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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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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장남으로, 1373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1390년에 러틀랜드 백작, 1397년에 오말 공작이 되었으며, 140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요크 공작위를 계승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자녀가 없어 그의 조카인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요크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그는 사냥의 대가(The Master of Game)를 저술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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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드워드 하딩이 그린 요크 공작 에드워드 오브 노리치의 1793년 초상화
에드워드 하딩이 장 크레통의 연대기에 있는 15세기 원본을 바탕으로 그린 요크 공작 에드워드 오브 노리치의 1793년 초상화
칭호요크 공작
출생지하트퍼드셔 주킹스 랭글리
사망일1415년 10월 25일 (세)
사망지아쟁쿠르 전투, 프랑스
매장일1415년 12월 1일
매장지포더링헤이의 성모 마리아 및 모든 성인 교회
배우자필리파 드 모운 (1398년 결혼)
가문요크 가문
아버지랭글리의 에드먼드, 제1대 요크 공작
어머니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요크 공작부인
직업귀족, 군인, 작가
생애
작위 계승140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요크 공작 작위 계승
주요 활동군사 활동: 백년 전쟁 참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
저술 활동: 《사냥의 마스터》 (The Master of Game) 저술
기타헨리 5세 시대의 주요 귀족
잉글랜드 왕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활동
가계
부계플랜태저넷 가문
모계카스티야 왕국
참고
관련 인물헨리 4세
헨리 5세
랭커스터 가문

2. 가계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1373년경, 아마도 현재 킹스 랭리인 허트퍼드셔의 랭리에서 태어났다. 에드먼드 오브 랭리, 초대 요크 공작(에드워드 3세의 아들)과 이사벨라 오브 카스티야, 요크 공작부인(페드로 1세 오브 카스티야 국왕의 딸)의 장남이었다.[1] 요크의 콘스탄스와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의 형제였다.[1]

G. E. 코케인에 따르면, 에드워드가 '노리치의'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현대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프랑스 연대기 뿐이며, 코케인과 호록스 모두 그 안에서 발견된 'de Norwik'이라는 문구가 당시 '오브 요크'라는 구절의 일반적인 프랑스어 표현인 'Deverwik'의 오기 또는 오독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2]

2. 1. 가계도

에드워드 3세의 가계도

3. 생애

1390년 래틀랜드 백작 작위를 받았고, 1397년 오마르 공작이 되었지만 1399년에 박탈되었다가 1414년에 다시 받았다. 140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요크 공작위를 계승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1] 던스터 남작 존 드 문의 딸 필리파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동생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의 아들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상속자가 되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일단 국왕령이 된 후, 리처드가 성인이 된 후에 주어졌다. 리처드는 훗날 요크 가문의 수장으로서 랭커스터 가문의 잉글랜드 왕위 주장에 도전하여 장미 전쟁을 일으킨다.

3. 1. 리처드 2세 치하 (1377년 ~ 1399년)

에드워드는 1377년 7월 16일 사촌 리처드 2세 국왕의 대관식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387년 5월에는 가터 훈장에 서임되었다. 그는 평생 국왕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젊은 시절에도 수많은 왕실의 지원과 임명을 통해 혜택을 받았다.

1390년 2월 25일, 국왕은 그를 러틀랜드 백작으로 봉했고, 1391년 3월 22일에는 북부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 11월에는 단독 제독이 되었다. 1392년에는 리처드 국왕의 의회 구성원이 되었으며, 1394년부터 1395년까지 아일랜드 원정에서 국왕과 함께했다. 그 이전,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코크 백작으로 봉해졌다. 그는 여생 동안 러틀랜드와 코크의 칭호를 사용했다.

1390년대 후반, 에드워드는 프랑스와 팔라틴 백작에게 사절로 보내졌으며, 도버 성의 치안관, 친퀘 포트의 영주 감시관, 채널 제도 관리인, 타워 성 치안관, 뉴 포레스트 관리인, 캐리스브루크 성 관리인, 그리고 와이트 섬의 영주를 포함한 수많은 직책에 임명되었다.

