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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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윤겸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492년 무과에 급제하여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회령부사,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여 국위를 선양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장량이다. 청백하고 근검한 성품으로 칭송받았으며, 묘소는 원주 호저면에 있다.
정온의 장남 정윤겸은 1492년(성종 23년) 무과에 급제, 사복시 판관 재직 중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녹훈되었다. 군기시 첨정, 회령부사를 거쳐 청계군에 봉해졌다. 1522년(중종 17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서 전함을 정비, 왜구를 섬멸하여 국위를 선양했다. 훈련원 도정, 성절사로 명나라 방문, 평안도 병마절도사, 상호군, 첨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고 1536년(중종 31년) 사망, 병조판서에 추증, 시호는 장량(莊襄)이다.
공(정윤겸)의 휘(諱)는 윤겸(允謙), 자(字)는 익부(益夫)이며, 초계(草溪)에서 나왔다. 고려 시대에 벼슬은 시중(侍中, 정승)에 이르렀고 광유후(光儒侯)에 봉해졌다. 문하의 많은 생도 수는 최문헌공(崔文憲公)과 비슷했다. 아들 정간공(貞簡公)의 휘는 문(文)이다. 선대의 아름다운 업적을 이어받아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후손 윤기(允耆)와 선(僐)은 양대에 걸쳐 진현관 대제학(進賢舘大提學)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諱 편(便)은 통예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을 지내고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증직되었다. 諱 흥(興)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俯事)에 증직되었고, 諱 온(溫)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俯事)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되어 3대(三代)에 추은을 받은 것이다. 참판공은 생원(生員) 원자민(元自敏) 가문에 장가들었고, 공은 그 맏아들이다. 태어나서 첫돌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성장하여 활쏘기와 말 타는 기술을 익혀 마침내 육도(六韜, 병법)의 병법을 통달했다. 1491년(성종 22년) 성종이 병사들의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살피고 공의 사술(射術)이 가장 뛰어남에 특별히 어주를 내리고 포상했다. 다음 해인 1492년(성종 2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에 들어가 참군(參軍)에 오르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기(軍器)와 광흥(廣興)의 군자주부(軍資主簿)를 거쳐 사복판관(司僕判官)에 전임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훈호(勳號)와 전토(田土), 노비(奴婢)를 하사받고 군기첨정(軍器僉正)을 제수받았다. 1507년(중종 2년) 통정(通政, 당상관 정3품)에 오르고 간성군수로 나갔다.
2001년~2002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배우 백윤식이 정윤겸 역을 연기했다.
2. 생애
청백하고 근검하여 호화로운 것을 멀리하고, 5개 읍, 6개 군을 다스리는 30여 년간 군용을 정비, 전투 태세를 갖춰 옛 명장의 풍모를 갖췄다는 칭송을 받았다. 부조묘에 모셔졌고, 묘소는 원주시 호저면 격동 지음곡에 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정온의 장남으로, 1492년(성종 2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사복시 판관으로 재직 중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군기시 첨정, 회령부사를 역임하고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졌다. 1522년(중종 17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며 전함을 정비하여 왜구를 섬멸, 국위를 선양하였다. 훈련원 도정을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 상호군, 첨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536년(중종 31년) 사망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장량(莊襄)이다.
청백하고 근검하여 호화로운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5개 읍과 6개 군을 다스리는 30여 년 동안 군용을 정비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었기에, 사람들은 옛 명장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부조묘에 모셔졌으며, 묘소는 원주시 호저면 격동 지음곡에 있다.
2. 2. 무과 급제와 관직 생활
성종 23년(1492년) 무과에 급제하고 사복시 판관을 지내던 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병충분의 정국공신(秉忠奮義 靖國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군기시 첨정, 회령부사를 역임하고 청계군(淸溪君)에 봉군되었다. 중종 17년(1522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재직 당시 전함을 정비하여 왜구를 섬멸하여 국위를 선양하였고, 훈련원 도정을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상호군, 첨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중종 31년(1536년) 사망하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량(莊襄)이다.
청백하고 근검하여 호화로운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5개 읍, 6개 군을 다스리는 30여 년 동안 항상 군용을 정비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었으니, 사람들이 옛 명장의 풍모를 갖춘 분이라 칭송하였다. 부조묘에 모셔졌으며 묘소는 원주시 호저면 격동 지음곡에 있다.
