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마테벨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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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마테벨레 전쟁은 1893년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로벤굴라가 이끄는 마타벨레 왕국 간에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영국 정부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왕실 칙허장에 따라 영토를 행정하도록 동의했고, 세실 로즈는 1890년 선구자 부대를 파견하여 마타벨레랜드를 거쳐 쇼나 영토에 포트 솔즈베리를 건설했다. 1893년 마쇼날랜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로벤굴라가 습격대를 보내면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군은 맥심 기관총을 사용하여 샹가니 강과 벰베지 전투에서 승리했고, 로벤굴라는 도주했으며, 불라와요는 함락되었다. 전쟁 결과, 로벤굴라는 천연두로 사망하고 마타벨레족은 항복했으며, 로디지아가 건설되어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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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마테벨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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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제1차 마테벨레 전쟁 |
전쟁의 부분 | 마테벨레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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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93년 10월 – 1894년 1월 |
장소 | 마테벨레랜드 및 마쇼날랜드 |
결과 | 회사의 결정적인 승리; 은데벨레 왕국의 해체 |
영토 변경 | 마테벨레랜드가 회사 통제하에 들어감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
교전 세력 1-1 | 츠와나족(베추아나) |
교전 세력 2 | 은데벨레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세실 로즈 |
지휘관 2 | 리앤더 스타 제임슨 |
지휘관 3 | 앨런 윌슨 |
지휘관 4 | 패트릭 포브스 |
지휘관 5 | 카마 3세 |
지휘관 6 | 로벵굴라 왕 |
지휘관 7 | 므잔, 추장 인두나 |
병력 규모 | |
병력 1 | 회사 군대 750명 |
병력 1-1 | 츠와나족 1,000명 |
병력 2 | 창병 80,000명 |
병력 2-1 | 소총병 20,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100명 |
피해 2 | 10,000명 이상 |
캠페인 박스 | |
관련 전투 | 샹가니 전투 벰베지 전투 샹가니 순찰대 |
2. 전쟁의 배경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왕실 칙허장에 따라 림포포 강에서 잠베지 강까지 뻗어 있는 영토를 행정하는 것에 대해 영국 정부의 동의를 얻었다. 1889년 빅토리아 여왕은 칙허장에 서명했다. 1890년 세실 로즈는 이 문서를 사용하여 선구자 부대를 보낼 명분을 얻었는데, 이 부대는 잘 무장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경찰(BSAP)의 보호를 받는 정착민 그룹이었다. 이들은 거물 사냥꾼 프레데릭 셀루스의 안내를 받아 마타벨레랜드를 통과하여 쇼나 영토로 들어가 포트 솔즈베리(현재 하라레)를 건설했다.[1]
1891년과 1892년 동안 로벤굴라는 자신의 습격대가 주요 목표 지역인 마쇼날랜드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젊고 열정적인 지휘관들과 백인 정착민들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했다.[2] 그러나 1893년 빅토리아 지역의 족장 고마라가 조공을 거부하며 자신은 이제 정착민의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주장하자, 로벤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전사로 구성된 습격대를 보내 그의 봉신을 복종시켜야 했다. 이 습격대는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현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행정부는 습격에 대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회사 관계자들은 습격자들에게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은데벨레족은 이에 불응했고, 이어진 교전에서 은데벨레족은 약 40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로벤굴라 왕은 습격을 시작할 때 자신의 전사들에게 "만약 마쇼날랜드 습격에서 백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너희 모두 돌아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엄중히 경고했다.[3]