1397년 7월 11일, 리처드 2세는 삼촌 우드스톡의 토머스, 글로스터 공작을 체포했다. 에드워드는 7월 12일 글로스터의 잉글랜드 경호 사령관 직책을 받았으며, 8월 5일 글로스터, 워릭 백작 토머스 보챔 및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반역죄로 고발하기로 결정한 8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다. 에드워드는 나중에 그의 하인들을 보내 글로스터가 칼레에서 살해되는 것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1397년 9월 28일, 그는 글로스터, 워릭 및 아룬델의 몰수된 토지를 대량으로 하사받았다. 9월 29일, 그는 오말 공작으로 봉해졌는데, 이 칭호는 1385년 9월 3일 이전에 글로스터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1398년 9월 16일, 에드워드는 미래의 헨리 4세인 헨리 볼링브로크와 노퍽 공작 토머스 드 모브레이 간의 중단된 사법 결투를 치안관으로서 주재했는데, 이 결투는 볼링브로크와 노퍽이 리처드 국왕에 의해 추방되면서 끝났다.

리처드 국왕 통치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추가적인 왕실의 지원이 이어졌다. 1398년 2월 10일 에드워드는 서부 변경지의 변경지 관리관으로 임명되었다. 1398년 8월 11일 그는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미성년자 동안 그의 토지를 관리할 권한을 받았으며, 1399년 3월 20일에는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에게 속했던 토지와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 미래의 헨리 4세 국왕의 상속 재산의 일부를 받았다.

1399년 5월, 에드워드는 리처드 국왕과 함께 아일랜드로 갔고, 국왕이 부재한 동안 헨리 볼링브로크(미래의 헨리 4세 국왕)는 6월 말 요크셔의 레이븐스퍼 근처에 작은 추방자 무리와 함께 상륙했다. 그 후 3주 동안 볼링브로크의 군대는 충성스러운 랭커스터 지지자들에 의해 증강되었고, 곧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랠프 네빌을 비롯한 북부의 가장 강력한 유력자들이 합류했다.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리처드 국왕이 군대를 분산시킨 치명적인 결정은 에드워드의 조언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왕은 군대 일부를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태규의 지휘 아래 북웨일스로 보냈고, 약 7월 19일에 나머지 군대와 함께 남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도착했다. 볼링브로크 군대의 강세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국왕은 함께 있던 군대를 버리고 솔즈베리에 합류하기 위해 북웨일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솔즈베리의 군대는 국왕의 사망 소문을 듣고 흩어졌고, 국왕이 남겨둔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다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지만, 국왕은 볼링브로크와의 협상에 휘말렸다. 한편, 리처드 국왕의 부재 중에 왕국을 맡아 요크셔에서 볼링브로크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킨 에드워드의 아버지 랭글리의 에드먼드, 요크 공작는 7월 27일 글로스터셔의 버클리에서 볼링브로크에게 항복했다. 에드워드 또한 재빨리 볼링브로크에게 투항했고, 볼링브로크가 플린트 성에서 국왕에게 보낸 사람들 중에 볼링브로크의 리버리를 입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3. 2. 헨리 4세 치하 (1399년 ~ 1413년)

헨리 4세는 즉위 직후인 1399년 8월 31일 에드워드에게서 타워 수비대장 직을 박탈했다. 1399년 10월 20일, 그는 윈저 성에 투옥되었고, 11월 3일에는 오말 공작위를 박탈당했지만, 다른 작위는 유지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불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왕은 그에게 채널 제도와 와이트 섬 관련 직무를 재확인했고, 1399년 12월 4일까지는 그를 자신의 의회 구성원으로 만들었다.[1]