2. 3. 회령부사와 왜구 격퇴
성종 23년(1492년) 무과에 급제하고 사복시 판관을 지내던 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병충분의 정국공신(秉忠奮義 靖國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군기시 첨정, 회령부사를 역임하고 청계군(淸溪君)에 봉군되었다. 중종 17년(1522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전함을 정비하여 왜구를 섬멸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2. 4. 명나라 사신과 파직
明중국어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2. 5. 말년과 죽음
정온의 장자로, 1492년(성종 23년) 무과에 급제하고 사복시 판관을 지내던 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병충분의 정국공신(秉忠奮義 靖國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군기시 첨정, 회령부사를 역임하고 청계군(淸溪君)에 봉군되었다. 1522년(중종 17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전함을 정비하여 왜구를 섬멸하여 국위를 선양하였고, 훈련원 도정을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 상호군, 첨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536년(중종 31년) 사망하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량(莊襄)이다.
정윤겸은 청백하고 근검하여 호화로운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5개 읍, 6개 군을 다스리는 30여 년 동안 항상 군용을 정비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었으니, 사람들이 옛 명장의 풍모를 갖춘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부조묘에 모셔졌으며 묘소는 원주시 호저면 격동 지음곡에 있다.
3. 신도비문
갑자기 아버지 상을 당하고, 또 계모 복을 당하여 5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복상을 마치고 웅천부사(熊川府使)에 임명되었다. 공은 왜구(倭寇)의 병란 이후 힘써 복구하였다. 임기가 차서 무관(서위, 西衛)을 제수받고, 금여(禁硢)의 장(將)을 청하여 신축하여 병영군진(兵營軍鎭)의 형세를 장대하게 하였다. 1508년(중종 3년) 첨정중추(僉正中樞)로 불렸다.
1509년(중종 4년) 특별히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차하여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졌다. 1510년(중종 5년) 북도의 진(鎭)으로 옮겨 두 진을 지내니 공로가 더욱 뚜렷했다. 1512년(중종 7년) 동지중추(同知中樞)를 거쳐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중국(명나라)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던 왜적이 표류하여 우리 경계에 이르러 여러 섬에 출몰하였다. 공은 진에 이르러 전함을 크게 수리하고, 1513년(중종 8년) 여름에 왜선을 추격하고 적을 잡아 목을 베었다. 임금은 1계급을 더하고 활과 화살, 의대(衣帶)를 하사하고 시종을 보내 위로했다. 중종은 백금(白金)을 하사하고 포상했다. 1514년(중종 9년) 훈련원도정(訓練阮都正)에 제수되고, 1515년(중종 10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 서울에 가서 하례했다. 1516년(중종 11년) 평안도의 모사(謀師)로 추천받아 각 진을 순찰하고 군비를 일신하였다. 1518년(중종 13년) 우리 진의 장사가 오랑캐 지경을 넘어갔다가 해를 당하여 견책을 받고 당진(唐津)에 유배되었다가 가을에 풀려났다. 1519년(중종 14년) 충청도 총병마(摠兵馬)가 되었으나, 임기 전에 죄를 입고 다시 횡성(橫城)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에 풀려났다. 1522년(중종 17년) 무반(서직, 西職)의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했다. 1524년(중종 19년)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공은 평소 벼슬을 사양할 뜻으로 외직(外職)을 구하여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보직되었다가 1525년(중종 2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바뀌었다. 1526년(중종 21년) 병으로 사직하고 서울에서 치료하다 자택에서 사망했다. 1463년(세조 8년)에 태어나 1526년(중종 21년)까지 75세였다. 왕은 유사를 명하여 조문, 제사하고, 관이 예장하였다. 벼슬을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로 높이고 장양공(長襄公)의 시호를 내렸다.
공은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일찍 일어나 종일 바르게 단정히 앉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풍류, 잔치, 놀이, 오락 등은 멀리하였고, 주량은 컸지만 자제하여 마시지 않아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았다. 남을 대함에는 온화했고, 관직에서는 근면했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종합적이고 정밀했다. 변방을 30년 동안 지키며 군비를 충실히 하였고, 진의 군용을 장대하게 하여 항상 적이 이르는 것처럼 대비하니, 옛 양장(良將)의 풍모가 있다고 칭송받았다.
공의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원중치(元仲穉)의 딸로, 어질고 부덕(婦德)하였다. 공보다 3년 먼저 사망하여, 공과 함께 같은 영역 내 별실에 모셨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정숙(鄭淑)이며, 당진현감(唐津縣監)을 지냈다. 차실(次室) 남씨(南氏)는 2남 3녀를 두었으니 정형(鄭泂), 정담(鄭淡)이고, 딸은 원연손(元連孫), 신거관(愼居寬), 윤원형(尹元衡)에게 출가하였다. 현감공은 충의위(忠義衛) 김계훈(金季勳)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휘는 정종영(宗榮)이며, 1543년(중종 38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우찬성(右贊成, 종1품)을 지냈다. 차실(次室)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방정(邦塋), 말영(末塋)이다. 찬성공(贊成公)은 1남 3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렸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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