2. 1. 영국의 남아프리카 확장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왕실 칙허장에 따라 림포포 강에서 잠베지 강까지 뻗어 있는 영토를 행정하는 데 영국 정부의 동의를 얻었다. 1889년 빅토리아 여왕이 칙허장에 서명했다. 1890년 세실 로즈는 이 문서를 사용하여 선구자 부대를 보낼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이 부대는 잘 무장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경찰(BSAP)의 보호를 받는 정착민 그룹이었다. 이들은 거물 사냥꾼 프레데릭 셀루스의 안내를 받아 마타벨레랜드를 통과하여 쇼나 영토로 들어가 포트 솔즈베리(현재 하라레)를 건설했다.[1]1891년과 1892년 내내 로벤굴라는 자신의 습격대가 주요 목표 지역인 마쇼날랜드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그의 젊은 지휘관들과 백인 정착민들 간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했다.[2] 그러나 1893년 빅토리아 지역의 족장 고마라가 조공을 거부하며, 자신은 이제 정착민의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주장했다. 로벤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전사들로 구성된 습격대를 보내 그의 봉신을 복종시켜야 했다. 습격대는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현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행정부는 습격에 대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결과, 회사 관계자들은 습격자들에게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은데벨레족은 거부했고, 이어진 적대 행위에서 은데벨레족은 약 4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물러났다. 로벤굴라 왕은 습격을 시작할 때 자신의 전사들에게 "만약 마쇼날랜드 습격에서 백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너희 모두가 돌아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엄중한 경고를 했다.[3]
2. 2. 마타벨레 왕국과 로벤굴라 왕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왕실 칙허장에 따라 림포포 강에서 잠베지 강까지 뻗어 있는 영토를 행정하는 것에 대해 영국 정부의 동의를 얻었다. 1889년 빅토리아 여왕은 칙허장에 서명했다. 1890년 세실 로즈는 이 문서를 사용하여 선구자 부대를 보낼 명분을 얻었는데, 이 부대는 잘 무장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경찰(BSAP)의 보호를 받는 정착민 그룹이었다. 이들은 거물 사냥꾼 프레데릭 셀루스의 안내를 받아 마타벨레랜드를 통과하여 쇼나 영토로 들어가 포트 솔즈베리(현재 하라레)를 건설했다.[1]1891년과 1892년 동안 로벤굴라는 자신의 습격대가 주요 목표 지역인 마쇼날랜드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젊고 열정적인 지휘관들과 백인 정착민들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했다.[2] 그러나 1893년 빅토리아 지역의 족장 고마라가 조공을 거부하며 자신은 이제 정착민의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주장하자, 로벤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전사로 구성된 습격대를 보내 그의 봉신을 복종시켜야 했다. 이 습격대는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살해했다. (다만, 이들은 일반적으로 적절한 나이의 젊은 남녀를 납치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살해하는 것에 비해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현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행정부는 습격에 대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회사 관계자들은 습격자들에게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은데벨레족은 이에 불응했고, 이어진 교전에서 은데벨레족은 약 40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로벤굴라 왕은 습격을 시작할 때 자신의 전사들에게 "만약 마쇼날랜드 습격에서 백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너희 모두 돌아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엄중히 경고했다.[3]
2. 3. 회사 통치와 갈등의 시작
