈다.[12]
208년,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조조를 진국(陳國)에서 만나 의랑(議郎) ·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가 되었다.[7]
이후 조조가 원정을 나갈 때마다 병원과 함께 서울에 남아 위왕의 세자 조비와 함께 유수(留守)를 맡았다. 조조는 조비에게 일을 할 때마다 이 둘에게 물어서 하라고 명했고, 조비도 이 둘을 존경했다.[12]
208년,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조조를 진국(陳國, 현재의 허난성화이양 현)에서 만나 의랑(議郎) 겸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가 되었다.[7]
이후 조조가 원정을 나갈 때마다 병원과 함께 서울에 남아 위왕의 세자 조비와 함께 유수를 맡았다. 조조는 조비에게 일을 할 때마다 이 둘에게 물어서 하라고 명했고, 조비도 이들을 존경했다.[12]
2. 5. 최후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범을 만나 그를 의랑 겸 참승상군사로 임명했다.[7] 이후 조조는 원정을 나갈 때마다 장범과 병원을 도성에 남겨 조비와 함께 유수를 맡게 했다.[8] 조조는 조비에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항상 이 두 사람에게 상의하라고 명했고, 조비는 이들을 존경하며 집안 어른처럼 대했다.[9]
장범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했으며, 도를 명예와 이익보다 우선시하여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1] 유수를 지내면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고아와 과부들이 모두 그에게 의지했다. 사람들이 주는 물건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쓰지 않고 보관하다가, 떠날 때 돌려주었다.[12]
장범은 동한 시대 하내군 수무 현(현재의 허난성 후오자 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장신은 사도를, 아버지 장연은 태위를 지냈다.[1] 장범은 명성과 재물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조정에서 벼슬을 하라는 제안과 초대를 거절했다.[2]
190년대 군벌 원술이 회하 주변 지역을 통제할 때, 장범을 고문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장범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207년경 군벌 조조가 중국 북부를 통일한 후, 장범에게 조정에서 벼슬을 하도록 불렀으나, 역시 병을 핑계로 장쑤성 쉬저우 인근 팽성에 머물렀다.[5]
어느 날, 장범의 아들 장령과 조카 장건(장승의 아들)이 산둥성에서 산적에게 납치되었다. 장범이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산적들은 장령만 풀어주었다. 장범은 조카가 더 어리다는 이유로 아들과 조카를 맞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산적들은 그의 희생에 감명받아 둘 다 풀어주었다.[6]
209년 적벽 대전 이후 조조는 장범을 의랑, 참군으로 임명했다. 조조는 장범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며, 군사 작전에 나설 때 종종 장범과 병원을 남겨 아들 조비와 함께 기지를 지키게 했다.[8] 조비에게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이 두 사람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했고, 조비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랐다.[9]
장범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재산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고, 많은 과부와 고아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은 사용하지 않고 보관했다가, 212년 사망한 후 가족들이 그의 유언에 따라 돌려주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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