프랑스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1399년 말 리처드 2세의 옛 측근 그룹이 헨리 4세와 그의 아들들을 1400년 1월 6일 윈저 성에서 열리는 마상 시합에서 암살하려 했던 음모를 국왕에게 고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임스 테이트에 따르면, 음모를 묘사한 당시의 영어 자료에는 에드워드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2]

1400년 10월, 국왕은 에드워드를 북웨일스의 관리로 임명했고, 1401년 7월 5일에는 아키텐의 부관으로 임명했다.[3] 1402년 8월 1일,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는 요크 공작령을 계승했고, 이 시점에 그의 러틀랜드 백작령은 헌장에 따라 소멸되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러틀랜드 백작으로 계속 칭했다. 1403년 5월까지 그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그해 가을 웨일스에서 벌어진 국왕의 원정에 동원되었고, 11월 12일에는 3년 동안 남웨일스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과 아키텐에서의 임명 모두 매우 많은 비용이 들었고, 1404년 6월까지 그는 자신의 접시를 팔거나 저당 잡았으며, 웨일스에서 자신의 군대에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자신의 토지에 대한 대출을 고려하고 있었다.

1405년 2월, 웨일스 반란 지도자 오와인 글린두르, 글린두르의 사위 경 에드먼드 모티머와 헨리 퍼시는 왕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삼자 합의서를 체결했다. 이 협정은 모티머의 조카 에드먼드 모티머를 헨리 국왕의 감금에서 풀어 웨일스로 데려가는 계획과 관련이 있었다. 1405년 2월 13일, 젊은 에드먼드 모티머와 그의 형제 로저는 윈저 성에서 납치되었지만, 첼튼엄 근처에서 곧 재검거되었다. 에드워드의 누이 콘스탄스가 책임을 지고 그의 형제가 실패한 납치에 연루되었다고 비난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나중에는 음모를 알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페벤시 성에서 17주 동안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이후 석방을 청원했으며, 10월까지 점차 호의를 되찾았다. 그의 토지는 1405년 12월 8일에 회복되었고, 1406년 11월에는 다시 타워 수비대장이 되었으며, 웨일스에서 군사적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헨리 4세 통치 말년에 헨리 4세와 그의 후계자, 즉 웨일스 공 (훗날 헨리 5세) 사이에 발생한 외교 정책에 대한 갈등에서 에드워드는 국왕 편을 든 것으로 보인다. 1412년, 그는 다시 프랑스에 있었고, 이번에는 국왕의 차남 토마스와 함께 아르마냑파를 부르고뉴파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3. 3. 헨리 5세 치하 (1413년 ~ 1415년)

헨리 4세는 1413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국왕의 죽음 이후 잠시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수 있지만, 1413년 6월까지는 아키텐에서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에는 파리에 있었으며, 새 국왕인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캐서린 사이의 결혼을 협상했지만, 10월에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1415년 헨리 5세의 프랑스 침공 직전 마지막 몇 달 동안 외교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프랑스 침공 며칠 전, 헨리 국왕은 사우샘프턴 음모를 밝혀냈고,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가 이에 연루된 사실을 알아냈다. 그 결과 남동생은 1415년 8월 5일에 참수되었다. 에드워드 자신은 이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고, 프랑스로 군대와 함께 떠났다. 그는 아르플뢰르 공성전에 참여했으며, 1415년 8월 17일에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 후 그는 북부 프랑스를 통과하는 군대의 선두를 지휘했다. 그는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우익을 지휘했으며, 이 전투에서 그는 최고위급 잉글랜드 사상자가 되었다. 일부에 따르면, 그는 헨리 5세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헨리 5세는 국왕의 남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를 돕고 있었으며, 알랑송 공작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요크는 개입하여 국왕의 생명을 구했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머리 부상과 '많은 열과 압력'으로 '타 죽었다'는 다양한 원인으로 설명된다. 에드워드는 포더링게이의 성 메리 앤 올 세인츠 교회에 묻혔으며, 그는 이전에 이곳에 마스터와 12명의 채플린을 위한 대학을 설립했었다. 현재 교회에 있는 기념비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통치 시대에 세워졌다.[1]