영국 정부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왕실 칙허장에 따라 림포포 강에서 잠베지 강까지 뻗어 있는 영토를 행정하는 데 동의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89년에 칙허장에 서명했다. 세실 로즈는 1890년에 이 문서를 사용하여 선구자 부대를 보낼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이 부대는 잘 무장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경찰(BSAP)의 보호를 받는 정착민 그룹이었고, 거물 사냥꾼 프레데릭 셀루스의 안내를 받아 마타벨레랜드를 통과하여 쇼나 영토로 들어가 포트 솔즈베리(현재 하라레)를 건설했다.1891년과 1892년 내내 로벤굴라는 자신의 습격대가 주요 목표 지역인 마쇼날랜드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그의 열정적인 젊은 지휘관들과 백인 정착민들 간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했다. 그러나 1893년에 빅토리아 지역의 족장 고마라가 조공을 거부하며, 자신은 이제 정착민의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주장했다. 로벤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전사들로 구성된 습격대를 보내 그의 봉신을 복종시켜야 했다. 습격대는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현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행정부는 습격에 대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결과, 회사 관계자들은 습격자들에게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은데벨레족은 거부했고, 이어진 적대 행위에서 은데벨레족은 약 4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물러났다. 로벤굴라 왕은 습격을 시작할 때 자신의 전사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만약 마쇼날랜드 습격에서 백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너희 모두가 돌아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3. 전쟁의 발발
제임슨이 케이프타운의 로즈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타벨레랜드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1893년 8월에서 10월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0월 16일, 패트릭 포브스 소령이 지휘하는 약 700명의 BSAP 부대가 포트 솔즈베리와 포트 빅토리아에서 출발하여 아이언 마인 힐에서 합류했다. 이들은 다섯 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포브스의 연합 부대는 남서쪽 불라와요에 있는 마타벨레 왕의 수도로 이동했다. 남쪽에서는 영국의 충실한 동맹인 바망와토 추장 카마 3세 휘하의 700명의 베추아나인 부대가 불라와요로 진군했다. 마타벨레 군대는 포브스 부대가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원되어 두 번 교전했다. 10월 25일, 샹가니 강 근처에서 3,500명의 마타벨레 전사가 포브스 부대를 공격했다.[3] 로벤굴라의 군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지만, 맥심 기관총의 화력에 압도되어 1,500명이 사망했고, BSAP는 4명만 잃었다.[2]
일주일 후인 11월 1일, 벰베지에서 2,000명의 마타벨레 소총수와 4,000명의 전사가 포브스 부대를 공격했지만, 불라와요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서[3] 다시 맥심 기관총에 의해 약 2,500명이 사망했다.[3] 로벤굴라는 벰베지 전투 소식을 듣고 불라와요에서 도망쳤고, 전통에 따라 왕궁을 불태웠다.[3] 이 화재로 도시의 보물과 탄약고가 파괴되었다.[1][5] 다음 날 영국군이 진군했을 때 불길은 여전했고, 그들은 "백인의 캠프"에 기지를 세우고 회사 깃발과 유니언 잭을 나무에 못 박았다.[4] 불라와요의 재건은 화재가 진압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로벤굴라의 이전 거주지 폐허 위에 새로운 회사 운영 도시가 건설되었다.[5]
3. 1. 선구자 부대와 포트 솔즈베리 건설
제임슨은 케이프타운에 있는 로즈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타벨레랜드 침공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모으는 방법을 고려하는 동안 두 달이 조금 넘는 지연(8월에서 10월)이 있었다.BSAP 부대는 포트 솔즈베리와 포트 빅토리아에서 출발하여 1893년 10월 16일 국가의 중심 지점인 아이언 마인 힐에서 합류했다.[1] 이 부대의 총 병력은 약 700명이었으며, 패트릭 포브스 소령이 지휘하고 다섯 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4. 전쟁의 전개
BSAP 부대는 포트 샐리스버리와 포트 빅토리아에서 출발하여 1893년 10월 16일 국가의 중심 지점인 아이언 마인 힐에서 합류했다.[1] 이 부대는 패트릭 포브스 소령이 지휘했으며, 총 병력은 약 700명에 맥심 기관총 다섯 정으로 무장했다. 포브스의 연합 부대는 남서쪽의 불라와요에 있는 마타벨레 왕의 수도로 이동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바망와토 추장 중 한 명이자 영국의 충실한 동맹인 카마 3세 휘하의 700명의 베추아나인 추가 부대가 남쪽에서 불라와요로 행진했다.
