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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일 포폴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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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일 포폴라노는 1467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인문주의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형과 함께 로렌초 데 메디치와의 갈등으로 추방당했으나,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후 피렌체로 돌아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지지하며 '포폴라노'라는 별칭을 얻었다. 1496년 폴리의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497년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아들 루도비코를 얻었으나, 조반니가 사망한 후 아들의 이름은 조반니로 변경되었다. 그는 1498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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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일 포폴라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조반니의 초상화 (추정), 산드로 보티첼리 작
본명조반니 데 메디치 일 포폴라노
가문메디치 가문 "포폴라노" 분가
아버지피에르프란체스코 디 로렌초 데 메디치
어머니라우도미아 아차이올리
배우자카테리나 스포르차
자녀조반니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출생일1467년 10월 21일
출생지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사망일1498년 9월 14일
사망지산타 마리아 인 바뇨, 교황령
기타
이탈리아어Giovanni de' Medici
별칭il Popolano

2. 생애

조반니는 루이사 데 메디치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그녀는 1488년 1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497년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아들 루도비코를 낳았다. 그러나 조반니가 곧 사망한 후, 카테리나는 아들의 이름을 조반니로 개명했다. 이 아들이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이다.

조반니 일 포폴라노는 1498년 9월 14일 교황령 산타 마리아 인 바뇨에서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피렌체에서 태어난 조반니는 1476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그와 그의 형 로렌초 일 포폴라노는 메디치 가문의 장자 가문 친척인 줄리아노로렌초(1449-92)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안젤로 폴리치아노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교육을 받았다.[1] 이들은 고전 수업과 저술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훗날 필사본과 고문서로 이뤄진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2. 2. 로렌초 일 마니피코와의 갈등 및 피렌체 추방

조반니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망 후(1476년), 그와 그의 형 로렌초 일 포폴라노는 메디치 가문의 친척인 줄리아노로렌초(1449-92)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안젤로 폴리치아노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고전 수업과 저서에서 열정을 받아, 이후 필사본과 고문서로 이뤄진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훗날 상속 재산 관련한 불화로 인해 로렌초 일 마니피코(1449-92)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 사망 후, 형과 함께 조카 피에로의 통치에 반대하는 진영에 합류하였다. 1494년 4월 형제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그 해 11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직후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피에로는 도시에서 일어난 공화 혁명으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지지하여 '포폴라노'(“평민”, “서민”)라는 별명을 얻었다.[1]

2. 3. 피렌체 귀환과 사보나롤라 지지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사망한 후, 조반니는 형과 함께 조카 피에로의 통치에 반대하는 진영에 합류하였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에 피렌체로 복귀하였다. 사보나롤라를 지지하였고 ''포폴라노''(Popolano, 인민주의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1]

1494년 11월, 로렌초와 조반니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직후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이는 피에로가 도시에서 일어난 공화 혁명으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지지하여 '포폴라노'(“평민”, “서민”)라는 별명을 얻었다.

2. 4. 폴리 대사 임명

조반니는 1496년 피렌체 공화국에 의해 폴리의 대사로 임명되어 폴리로 파송되었다.[1]

3. 결혼과 자녀

1497년 조반니는 이몰라포를리의 여공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혼인하였다.[2] 조반니는 초혼이었지만 카테리나 스포르차에게는 세 번째 남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아들 루도비코를 두었다. 루도비코라는 이름은 부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삼촌인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유화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러나 조반니 일 포폴라노가 사망한 후, 아내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아들의 이름을 조반니 데 메디치로 바꾸었다.[3] 이 아이는 훗날 용병대장으로 활약하였고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Giovanni dalle Bande Nere)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4. 사망

의붓아들 옥타비안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를 지원하러 갔다가 병을 얻었다. 당시 피렌체는 피사와 전쟁 중이었는데,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원정 이후 피사가 피렌체로부터 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요양차 아펜니노 산맥에 위치한 바뇨의 산 피에트로 온천에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4] 1498년 9월 14일 교황령 산타 마리아 인 바뇨에서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가계도

조반니 일 포폴라노 가계도

참조

[1]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3]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4]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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