에드워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남동생 리처드의 아들인 네 살의 조카 리처드가 요크 공작과 러틀랜드 백작의 작위를 상속받았다. 요크 가문의 수장으로서 리처드는 랭커스터 가문의 잉글랜드 왕위 주장에 도전하여 장미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4. 결혼

에드워드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 1381년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의 딸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에드워드는 여덟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리스본으로 가서 1381년 8월 29일에 베아트리스와 약혼했는데, 이는 카스티야 왕국에 대항하는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동맹의 일부였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사이의 화해 이후, 이 결혼은 교황의 면제로 무효가 되었고, 베아트리스는 대신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결혼했다.[1] 나중에 리처드 2세는 에드워드에게 왕비 발루아의 이사벨라의 여동생인 브르타뉴의 조안을 포함한 여러 신부 후보를 제안했다.

던스터의 모언 문장: ''Or, a cross engrailed sable''

  • 1398년 10월 7일 이전에 필리파 드 모언과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가터 기사단 기사이자 서머싯의 던스터 봉건 남작인 존 V 드 모언 경의 셋째 딸이었다. 필리파의 어머니 조안 버거시가 1376년에 던스터 성과 모언 영지를 팔았기 때문에 필리파는 남편에게 별로 가져다줄 것이 없었다. 더욱이 필리파는 이전의 두 남편인 피츠월터 남작의 월터 피츠월터 3세와 존 골라프 경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 결혼에서도 자녀는 없었다. 필리파는 1431년 7월 17일에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2]

5. '사냥의 대가(The Master of Game)'

요크는 헨리 4세의 사냥개 책임자였다.[1] 1406년과 1413년 사이에 웨일스 공에게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의 ''사냥의 서(Livre de Chasse)''를 번역하여 헌정했는데, 이는 중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사냥 논문 중 하나였다. 요크는 여기에 자신의 장 5장을 추가했는데, 이 영어 버전은 ''사냥의 대가(The Master of Game)''로 알려져 있다.

6. 작위 및 문장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부계로 국왕의 손자였으므로 왕국의 문장을 사용했으며, "양분된 카스티야와 레온의 3점 레이블"로 구별되었다.[3] 1402년 그는 부친의 문장을 상속받았는데, 이는 왕국의 문장에 "각각 3개의 붉은 원반을 가진 3점 은색 레이블"로 구별된 것이었다.

6. 1. 작위


  • 러틀랜드 백작 (1390년 2월 25일 – 1402년 8월 1일)
  • 코크 백작 (1395년경)
  • 오말 공작 (1397년 9월 29일 – 1399년 11월 3일)
  • 요크 공작 (1402년 8월 1일 – 1415년 10월 25일)
  • 케임브리지 백작 (1402년 8월 1일 – 1414년경)


1390년에 러틀랜드 백작 작위를, 1397년에는 오말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1399년에 박탈당했다.[1] 140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요크 공작위를 계승했다.[2]

6. 2. 문장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부계로 국왕의 손자였으므로 왕국의 문장을 사용했으며, 이는 "양분된 카스티야와 레온의 3점 레이블"로 구별되었다.[3] 1402년 그는 부친의 문장을 상속받았는데, 이는 왕국의 문장에 "각각 3개의 붉은 원반을 가진 3점 은색 레이블"로 구별된 것이었다.

7. 셰익스피어 작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2세''에서 오말 공작으로, ''헨리 5세''에서 요크 공작으로 등장한다. 두 희곡 모두에서 오말 공작과 요크 공작이 동일 인물이라는 언급은 없다.

참조

[1] 문서 Tait dates the appointment to 28 August 1401.
[2] 문서 Tait dates the appointment to 29 November 1403.
[3] 웹사이트 Marks of Cadenc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http://www.herald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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