마타벨레 군대는 포브스가 도시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고, 접근하는 부대와 두 번 교전했다. 10월 25일, 3,500명의 마타벨레 전사가 샹가니 강 근처에서 부대를 공격했다.[3] 로벤굴라의 군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지만, 맥심 기관총에 의해 "풀처럼 베어"졌다.[2] 마타벨레는 약 1,500명이 사망했고, BSAP는 4명만 잃었다.[2] 일주일 후인 11월 1일, 2,000명의 마타벨레 소총수와 4,000명의 전사가 벰베지에서 포브스를 공격했지만,[3] 맥심 기관총에 의해 약 2,500명이 사망했다.[3]
로벤굴라는 벰베지 소식을 듣자마자 불라와요에서 도망쳤고,[3] 그의 신하들은 이동하면서 왕궁을 불태웠다. 그 결과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의 상아, 금 및 기타 보물이 파괴되었고, 탄약고가 폭발했다.[1][5] 다음 날 영국군이 정착지에 도착했을 때 불길은 여전히 치솟고 있었고,[5] 그들은 "백인의 캠프"에 기지를 세우고, 회사 깃발과 유니언 잭을 나무에 못 박았다.[4]
카마의 부대가 남쪽에서 출발하여 타티 강에 도착했고, 11월 2일 싱게시 강에서 승리했다. 번햄과 셀루스를 포함한 식민지군의 선발대가 같은 날 불라와요에 도착하여 로벤굴라가 탄약고를 폭파하는 것을 지켜봤다. 11월 3일, 매쇼나랜드에서 온 빅토리아 부대가 제임슨과 존 윌러비 경을 동반하여 불라와요에 도착했다. 이때 로벤굴라와 그의 전사들은 잠베지 강을 향해 전면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로벤굴라의 항복을 유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메시지에 대한 답신은 없었다. 11월 13일, 패트릭 포브스 소령은 부대를 조직하여 로벤굴라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추격대는 험난한 경로와 폭우로 인해 지연되었고, 12월 3일에야 로벤굴라를 따라잡았다. 앨런 윌슨 소령이 이끌던 34명의 기병대는 샹가니 순찰대로 알려졌으며, 샹가니 강을 건너 로벤굴라의 숙소 근처에 야영했다.
4. 1.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진격
제임슨은 케이프타운에 있는 로즈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타벨레랜드 침공을 위한 병력을 모으는 방법을 고려했고, 이 과정은 8월에서 10월까지 두 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BSAP 부대는 포트 샐리스버리와 포트 빅토리아에서 출발하여 1893년 10월 16일 국가의 중심 지점인 아이언 마인 힐에서 합류했다.[1] 이 부대는 총 700명 정도였으며, 패트릭 포브스 소령이 지휘했고 다섯 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포브스의 연합 부대는 남서쪽의 불라와요에 있는 마타벨레 왕의 수도로 이동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바망와토 추장 중 한 명이자 영국의 충실한 동맹인 카마 3세 휘하의 700명의 베추아나인 추가 부대가 남쪽에서 불라와요로 행진했다. 마타벨레 군대는 포브스가 도시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고, 접근하는 부대와 두 번 교전했다. 10월 25일, 3,500명의 전사가 샹가니 강 근처에서 부대를 공격했다.[3] 로벤굴라의 군대는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 기준으로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강력했지만, 이전에 전투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개척자들의 맥심 기관총은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한 목격자에 따르면 "그들을 문자 그대로 풀처럼 베어 버렸다".[2] 마타벨레가 철수할 때까지 약 1,500명이 사망했고, 반면에 BSAP는 4명만 잃었다.[2]
