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본문
정항(鄭沆)정항(1080년 ~ 1136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자림(子臨),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태부경 정목의 아들이자 〈정과정(鄭瓜亭)〉을 지은 정서(鄭敍)의 아버지이다.
생애숙종 7년(1102)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녹사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도 업무 처리를 잘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녹사 임기가 만료된 후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되었다. 예종 때 내시로서 주사(奏事)를 맡아 왕명을 출납하였고, 이자량(李資諒)을 따라 송나라에 갔을 때 국서를 잘 써 왕보(王黼)의 칭찬을 받았다. 귀국 후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어 바른 말을 하다가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전주 통판으로 나갔다.
인종이 즉위하고 이자겸의 세력이 강해지자, 다른 관리들이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이자겸에게 아부했지만 정항은 그러지 않았다. 이자겸이 패망한 후 추밀원 승선(樞密院承宣)에 임명되었고, 지주사(知奏事)로 승진하여 왕에게 글 공부를 권하였다. 묘청(妙淸)이 서경 천도를 주장할 때, 정항은 송도의 궁궐을 수리하여 환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지공거(知貢擧) 최자성(崔滋盛)이 과거 시험의 제목을 잘못 내어 과거를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정항의 사위 김이영(金貽永)이 응시자였으므로 환관에게 부탁하여 과거가 취소되지 않도록 힘썼다.
관직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좌승선(左承宣) 이부시랑(吏部侍郞), 국자좨주(國子祭酒)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 겸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비서감(祕書監)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겸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에 이르렀으며,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을 지내기도 했다.
강릉 왕씨(江陵王氏) 왕국모(王國髦)의 딸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으나, 세 아들은 요절하고 막내 정사문(鄭嗣文)만이 남았다. 정사문은 후에 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녀는 동주 최씨(東州崔氏) 최유청(崔惟淸)과 혼인하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