일주일 후인 11월 1일, 2,000명의 마타벨레 소총수와 4,000명의 전사가 벰베지에서 포브스를 공격했다. 불라와요에서 북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서[3], 그들은 다시 소령의 맥심 기관총의 압도적인 화력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약 2,500명의 마타벨레가 더 죽었다.[3] 로벤굴라는 벰베지 소식을 듣자마자 불라와요에서 도망쳤다.[3] 전통 관습에 따라 그와 그의 신하들은 이동하면서 왕궁을 불태웠다. 그 결과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의 대량의 상아, 금 및 기타 보물이 파괴되었고, 탄약고가 폭발했다.[1][5] 다음 날 영국군이 정착지로 진군했을 때 불길은 여전히 치솟고 있었다.[5] 그들은 이미 존재하던 "백인의 캠프"에 기지를 세우고, 회사 깃발과 유니언 잭을 나무에 못 박았다.[4] 불라와요의 재건은 화재가 진압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로벤굴라의 이전 거주지 폐허 위에 새로운 회사 운영 도시가 건설되었다.[5]
4. 2. 샹가니 전투와 벰베지 전투
제임슨이 케이프타운에 있는 로즈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타벨레랜드 침공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모으는 방법을 고려하는 동안 두 달이 조금 넘는 지연(8월에서 10월)이 있었다.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경찰(BSAP) 부대는 포트 샐리스버리와 포트 빅토리아에서 출발하여 1893년 10월 16일 국가의 중심 지점인 아이언 마인 힐에서 합류했다.[1] 이 부대의 총 병력은 약 700명이었으며, 패트릭 포브스 소령이 지휘하고 다섯 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포브스의 연합 부대는 남서쪽의 불라와요에 있는 마타벨레 왕의 수도로 이동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바망와토 추장 중 한 명이자 영국의 충실한 동맹인 카마 3세 휘하의 700명의 베추아나인 추가 부대가 남쪽에서 불라와요로 행진했다. 마타벨레 군대는 포브스가 도시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고, 접근하는 부대와 두 번 교전했다. 10월 25일, 3,500명의 전사가 샹가니 강 근처에서 부대를 공격했다.[3] 로벤굴라의 군대는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 기준으로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강력했지만, 이전에 전투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개척자들의 맥심 기관총은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한 목격자에 따르면 "그들을 문자 그대로 풀처럼 베어 버렸다".[2] 마타벨레가 철수할 때까지 약 1,500명이 사망했고, 반면에 BSAP는 4명만 잃었다.[2]
일주일 후인 11월 1일, 2,000명의 마타벨레 소총수와 4,000명의 전사가 벰베지에서 포브스를 공격했다. 불라와요에서 북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서[3], 그들은 다시 소령의 맥심 기관총의 압도적인 화력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약 2,500명의 마타벨레가 더 죽었다.[3] 로벤굴라는 벰베지 소식을 듣자마자 불라와요에서 도망쳤다.[3] 전통 관습에 따라 그와 그의 신하들은 이동하면서 왕궁을 불태웠다. 그 결과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의 대량의 상아, 금 및 기타 보물이 파괴되었고, 탄약고가 폭발했다.[1][5] 다음 날 영국군이 정착지로 진군했을 때 불길은 여전히 치솟고 있었다.[5] 그들은 이미 존재하던 "백인의 캠프"에 기지를 세우고, 회사 깃발과 유니언 잭을 나무에 못 박았다.[4] 불라와요의 재건은 화재가 진압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로벤굴라의 이전 거주지 폐허 위에 새로운 회사 운영 도시가 건설되었다.[5]
4. 3. 불라와요 함락과 로벤굴라의 도주
BSAP 부대는 포트 샐리스버리와 포트 빅토리아에서 출발하여 1893년 10월 16일 국가의 중심 지점인 아이언 마인 힐에서 합류했다.[1] 이 부대는 패트릭 포브스 소령이 지휘했으며, 총 병력은 약 700명에 맥심 기관총 다섯 정으로 무장했다. 포브스의 연합 부대는 남서쪽의 불라와요에 있는 마타벨레 왕의 수도로 이동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바망와토 추장 중 한 명이자 영국의 충실한 동맹인 카마 3세 휘하의 700명의 베추아나인 추가 부대가 남쪽에서 불라와요로 행진했다.10월 25일, 3,500명의 마타벨레 전사가 샹가니 강 근처에서 부대를 공격했다.[3] 로벤굴라의 군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지만, 맥심 기관총에 의해 "풀처럼 베어"졌다.[2] 마타벨레는 약 1,500명이 사망했고, BSAP는 4명만 잃었다.[2] 일주일 후인 11월 1일, 2,000명의 마타벨레 소총수와 4,000명의 전사가 벰베지에서 포브스를 공격했지만,[3] 맥심 기관총에 의해 약 2,500명이 사망했다.[3]
로벤굴라는 벰베지 소식을 듣자마자 불라와요에서 도망쳤고,[3] 그의 신하들은 이동하면서 왕궁을 불태웠다. 그 결과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의 상아, 금 및 기타 보물이 파괴되었고, 탄약고가 폭발했다.[1][5] 다음 날 영국군이 정착지에 도착했을 때 불길은 여전히 치솟고 있었고,[5] 그들은 "백인의 캠프"에 기지를 세우고, 회사 깃발과 유니언 잭을 나무에 못 박았다.[4] 불라와요의 재건은 화재가 진압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로벤굴라의 이전 거주지 폐허 위에 새로운 회사 운영 도시가 건설되었다.[5]
11월 2일, 번햄과 셀루스를 포함한 식민지군의 선발대가 불라와요에 도착하여 로벤굴라가 탄약고를 폭파하는 것을 지켜봤다. 11월 3일, 매쇼나랜드에서 온 빅토리아 부대가 제임슨과 존 윌러비 경을 동반하여 불라와요에 도착했다. 이때 로벤굴라와 그의 전사들은 잠베지 강을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11월 13일, 패트릭 포브스 소령은 부대를 조직하여 로벤굴라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4. 4. 샹가니 순찰대와 앨런 윌슨의 최후
추격대는 험난한 경로와 폭우로 인해 지연되었고, 12월 3일에야 로벤굴라를 따라잡았다. 앨런 윌슨 소령이 이끌던 34명의 기병대는 샹가니 순찰대로 알려졌으며, 샹가니 강을 건너 로벤굴라의 숙소 근처에 야영했다.밤에 강물이 불어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마타벨레족이 샹가니 순찰대를 포위하여 윌슨과 그의 부하들을 압도했다. 샹가니 순찰대 34명 전원이 이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윌슨의 명령에 따라 살아남은 3명(미국인 정찰병 프레데릭 러셀 번햄과 펄 "피트" 잉그램, 그리고 굿딩이라는 호주인)은 불어난 강을 건너 포브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러나 포브스의 병력은 제때 강을 건널 수 없었다.
5. 전쟁의 결과
제1차 마테벨레 전쟁은 마타벨레 왕국과 로디지아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4년 1월, 로벤굴라 왕이 천연두로 사망하고,[1][6] 은데벨레 전사들이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우세한 화력에 굴복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왕의 죽음 직후, 은데벨레의 이진두나들은 회사에 항복했다.
회사가 은데벨레를 도발하여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는 혐의로 영국 하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리폰 경 식민부 장관에 의해 기각되었다. 1895년, 회사의 영토는 공식적으로 "로디지아"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마타벨레랜드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불라와요는 빠르게 재건되어 9개월 만에 1,900명의 식민지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고, 2,000명 이상의 탐사자들이 금광을 찾아 나섰다.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하는 철도가 1897년 불라와요에 도달했고, 1899년에는 샐즈베리(현재 하라레)와 베이라를 연결하는 동부 해안선이 완공되었다.
5. 1. 로벤굴라의 죽음과 마타벨레족의 항복
로벤굴라는 1894년 1월 22일 또는 23일에 천연두로 사망했다.[1][6] 한편, 은데벨레 전사들은 회사의 우세한 화력에 점차 굴복했다. 왕의 죽음 직후, 은데벨레의 이진두나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항복했다. 이후 회사가 은데벨레를 도발하여 그들의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는 혐의로 영국 하원에서 회사를 고발했으나, 조사 후 리폰 경 식민부 장관에 의해 혐의가 기각되었다.5. 2. 로디지아의 탄생과 식민 통치
세실 로즈는 회사가 취한 모든 조치에서 지침을 제공했으며, 1895년 5월 3일 회사의 영토가 공식적으로 "로디지아"라는 이름을 받으면서 그 사실이 인정받았다. 이 해 동안 마타벨레랜드를 개발하는 데 큰 활동이 있었고, 불라와요에서 "스탠드" 또는 구획이 엄청난 가격에 판매되었다. 9개월 만에 재건된 불라와요 마을에는 1,900명의 식민지 주민과 2,000명 이상의 탐사자가 다양한 금광에 있었다. 세실의 형제인 프랭크 로즈 대령의 후원하에 아프리카 대륙 횡단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최종 목적은 케이프와 카이로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하는 철도는 마페킹을 지나 1897년 로디지아 국경에 접근하여 불라와요에 도달했다. 샐즈베리(현재 하라레)와 베이라, 모잠비크 (당시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동부 해안선은 1899년에 완공되었다.5. 3. 로벤굴라의 금괴 상자 논란
전쟁이 끝난 후, 로벤굴라의 ''이진두나'' 중 한 명은 포브스 부대가 1893년 12월 3일 샹가니에 도착하기 직전에 왕이 선구자들을 매수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두 명의 마타벨레 사신 페찬과 세훌로홀루는 금 소버린 상자를 받았고, 강에 도착하기 전에 부대를 가로막도록 지시받았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왕이 패배를 인정하고, BSAP가 물러선다면 이 돈을 조공으로 바치겠다고 말해야 했다.[9] 로벤굴라는 "금은 백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7]페찬과 세훌로홀루는 1893년 12월 2일에 부대에 도착하여 후위 부대에 있는 두 남자에게 돈과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부대에 소속되었던 어떤 남자도 이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회사 당국은 마타벨레가 그런 이야기를 단순히 지어낼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9] 두 장교의 배트맨이 금을 받고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졌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에 대한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치안 판사에 의해 14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9] 그러나 최고 판사가 내릴 수 있는 최대 형량이 3개월이었기 때문에 2년 후에 석방되었다. 고등 판무관의 법률 팀이 증거를 재평가한 결과, 유죄 판결은 결국 완전히 무효화되었다.[8] 이 문제의 진실은 결정적으로 해결된 적이 없다.[9]
6. 전쟁의 유산
제1차 마테벨레 전쟁은 맥심 기관총이 최초로 실전에 사용되어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꾼 전쟁이다. 맥심 기관총은 은데벨레족에게 큰 공포를 주었고, 영국 남아프리카 경찰을 무적으로 보이게 했다.[2]
6. 1. 맥심 기관총과 전쟁의 양상 변화
제1차 마테벨레 전쟁은 영국이 맥심 기관총을 최초로 실전 사용한 전쟁으로, 전쟁의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맥심 기관총은 언덕, 산악 지형, 빽빽한 숲과 같이 시야가 좋지 않은 곳에서는 적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덜 주었지만, 심리적인 무기로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맥심 기관총은 은데벨레족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고, 영국 남아프리카 경찰을 무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2]샹가니 강 전투에서 3,500명의 마타벨레 전사들이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맥심 기관총에 의해 "문자 그대로 풀처럼 베어졌다"라는 표현처럼 약 1,500명이 사망했다.[2] 벰베지 전투에서는 2,000명의 마타벨레 소총수와 4,000명의 전사가 공격했지만, 역시 맥심 기관총의 화력에 압도되어 약 2,500명이 사망했다.[3] 이처럼 맥심 기관총은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전투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한 전투에서는 맥심 기관총 4정을 장착한 50명의 회사 군인들이 5,000명의 은데벨레 전사들을 격퇴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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